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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의 생애와 사상 - 박동천 교수(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
1. 데이비드 흄의 지성사적 위상
흄은 일반 대중에게 그다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이름도 플라톤이나 마르크스 또는 루소에 비하여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다가, 그가 무슨 생각을 했으며 그 생각이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를 어느 정도나마 이해하는 사람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소위 철학자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단히 많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좁게는 영국의 지성사에서 넓게는 서양의 지성사 및 나아가 인류의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공공연하게 인지된 정도보다 훨씬 크다. 그리하여 에이어(A. J. Ayer)는 그를 영국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으며(에이어 1987: 11), 윈치는 그의 철학사적 위상을 음악사에서 베토벤이 수행한 만큼의 대전환에 비견한다(Winch 1990: 93).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그의 주제 및 문체가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차분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철학이 무엇인지에 관한 그 자신의 매우 독특한 입장에서도 기인한다. 그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 《인간오성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 등은 모두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성과 성정 각각이 무슨 기여를 얼마나 하는가, 선과 악에 관한 분별은 어떻게 가능하며 그 분별의 생성은 인간의 본성 덕분인가 사회적 습관 덕분인가, 등등, 일상적인 삶의 문제들과는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문체에 있어서도 그는, 비록 대부분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이른바 철학적 은어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대중적 매력을 추구하다가 황당함에 빠지는 사태를 극도로 경계하여 주제 자체와 상관있는 논점들만을 냉정하게 그러나 차근차근히 풀어나가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얼핏 보기에 사소한 것 같은 논점들에 대한 섬세한 탐색, 그리고 얼핏 생각하면 중언부언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끈질긴 탐색으로 이어진다. 섬세한 차이에 대한 흄의 분별력, 그 차이에 함축된 실질적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는 그의 논리적 감수성,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주제들을 스스로 만족할 수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막다른 장벽에 가로막힐 때까지 파고 들어가는 그의 탐구정신 등은 일반인은 물론이고 철학의 언저리에서 활동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서도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그나마 그의 《영국사》(The History of England)는 17세기 영국혁명이라고 하는 정치적 격변을 바로 그 다음 세기에 한 영국인이 바라본 서술과 평가라는 점에서 일반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그의 저술 중에서는 생전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영국의 일반적 정세에서 토리당도 휘그당도 흄이 서술하고 평가한 내용을 환영할 수는 없었다. 챨스 1세의 비극적 운명을 동정하고 혁명과정의 무분별과 야만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휘그당에게는 당연히 적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에 스튜어트 왕실에 대한 동정이 이념이나 정책에 대한 전면적 동조가 아니라 단지 "왕에게 저항하는 것과 왕을 내쫓는 것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다(Hume 1792: vol. VII, 148-150)"는 철학적 분별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토리당에게도 마뜩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한다는 흄의 독자적 태도야말로 그의 철학 및 나아가 삶을 관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다시 "논의할 가치가 있는" 주제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며, 그렇게 설정된 주제에 관하여 "무슨 말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와 같이 한 철학자에게 있어 실질적인 입장에 해당하는 측면들과 지극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철학자 흄에게 가장 중요했던 관심사는 삶의 문제, 즉 도덕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 "도덕의 문제를 다룬다"고 하면 곧 "올바른 도덕 규범을 찾는다"로 통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떤 하나의 행동 기준이 모든 또는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발상이 검토되지 않은 채 전제된다. 반면에 흄의 경우에 도덕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전제를 검토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검토는 결국 선악의 판단이라는 것이 호오의 감성과 어떤 방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겹치지 않을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의 판단이 순전히 자의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는 까닭은 그 감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습관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다시 습관이라는 것은 사회성을 또한 어느 정도로든 포함하고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흄의 실질적 입장이 지성사적 전환의 계기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흄의 철학적 방법 역시 그러한 실질적 입장에 못지 않게 지성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지성이 자주 가식으로 빠져들기 쉽다는 점을 통감하여, 소크라테스가 그리하였듯이 철학과 능란한 말장난을 엄격하게 분별하고 후자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일상적으로 공유되는 경험으로부터 철학적 탐구를 시작하는 것은 "경험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깝고 익숙하여 비교적 확실한 사항들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빠져들지도 모르는 허황함을 방지하려는 노력이었다. 흔히 운위되는 그의 "회의주의" 역시 다분히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통설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그의 탐구 정신의 발로였다. 다시 말하여 그는 이론의 체계성을 위하여 불확실성을 덮어두기보다는 불완전한 체계를 애당초 체계로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흄이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러므로 성정과 습관을 재발견했다는 그의 실질적 입장에 못지 않게 이와 같은 치열한 그의 철학적 태도에도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생애와 저술
데이비드 흄은 1711년 4월 26일 에딘버러에서 조셉 흄(Joseph Home)과 캐더린 팔코너(Catherine Falconer) 사이의 삼남매 중 막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잉글랜드 접경 마을 천사이드(Chirnside) 인근 나인웰즈(Ninewells)에 약간의 토지를 소유한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의 민사대법관이자 고등법원장을 겸임한 바 있는 데이비드 팔코너 경의 딸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할 당시 제임스를 수행하여 백작에 오른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알렉산더 흄(Alexander Home, 1575-1605)이 있는데, 이 흄 백작 가문과 데이비드 흄의 가문은 15세기 초에 가지가 나뉜 친척 사이였다.
