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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솔깃☆]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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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깃]
최재경 시집 / 詩와에세이(2013.08.13)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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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깃
최재경
읍내 다방이 신장개업을 하면서 마담도 새로 오고 배달하는 아가씨도 둘이나 따라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무 개가 넘는 마을로 순식간에 번졌다 모두 솔깃하였지만, 그 놈의 체면 때문에 내놓고 좋아라 하는 눈치는 뒤로 꿍쳤다 스피커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게 뽕짝으로 조지는 관광버스 막춤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환인지 꽃다발인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위아래를 흔들며 차를 날랐다, 젊은 것들은 가겟방에서 노닥거리며 해가 식기만 기다렸고, 나잇살이나 있는 이들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 사는 거시기고 머시기 타령이다 안 해도 뻔한 뻥튀기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착 달라붙어 시키지도 않은 비싼 쌍화차나 칡즙을 저희들 맘대로 시켜먹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하나 둘씩 일어선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다보며 느리게 느리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덜 차례가 되었다 몰려가는 중에 누가 그랬다, “밤이는 술도 판댜” 솔깃하다, 솔깃! 어쩌자고 솔깃에게 자주 넘어진 봄날
딱
최재경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밥을 복 나가게 먹는다고 수저로 대갈빡을 때렸다
말로 해도 될 것을
쳐다보았더니, 대든다고 또 때렸다
"딱" 어지간히 익은 소리가 났다
엄마도 모르게 은수저를 내다 버렸다
다음 날도, 지금까지도
아무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열 대여섯쯤 되던 해였다
지금도, 그 자리를 만져보면
대갈빡에서 "딱" 소리가 난다
복이 나갔는지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안달이 났어요
최재경
아이들 뛰노는 운동장에 벚꽃이 환해요
버들잎도 흔들리며 자꾸 파래지고요
개나리가 어지러워요
머리 하얀 선생이
아이들 공부는 안 가르치고
호뜨기를 만들어주어요
일 학년은 삐
이 학년은 빼
삼 학년은 뿌, 그렇게 불어요
공부하는 언니들이 운동장을 쳐다봐요
저희들도 안달이 났나 보지요
봄날이 자꾸 시끄러워요.
나물 캐는 여자들
최재경
여자들하고 나물 캐러 갔다
얼굴 탈까 봐
칭칭 가리고 나물을 캔다, 그러니
누가 더
이쁜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 손이 바쁘다
손 탈까 봐
장갑을 꼭 끼고 나물을 캔다, 그러니
누구 손이 더 뽀얀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이 오줌을 싼다
환한 궁딩이 볼까 봐
둘둘 가리고 오줌을 싼다, 그러니
누구 궁딩이가
더 큰지 알 수가 없다
치마
최재경
문방구집 딸 미영이는 내 친구다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이쁜 치마를 입고 오면
나는 툭하면 치마를 훌러덩 걷어 올렸다
미영이는 눈을 가리고 울었다
도망치다 몰래 쳐다보면 참말로 운 적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께도 부모님께도 일러바친 적도 없었다
가끔 나를 때리거나 꼬집었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연필도 주고 크레용도 몰래 주었다
애들은 쑥덕거리고, 변소에는 누구누구하고 연애 걸었다는 낙서도 있었다
내가 아파서 결석을 하면, 먼 길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간 적도 있었다
아파 누워있어도 미영이 치마가 생각났다
다른 애들은 감히 미영이 치마를 걷어붙일 생각을 못했다
쓰봉을 입고 오는 날은 나는 되게 심심했다
일부러 생글거리며 내 곁을 자꾸 왔다 갔다 지나쳤다
살랑살랑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나
가끔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회 때도
할머니 미영이는 치마를 입고 나온다
또 걷어붙일까 봐
치마 끝을 꼭 잡고 내 곁으로 온다.
