<상임시인>
이무원: 사랑과 행복
홍사안: 불꽃놀이
강수: 염하다
고영: 상처
김동호: 인생공부 가장 많이 할 때
문창길: 강
박무웅: 시래기 국
박희진: 폭포 선비 노송
편집후기:
일시; 2005년 8월31일 수요일 오후 6시
장소; 한국현대문학관(중구 장충동2가 186-210) TEL; 2277-4857-8
후원; 한국현대문학관, 한국문예진흥원, 서울시문화재단
<시인의 산문 4>
사람 같은 시
손 현 숙
환온이 길을 가다가 왕돈의 묘 옆을 지나가면서 바라보 며 이르길 ‘괜찮은 사람이 야! 괜찮은 사람이야! …….’
라고 했다
- 세설신어 -
*여우
전화가 왔다. 말 속의 그는 내성적이다. 부끄러운 듯 그러나 단정하게 안부를 묻고 시간을 묻고 건강을 체크하고, 시인은 시인의 식대로 조용히 말을 건넨다. 무조건 상대를 믿어 버리는 그의 무모함 속에는 세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아니 눈치 채고 싶지 않은 배짱과 단호함이 만져진다. 마음 안 하늘에서 정직하게 묻고 정직하게 답 할 줄 아는, 시인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넘어뜨리는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전쟁터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송두리 째 적군을 사로잡는 여우. 그는 어디서 이렇게 기막힌 전술을 익힌 것일까? 나는 보았다. 그의 손이 이르는 곳 마다 깨끗하고 투명한 꽃이 피어나는 광경을. 그러니까 그가 내미는 손은 새벽 첫 기도, 황도광 같은 경험인 것이다.
오늘, 전화 속의 그는 매우 흥분하고 있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그의 목소리. 어떤 것으로도 거절할 수 없는 진지함. 매혹은 슬프고 폭력적이 듯, 그는 지금 무엇인가에 사정없이 마음을 빼앗겼나보다. 단도직입, 시간을 묻는다. 그는 아마 나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은 무엇이 있는 모양이다. 그림이나 글씨 혹은 사진일 것이다. 여인에게 마음을 하얗게 내어주듯<그에게는 여자 보다는 여인이 어울린다> 그는 지금 그림 앞에서 무방비하다. 시인을 감동 시킨 혼돈과 질서를 만나기 위해, 아니 환하고 따뜻한 여우의 손을 잡기 위해 나는 급하게 안국동 모퉁이 사비나 미술관을 향해 발을 옮긴다.
90도로 박힌 못이 제 구실하듯
정수리로 내리 꽂아야
한 세계를 파고 들 수 있다.
물이든 허공이든
정면으로 응하는 것들만 받아준다.
목숨 거는 것들만 살아남는다.
설태수, <“정면으로” 全文>
화폭 전체가 파랗고 잔잔한 수면일 뿐인데 그는 그림과 자신만의 구도를 완성했다. 곁에 누가 서 있건 말건 들 숨에서 멈춘 숨,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그는 그렇게 혼자만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혁명이니 개혁이니 세인들이 떠드는 사이에도 시인은 시인만의 갈 길을 똑바로 정해 놓고 그 세상 속을 요요히 파고든다. 텅 비어 차라리 고요한 세상. 정수리로 내리 꽂아 목숨 걸고 가야 하는, 아무도 함께 갈 수 없는 그 빛과 어둠의 세계로 그를 인도 한 이가 있었으니,
*스승
그는 가슴 속에 별빛 하나 품고 산다. 그것도 아주 멀고 아름다운 별. 애인? 첫사랑? 성급한 당신은 너무 일찍 그를 건너가 버렸다. 그에게 여자는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그의 아내 김선희. 그가 세상을 살아나가는 단순하고 분명한 태도. 그에게 김선희 외의 여자는 여인이 아닌 것 같다. 나머지는 그저 출렁이는 그 무엇. 그것도 문장 속에서 문자로만 그려 보이는 출렁임. 자기 절제 속에서 나오는 용기라고 해 둘까? 그러니까 그가 평생 변치 않고 바라보며 따라 가는 저 빛은 바로 그의 스승, 성찬경 시인이다. 여러분이 혹시 시인을 만나게 될 때 명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절대로 그의 스승을 다치게 하는 말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가 너무 과묵해서 조금 지루하다 싶을 때 활화산처럼 터지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면 약간만, 아주 약간만 그의 스승을 건드려 보시라, 그 날 당신은 무척 당혹스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 화살처럼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성찬경 선생님을 사모하죠? 그의 대답은 적절하다. 시의 바다로 이끈 분. 나는 그 때 왜 ‘사랑받는 사람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말이 생각났을까? 성찬경 시인과 설태수 시인은 한 나무뿌리에서 태어 난 두 가지처럼 비슷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남성다움의 절제, 때가 되면 폭풍은 반드시 멎는다는 것을 아는 종족, 빛과 사물 사이 반투명의 존재를 이미 눈치 챈 사람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과묵 뒤에 숨겨둔 재치와 유머. 시? 그것은 그들 삶의 전체를 단정 지어야 하는 말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다. 두 사람 모두 시를 빼고 나면, 글쎄……. 그냥 두 사람 모두 시다.