흄 백작 가문은 훨씬 나중 일이지만 1963-64년에 보수당 수상을 지낸 알렉 더글라스-흄(Alec Douglas-Home)을 배출할 정도로 대단한 명문가여서, 데이비드 흄 자신이 사망 직전에 쓴 짧은 자서전에서 "나는 좋은 집안(good family) 출신(Hume 1985: xxxii)"이라고 술회한 연유가 된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직계 가문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조셉은 불과 서른 셋의 나이로 1713년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에게 연간 230 파운드의 수입에 해당하는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 중에서 둘째 아들 데이비드가 상속한 몫은 50 파운드 이내였다 (Mossner 1954: 23-8).
조셉은 "재주가 많은 사람(Hume 1985: xxxii)"이었고, 앤(Anne) 여왕 이후의 왕위 계승이 하노버 가문으로 이어지도록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기뻐서 웃통을 벗고 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휘그 혁명파"였다(Mossner 1954: 27-8). 캐더린은 "뛰어난 성품의 소유자로서, 젊고 아름다웠음에도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에 전심으로 헌신(Hume 1985: xxxii)"하느라 재혼하지 않았다. 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명랑한 성격의 신사들이었음을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남편이 남긴 빚으로 인하여 항상 빠듯한 살림이면서도 자녀들에게 생기 넘치고 사교적인 성품을 심어줄 수 있도록 집안 분위기를 이끌었다. 캐더린은 독실한 장로교도였는데, 어린 데이비드 역시 엄격하기로 소문난 스코틀랜드 교회의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의 진지함이 주위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미 흄은 어릴 때부터 독자적 사고의 싹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인웰즈의 저택의 서재에는 꽤나 괜찮은 서적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의 기초 교육용 도서는 충분할 만큼 있었고, 세익스피어, 밀턴, 드라이덴, 포우프 등을 비롯한 영국 작가들의 작품, 성경 및 종교에 관한 문헌들, 고대 법률에 관한 전문 서적, 나아가 라틴어, 희랍어, 프랑스어 고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어린 데이비드는 가정교사에게서 희랍어, 수학, 자연철학(오늘날의 용어로는 물리학)의 기초를 배우는 한편으로 이들 서적을 읽으면서 그 나이 어린이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교양을 쌓았다(Mossner 1954: 30-32).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회고하기를 "아주 어릴 적부터 글의 세계로 이끌리는 성정에 사로잡혔던 바, 그 성정이 내 일생을 이끌었고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Hume 1985: xxxii-xxxiii)"고 하였다.
1722년말 또는 1723년초의 겨울에 그는 두 살 위인 형과 함께 에딘버러 대학에 들어가서 3년을 다니고, 그 당시 흔히들 그랬듯이 학위 없이 졸업하였다. 그가 어떤 과목들을 수강했는지 특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는데, 당시 에딘버러 대학의 학부 과정은 라틴어, 희랍어,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철학 등이 정규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아울러 수학, 윤리학, 역사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가 존 로크와 아이작 뉴톤의 저술에 접하였으리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졸업 후 그는 나인웰즈로 돌아가서 독서를 계속하였는데, 가족들은 그가 자신들의 기대대로 법률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자신은 "철학과 일반 교양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반감 때문에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였다(Hume 1985: xxxiii)". 가족들의 기대와 성정의 이끌림 사이의 갈등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1729년의 특이한 지적 경험 덕분이었다. 졸업 이후 3년여의 광범위한 독서와 성찰을 통하여 그는 철학이야말로 글의 세계에서 중추에 해당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논리적 이치에 몰입함에 따라 종교적 믿음을 서서히 상실하게 되었다. 동시에 "철학 및 비평의 분야는 끝없는 논쟁으로만 가득 차 있을 뿐, 무엇 하나 제대로 확립된 것이 없음"을 알아 차렸다. 그리하여 "그 어떤 기존의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진리의 초석이 될 수 있는 매개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대담한 기운(Boldness of Temper)"이 마음 속에 자라났다. 그러던 중 1729년 봄, 모든 것들이 하나의 체계 아래 정리되어 자리가 잡힐 수 있을 것 같은 지적 경험이 찾아 왔다. "18세 가량의 나이에 새로운 사유의 지평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젊은이에게 특유한 불길로 치솟아 모든 쾌락이나 사업을 내 팽개치고 오직 거기에만 전념하게 만들었다. 법률은 이제 구역질이 났고 학자 및 철학자의 길말고는 이 세상에서 나의 운을 시험할 그 어느 다른 길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사유의 지평으로 가는 불길은 6개월만에 그의 몸과 마음을 태워버렸다. 1729년 9월에 이르러 그는 과도한 연구로 인하여 심신이 극도로 피폐한 상태에 빠졌다. 연구 강도의 완화와 적절한 섭생 및 옥외 활동으로써 이 침체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1731년부터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에 봉착하여 또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그것은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세상의 이목을 끌 수 있을 만큼 우아하고 정제된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궁지를 극복할 길은 찾지 못한 채, 우울증에서라도 벗어나기 위하여 그는 잠시 현실 세계에 몸담게 된다. 1734년 브리스톨(Bristol)의 한 설탕 상인 밑에서 서기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무 진척이 없는 저술을 고집하느니 차라리 기분전환이라도 하자는 심사에서였지, 사업에 인생을 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게다가 고용주가 쓴 문장의 오류를 가차없이 지적하고 교정하는 바람에 괘씸죄에 걸려 4개월만에 해고당하고 만다.