당골네의 오월
최재경
낮에는 약장사가 좀약을 불알처럼 흔들며 까불다 갔고
눈이 쑥 들어간 폐병쟁이는 기침만 하다 갔다
해거름엔 소금장사도 지나갈 판이고
어두우면 새우젓장수도 놀다 갈 것이다
댕겨가고 쉬다가는 사람도 많은 귀틀집에
당골네도 복사꽃도 흥건하게 젖어있다
어쩌건에, 꽃물 풀물 시푸루둥둥 녹아날 판이다
꿈같으고 화사한 세상이다, 보리밭 말고는
마땅히 숨을 만 한 곳이 없다
자꾸 이리 오라 손짓이다
나도 실성한 놈처럼 따라간다
쑥국새가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으로 말하기
최재경
나는 알고 남음이다
별 하나 떠 있어도 지붕 위에 내리는 별빛의 표정을
빈산으로 불어가는 바람의 표정도
늙은 참나무에서 웅웅 우는 부엉이소리라든지
마루 밑에서 코를 골며 자는 고양이
병아리 물어 죽이고 똥 마려운 강아지
알 실은 소리를 하며 장소를 보는 암탉
하늘에 떠있는 황조롱이 눈빛도
초상집에 낯선 문상객
밤길에 툭 튀어나온 돌짜가리
날은 자꾸 어두워지고
서둘러 집으로 가는 사람들의 어깨
수지 맞은 장사 신명난 얼굴
외상 잘 주는 수더분한 가겟방 주인
시를 읽다가 고개를 끄덕인다든지
하루에도 몇 번을 꼭 봐야 하는 산과 가으이 표정도
그렇게 우리는 다 알고 남음이다
두계역 팥거리 방앗간에는 말 못하는 벙어리 부부가 살고 있다
이장 봉급
최재경
작은 산골마을에 달빛이라도 내린다면 숨이 멈출 듯한 고요가 찾아와 적적하기 그지없고, 한 집 걸러 하나 둘 버리고 간 폐가들을 빼면, 한 집 당 노인네 한 명이 납작 엎드려 자는 함석 슬레이트 지붕 아래 고단한 밤이 깊어만 갔다 아침 식전에 방송해야 모두 알아듣지, 동이 텄다 하면 논으로 밭으로 나가는 통에, 서둘러 방송을 해야 한다 “주민 여러분 이장입니다요. 다름이 아니라요 오늘은 보건지소에서 건강진단을 하는 날 입니다요. 그러니께 10시까지 회관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요. 그리고 내일은 말이지요. 농기계 수리를 하러 온다니께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예취기 분무기 관리기는 마을 정자나무 아래로 가져 나오길 바랍니다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요...” 방송을 듣고 일 나갈 사람들이 회관 옆 구판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 구판장이라야, 도회지 골목 구멍가게만도 못하여, 갖춘 거라고는 됫병 막소주와 양조장에서 배달된 막걸리 서너 병이 고작이고, 포장에 먼데기가 부연한 라면이나 가락지 과자 번데기 과자뿐이었다 찾는 사람이라야 식전에 속풀이 하러 나온 은애 아부지 아니면 죽은 진산 어른 작은아들 만식이가 고작이었다 “어이 이장, 션한 막걸리 이제 막 왔는디 해장술 한 잔 받아줄쳐? 어제 보니께 다방서 나오데? 이리 오너 한 잔 햐, 건강진단은 진단이구 속은 풀어야 쓰는 겨, 안 그려?”