그가 월러스 스티븐스를 ‘시인의 시인’ 이라고 했듯이
나는 그를 시인의 시인으로 기린다.
비바람 치던 그날,
서울의 땟국물이 씻겨 내리던 그날,
시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하고 싶던 말을
장대비와 천둥번개가 대신 해준 것 같다.
연회가 끝나고 비도 그쳤다.
밤하늘에 선명한 별이 보였다.
나는 그 별을
오래오래 보았다.
설태수, <“성찬경 제 6시집 ꡔ묵극ꡕ 기념연”, 부분>
그가 감색 양복에 붉은 빛의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다. 여러분 모두가 알고 있는, 가장 귀한 사람에게 귀한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는 가장 좋은 의복을 갖추시라는 말. 소크라테스가 아마 그를 위해서 생각해 낸 말인 것 같다. 스승을 찾아뵈러 가는 길, 옛날 옛적 그 지독한 첫사랑을 만나러 갈 때도 이러 했을까? 한때는 그의 별명이 ‘술태수’라 했다는데……, 스승 앞에서는 말소리도 조곤조곤 그는 분명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임에 틀림이 없는데, 성찬경 선생님도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두 사람이 나누는 無我의 저런 눈길을 두고 사람들은 ‘믿는 사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둔하되 따뜻하고, 순박하되 힘이 있고, 단순하되 청순한’ 설태수, 그의 스승은 그의 시를 두고 그렇게 명명했다.
*시
「시안」의 밤, 마루콘서트홀에서 시인들의 시가 낭독 중이다. 무대에서 셋째 줄 그와 내가 자리를 잡았다. 성능 좋은 마이크 앞에서 시인들이 줄줄이 인사를 한다. 나는 잘난 척, 인사를 뚝딱 받아먹고 있는데, 그가 이상하다. 무대에서 시인이 인사를 할 때 마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그도 함께 인사를 나눈다. 누구에게? 왜? 그는 아마 시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웃긴다! 그랬다, 그 때 나는 그가 웃겨서 내가 정말 웃을까봐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늪에서 올라오는 연꽃의 고요함처럼 고요했다. 한 번 어긋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을 만난 듯 그의 시선은 무대를 지나 한없이 멀어졌다. 무섭다, 시 앞에 바른 자세를 취하며 기교 없이 정직하기만 한 이 남자가 오히려 벼랑처럼 느껴졌다.
늦가을 찬 바람에
단풍나무가 불붙고 있다.
(.......)
어떤 목적도 없이
자신을 불 지르고 있다.
(.......)
燒身供養을 하고 있다.
사람이 때 되어
순순히 떠날 수 있는 것도
평생 동안 이 모습들을
지켜본 덕분인지 몰라.
아쉬워도 눈 감는 것은
모두 이 덕분인지 몰라.