그러나 기분은 확실히 전환이 되었고, 글의 세계말고는 몸담을 곳이 없다는 점도 새삼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친구 몇 사람의 소개로 프랑스에 건너가 저술에 전념하게 된다. 랑스(Rheims)에서 1년 정도, 그리고 앙주 지방의 라플레시(La Fleche)에서 2년 정도를 지내면서 그는 1737년 마침내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완성하여 그 출판을 위해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출판업자를 구하느라 그리고 출판조건을 협상하느라 시일이 걸려 1739년에야 그 제1권과 제2권이, 그리고 제3권은 이듬해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여, 그 자신의 말로는 "열성가들 사이에서 중얼거림의 대상이 될 정도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인쇄기에서 사산되어 버렸다". 그러나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기질을 타고난 덕분에", 그는 "그 충격에서 금세 회복되어 시골집에서 대단한 열성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Hume 1985: xxxiv). 우선 《인성론》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하여 1740년에 《인성론 개요》(An Abstract of a Treatise of Human Nature)를, 1741-2년에는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Essays, Moral and Political)을 출판하였다. 《평론집》에는 27편의 논문이 실렸는데, 당시의 민감한 주제들을 비교적 가벼운 문체로 다루어 상당한 문명을 날리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로버트 월폴 경의 성품〉은 공교롭게도 그 책이 나올 당시에 터진 스캔들에 연루되어 궁지에 몰려있던 월폴에게 치명타를 가하여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Mossner 1954: 142-143).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흄은 1744년에 공석이던 에딘버러 대학의 윤리학 및 정신철학 교수직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인성론》이 무신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간주한 광신자들이 반대함으로써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는데, 마침 런던 근교의 애넌데일(Annandale) 후작으로부터 300 파운드의 가정교사 자리를 제의받아 일하게 되었다. 후작은 정신이상자여서 그 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지만, 흄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나머지를 모두 수용하였다. 그것은 저술을 위한 여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746년에 해고될 때까지 그는 《인간오성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와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 세 편》(Three Essays, Moral and Political)을 썼다.
흄은 《인성론》의 실패가 내용 때문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성급하고 요령없는 표현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Hume 1985: xxxv). 그리하여 생전에 《인성론》의 세 부분을 모두 다시 쓰게 되는데, 《인간오성에 관한 탐구》는 바로 《인성론》 제1권의 수정본에 해당한다. 실제로 이 책은 치밀함과 차분함 및 정연함에서 《인성론》보다 한결 나아진 것이었지만,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평론 세 편》은 1745년의 찰스 에드워드의 반란과 그 진압과정에 대한 흄의 평가에 해당한다. 원래 계획은 〈원초적 계약에 관하여〉, 〈수동적 복종에 관하여〉, 〈신교 계통의 왕위 계승에 관하여〉 등 세 편을, "첫번째 것은 휘그당의 신조인 원초적 계약을 공격하기 위하여, 두번째 것은 토리당의 신조인 수동적 복종을 반박하기 위하여, 세번째 것은 신교 계통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기 전에 어떤 왕가에게 충성을 바칠 것인지 그 이익과 손해는 무엇인지 등을 누구나 따져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Mossner 1954: 180)" 엮어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친구의 권고에 따라 세번째 논문의 자리는 〈국민성에 관하여〉가 대신하였다.
아직 저술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못하여 그 후로도 흄은 여러 일자리를 전전한다. 1746년 5월 먼 친척뻘이 되는 제임스 생클레어(James St. Clair) 장군의 초청을 받아 비서가 되는데, 생클레어는 캐나다에서 프랑스 세력과 투쟁하고 있던 영국계 주민들의 요청으로 파견될 증원군의 사령관을 맡은 차였다. 이 원정은 영국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인하여 시일만 끌다가 엉뚱하게 프랑스 본토인 브르타뉴를 공격하게 되었다가 실패로 끝나지만, 생클레어와의 만남 덕택으로 흄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계기를 얻게 된다. 플리머스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세월만 보내던 시기에 생클레어는 순전히 흄의 경제적 사정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군법무관 자리를 하나 마련하여 그를 임명하였다. 이 자리는 실무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하루 ¼ 파운드의 연금을 보장하였다. 흄은 이 원정 후에 잠시 나인웰즈와 런던에 머물다가 1748년에 다시 생클레어의 초청으로 비엔나 및 튜린(Turin)으로 가게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가 프랑스의 배후를 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영국 정부에서는 그 두 나라의 궁정에 군사절단을 보내게 되었는데, 생클레어가 그 대표를 맡게 되자 다시 흄을 부른 것이었다. 흄은 1749년 초까지 생클레어를 수행하였고, 그 사이의 급료와 자신의 "검소함이 결합하여 1000 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Hume 1985: xxxv)".
