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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58강-2 (2014. 12. 1.)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九
十行品 第二十一之一
一. 功德林菩薩의 入三昧
二. 諸佛加被
3. 加被의 相
(1) 語加 (2) 意加 (3) 身加
三. 功德林菩薩의 菩薩行
1. 菩薩行의 根本
2. 十種名
3. 第一 歡喜行 布施波羅密
(1) 大施主 (2) 饒益衆生
이 우주만유가 본래로 가지고 있는 진리선이고 그래서 중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꼭 열 가지로 이렇게 여기서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도 수차 봐 왔듯이 끊임없이 그렇게 갈 것입니다. 왜냐? 깨달음의 안목에서 볼 때 이 우주만유는 그대로 완전무결한 그야말로 법과 성인이 일체차별 현상과,
그 ‘현상의 본질의 성품이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 완전무결한 존재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지요.
3. 加被의 相.
(1) 語加
善男子야 汝當承佛威神之力하야 而演此法이니라
語加. 신ㆍ구ㆍ의 3업으로 가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하다.’ 하더라도 감사를 느낄 때, 마음으로 감사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말로 “감사하다.” 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사실 뭔가 몸으로 눈에 보이고 하는 것으로써 감사의 표현을 해야 됩니다. 하다못해 말라비틀어진 곶감이라도 하나 갖다 주고 감사를 해야 그것이 신ㆍ구ㆍ의 3업이 다 동원된 완전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제가 늘 그런 이야기하지요? 그것이 불교의 교리는 항상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가피하는 것도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善男子야 汝當承佛威神之力하야,
그대가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而演此法이니라. 이 법을 설할지니라. 부처님이 그렇게 설하라고 이렇게 분부를 하든지 명령을 내렸든지 하면 이것은 큰 힘을 받는 거예요. 큰 힘을 받는 겁니다. 만약 부처님이 뻔히 쳐다만 보고... 상좌에게 절을 맡겨놨는데 은사스님이 확실하게 “네가 오늘 가서 내대신 법문하라. 초하루 법문 네가 하라.” 딱 이렇게 해야 상좌가 힘을 받아서 자신 있게 법문하지요. 그런데 아무 말도 안하고 절만 “네가 알아서 하라.” 이렇게 해놓고 멀찌감치서 쳐다만 보고 있으면 무슨 힘을 받겠습니까? 확실하게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이것이 그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이 법을 설하라.
부처님이 공덕림보살에게 딱 그렇게 명령을 내린 겁니다.
(2) 意加
是時에 諸佛이 卽與功德林菩薩에 無碍智와 無着智와
無斷智와 無師智와 無癡智와 無異智와 無失智와
無量智와 無勝智와 無懈智와 無奪智하시니 何以故오
此三昧力이 法如是故니라
意加. 뜻으로 = 마음으로 가피하는 것이지요.
是時에, 그때에
諸佛이, 모든 부처님이
卽與 = 곧 주었다.
功德林菩薩에, 공덕림보살에게
無碍智와, 걸림 없는 지혜.
無着智와, 집착이 없는 무착지.
無斷智와, 끊어짐이 없는 지혜. 지혜가 또 왔다ㆍ갔다하는 경우가 많지요.
끊어짐이 없는 지혜. 참 중요합니다.
無師智와, 지혜가 본래 갖춘 지혜라야 힘을 쓰지, 누구에게 듣고 기억하고 메모하고 어디잠깐 컨닝해서 그 밑천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의 어떤 그야말로 끝없이ㆍ끝없이 깊고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라야 그것이 진짜 좋은 지혜입니다. 천번만번 써도 쓸수록 더 빛나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사지지요. 스승 없는 지혜.= 無師智.
이 화엄경은 無師智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스승 없는 지혜. 자기 마음속에서... 우리 마음은요? 본래 그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참 마음 = 無位眞人 = 차별 없는 참 사람. 참 나 라고 하든지 법성이라고 하든지 자성이라고 하든지 진여불성이라고 하든지 이름이야 아무렇게나 지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그 것. 그것에는 본래 이런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무애지도 있고 무착지도 있고 무단지도 있고 무사지도 있고,
無癡智와,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
無異智와, 다름이 없는 지혜.
無失智와, 잃어버리지 않는 지혜.
無量智와, 한량없는 지혜.
無勝智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는 지혜.