설태수, <“소신공양” 부분>
자신에게 갇히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반드시 자신에게 갇히고야 마는 사람. 정숙하고 깨끗하고 고즈넉한 마음 때문에 언제나 세상을 에둘러 혼자 견디는 남자. 그러나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 기어이 꽃술 속에 코를 박고 작살이 나고야 마는 시인! 담 속에 갇혀 있기가 답답한 날, 바람을 바라보며 바람을 소유하고, 꽃을 바라보며 꽃을 소유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을 소유하며, 느리게 그러나 삐뚤삐뚤 길을 나선다. 텅 비어 아무 것도 움켜쥘 줄 모르는 손. 아무하고도 경쟁하지 않으며 아무 하고도 비교하지 않는 시, 그리고 시인. 그렇게 둘은 뜨거운 연인 사이다. 뭘까? 질투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농담처럼 가볍게 그러나 그를 흔들어 버릴 작정으로 말을 건넨다. 지면에 욕심 없어요? 아무 모습도 없는 것처럼 아무 말도 없는 대답. 갑자기 그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시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부끄럽단다. 그는 시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단다. 그때 내 머릿속은 백화점의 옷들이 들락거렸고, 파노라마처럼 명품들이 지나 갔었고, 가련한 배를 채워 줄 먹을거리로 머리가 복잡했었는데, 둔기로 머리한 대 얻어맞은 기분. 그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다. 나는 지금부터 긴장해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두꺼비 걸음으로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고 오늘, 여기까지 걸어 온 무서운 남자의 질문이 시작 된 것이다. ‘시, 쓰면서 즐겁지 않은가요?’ 그런가? 그랬었나? 혹시 시 보다는 시인을 더 좋아한 것은 아닐까? 시가 있어서 세상은 살만 하단다. 시가 있어서 남편도 아버지도 아들도 잘 할 수 있는 거란다. 모든 예술은 저주의 몫이 있다고 확신하는 내게 그가 구원처럼 손을 내민다. 바람 불면 바람의 언어로, 꽃이 피면 꽃들의 문자로, 시인의 몸과 마음이 함께 들고 나는 시. 몰랐다, 고집도 욕망도 가지를 쳐 내면 저렇게 단정하고 아름다운 나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다, 시가 무엇인지. 그러나 오늘 내가 아는 한 가지. 그믐에도 달을 볼 줄 아는 저 남자, 우리들 곁에서 천상을 노래하는 그가 있어서 오늘보다는 내일, 세상은 조금 더 넓어지고 둥글어 질수 있는 것 아닐까?
그에게 전화가 왔다. 도톰도톰 아이처럼 부풀어서 말을 건다. 봄이 왔다고, 곧 꽃망울이 터질 것 같다고, 이미 시인의 심장은 꽃보다 먼저 터져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 같은 시’는 성찬경시인의 시 제목임.
2005년 4월 만우절,
손현숙올림.
<2005 정신과 표현 발췌>
누가 주인인가?
배 인 환
이 무한의 우주와
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
유한하게 사는 인간!
과연 주인은 누구인가.
무 시간의 우주와
유 시간의 인간
과연 누가 주인 인가?
어느 쪽이 더 부드러운가?
이 어려운 판정을
합의 판정이라도 해야 하는데
다들 어딜 갔지?
누가 주인 인가 보다는
유한한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21세기에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이.
삶은 지구와 일치 되는 것이고
죽음은 우주와 일치되는 것인가.
억지로 끼어든 사내
상 희 구
우리집에 근 이십년이나 더부살이 하는 사내가 있다 십여년 전인가 회사에서 야유회 갔을 때 가족사진이 랍시고 한판 찍어둔 명함판보다 조금 큰 천연색 사진속에 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마침 社內 축구대회 같은 모임인가를 가졌던 모양으로 흘러들어온 공을 뒤쫓아 끼어든 것인데 황급히 공을 돌려차느라, 카메라 앞에서 마악 포오즈를 취하고 있는 아내와 막내 사이에 갑자기 섞여들어오는 바람에 사내의 헌껏 치켜 든 왼켠 대퇴부께의 다리가 자려나가고, 대신 그 위쪽으로 꽃술을 많이 단 노오란 산수유가 가지를 뻗었다 몸을 왼쪽으로 뻗치느라 고개를 ⅓쯤 좌로 그의 몸뚱어리와 같이 돌려 그것이 엉거주춤 초점도 없이 잠시 정면을 응시하게 되었는데 언뜻 보기에 임시직 체신공무원쯤 돼 보였고 감원 선풍이라도 불었는지 얼굴이 편치가 못하여 자못 수심이 그득하다 혹시나 그 사내의 아내가 산후 황달 증세로 고생깨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왠지 나는 요즈음 이 친구와 친해져서 막내와 아내는 제쳐놓고서 얼굴을 맞추곤 한다
상처의 만다라
설 태 수
찢긴 날개의 매미가
방충망에 붙어 있다.