그 자신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문필가로서 그의 운명 역시 호전되고 있었다. 불과 8년 후인 1757년에 흄은 분명히 영국 전역에서 그리고 나아가 유럽 대륙에서도 아주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된다. 이러한 명성이 반드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1757년에 그랬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늦어도 1749년부터는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흄 자신은 여전히 자신의 저술들이 실패로 끝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저술은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751년에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를, 1752년에는 《정치평론집》(Political Discourses)를 출판하였고,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및 《영국사》 (The History of England)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는 《인성론》 제3권의 수정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흄 스스로 "역사와 철학 또는 일반 교양을 막론하고 내가 쓴 글 중에서 단연 최상(Hume 1985: xxxvi)"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정치평론집》에 실린 논문들은 1875년이래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의 제2부로(1741-2년에 나온 《평론집》에 실린 논문들이 제1부를 구성한다) 합본되어 출판되고 있다. 《자연 종교에 대한 대화》는 1779년에 가서야 출판되었으며, 《영국사》는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철학자로서보다 역사가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1752년 글래스고우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가 지병으로 사망하자 논리학 교수로 있던 아담 스미스가 그 자리로 옮겨갔고 그에 따라 논리학 교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몇 해 전부터 예상되었었기 때문에 가까운 친구들에 의하여 흄도 논리학 교수 자리에 추천되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흄의 "무신론"을 들먹이는 광신자들의 반대로 인하여 그는 취임하지 못했다. 이때 그는 이미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돈이 아니라 책이었다. 그리하여 글래스고우 대학의 소장 도서를 마음대로 보지 못하게 된 대신에 흄은 에딘버러 변호사 협회 부속 도서관의 사서로 취직한다. 여기서도 적이 없지는 않아서, 1754년에 흄이 주문한 라퐁텐느의 《꽁트집》과 크레비용의 《그물국자》 등을 "점잖지 못하여 지성인의 도서관에 비치할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큐레이터가 기각하는 일이 있었다(Mossner 1954: 253). 이 일 이후로 흄은 그때까지 받던 연 40 파운드의 급료마저 거절한 채, 1757년까지 사서로 일했다. 무려 30,000권에 달하는 장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장서의 도움으로 《영국사》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볼테르는 "아마도 언어로 쓰인 것 중에서 최고일 것(Mossner 1954: 318)"이라고 극찬하였고, 1762년에 6권으로 완성된 이 책은 인세만도 3,000 파운드에 달하였다(에이어 1987: 23).
《영국사》와 더불어, 아마도 1749-51년 사이에 쓰였다고 추정되는 《네 편의 논문집》(Four Dissertations)이 1757년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집은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로 시작하는데, 광신자들의 반감을 완화하기 위하여 원고의 내용을 많이 고쳐서 출판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61년 로마 카톨릭 교회는 흄의 모든 저술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두번째 논문은 〈성정론〉(A Dissertation on the Passions)으로 《인성론》 제2권의 수정본에 해당한다. 이로써 《인성론》 개작은 완성되었다. 세번째와 네번째는 〈비극에 관하여〉와 〈기호의 표준에 관하여〉인데, 1758년에 《영국사》를 제외한 흄의 모든 저술들이 전집으로 출판될 때부터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의 제1부에 편입되도록 되었다. 흄은 원래 네번째 논문을 빼고 그 대신 〈자살에 관하여〉와 〈영혼 불멸에 관하여〉를 추가한 《다섯 편의 논문집》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살과 영혼불멸이라는 주제를 냉정하고 중립적으로 논의하는 그의 문체만으로도 광신자들에게 무신론의 혐의를 덮어쓰게 되리라 예상한 친구들의 만류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자살에 관하여〉와 〈영혼 불멸에 관하여〉는 흄의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 100년까지도 흄의 공인된 저술로 출판되지 않고 사본만이 은밀하게 유통되다가, 1875년에야 그린과 그로즈(Green & Grose)가 편집한 《도덕과 정치에 관한 평론집》 제3부 "미간행 또는 삭제된 논문들"의 일부로 편입되어 출판되었다.
1763년에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 허트포드(Hertford) 백작은 흄에게 비서직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766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지내게 된다. 이때 그는 이미 유럽 전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파리의 지식인들로부터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특히 디드로(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등 백과전서파와 돌바크(d'Holbach)와 같은 유물론자와 친밀하게 지냈다. 이밖에 부플레르(Boufflers) 여백작과 아마도 최소한 잠시는 사랑에 빠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1766년 파리를 떠난 다음에도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곤궁한 처지의 루소에 대한 보호역을 자청하여 귀국길에 동행하였다.
루소는 1766년 1월부터 1767년 3월까지 영국에 있었다. 처음에는 흄의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내 피해망상증이 발동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논적들과 흄이 합세하여 자신을 우스개감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하였다. 흄은 이에 루소와의 관계에 관한 자초지종을 글로 정리하였는데, 이를 공개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달랑베르에게 맡기면서 공개 여부를 일임하였다. 달랑베르는 그것을 출판하였고, 이내 《흄씨와 루소씨 사이의 분쟁에 관한 간결하고 진실한 해명》(A Concise and Genuine Account of the Dispute between Mr. Hume and Mr. Rousseau)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점이 다시 루소를 자극하여 그는 흄에게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영국을 떠나고 말았다.