해가 한나절 가웃 자빠진 회관 앞마당에는, 종합진단 버스 엔진소리와 구판장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약통을 메고 고추밭에 가던 만식이는 벌써 취해있었고, 은애 아부지는 고얀히 진료하는 의사 간호사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지 놈들이 뭘 안다구, 아 여기가 바로 대학병원 실습장인 거여, 실습장. 한번 먹으면 싹 가셔야지, 약이라구 주는 것이 어디 몹쓸 놈의 약장사가 주는 약이라니께?” 젊은 의사 선생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장님 말예요, 술 먹은 사람 있으면 안 된다고 제가 신신당부를 드렸는데 이게 뭔가요? 이장님도 술 한잔 했지요? 참 내, 저분이나 집에 모셔다 드리고 오세요.” 식전부터 할 일 팽개치고 나와 방송하고, 아들 같은 의사에게 쿠사리 먹고 영 하루가 거시기할 판인디, 전화가 왔다 “이장님 봉급 나왔으니 얼른 타가세요.” 공복에 들어간 막걸리가 다시 삭혀지는지 뱃속이 우글거렸다 이달도 전달과 다를 수가 없다 오늘도 매 한 가지 일뿐, 봉급 타서 담배 한 보루 사고, 가게방 다방 술집 외상값 줬더니 백 원짜리 동전 두 개 남았다.
이장! 집에 있어?
최재경
김판용 씨가 죽을라고 농약을 벌컥벌컥 마신 날이었다
봄 가뭄이 어지간하여 저수지 바닥이 허옇게 말라가는데
뻐꾸기는 어여 씨갑씨 뿌리라고 뻐꾹 뻐꾹 울어대고 있었다
119구급차가 마당에 들어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떠난 뒤
“자식 여럿 있으면 뭘햐, 하나 같이 애미 애비 속만 징글허게 썩히니어쩐댜.”
걱정들이 한결 같았다
봄 버즘이 까칠하게 피어났어도 세월은 하냥 그렇게 흘러서
논 갈고 밭 갈아 쌀도 먹고 콩도 먹게 그렇게 흘러서
죽으려고 했던 것도 까마득히 흘러서
어느새 들국 산국은 자꾸 피어났다
“이장! 집에 있어?”
만나면 으레 인사가 ‘한잔할쳐’인 판용 씨가 찾아왔다
“그때 증말로 죽을라고 약 먹은 거 아녀. 애새끼들 정신 좀 차리라고 쇼를 한 거여.”
“얼마나 마셨슈?”
“한 두 모금 먹었는디 말여, 오장이 틀어지는 게 느끼더라구. 병원에 갔는디 똥구녕 목구녕에다 호스를 집어넣고 지랄을 떨어서 외려 죽는 줄 알았다니께. 풀약 먹었으면 고대 죽을 판인디 그나마 다행이라데.”
판용 씨가 울고 있었다
“한잔 할쳐?”
황금빛 물감이 논으로 번져가는디 어디서
쉬쉿거리고 쇠오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말여
최재경
쑥국새가 울다가 슬며시 사라졌다면 말여
속앓이하던 깨구락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말여
어지간히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얘기여
나절 가웃 자빠져서 민기작거리다가 뻔뻔하게시리
점심상 내오라고 성질부터 내는 꼬락서니 하고는
싸그랑 비가 내리다 말고
쨍볕이 내려 흐지부지 하루가 간다면
여름이 말여 솔찬히 익었다는 얘기여
찬물을 끼얹고도 끈적거리기는 매한가진디
옆댕이에 착 붙어서 수작을 부리는 거 허구
햇무리 구름이 뭉개졌다 새털마냥 흐트러지고
달개비가 피어나 어쩌자고 대꾸 피어나서
대추 같은 다래가 들큰하게 익어 간다면
이제 여름도 어쩌지를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여
억척으로 살다가도 걸핏하면 종일 울거나
몇 날 며칠을 악을 쓰고 울다가
빈 껍질로 사라지는 매미 같다는 얘기여
예를 들자면 말여
우리 마을 이장
최재경
다섯 개 마을 이장들이 단합하여 도장을 눌러준 사건이 있던 보름 후 어부지리로 마을의 대표가 된 지도자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서 건들거리고 걸어간다
다짜고짜로 마을회관 열쇠를 움켜쥐고 방송을 한다 “사람들이 그러면 쓰간디유, 아, 주민들을 핫바지로 봐도 유분수지. 돈푼이나 받아먹고 도장을 눌러유. 나도 촌놈이지만 알만 한 건 다 알지유. 이참에,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집에서 방송을 듣고 있던 어제 이장이 씅빨이났다 “아, 저 놈 좀 봐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네, 지 깐놈 지도자 세워 준 게 누군데 내 덕택에 여태 살아온 놈이.” 단바람에 쫓아간다 다구진 주먹이 볼투가리로 날아간다 분한 마음에 갈겼지만 두 손으로 감싸고 자빠진 꼴을 보니 안됐나 일으켜 세우고 사과한다 술잔이 얼큰하게 돌아간다 매를 친 이장에게 한 마디 한다 “얼마씩 먹은 겨?” 다시 술상이 엎어지고 난리다.