無懈智(무해지)와, 해태함이 없는 지혜.
無奪智(무탈지)하시니, 누가 뺏어가지 못하는 지혜.
이런 것들이요? 사실 우리 본성 속에 다 있습니다. 그저 온갖 번뇌 망상으로 그것이 뒤덮여 있어서, 우리들의 그 알량한 자아의식이 본래 그 보물 같은 참 마음의 능력을, 참 사람의 능력을 다 뒤덮고 있어서 이런 한량없는, 이런 멋진 지혜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화엄경을 통해서 자꾸 두드리는 겁니다. 자꾸 두드리는 겁니다. 두드리면 어느 땐가 그야말로 큰 도구로 짓누르고 그 위에다 시멘트를 3미터정도 쌓고 또 위에다 철판을 깔고 하면 그런 두꺼운 업장이 어느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삭~~~ 녹아서 무너져 없어지는 겁니다. 그럼 저절로 그 속에 있던 이런 열 가지 지혜가 그냥 샘솟듯이 솟는 겁니다. 어디 딴 데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주 대표적인 것이 無師智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 차별 없는 참 사람 속에는...
제가 그러지요? “차별 없는 참 사람을 바로 우리가 생각해 보자. 지금 무슨 조건으로 법문 듣느냐? 스님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느냐? 남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느냐? 여자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느냐? 나이가 몇 살이라고 하는 조건으로 듣느냐? 이 말 듣는 그 당체는 그 어떤 조건도 동원되지 않았다. 그 어떤 조건도 거기는 해당되지 않고 듣는 그 놈이 있다.” 그것을 그야말로 宗旨(종지)로써 늘 거량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그 무엇도 조건으로 삼지 않고 歷歷孤明(역력고명)한 분명하고ㆍ분명하고, 그것만이 홀로 밝은 그것이 우리가 지금 듣고 있거든요. 그거라고요. 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자성입니다. 그것이 불성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거기다 뭘 칠을 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다 그냥 그것가지고 활용하는 겁니다. 그것가지고 오고 가고하고, 그것가지고 다 경전 읽고 보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이지요.
가깝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 당체니까요. 모든 작용의 당체니까요.
何以故오 此三昧力이 法如是故니라.
이 삼매력이 法如是故니라. 법이 으레 그렇다. 법이 본래 그렇게 돼있다.
그럼 우리가 “삼매에 들어간다.” 하면 뭡니까? 경계에 끄달리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경계에서 回光返照(회광반조)하는 것이지요.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 입정의 목적 아닙니까? 入定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것이 法如是故입니다. 본래 그런 것이 갖춰져 있는데, 우리가 回光返照를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入定은 回光返照하는 겁니다. 이 삼매력이 法如是故니라. 법이 으레 이와 같이 돼있다.
이것이 무슨 공덕림보살만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 자리의 우리일입니다. 우리일. 그리고 조금만, 아주 얇은 그 막만 딱 뚫고 들어가면요?
사실은 그 중에 눈에 보입니다. 이러한 이치가 눈에 보이는 일입니다.
사물이 보이듯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얇은 막이 하나 딱 처져있습니다. 그것 뚫릴 듯ㆍ뚫릴 듯하면서 안 뚫리는 막입니다.
(3) 身加
爾時에 諸佛이 各伸右手하사 摩功德林菩薩頂하신대
身加. 몸으로 가피하는 것이지요.
爾時에 諸佛이
各伸右手(각신우수)하사,
그 많고 많은 부처님들이 전부 오른손을 내밀어서,
그것이 실지로 그런 손이 있다면, 그럼 손이 수억만 개도 넘을 텐데 그 손 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손 하나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전체고 전체가 하나니까요. 화엄경은 늘 그렇게 왔잖아요.
또 실지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그렇게 그 원리로 존재하고 있고요. 하나를 들면 전체가 들리고요.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화엄경의 이치, 참~~ 제대로 본겁니다.
그래서 그 좋은 내용을 의상스님이 법성게 210자. 그 짧은 詩구절.
그 안에 30 개의 구절에 모든 이치를 담았지 않습니까?