허트포드의 동생 콘웨이(Conway) 장군은 1767년 북부 담당 국무장관이 되면서 흄을 차관으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1768년 1월에 콘웨이가 장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흄은 그 직책을 맡았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1769년 8월까지 런던에서 지내다가 에딘버러로 돌아가 만년을 보낸다. 거기서 숨을 멈출 때까지 자신의 저작들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재편집하면서 활기차게 살았다. 1775년 봄부터는 극심한 설사가 시작되었는데, 자기 어머니 만년의 증상과 같아서 죽음을 예감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고 한 순간이라도 정신의 감퇴도 겪지 않았다(Hume 1985: xl)"고 1776년 4월 18일에 쓴 짧은 자서전에 적고 있다. 스스로 평하기에 "개방적이며 사교적이고 명랑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친화력이 있었지만 적개심은 별로 없었으며 모든 성정에 있어서 대단한 절제를 발휘하였던" 그의 삶은 그 해 8월 25일에 마감되었다. 그가 살던 작은 골목길은 누군가에 의하여 언제부터인지 "성 데이비드 거리"(St. David Street)라고 불리기 시작하여, 결국은 에딘버러 시 당국에 의하여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었다.
3. 인식론
장님은 색채에 관한 관념을 가지지 못하고 귀머거리는 소리에 관한 관념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유는 감각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흄은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유나 관념이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무언가 원초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원초적인 요소를 그는 인상(impression)이라고 불렀다(Hume 1955: 27). 어떤 자연적 대상과 한 인간의 마음이 만났을 때, 감각(sensation)의 작용에 의하여 대상은 마음에 자국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인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상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보다 명확하다.
이에 비하여 관념(idea)은 인상으로부터 파생한다. 관념은 마음이 만들어 남겨둔 인상의 사본이다(Hume 1978: 8). 인상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국은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된다. 인상이 사라진 다음에도 그 사본은 남아 있게 된다. 예컨대 어떤 뜨거운 물체와 접촉했을 때, 그 감각으로 인하여 "뜨겁다"는 인상을 얻게 되고, 다시 그 인상의 사본으로서 "뜨거움"(coldness)이라는 관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을 마음이 언제나 의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권능으로서 보유될 뿐이다. 즉, 언젠가 그럴 만한 사정이 발생하였을 때, 그 관념이 마음의 전면에 다시 돌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관념 역시 사라질 수 있다. 다만 인상에 비하여 그 지속되는 기간이 훨씬 길 뿐이다).
일단 관념이 형성된 다음에는 그 관념이 다시 마음과 접촉하여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그리하여 흄은 대상에 의하여 생기는 인상, 즉 감각에 의한 인상(impression of sensation)과 구분하여 성찰에 의한 인상(impression of reflexion)을 인정한다. 성찰에 의한 인상도 다시 마음에 의하여 사본, 즉 그것에 상응하는 관념을 낳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상호작용은 무한히 지속될 수 있다. 그의 생각으로는 이로써 추상적 관념 및 일반적 관념의 본질을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추상적 또는 일반적 관념의 문제는 곧 이른바 "보편자의 문제"와 같다. 예컨대 우리는 매우 다양한 키, 몸무게, 모습, 체형, 피부색, 등등을 가진 서로 다른 존재들을 모두 인간이라고 지칭한다. 이때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은 다만 각자 나름의 키와 몸무게와 체형을 지닌 개별자들뿐이다. 그 모든 개별자들을 모두 포섭하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만난 적이 없고 만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만약 관념이 감각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념을 생성할 기초는 어떤 감각인지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신, 본체, 무한 등과 같은 관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영혼 속에 가지고 있는 본유관념(innate idea)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흄의 반론은 "한 직선의 정확한 길이가 그 직선 자체와 구분될 수 없듯이 어떤 질적 속성의 정확한 정도는 그 질적 속성 자체와 구분될 수 없다(Hume 1978: 18-19)"는 것으로 요약된다. 인간이라는 일반적 관념은 키, 몸무게, 체형 등등, 여러 개의 질적 속성으로 구성되며, 그 속성들은 개별적인 사례에서 정확한 양적 정도를 가진다. 이때 "키"라고 하는 질적 속성이 "163cm", "170.5cm", "207cm", 등등의 개별적 사례들과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키"라고 하는 질적 속성은 결국 존재하는 개별적 사례들의 합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일반적 관념 역시 존재하는 개별적 대상들의 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대상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내었을 때, 그런 일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대상 모두를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 이런 종류의 관습을 획득한 다음에는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그 대상 중 하나의 관념이 재생되고, 그리하여 상상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모든 개별적 특성과 정도를 인식하게 한다. (Hume 1978: 20)