단술
최재경
우리 엄니가
나, 맨날
쓴 소주만 먹고 댕긴다고 단술을 해준단다
양재기에 엿지름을 풀더니
검버섯 손으로 보리가루를 조물조물 푼다
“생각나느냐. 느그 아부지도 이렇게 해주면 션하게 잘도 자셨지.”
까끄라기 쭉정이가 뜨고
젖색 같은 앙금이 나릇나릇 가라앉는다
단내가 풍기더니 살얼음이 사르르 언다
육십이 거반 가까운 나이에
오늘 밤은
엄마 젖을 만지며 자고 싶다
섣달그믐밤
우리 엄마 손이 엿질금처럼 반지르 윤이 난다
똥도 시도 다 틀렸다
최재경
맘먹고 시 한 편 쓰려는데
어여 건너와 저녁 먹으라 부른다
뮛 좀 쓰고 먹는다고 먼저 먹으라고 했더니, 글쎄
그럼 상 치운단다, 그러라고 했더니, 글쎄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하며, 방문을 확 열며 하는 말이
“문이나 열고 담배를 피든지 먹든지 하지 오소리 잡겄다.”
윗문 아랫문 방문 죄다 열어 제낀다
무너진다
순식간이다
모두 훨훨 날아갔다
단이니 한꺼번에 우르르 진다
컴컴한 시월 초승 밤이다
똥 마려 변소까지 갔다가 무서워 그냥 들어왔다
고약한 노릇이다
똥도 시도 다 틀렸다
맘먹고 시 한 편 쓰기 어렵다
아무 데나 침 한 번 퉤 뱉고, 밥상머리에 앉는다
보리밥이 아니고 쌀밥으로 고봉이다
조기 새끼 두 마리 노랗게 누워있다
입맛이 돌아왔다
나도 참 철딱서니 어지간히 없다
담배
최재경
담배 피우다 선생님께 들켰다
귀싸대기 예배당 종 치듯 얻어맞고
일주일 내내 변소간 똥 펐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또 뒤지게 맞았다
엄마가 들어오는 틈을 타 부리나케 도망쳤다
뒷산에 올라 어른들 욕을 하며 또 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떨어지면 괭이마냥 살금살금
할머니꺼 아버지꺼 훔쳐 피웠다
할머니꺼는 겁나게 쓰거웠지만
아버지꺼는 고급이라 아주 달았다
군대 가서는 구수한 화랑담배 신나게 피다 왔고
시방도 피지만
우리 할머니 아버지 팔십을 너끈이 살다 가셨다
나는 아직 팔십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피우다 들켜도 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
그럭저럭 한 사십 년 담배 먹었다
나는 오늘도 아내에게 또 쿠사리 들었다
뭐 하나 딱 뿌러지게 하는 일이 없으니
담배나 똑소리 나게 한번 끊어보란다
담배갑으로 손이 가다가 멈춘다
그 전 할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뼈 삭는다
딱
최재경
아내에게, 머리를 깎으려고 돈 만 원을 달랬더니
얼싸 준다, 그래서
삼 년 내내 기른 머리를
연산 장터 이발소에서 싹둑 잘랐다
긴 세월이 구름처럼 풀풀 날아갔다
내 모습이 자꾸 변해갔다
오랜만에 오셨지요
시도 잘 되시구요
헌데, 많이 빠지셨네요
그리고
염색도 하셔야지요
주름살이 편해 보이는 이발사가 그랬다
눈을 감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유리창 밖으로 풀이 죽은 해가 떨어지고
연탄난로가 썰렁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어느 시인에게 전화가 왔다
머리 깎으러 갔다며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혀 이 숙맥아
아내 말 잘 듣는 것도 숙맥인 모양이다
바람 부는 장터에서 자꾸 손이 머리로 갔다
쭉정이
최재경
어머니 젊어 한 시절
밤이면 푸른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그렁그렁 우는 아이들에게 모자란 젖을 물리고 있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뙤약볕에 데워지고