우리 조선의 최고 천재 설잠 김시습스님이 다른 불교 책 다 놔두고 법성게를 설명한 겁니다. 법성게를 주로 연구한 겁니다. 제가 화엄경강설 80권 다 쓰고 부록 1은 보현행원 품. 부록 2는 법성게. 설잠 스님의 법성게 해설을 부록 2로 다 올려놨습니다. 벌써 그것을 연구 중에 있습니다. 본문 보다가 힘들면 가끔 그것도 한 번씩 보고 그러는데... 조선제일의 그 천재가 그 많고 많은 儒書ㆍ佛書ㆍ道書 다 있는데, 왜 굳이 법성게를 가지고 자기의 어떤 깨달음을 표현했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고, 그만한 심오한 내용이 감춰져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법성게를 외우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분에게 마지막 들려주는 최고의 선물, 저승을 잘 갈 수 있도록 들려주는 최고의 선물이 법성게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소홀이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부처님이 오른손을 펴서
摩功德林菩薩頂하신대, 공덕림보살의 이마를 만졌다.
이것이 어린 아이들 이마를 만지는 것이 귀엽다고 만지지만, 요즘 잘못 만지면 큰일 납니다. 아무튼 이것이 옛날부터 격려하는 뜻에서 어깨를 다독인다든지 이마를 만진다든지 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지요.
三. 功德林菩薩의 菩薩行
1. 菩薩行의 根本
時에 功德林菩薩이 卽從定起하사 告諸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行이 不可思議라 與法界虛空界等하니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 學三世諸佛하야 而修行故니라
時에, 그 때 功德林菩薩이
卽從定起하사,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서 이마를 척~ 만지니까 삼매에서 일어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삼매에서부터 일어나서
告諸菩薩言하사대, 여러 보살에게 말씀하사대,
佛子야 菩薩行이 不可思議라
與法界虛空界等하니, 법계와 허공계로 더불어 같다.
이 무한한 우주로 더불어 같다. 말입니다.
何以故오? 왜 그러냐? 菩薩摩訶薩이
學三世諸佛하야, 삼세제불에게 배워서,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든 부처님, 모든 깨달은 분에게 배워서
而修行故니라.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행의 공덕으로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이 이 허공계와 법계와 더불어 동등하다. 이 우주, 저~ 드넓은 우주, 수억 만 광년을 달려도 끝이 닿지 않는 거기에, 그만치 넓고 넓은 것이 또한 보살행이기도 하다. 우주만 넓은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보살행도 넓다. 그만치 넓다.’ 이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요?
지금 우리 몸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60조 세포가 꼬물대고 있는 우리 신체에서부터 저~ 수억 만 광년 밖의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계의 작용과 운행과 돌아가고하는 그런 상황들이 그대로 보살행이다.
이 말입니다. 그대로가 보살행이다.
거기서 굳이 우리가 또 우리 근기에 맞는, 우리 안목에 맞는 보살행을 이야기하기로 하자면 어디 가서 봉사하고 또 연말에, 요즘 김치 담가서 많이 나눠줍니다. 또 연탄도 많이 나누고요. 그것 좋은 보살행입니다. 그것 우리 수준에 맞는 좋은 보살행이지요. 그러나 화엄의 안목으로 볼 때의 보살행은 그것과 포함해서 온갖 우주 만유가 눈앞에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이 현상 그대로가 보살행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 신체에서 60조 세포가 제 궤도를 돌지 아니하면 그것은 금방 우리 몸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무너지는 그것도 그 나름의 또한 보살행입니다. 그와 같이 우주공간의 드넓은 모든 별들의 운행. ‘그것도 또한 하나의 보살행의 작용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어찌 보살행이 불가사의하고 허공계와 법계와 더불어 동등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연말에 연탄 나누는 것만 보살행이다.” 하면 이것이 안 맞잖아요. 그것도 다 포함되지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2. 十種名
佛子야 何等이 是菩薩摩訶薩行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行하야 三世諸佛之所宣說이시니
何等이 爲十고 一者는歡喜行이요 二者는 饒益行이요
三者는 無違逆行이요 四者는 無屈撓行이요
五者는 無癡亂行이요 六者는 善現行이요
七者는 無着行이요 八者는 難得行이요 九者는 善法行이요
十者는 眞實行이니 是爲十이니라
佛子야 何等이 是菩薩摩訶薩의 行고?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行하야, 열 가지 행이 있어서
三世諸佛之所宣說이시니,
3세의 모든 부처님이 선설한 바다. 나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과거ㆍ현재ㆍ미래 모두가 다 이야기한다. 何等이 爲十고?