아파트 11층.
떨어지면 가속도가 붙겠지.
연일 터지는
투신 자살 뉴스.
마침표는 늘 발뒤꿈치를 따라다니지.
포크레인 지나가는 소리.
다시 매미를 보니
없다.
있음과 없음의 파동.
그 흐름 속의 나.
자동차 소리의 물결.
하늘엔 구름.
상념을 구름에 내려놓으면
잘 녹을까?
목숨을 던질 때는
아픔에서 벗어나 있다.
마비환자의 치유법은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
아픔은 살아있음의 증표.
노을은
하루가 겪은 상처의 궤적.
한 생애는
상처의 만다라.
천하장사의 몸뚱어리
-조국의 평화통일을 비는 14행 시-
성 찬 경
천하장사의 몸뚱어리.
아뿔싸 지금은 남북으로 두 동강나있다.
분하다. 아프고 슬프다.
허나 유구한 역사 흰빛 겨레사랑 있기에 견딘다.
분단의 사연. 멀리 가까이 꼬투리를 캐면
눈물 호수 고이고 피의 홍수가 넘친다.
남들이 어찌 알랴.
허나 이 시련으로 우리는 이제 불사신이다.
새 한 마리 울어도 천국과 지옥이 더불어 술렁인다.
세계 평화의 눈동자 빼어난 강산이 시름함에랴.
허나 천하장사의 몸뚱어리가 다시 아름답게 하나되는
그 날이 오면 세계의 높은 풍랑 가라앉고
백두 금강 설악 한라의 우리 조국 다시 솟아 빛나리.
이제 그 날이 바로 그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속이 상했다
손현숙
사내의 뱃속은 이미 끓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짐을 지고
사내는 홀로 먼 곳을 떠돌았다
클로로포름에 마취된 사내의 동공 반쯤 풀려있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 가야하는데
주먹 안에 무엇인가를 꽉 움켜쥐었다
꽃보다 더 예쁘게 핀 울화鬱火
목부터 천천히 상해들어 갔을 거다
속살에 스미는 불길한 예감
몸속에서 좀처럼 산화될 줄 모르던 고통
제 몸을 덧내면서도 사내를 살게 한 힘은
주먹 안의 세상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
더 이상 길은 열리지 않았다
헤집어 졌던 뱃속의 장기 몸속으로 쓸어 담았다
봉인된 길, 사내의 주먹 안에는
스스로 감았다 풀어버린 손금만 희미하다
파고파고 또 파도 성한 곳 없는 사과처럼
간단하게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사과를 위해 우는 사람은 없다
밤낚시
신미균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 뒤로
해가 느릿느릿 끌려갑니다
나는 저수지 둑에 앉아
낚싯대 끝에 야광 찌를 달았습니다
저녁 안개가 내려와 축축해진 기억 속으로
공기 방울이 떠올라 뜬금없이 터집니다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두워졌다고 내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저수지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대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어두워질수록 야광 찌는 더욱 또렷해집니다
당신에 대한 내 생각도 더욱 또렷해집니다
어둠에 박힌 야광 찌와 그 야광 찌에 박힌
내 생각에 그대를 밤새도록 걸어둡니다
다리가 저려옵니다
잔챙이들이 휘적거리는지
잠깐씩 찌가 흔들립니다
이제 어둠이 한 꺼풀씩 옷을 벗으면
그대를 챙겨 이 저수지를
떠나렵니다
손에 잡힌 것은 아무 것도 없어도
당신과 함께 보낸 밤이
포근했습니다
목숨시 전농스트리트
- 진성이에게
안현미
네가 이 거리로 도착하던 날은 네가 빠뜨린 눈물 하나 목련꽃으로 피는 봄밤이었지 우리가 모두 한 개의 작은 슬픔의 꽃씨였던 때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는데 너는 屍口門 밖을 다녀온 사람의 낯빛을 하고선 손을 내밀었지 낮 동안 모니터를 닦다 돌아온 내 지친 손이 네 손을 잡을 때 목숨은 아직 뜨거움이어서 네 손과 내 손이 따뜻해졌지 3월인데 우린 아프고 가엾은 영혼이었지 3월인데 알프라졸람과 폭설 속에서 우린 술을 마셨지 식어버린 닭도리탕을 다시 데우고 데우면서 술과 병을 나누어 마셨지 나누어 마신 술병들 새로 비탈에 선 느니타무 같아서 뿌리를 뻗어 목,숨,목,숨, 시인아 시인아 숨쉬러 가자 발작할 것 같았지만 같은 해에 등단한 우리의 발이 디디고 있던 목숨시 전농스트리 네가 빠뜨린 눈물 하나 목숨꽃으로 피던, 봄이고 밤이었던 봄밤을 기억해다오 오오 목숨
* 박진성 시 ‘목숨’에 부쳐
괜찮구나
이경희
성근머리
쭈뼛쭈뼛
까닭없이 부끄러워
엉거주춤한 양
그도 또
괜찮구나
살아 있어
얼글설글
저저끔의 자태로
어우러지는 일
그 아주
괜찮구나.