가을이 다할 때까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
고요하고 쓸쓸할 것 하나 없어도, 자꾸 슬퍼졌다
무서리 다녀가고
일렁이는 울음도 다 삭은
시래기만 남은 배추밭으로 푸짐하게 눈이 내렸다
옥수수밭에 갔더니
아기를 업은 채 엄마가 죽어있었다
꼿꼿하게 서서 얼어 죽었다
아기도 칭얼칭얼 울다가 잠자듯 따라 죽었다
기척도 없이 마른 소리로
포대기 끈이 바람에 날렸다
나의 전생
최재경
나는 전생에 산지기나 종지기였다
그러나 가끔은, 붓으로
하얗고 검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봄이 다시 살아 돌아오면
창꽃 피어나는 애장터 근처에서 비를 맞았고
물싸리가 하얗게 고봉으로 피어나
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길을 해매고 다녔다, 그리고
산을 깎고 꽃을 베고 종을 쳤다
잠 못 이루는 달밤에는
지는 꽃잎을 덮고
울다 웃다 잠이 들었다
가을에는 꼭꼭 숨어 지내다
겨울에는 아예 숨을 끊고 죽어있었다
봄이 다시 올 줄도 몰랐다
나는 전생에 산지기나 종지기였다.
쌀도둑
최재경
식구들 몰래 쌀 한 말을 퍼내어
외상값도 갚고 술과 라면으로 바꿔먹었다
그다음 날, 마당에서
방에 있는 나 들으라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우리집에 분명 쌀 도적놈이 있는디, 당최 누군지 모르겄단말여
아버지는 그러셨다
걸리기만 하면 손모가지를 잘라 논다고
끽소리도 못하고 내 손을 쳐다보았다
며칠 뒤 식구들 오일장에 다들 가고 집이 텅 비었다
나는 또 도적놈이 되어 부엌문을 살금살금 열다가
기겁을 하였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어짤라고 니가 여길 들어오냐?
.
.
.
그다음부터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손가락으로
쌀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그 꽃
최재경
그 꽃이 피었다기에
쓰던 시 팽개치고 달려가 보았더니
활짝 열리지는 않았어도, 그래도
아무도 몰래, 슬쩍 만져보면
눈을 감고
혼자 수줍어 축축해지다
화르르 혼절도 하는
누가 꼭 곁에 있어야, 피어나는
흐뭇한 밤이던지
바람기 다분한 봄날
가만히 다가가 소곤소곤
그대라고 불러도 좋은
아흐 아흐흐
명자야
낯선 시詩
최재경
한 두어 달, 시 한 편
아니, 시 한 줄도 못 쓰고 있다
나는 시에게 가혹한 배신을 당해 아무도 없는 곳에 와 혼자 산다
캄캄한 여기가 밤하늘도 아니고, 땅속도 아닌 그냥, 수렁 깊숙한 곳이라
아무리 걸어 뒤를 돌아보아도 어디쯤인가, 알 수가 없다
여러 번 지났을 뿐, 여기는 지금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모르는 하루가 지나간다
하루아침에 나는 낯선 이가 되어 있다
처음 보는 버스가 지나가고, 툭하면 내릴 곳을 지나 한참을 걸어온다
시가 나를 철저히 따돌리고 있다, 그런데
배가 고파온다, 허기진 배를 채운다면, 시가 돌아올까
차라리 무슨 병에 걸려, 쓰러져 눕는다면, 시가 다시 돌아올까
답답하다
그런데, 또 배가 고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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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3년 임기인 이장직을 딱 한번하고 그만두었다.