一者는 歡喜行이요. 하~~ 환희 행 좋잖아요.
그야말로 우리가 용어를 좋은 걸 써야지요. 평소에 말도 좋은 말을 선택해서 써야 됩니다. 환희행하니까 그냥 환희스럽잖아요. 그냥 제목인데 환희스러운 겁니다. 왜냐? 환희니까요. 꽃은 항상 꽃입니다. 꽃이 가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꽃은 꽃입니다. “꽃” 하면 그 말 속에 이미 꽃의 의미가 드러나잖아요. 그렇듯이 우리가 “환희” 하면 벌써 환희의 의미가 나타는 겁니다.
二者는 饒益行(요익행)이요.
饒益有情(요익유정). 요익중생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불교는 다른 것 아닙니다. 見性. 100번해서 뭐 하자고요? 나중에 뭘 하자고요? 결국은 요익중생입니다. 다른 사람 이익케하자고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三者는 無違逆行(무위역행)이요.
어기거나 거슬림이 없는 행. 그렇습니다. 지금 같이 험한 세상에 살 때 참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어기고 거슬리는 상황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늘 설법 하셨듯이 제 2의 화살을 맞지 말라. 한 번은 맞을 수 있다. 돈은 잃어버릴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까지 상하지 말라. 돈은 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친구까지 잃지 말라. 이것이 제 2의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겁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無違逆行.
四者는 無屈撓行(무굴요행)이요.
어디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공부하겠다.’라고 딱~ 신심내서 마음 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조건에서도 거기에 흔들림이 없이, 거기에 굽히지 않고 자기가 정해놓은 그날 딱~ 와서 공부하고 가고요.
이것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공부해서 뭐가 얼마나 불어나겠습니까? 그까짓 것 한번 한들, 안 한들 무슨 특별한 소득이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그 하루를 지킨다고 하는 여기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어떤 든든함ㆍ자신감. 자기를 지켜주는 구심점. 이런 것이 더욱 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아무 것도 아닌 약속. 그것 뭐 약속 안 지켜도 되고, 전화 한통이면 파기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작은 약속이지만 ‘아~ 이것은 내가한 약속이기 때문에 가서 약속을 이행한다.’ 할 때 그 사람에게는 아주 큰 힘이 생깁니다.
소홀히 여기지 않고 ‘내가 약속한 것이니까’ 하고 약속을 딱 이행하는 것.
이것 참~ 중요한 겁니다.
五者는 無癡亂行(무치란행)이요.
어리석음은 어지럽게 되어있습니다. 어리석고 어지러움이 없는 행.
六者는 善現行이요. 공덕이 잘 나타나는 행.
七者는 無着行이요. 집착이 없는 행.
제가 이 무착행을 쓰면서 방하착ㆍ무착. 이야기를 많이 쓴 기억이 납니다.
집착이 없는 행. 참 얼마나 좋습니까? 세상에 돌아가는 어떤 문제를 들고 와서 이야기할 때 방하착하라. 우리 불법에는요? 처방전이, 어마어마한 값비싼 처방전ㆍ아주 기가 막힌 효능을 자랑하는 처방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잘 쓰는 처방전이 무집착 = 무착 = 방하착. 방하착이나 무착이나 같은 뜻이지요. ‘내려놓아라.’ 얼마나 멋진 처방전입니까? 이것 하나면 어떤 문제도 해결 못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외면해버리면 그 문제는 없는 겁니다.
없는 거요. 길을 가다가 산이 나타났어요. 산보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세 번 소리쳐도 산이 안 물러갑니다. 획 돌아서 버리니까 산이 어디가고 없습니다. 바로 그 이치입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도 자기가 획 돌아서면, 그 문제를 외면해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걸로 해결이지, 문제에 나아가서 그것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기 가서 이렇게 설득하고, 저기 가서 저렇게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그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지요. 더 얽히고설킬 뿐이지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無着. 참~~ 좋은 말입니다. 불교에는 이런 좋은 말이 있습니다.
八者는 難得行이요.
아~ 이러한 이치는 참 얻기 어려운 법이다. 얻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행.
九者는 善法行이요. 훌륭한 법. 훌륭한 이치.
十者는 眞實行이니, 참답고 실다운 행.
이것이 우리의 참 나. 또는 차별 없는 참 사람.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다.