<초대시인>
얼굴
김기택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내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깐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커다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소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 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약력: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꼽추’ 당선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바 다
-안데스 2
최 영 규
깊은 바다 속이었다. 빙벽용 피켈과 오른발의 아이젠만으로 하산 중에 만난 청빙구간. 추락의 공포보다는 뱃전에서 깊은 바다를 내려다보던 두려움의 기억으로 설벽을 향한 내 얼굴 앞에 나타난 청빙 그 안쪽 깊숙한 곳. 깊이를 알 수 없는 빙하의 길고 긴 세월 그 너머. 한 동작의 실수면 수 백 미터 아래의 동빙하 계곡으로 날아가 버릴 설벽의 한가운데-그곳에서 마주친 바다.
환 생(還生)
-안데스 5
최 영 규
폴리쉬빙하의 설벽은 밤새 불어댄 눈보라에 한겨울 광목 빨래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두 명의 공격조는 빙하중단 세락지대의 테라스나 크레바스의 틈새에서 이 눈보라를 견뎠을 것이다. 새벽의 여명이 설벽 그 깊숙한 곳으로 푸르고 그리고 투명하게 천천히 스미고 있었다. 설벽을 올려다보며 공격조의 생존을 확인하려는 나의 눈빛도 밤새 숨도 못 쉴 것 같던 가슴도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위태롭게 얼어붙어 있었다. 순간 순백색 빨래에 뭍은 검은 티만 한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의 저 미미한 동작이 이 거대한 山 전체를 순간 되살려 내고 있었다.
註) 세락(Serac)- 빙하의 크레바스(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탑 모양의 얼음덩이
일명 빙탑(氷塔)이라고 함.
<약 력>
최 영 규
57년 강릉 출생
96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천지 동인] [서사시문학 동인]
바늘들
강영은
앞산 비탈을 오르는 잎갈나무* 가지 끝
저, 바늘들
바람이 몸통을 지날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다
끊임없이 수액을 퍼 올려
침침한 하늘을 깁기도 했던 그것들
지층 깊은 곳에 뿌리내린 단단한 슬픔을 끌어올려
제 안 어딘가
가늘고 뾰족한 생각의 끝을 만든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몇 음절의 비명을 질러대는 바늘잎 몇 개
저 바늘들은 내 몸의 어둠 뚫고 흘러나간
푸른 별빛의 강물을 깁고 싶었던 걸까
날카로운 이마의 핏줄 돋우어 생의 조각들을
시침질하는 누대(累代)의 삶
천년 전 어머니의 대물림한 바느질 내력으로
강물처럼 깊어진 제 몸의 바람소리
올올이 꿰매는 저, 존재방식이 나를 찌른다
*落葉松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사시사철 푸르나 같은 침엽수인 낙엽송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낙엽이 진다. 이렇게 '잎을 간다' 하여 잎갈나무 혹은 이깔나무라고 말하는 것이다.
능소화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
나는 꽃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어요.
꽃이 나에게 노크를 했거든요.
엄마가 내 몸 속에 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 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마구 뻗어난 陰部의 길들을
늙은 노송의 축 늘어진 그것이든
버드나무 휘어진 허리춤이든
낭창낭창 휘감는 붉은 뱀들이
절정으로, 꼭대기로 치닫고 있잖아요?
