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제국의 탄생
4~5세기에 로마 제국은 여러 방면으로 크게 변화했지만, 가장 큰 변화는 그리스도교화일 것이다. 이 과정은 313년 박해가 중단되면서 눈에 띄게 진전을 보이더니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 기능하며 가속화되었다.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모든 황제가 그리스도교도였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는 특권이라는 혜택을 누렸고 당연히 문화를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인의 삶을 안팎으로 변화시켰다. 말하자면 외적으로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출현하여 곧 지배적이되고 그리스도교를 주제로 다룬 미술과 의례가 등장했으며, 내적으로는 신체·가족 그리고 삶의 이상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세계에대한 인식까지 바꾸었다.
황제들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법을 제정했는데,이는 다른 종교들 특히 그때까지 널리 퍼져 있던 고대 신앙에게는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황제들은 필요하다면 다른 종교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리스도교에 유리한 법령을 입안했다. 남겨진 법률 문서들은 이교 신앙에 대한 황실의 후원을 중단하고 신전들의 재산을 박탈했으며, 처음에는 공적 측면에서 다음에는 사적 측면에서 희생제를 금지하여 결국 신전들에서 어떠한 의식도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배제와 금지의 조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법이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었는 지는 남은 증거들이 너무 모호해서 사실상 추측이 불가능하다.
다만 이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은확실하다. 예를 들어 389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와 이교도가 충돌하여(그리스도교 측이 먼저 도발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사상자가 발생하고 세라페움[헬레니즘 시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숭상한 신 세라피스(Serapis)의 신전.]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전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웅변가이자 수사학 교사로 명성을 날린 리바니우스는 이교 신전이 매우 아름다우니 국가가 이를 활용할 다른 방안이 있을 것이라는 실용적인 이유를 내세우며 이교 신전의 파괴를 반대하기도 했다.
한 세대가량이 지난 415년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도 군중은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에게 잔혹한 린치를 가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마저 폭력 행위에 동참한 사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종교 갈등이 대단히 첨예했고 이교 신앙이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눈에 띄는 사건만 보고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고대의 제도들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를테면 올림픽은 390년대에 중단되었다. 이교 활동을 금지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법령이 부분적인 이유를 차지하겠지만, 사실 더 큰 원인은 알라리크가 그리스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4세기 말과 5세기 초가 되면 이교 신앙을 지닌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적 생활에서 앞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로마 원로원 귀족 사이에서 이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오래된 통념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로마 제국 엘리트들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오히려 증가했으며, 흐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단지 관용과 공존을 희망할 따름이었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적·물질적 성장과 주교의 권위 증대는 도시 건축 양상에도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다. 병자, 노인, 고아, 빈자 또는 과부를 위한 자선 시설이 360년대에 처음 나타났다. 그 시설들은 대부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이 주도했지만, 정교회는 이를 빠르게 따라 했다. 이 건축물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는 아직 없으나, 교회의 성장을 바라볼 때 분명 존재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시설들이 이 시기 경제적 호황에 동참하지 못한 도시 빈곤층과 가난한 대중에게 진정한 구제처였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화의 증거가 도시에서는 그리스도교 건물의 증가로 나타났다면, 농촌에서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출현으로 나타났다. 연대와 금욕을 강조한 독실한 인물들이 40일 동안 사막을 떠돌았다는 예수의 예를 따라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으로 떠났는데, 이들을 그리스어로 사막에 사는 '은자'라고 불렀다. 이들 곁에는 곧 추종자와 제자가 모여들었고, 문명화한 세상에서 멀어지기를 추구했다. 동시에 이들은 그 수가 점차 늘어 가며 연대와 금욕을 강조하는조직으로 변화했으며, 4세기 중반 이집트에서 파코미우스의 지도아래에 출현한 것이 최초이다.
파코미우스가 활동한 지역은 완전한 사막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파코미우스 공동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고행, 육체노동, 보편적인 물품과 가치에 대한 거부, 순결, 공동 기도는 얼마 안 가 이상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졌고 후기 로마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들의 수도원은 곧 사막 인근 또는 사막과 비슷한 산지 등 인구가 희박한 지역으로 퍼져 나가 나중에는 취락이나 도시 내부에까지 형성되었다. 수도원은 사막을 상징하는 요소를 이용해 외부 세계와 분리하는 벽과 규율을 세워 접근과 접촉을 통제했다.
그러나 고대 사상이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다. 육신과 가족의 형성 및 기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2세기에 출현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을 다시금 강조하여 자식을 두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하여 순결과 금욕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식에 맞섰다. 금욕주의자와 수도사들이 육신과 현세를 경시한 점은 이 특별한 시민들이 새로운 영웅이자 롤 모델의 지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들의 기도와 대도는 신앙사회 공동체들이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박해가 중단된 후 수십 년 동안 태어난 그리스도교도들은 제국행정부와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갔으며 그리스도교도에의한 그리스도교도를 위한 문학을 생산해 냈다. 이교 신들이 바글거리는 고전 문학이 전적으로 부정당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교육에 맞게 조정되었을 뿐이었기에, 호메로스의 작품과 《성경》의 <시편>은 동등하게 강조되었다. 즉 고대 그리스어 문헌 대부분은 방치되거나 버림받기는커녕 보호받았다. 새로운 문학은 옛 작품을 빌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안토니우스의생애(vita Antoni)》[우리나라에는 <사막의 안토니우스>(허성석 옮김, 2015. 분도출판사)로 출간되어 있다]같은 성인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고대의 수사를 차용하고 수정하여 그리스도교 사상과 이상을 발전시키는 데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