3. 第一 歡喜行 布施波羅密
(1) 大施主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歡喜行고
佛子야 此菩薩이 爲大施主하야 凡所有物을 悉能惠施호대
其心平等하야 無有悔吝하며 不望果報하며 不求名稱하며
不貪利養하니라
第一 歡喜行 布施波羅密 그랬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모든 수행에는 主바라밀이 있고, 助바라밀이 있다.
화엄경에 오면, 저~ 앞에서 10주에서도 봤지만 여기서 더 분명해집니다.
10행에서 처음에는 歡喜行인데, 환희행은 主라밀은 보시 바라밀이다.
그 다음에 나머지 아홉 바라밀은 助바라밀입니다. 여러분은 화엄경 공부하는 것이 主바라밀이 되어야 됩니다. 주지 사는 것은 助바라밀이 되어야 됩니다. ‘화엄경 공부하려고 나는 주지 산다.’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요.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전환이 되면 그 사람은 어지간히 공부한 공덕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 나는 화엄경 공부하려고 주지 살지, 주지 살려고 화엄경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쯤 되어야 된다니까요. 그렇게 전환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겁니다. 해보니까 좋거든요. 그래서 초하루가 언제인지 관음재일이 언제인지 다 잊어버리고 그냥 화엄경만 공부하는 그쯤 되어 가면 그 사람은 아주 참 제대로 공부인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래 모든 사람들은 主바라밀 助바라밀이 있다. 그래서 가끔 저한테 찾아오면 “나는 뭐가 主바라밀이다. 뭐가 助바라밀이다.” 그런 말을 더러 하지요.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고, 여기서는 그렇습니다. 歡喜行에는 보시 바라밀이 主고, 나머지 아홉 바라밀은 보조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 행에 가면 持戒가 主바라밀이고, 나머지 보시 바라밀이하 아홉 바라밀은 助바라밀이 됩니다.
계속 그렇게 됩니다.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歡喜行고? 보살마하살의 환희행이 되느냐?
기쁨. 기쁨에 대한 행이냐?
佛子야
此菩薩이 爲大施主하야, 이 보살이 대 시주가 되어서,
대 시주. 부처님도 법화경에서 나는 대 시주다. 그랬습니다. 대 시주다.
우리, 절에서 “아~ 저 시주보살이 왔다. 대 시주보살이 왔다.” 그럴 일이 아닙니다. 진짜 대 시주는 부처님입니다. 여기도 보세요. 보살이 대 시주가 되어서 凡所有物을, 모든 인연 사물들을
悉能惠施호대, 모두 베푼다. 말입니다.
其心이 平等하야 無有悔吝(무유회린)하며,
그런데 그 마음이 평등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국 평등해집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가져가도 괜찮고,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가져가면 마음이 좀 찝찝하고 영 편치가 않고요. 이래서는 아직도 보살마음이 아닌 것이지요. 이것 보세요. 其心이 平等하야, 줄 때 그런 마음 참 갈등 많이 생기잖아요. ‘그것 뭐 네 가져가라고 내놓은 줄 아느냐?’ 고 속으로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제대로 보살 심은 아닌 겁니다. 其心이 平等하야 無有悔吝이라. 베푸는데 누구는 예쁘게 보이고, 누구는 밉게 보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不望果報하며,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
우리가 무주상 보시를 많이 이야기하지요?
不求名稱하며. 소문. 소문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또
不貪利養하니라. 이양도 탐하지 않는다.
‘아~ 대접 좀 안 하나? 내가 그렇게 베푸는데도 대접 좀 안 하나? 내가 책을 그렇게 많이 법공양 했는데도 누가 대접 좀 안 하나?’ 이러고 있으면 누가 괴롭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만 괴롭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그 생각 아니 해야 됩니다. 안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名稱. 하는 것이 소문이거든요. ‘소문이 좀 났으면... 신문사에서 와서 취재 좀 안 해가나?’ 이 생각 늘 하거든요.
살아있는 이 시대의 관세음보살 증엄스님 이야기를 제가 많이 하는데요.
아무리 많이 해도 싫어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이야기 그렇게 많이 해도 싫어하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그가 부처님 행을 한다면 아무리 이야기해도 우리가 싫어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증엄스님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하는데요. 그 스님은 그 단체에서도 좋은 일 해놓고, 그 좋은 일 한 것을 전부 기록 다 해놨어요. 그리고 전시 다 해놨어요. 그리고 어디 학교지어주고 교회지어주고 집지어주고 한 것 모형도까지 전부 만들어서 오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相낸다고 하겠지요.