하지만 애당초 그것들이 "유사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홍길동과 전우치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냈다는 데에 이미 그들을 우리가 "인간"으로 파악했다는 점이 들어있는 것 아닌가? 현재의 우리는 인간이라는 일반적 관념을 하나의 관습으로 보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그 일반적 관념이 유사성의 인식을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흄이 논하는 주제는 바로 그러한 관습의 형성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있다. 그 관습은 그 어떤 본래적 유사성에 의한 필연적 소산이 아니라 단지 개별적인 감각에서 생성된 관념들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우리가 결합한 습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명론적(nominalist) 태도는 인과관계의 본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흄은 인과관계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reason)가 아니라 인간의 관습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A가 B의 원인"이라는 말이 타당하게 쓰이는 경우들을 면밀히 관찰하면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공 하나가 움직인다. 두번째 공에 가서 부딪친다. 그러자마자 두번째 공이 움직인다. 똑같은 공들 또는 비슷한 공들을 가지고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실험을 해보니 첫번째 공이 움직여서 부딪치면 언제나 두번째 공도 움직인다는 점을 알게 된다(Hume 1978: 650)."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첫번째 공의 움직임과 부딪힘을 가리켜 두번째 공이 움직이게 된 원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간적으로 서로 가까이 있고(contiguous) 시간적으로 앞뒤로 연속된(successive), 두 개의 사건 및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는 선행하는 사건을 원인이라고 부르고 후속되는 사건을 결과라고 부를 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에 그와 같은 사건들이 그처럼 일어났다는 경험에 기초하여, 과거의 사례에서 우리가 원인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 과거의 사례들과 비슷한 사정에서 발생하면 그 과거의 사례에서 우리가 결과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사건도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사건이 예상대로 일어날지 말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 인과관계로부터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물체의 본질에 관하여 무언가를 깨달은 척하는 것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물체에 관하여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형질은 전혀 변화하지 않은 채, 그 비밀스러운 본질, 그리고 따라서 그 결과 및 영향 등은 모두 변할 수 있다. 때때로 몇몇 특정 대상과 관련하여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그런즉 왜 언제나 모든 물체에 관하여 그렇지 않겠는가? (Hume 1955: 52)
그러므로 삶을 인도하는 것은 이치(reason)가 아니라 관습(custom)이다. 오로지 관습만이 모든 경우에 마음으로 하여금 미래가 과거에 조응한다고 생각하도록 정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행을 용이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있겠지만, 이치로서는 결코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Hume 1978: 652)
흄이 탐구해 들어간 주제는 유명론과 실재론 사이에서 오랫동안 벌어져왔었고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 핵심 쟁점에 해당하는 사항이다. 흄은 관습이 이치를 낳는다는 점을 증명해 내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관습과 이치의 사이에서 그가 이룩한 업적의 최대한은 관습의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정합적인 주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 데에 그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의 기대에는 못 미치지겠지만) 보편 실재론이 틀렸다는 증명은 하지 못했고, 다만 "실재론이 옳으니까 다른 모든 이론은 틀렸다"는 주장은 오류라는 점만은 확실히 증명하였다.
일반적 관념과 관련하여 그가 해명하지 못한 부분을 하나만 예시함으로써 흄의 한계 및 유명론/실재론의 이분법에 머무르는 철학적 논의의 한계를 약간이나마 드러내고자 한다. 《인성론》의 서두 부분에서 흄은 자신의 입장 전반에 대하여 파괴적인 함축을 가질 수 있는 사례를 스스로 거론한다(Hume 1978: 5-6). 어떤 사람이 30년 동안 눈과 귀를 (소리로 표현될 수 있으니까) 통하여, 파랑색 가운데 하나의 색조만을 빼고는 모든 색깔들의 모든 색조들을 감각하였다고 하자. 이제 그에게 그가 과거에 감각하지 못한 그 파랑색의 색조만 빼고 나머지 모든 색의 색조들을 순서에 따라 배치하여 보여 주었다고 하자. 이때 그가 그 파랑색의 색조 부분에서 무언가 빠졌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면 곧 감각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관념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흄은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색조의 경우 그럴 수 있다는 것은 특이한 예외이기 때문에 무시해도 좋을 것이라고 하면서 넘어간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전혀 특이한 예외가 아니라 흄이 논하는 주제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일반적 관념의 경우에도 색조의 경우와 동일한 반증이 훨씬 간단하고도 명백한 방식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30년 동안 개별적 인간들을 감각해 온 사람이 어느날 과거에 한 번도 보지 않은 인간을 만났을 때 그를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 흄은 유사성의 판단이 실수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들어(Hume 1978: 61) 유사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하나의 관습이라고 대꾸하겠지만, 처음 보는 대상에 관하여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데서 실수가 발생하는 경우는 지극히 희귀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인식이 관습에만 기인한다는 흄의 주장이 미흡한 것이 틀림없고, 어쩌면 기본적 발상에서부터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 이상의 탐색은 이 글의 한도를 넘게 될 것이다.
4. 윤리학
관념이 인상에 기초하고, 인상은 감각의 결과라는 흄의 입장은 도덕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즉, 도덕적 관념 역시 도덕적 인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도덕적 인상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사태 또는 사람에 대하여 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킨다. 대상에 접하였을 때 내 감정이 평온하고 이끌리며 고양된다면 그 대상은 덕스러운(virtuous) 것이 되고, 내 감정이 뒤집히고 역겨우며 침체된다면 그 대상은 사악한(vicious) 것이 된다. 물론 일시적이고 말초적인 감정이 도덕적 분별의 전부라는 주장은 아니다. 흄의 강조는 도덕의 영역에서 이성(reason)의 역할은 부수적인 데에 국한되고, 도덕적 분별의 주체는 성정(passion)이라는 데에 있다.