꼭 이장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도, 벌곡 사람들은 나를 시인이장이라고 부른다.
눈을 뜨면 보이는 산, 들, 강이 하루도 같을 수가 없듯
봄이 떠나고 여름이 슬그머니 와 있다.
산골에 뿌리 내린 지 벌써 14년이 되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니, 나도 어느새 자연인이 되었다.
타고 다니던 승용차, 트럭을 처분하고 웬만하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먼 곳에 가려면 버스나 기차를 타고 다닌다.
분수에 넘치게 살 수도 없고, 비울 수 있는 느긋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남을 해코지할 생각도 없거니와, 내가 좀 모지라게 손해 보고 사는 것이 참 좋다.
내가 사는 논산 벌곡에 초등학교가 두 곳이 있어, 그 곳에서 아이들에게 동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다.
엊그제 수업 시간에는 공부는 안 하고 버들피리를 네 시간 내내 만들어주었다.
운동장 교실이 버들피리소리로 가득했다.
이제 여름이 시작하니 보리피리도 만들어줄 생각이다.
일찍 피었던 꽃잎들이 진다.
빗님이 오신다.
탱자꽃, 대추꽃 피어나더니, 이제 감꽃이 피어난다.
낮에는 뻐꾸기 뻐꾹 뻐꾹 울더니
어두워지면서 뒷산에 소쩍새 쏘쩍 소쪽쪽 운다.
2013년 초여름 벌곡에서
최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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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최재경 시인이 사용하는 시어들은 모두 시골 사람들이 쓰고 있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들이다. 난해시가 어떻고 평론가의 평이 어떠하고 간에 이 모든 걸 뒤로하고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한 시를 생산해내고 있다. 한 편의 시 속에서 다정한 이웃 아저씨와 아줌마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는 입술 사이로 희로애락을 그대로 오물거리게 하며, 두 눈 속으로 고이는 맑은 물처럼 깊이 있는 정감을 아로새겨 넣게 한다. 그의 시가 심산유곡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삶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오늘날같이 복잡다단한 도시문명 속에서 최재경 시인의 시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신선한 삶에의 귀소를 도모하는 길임에 틀림없다. _구재기(시인)
남들은 시를 쓴다고 낑낑대거나, 고상 척을 떨 때, 그는 그냥 시하고 논다. 시가 오면 좋고, 안 오면 그만이다. “복종”에게 져서 단발이 되기 전까진 긴 생머리 한 줌을 뒤꼭지에 매달아, 자징개 등거리에서 “벌곡”의 풍경 속으로 휘날려 준다. 길가의 쑥부쟁이들이 코가 빨개진 그를 향하여 “이장 아재, 그새 또 한잔 빨았소” 그런다. 동시 배우러 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시는 안 배워주고, 버들피리만 만들어준다. 보리피리도 만들 거라는 궁리나 한다. 저,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능청’은 어디서 왔는가.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내 “대갈빡”에서도 여지없이 “딱” 소리가 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능청과 무욕(無慾)의 진경이여. 이게 바로 이 시집에 놓인 그의 시들이 ‘허는 짓’들이다. _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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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시인∥
∙ 1955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 2006년『문학세계』로 등단하였다
∙ 시집『그대 잊은 적 없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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