아닙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그렇게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교육입니다.
그래서 감동받고 교육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꼭 名稱을, 소문을 구해서가 아니고, 교육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좋은 교육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2) 饒益衆生
但爲救護一切衆生하며 攝受一切衆生하며 饒益一切衆生하며
爲學習諸佛本所修行하며 憶念諸佛本所修行하며
愛樂諸佛本所修行하며 淸淨諸佛本所修行하며
增長諸佛本所修行하며 住持諸佛本所修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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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說諸佛本所修行하야 令諸衆生으로 離苦得樂이니라
饒益衆生. 아~ 여기 요익중생 나오네요.
왜 보시하는가?
但爲救護一切衆生하며,
다만 일체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한다.
攝受一切衆生(섭수일체중생)하며,
일체중생을 攝受하기 위해서한다.
饒益一切衆生하며,
일체중생을 饒益하게 하기 위해서한다.
爲學習諸佛本所修行하며,
모든 부처님의 本所修行을, 본래 수행한 바. 부처님은 이렇게 살아오셨다.
이것을 학습하기 위해서한다. 학습하기 위해서한다. 말입니다.
憶念諸佛本所修行하며,
모든 부처님이 본래 수행한 바를 憶念. 기억하기 위해서한다.
그것 참 자재공덕회 그 봉사활동, 전 세계 적으로 구호활동 한 것을 전부 전시해 놓고ㆍ기록해 놓고ㆍ설명하고 하는 것이 참 좋은 교육이 되고ㆍ학습이 되고ㆍ또 憶念이 되고요. 기억하게 하는 일이 된다고요.
愛樂諸佛本所修行하며,
제불이 본래 수행한 바를 愛樂한다. 아~~ 참 잘했다. 좋은 일이다. 환희 심 난다.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이 생기도록 한다.
淸淨諸佛本所修行하며,
제불의 本所修行을, 본래 수행한 바를 淸淨하게, 훌륭하게 여긴다.
훌륭하게 여기도록, 淸淨하게 그것이 ‘더 빛나도록 한다.’ 이 뜻입니다.
增長諸佛本所修行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수행한 바를 더 증장시킨다.
더 발전시키는 그런 이유에서 한다.
住持諸佛本所修行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수행한 바의 머물러 가지도록 한다.
거기에 머물도록 한다.
顯現諸佛本所修行하며,
모든 부처님의 本所修行을, 본래 수행한 바를 드러내려고 한다.
顯現 = 자꾸 드러내려고, 그래서 많이 알리고, 알림으로써 감동받고 감동받음으로 해서 그런 사람이 또 나고요. 바로 그 겁니다. 감동받으면 또 나오거든요. 제가 전번에 그랬지요?
여기 앉아서 맨 날 자재공덕회 증엄스님 이야기를 여러 수백 번, 수백 번 읊조렸다가 ‘마음에 빚이 돼서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지난 가을에 한번 갔잖아요. 가서 그것 보고 대만의 잉꺼 거리라고 아주 오래된 차[茶], 유명한 차 많이 있어서 가서 그것을 꼭 사오라고 누가 그래서 차 사려고 돈도 상당히 준비해서갔어요. 그런데 차 사기전에 자재공덕회에 먼저 갔어요.
그 얘기 또 합니다. 제가 전번에 했지요? 교육으로 한번 또 알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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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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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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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행^^ 되뇌이기만 해도 좋습니다 ..._()()()_
身 口 意 삼업으로 가피하는 완전한 가피...
고맙습니다. 보살님, 수고 많으셨어요... _()()()_
온갖 우주 만유가 눈앞에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이 현상 그대로가 보살행이다...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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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現諸佛本所修行...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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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種行....
三者는 無違逆行(무위역행)이요. ....
五者는 無癡亂行(무치란행)이요.....불교는 결국 요익중생..._()()()_
고맙슴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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饒益一切衆生을 원으로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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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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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行= 歡喜行, 饒益行, 無違逆行,無屈橈行, 無癡亂行, 善現行,無着行, 難得行, 善法行,眞實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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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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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면해버리면 그 문제는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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