暴炎에 술 취한 딸처럼 주홍빛 꽃들을
울컥울컥 게우고 있잖아요?
그게 나라구요, 나였다구요
능소화 피면 장마 진다고 그러니 엄마,
습한 문 열고 나, 장마지게
꽃다운 나답게, 꽃답게, 툭툭,
빗물에 젖어
모가지를 떨굴 때까지
그냥, 피어나게 내버려두세요.
(약력)
제주출생, 제주교육대학 졸업
2000년 계간문학지 '미네르바' 여름호에 천료
시집 : 2000년 '스스로우는 꽃잎' (영언문화사)
2004년 '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시선사)
발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좋은시 문학회 회원, 회원, 미네르바문학회 회장으로 활동 중
전화 번호 : (02) 501-3011 (자택)
(019) 254-8283 (핸드폰)
주소 : 서울시 강남구 역삼1동 752-40번지
사랑과 행복
이무원
행복이란 말은
달콤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국어
말 할 때마다 단물이 씹힌다
사랑이란 말은
어색한 외국어
유명학원에 가 배워도
가정교사를 두고 배워도
마찬가지
나의 언어가 아니다
사랑이란
아름다운 꽃과 향기에 홀려
팔짝 팔짝 쫓아가 잡아 보면
손바닥에 묻어나는 빨간 피
주먹을 꼭 쥐고 서야
숨어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보인다
행복은 따뜻하게 아랫목에 누워 있고
사랑은 오뚝이처럼 긴장한 채 서 있다
불꽃놀이
홍사안
섬광이
하늘을 뒤덮더니
땅마저
불붙는다
우주는
한덩이 불
한 점
흔적없이 사라지는
내 생의
다비식
지켜보는
황홀한 꿈.
염(殮)하다
강수
죽어도 죽지 못하는 저 영혼
모니터 속에는 그대가 여전히 살아서 방긋 웃고 있다
이제 저승은 그리 멀지 않은 곳
그대가 있는 저승을 보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비디오 플레이어 속에 그대 영혼이 담긴 테이프를 돌리는 것
드디어 그대는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삶을 얻었구나
보고 보고 또 보다보면
눈 앞이 침침해지는 이승
방안, 한 구석 혼자 켜져 돌아가는 극락왕생(極樂往生)
징징 소리를 내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죽음을 실어 나르고 있다
내가 그대가 있는 저승으로 가기 위해선,
그대가 내가 있는 이승으로 오기 위해선,
TV 모니터 한 대, 비디오 플레이어 한 대면 되는구나
죽어도 죽지 못한 영혼과 살아도 살지 못하는 영혼이
기계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다.
TV 모니터 속 화면이 바르르 떨린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자동으로 극락왕생, 극락왕생, 되감기를 하는 방안,
죽음은, 저 속 어딘가, 하나의 전파가 되어 떠돌 준비를 하는 것.
비디오 테이프 꽂이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관(棺)들,
기계가 쉽게 환생시키는.
상처
-번데기
고영
품을 팔러 배추밭에 나가신 어머니
빈속에 걷는 머릿수건이
배추흰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찬장 속 밥그릇마다 배추꽃들이 가득했다
나는 밥 대신 배추꽃을 먹었다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 흰빛들이 퍼져나갔다
몸속에서 들끓는 흰빛들로 나는 점점 투명해지더니,
부풀어 오르더니, 자꾸 가려워지더니
눈에서, 입에서, 똥구멍에서 날개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이 눈부신 흰빛이었다
나는 몇 번 날개를 펼쳐 보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시퍼런 하늘이었다
인생 공부 가장 많이 할 때 외 3편
김동호
연착되는 차 오래 기다릴 때
다 된 죽에 코 빠출 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때
운명의 여신에게 바람 맞을 때
정신 가장 맑을 때
죽은 친구 영안실에서
영정과 마주앉아 마지막으로
한 잔 진하게 하고 거나하게
취해 하숙방으로 돌아갈 때
빛이 싫을 때
겉 훌번드르르
빛 좋은 개살구야
그 '빛'만 아니어도 너
'개' 소리 안 듣는데
미움이 고울 때
미움은 사랑의 조련사
우리 님의 눈흘김 같은 것
과음한 이튼날 나를 호되게
나무라는 또 하나의 나 같은 것
시래기국
박 무웅
그리움이란 속이 허전하면
밀려오는 배고픔 같은것이다
내 어린 날은
처마벽에 걸린 시래기 타래처럼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허리띠를 졸라메고
긴긴 겨울밤의 배고픔을 견디었다
지상의 천국이란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을 꿈꾸는 일이었다
우리들의 유년기는 가난에 얼어터져
쩍쩍 금이갔다
오직 쓰러지지 않기 위해
어머니가
눈물로 받쳐들던 시래기국
지금은
온몸에 꽃등심처럼 낀 기름을
걷어내기 위해 먹는다
밤새워 울궈낸
사태국물보다 더 단백한 이맛
자본의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이 식욕
일요일 아침 가족들과 둘러 앉아
시래기국을 먹으며
어머니의 눈물처럼 목을 넘어가는
가슴에 뜨거움이 쳐받쳐 오르는 것을
배고팠던 겨울밤의 차가운 바람의 맛을
요즘 아이들은 모른다.