기계공은 이성을 사용하여 기계의 움직임을 주어진 목적에 맞출 수 있고, 상인은 이성을 사용하여 자기가 진 빚이 얼마인지를 계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성은 어떤 행동이 인과적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목적이 주어졌을 때 주어진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일시적이며 말초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행동했다가는 원하는 바와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이성이 기여하는 바는 없다. 목적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영역이며, 의지는 각 개인의 성향(propensity) 또는 성정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성정의 노예이며 노예이어야만 한다. 이성은 성정에 복종하고 봉사하는 이외의 기능을 참칭할 수 없다(Hume 1978: 415)."
도덕적 분별의 주체가 성정이라고 할 때, 얼핏보면 일종의 윤리적 상대주의 또는 유아론(solipsism)에 해당하지 않느냐고 생각될 수 있는데, 흄은 오히려 그로써 윤리의 공공적 성격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성정에 공감(sympathy)의 권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그 느낌과 작동에 있어서 비슷하다.
조여진 현악기의 줄은 하나가 퉁겨지면 나머지도 같이 울리듯이 모든 감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에게 상응한 움직임을 자아낸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몸짓에서 어떤 성정의 결과적 표현을 목격하면 나의 마음은 곧 그 성정의 원인이 무엇인지로 향하여 그 성정 자체에 관하여 생생한 관념을 형성한다. … 마찬가지로 어떤 감정의 원인을 지각하면 내 마음은 그 결과로 연결되어 그 비슷한 감정이 발동한다. 무시무시한 외과수술 현장에 있게 되면, 정작 수술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도구의 준비, 붕대의 배치, 달궈진 쇠꼬챙이, 환자와 의료진이 걱정하고 긴장한 징후, 등등만으로도 내 마음에 커다란 효과를 자아내어 강렬한 동정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Hume 1978: 576)
어떤 대상이 그 소유자에게 기쁨을 주면 그것은 아름답다. 그리하여 편리한 주거, 비옥한 토지, 건장한 말, 크고 튼튼하고 빨리 갈 수 있는 배 등은 그래서 아름답다. 내가 그 소유자라면 나에게 기쁨과 이득을 주니 아름답고, 다른 사람이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기쁨과 이득을 주니 아름답다. 물론 나 자신의 기쁨이 생생한 것에 비하면 다른 사람의 기쁨에 대한 공감은 보다 희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에 대한 공감은 아는 사람에 대한 공감보다도 더 희미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멀리 있는 물체가 작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Hume 1978: 603). 즉, 멀리 있는 물체가 작아 보인다고 해서 멀리 떨어질수록 물체의 크기가 실제로 작아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듯이, 오히려 여러 가지 점들을 고려하여 그 물체의 실제 크기를 판단해 내듯이, 공감의 경우에도 인간의 성격을 차분하게 이해하려는 상황에서는 그 크기의 차이보다는 공감의 내용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상황이 수시로 변화하고, 또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날마다 만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 사이에 합당하게 대화가 가능한 것은 바로 그 공감의 능력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와 공감 속에서 감정의 소통이 가능하여 사람들의 성격 중에서 어떤 것을 옹호하고 어떤 것을 배척할 것인지에 관한 표준이 설정되어 학교나 강연장에서 논의가 가능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흄은 공감을 하나의 사실로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공감 자체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다. 온화한 성품의 인간은 비슷한 부류에게 공감을 느끼기 쉽고 강력한 기질의 인간도 자기와 비슷한 성격에서 공감을 느낀다. 온화한 성품은 용감한 성품에게 자제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때로는 우유부단에 빠질 수도 있다. 용감한 성품은 과감한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때로는 압제나 잔인을 낳기도 한다. 이런 점들을 이해하는 것이 도덕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떤 성품을 어디까지 용인하고 어디서부터 통제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강제해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사회가 결정할 정치적인 문제이다. 도덕적 분별이 성정에 기초한다는 말은 곧 도덕적 규범이라는 것 역시 이치가 아니라 관습의 문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공감이 있음으로써 바로 그 관습이, 그러므로 사회가 가능한 데에 있다.
5. 정치학
흄은 정의를 인위적인 덕목으로 분류하며, 특히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Hume 1978: 577).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우리는 17세기 영국에서 태동한 계약론·공리주의적 사유가 흄에게 미친 영향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흄은 어떤 경우에도 특정한 이론 체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기질과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사회계약론에 담겨 있는 치명적인 맹점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이 바로 흄이다. 공리주의에 관해서도, 흄이 강조하는 효용은 홉스의 일차원적 효용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위성과 효용에 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관습과 전통에 관한 그의 강조가 자유주의와 부딪칠 필요가 없이 오히려 자유주의의 핵심적 줄기를 확립하는 데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1) 원초적 계약과 인위성
홉스는 정부가 없던 상태는 곧 사회도 없던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정부가 없던 상태의 인간은 사회적 질서나 기강의 존재에서 나오는 이득을 전혀 향유하지 못하다가, 그것이 너무나 불편하기에 어느날 만나서 정부를 만들고 권위를 세우기로 계약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로크는 정부가 없던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의 대략적인 사회 질서가 존재했다고 본다. 즉, 정부가 창설되기 전에도 대부분의 인간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 따르는데, 극소수 일부가 그 질서를 위반하게 되고, 비록 극소수이지만 그러한 위반 행위가 사회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기 때문에 그 구제를 위하여 사회계약으로써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다. 흄은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사회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분명 홉스보다 로크와 가깝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로크의 이론과도 사뭇 다르다.
