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도 많습니다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바위
예류 구경후 점심 식사
대만 고궁 박물관 손문 동상 앞에서 여행객 전체 사진
국립 대반 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國立故宮博物院)은 중화민국 타이베이시에 위치해 있는 중화민국 행정원 소속 국립박물관이다.
이 박물원에는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에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의 수는 69만 7490개나 되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워낙 유물이 많기 때문에 박물관에서는 3개월에 1번씩 전시하는 소장품을 전부 교환하고 있어서, 모든 소장품을 관람하려면 8년정도 걸린다고 한다. 2001년부터 소장품 보호를 위해 박물원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 장제스는 중국 전통문화에 애착이 많았다. 평소 지론이 '나라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문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었고, 국공내전 와중 패주하면서도 베이징 자금성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29만점과 전국 각지의 유물들을 타이완으로 가져왔다 [4] 자이현 타이바오시에는 남부 분관이 별도로 존재한다.
*손문: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청 조정이 무능을 드러냄에 따라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여 중국을 일으키고자 한 인물이 있다. 바로 쑨원이다. 그는 삼민주의로 대표되는 중국의 공화제를 창시하고, 국민 정부 시대에는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졌다.
쑨원은 1866년 광둥 성 샹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으나 열네 살 때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체험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열여덟 살 때로,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미국식 민주주의 사이에서 괴리를 느낀 그는 곧 홍콩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서양의학원에 진학하여 의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 개원하여 잠시 의사로 생활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 청 조정이 무능함을 드러내고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가속화되자, 그는 나라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기치로 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였고,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부하의 밀고로 무산되고 쑨원은 해외 망명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본으로 탈출해 하와이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1896년에 런던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의학교 시절 스승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난 후 189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쑨원은 세력을 모아 1900년에 다시 제2차 무장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 역시 실패하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야 했다.
이후 쑨원이 일본, 하와이, 베트남, 미국 등에서 중국인들에게 혁명 사상을 전파하던 중 1905년 러일 전쟁이 일어났다. 쑨원은 그해 8월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총리로 추대되었다. 쑨원은 동맹회 민보 발간사를 통해 그동안 구상했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발표했다. 한족 국가를 부흥시키자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시키자는 민권주의, 민중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경제 정책을 실시하자는 민생주의의 삼민주의는 이후 쑨원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중국동맹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봉기를 거듭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이 났고, 결국 쑨원은 신해혁명 즈음까지 전 세계를 주유하며 혁명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데 주력했다.
1911년 5월 청나라 정부가 철도 국유화 정책을 발표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국민의 힘으로 철도를 건설하자는 철도부설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 정부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민영철도 건설을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열강에게 돈을 빌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피해를 입은 쓰촨 성 사람들은 사천보로동지회를 결성하여 이를 중심으로 납세거부 운동 등의 반대 운동을 펼쳤고, 청 정부는 우창에 주둔하고 있던 정부군을 동원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러자 우창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는 정부 옹호파를 제거한 후 호북군 정부를 조직했다. 이어서 호북군 정부는 10월 10일 우창에서 봉기해 중화민국군 정부를 수립했다.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중국 전역에서 13개 성이 이 혁명에 동조하여 독립을 선언했고, 추후 4개 성이 합류하여 총 17개 성이 청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12월 2일, 혁명군은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혁명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쑨원은 신문기사를 통해 봉기 사실을 접하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는 청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지할 것, 청 왕조를 지원하던 일본을 막아 줄 것 등을 요구하며 대신 새로 수립된 혁명 정부는 과거에 맺어진 조약을 계승한다고 표명했다. 성공적으로 교섭을 이끌어 낸 쑨원은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했고, 29일에 난징에서 열린 선거를 통해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쑨원의 취임식이 거행되었고 이로써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한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이것이 신해혁명이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베이징에서는 여전히 청 왕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지난해부터 실질적으로 전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 세력으로부터 군사적 위협까지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쑨원은 청 왕조의 편에 있던 위안스카이와의 연합을 결정했다. 그는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내각중심제를 시행하는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정권을 넘길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위안스카이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에게 퇴위 조서를 받아 내고 1912년 2월 청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선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중국동맹회는 1912년 12월 중국국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위안스카이를 견제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국민당의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쑨원과 국민당은 무력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항했으나 실패했고, 쑨원은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그는 1914년 도쿄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해 반제국주의, 반군벌의 기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화혁명당은 중국으로 입국하여 위안스카이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규합했으며, 서구 열강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에 맞섰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되기를 포기했다. 쑨원은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중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반일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반제국, 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민중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과거 일본의 대중국 21개조 요구안이 알려진 후부터 축척된 민중들의 분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열강들의 침탈로 더욱 거세졌고, 이로 인해 대학생들이 주도한 반일 혁명 운동이 각계각층으로 번진 것이다. 그 결과 위안스카이 사후 정권을 쥐고 있던 돤치루이 군벌 정부는 친일파 인사들을 파면시키고, 독일이 산둥에서 가지고 있던 특권을 전부 일본에게 양도하라는 파리평화회의의 결정을 거부했다. 국민들이 주도하여 군벌 정부와 제국주의에 대항해 결실을 맺은 이 5·4 운동은 중국 국민들의 근대의식이 성장하여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5·4 운동을 계기로 쑨원은 혁명에는 국민들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화혁명당을 다시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했다. 또한 5·4 운동은 공산당이 성립되는 계기로도 작용하여, 이듬해 소련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이어서 코민테른은 중국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쑨원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당시 쑨원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수립된 광둥 신정부는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군벌을 축출하고 무력이 기반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군사를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쑨원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이 바로 장제스(蔣介石)로, 이후 장제스는 이곳에서 군인을 양성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1924년 쑨원은 중국공산당과 연계하여 새로운 중앙기구를 조직했으니,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이다. 그러나 이듬해 쑨원은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장악한 돤치루이가 주선한 베이징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혁명을 위한 그의 행보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쑨원의 삼민주의는 이후 중국공산당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중국 정부는 삼민주의를 계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 건국 기념일에는 톈안먼 광장에 커다란 그의 초상화가 걸린다. 또한 타이완에서도 그는 ‘국부(國父)’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손문 동상앞에서 상민이 한장
1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