강
문 창 길
알 수 없는 깊이에서도
가슴은 푸르다
허물을 벗고 일어서는 태양
아침을 건지는 강
선연한 가슴을 풀어 놓는다
그리움에 겨운 유람선이 숱한 전설을 싣고
강나루를 출발한다
바람으로 일군 갈밭에는
제 그림자를 따라 밤새 서걱이며 피어난
갈꽃 몇 송이 청청한 시절을 맞고
나루질에 흥겨운 몇몇 사내가
불거진 팔뚝으로 이마를 훔칠 때
아낙의 무명자락이
푸른 강물에 젖어든다
아- 부끄러웠던 미명의 시간
살아서 잊을 수 없는 역사
이 강물에 씻을 수 있을까
종이배처럼 떠돌다
돌아온 은어떼의 눈망울로
아이들의 꿈은 맑아지고
뱃전을 디딘 사내의
힘 좋은 웃음소리가 어깨를 흔들 때
흘러가는 저 투명의 시간
그 아래 물잠자리 춤을 춘다
푸르게 살아 있는 만큼
그들은 춤을 춘다
폭포 선비 노송
-李麟祥의 松下觀瀑圖
박희진
선비는 오늘도
노송 아래 암반 위에 홀로 앉아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그 굉음에 넋을 잃은 채。
폭포 아래 깊은 소는
기절할 듯이 하얗게 환장하며
쏟아지는 폭포의 무한 지속 사정(射精)에도
아랑곳 않고 태연자약하다。
겨우 둘레에 물보라나 일게 할 뿐。
이러한 광경이 노송은 너무 좋아
짙푸른 소의 수면에 닿으려고
온몸을 구부렸고, 낏낏한 솔잎 달린
몇몇 가지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그 바람에 바윗속의 뿌리도 일부
드러날 만큼。선비는 아는 걸까。
노송의 이런 목숨을 걸고 하는
찬미의 춤사위를。
선비는 오늘도
노송 아래 암반 위에 홀로 앉아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그 굉음에 넋을 잃은 채。
선비는 이제 폭포와 하나다。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안 들리는。
이인상(李麟祥)의 설송도(雪松圖)
설송(雪松) 두 그루가
그것도 겨우 하반신만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바위에 뿌리 내린
한 그루는 곧장 위로 뻗었고
그 우듬지는 하늘 어디쯤에
가 닿았는지 알 길이 없다。
눈에 덮인 솔가지 둘이
아래로 처져 있어, 이렇게 말하는 듯。
「모르는 게 당연하죠。소나무는 본래
무한 상승 기백을 타고 났는 걸요」
다른 한 그루는
구부정하게 아래로 휘어 있어
앞의 소나무와 어긋난 모습이
묘한 균형을 얻고 있다。
오랜 세월에 씻겨서인지
일부 뿌리가 드러나 있다。
눈이 엄청 와서
하늘 땅을 하얗게 덮고 말았지만
노송의 싱싱한 용비늘마저
몽땅 덮어 버릴 수는 없었다네。
진초록 솔잎들의 낏낏한 바늘마저
몽땅 덮어 버릴 수는 없었다네。
◊
여름에 보면
뼛속에까지 설송(雪松)이 들어와서
이내 이마의 땀방울 가시고,
겨울에 보면
설송(雪松)은 오히려 훈훈한 느낌을
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