흄은 우선 사회계약으로써 정치적 권위가 창설되고 복종의 의무가 발생하려면, 논리적 선행요건으로 약속의 권위가 먼저 설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만약 사회계약이 하나의 권위적인 계약이 되기 위해서라도 그 계약보다 앞서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관습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이다(Hume 1978: 516-525). 이 점만으로 홉스의 사회계약론이 지탱될 수 없다는 점은 드러난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정부 이전에 사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흄의 관점에서는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로크의 이론에도 원천적인 결함이 들어 있다. 그것은 정부의 존재로 인하여 파생되는 도덕적 의무의 측면이 완전히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흄 역시 정부가 인위적 창조물임을 부인할 도리는 없다고 본다. 누가 언제 어떻게 정부를 처음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정부를 처음 만들 때 이익을 고려하였으리라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일단 정부가 창설된 다음에는 단순히 이익에 대한 고려만으로 정치적 의무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익에 대한 고려에 입각한 의무를 흄은 사회성과 상관없이 고립된 개인에게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 의무라 부르고, 정부가 창설된 다음에 추가되는 도덕적 의무와 구분한다. 도덕적 의무란 내가 손해를 볼 때마다 정부를 개폐하려 하지 않고, 정부의 존재를 일단 하나의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며(Hume 1978: 543), 설령 나 자신의 이익 및 공익에 반하는 전제정부라 할지라도 양심상 복종하는 경우와 같은 태도를 말한다(Hume 1978: 551). 물론 흄이 이로써 수동적 복종(passive obedience)을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그와 같은 발상을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absurdity)라고 일축한다(Hume 1978: 552). 다만 정부가 개인들 및 사회 전체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일반적 규칙으로서, 약속의 비유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 규칙은 보통 그 토대가 되는 원칙 이상의 적용범위를 가진다. 그러므로 그 규칙에 대한 예외가 자주 흔하게 발생하여 일반적 규칙이 되기 전까지는 그 규칙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Hume 1978: 551)
정부의 권위가 궁극적으로 이익의 보호에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민은 언제나 저항권을 보유하며 가장 독재적인 정부 아래에서도 그 권리는 박탈될 수 없다(Hume 1978: 563-564)". 그러나 이로부터 이익에 반하는 정부는 언제나 무너뜨려도 좋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이익에 반한다는 사실에 더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요소가 첨부될 때에만 저항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크에서 비롯되는 휘기즘의 정치이론이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에 급급하여 망각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의의 효용
흄은 정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창조된 개념이며, 정의가 증진할 가장 중요한 이익은 안전과 보호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정부의 경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익에 대한 고려는 정의가 필요한 실마리에 해당하는 요소이지 정의의 전부를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다. 왜나하면 만약 정의의 기능이 그처럼 좁게 규정된 이익의 보호에만 국한된다면 무엇이 공익인지를 둘러싼 논쟁과 투쟁만이 남고 말 터이기 때문이다.
사익이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그리고 비록 공익은 그 본령에 있어 언제나 하나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사익이나 마찬가지로 커다란 불화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공익에 관하여 개별적 개인들이 모두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Hume 1978: 555)
그러므로 정의의 효용은 비록 이익의 보호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서는 아니 되며, 실제로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그 내용이 어떠하든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대단한 효용을 가져다 준다. 흄이 정의를 전혀 자연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정의의 존재"란 실질적으로 "한 사회에서 정의로 간주되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시비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존재가 커다란 효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존재 자체가 안전 및 보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내부적으로 정당성이 의문시되는 정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있는 것이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정부의 존재가 곧 정치적 권위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며, 정치적 권위의 존재가 곧 안전과 보호를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이 언제나 정의 그 자체를 실현하리라는 기대는 순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방법이 있다면 그 어떤 나라도 잔혹한 전제의 약탈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으며 그 저항 때문에 비난받지도 않는다(Hume 1978: 552)." 그러나 저항권의 발동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압제의 정도와 빈도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차원에서 권위의 존재가 권위의 부재보다 더욱 안전하다는 의미가 손상되지는 않는다.
정치적 권위는 정의가 무엇인지 결정하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 결정을 집행한다. 실제 그 결정의 내용이나 집행의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정의에 관한 사업이며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는 사실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의미가 생성된다. 이것만으로도 사적인 고려가 공적인 고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며, 반역이라는 것이 어떤 종류의 불명예이며 악덕인지를 알려주는 교육이라는 것이다(Hume 1978: 546).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볼 때, 영국 혁명의 경우 설령 압제자를 몰아내어야 할 필요가 그토록 절실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몰아낸 왕의 아들까지 별 논의도 없이 마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 것처럼 쫓아내 버림으로써 고래의 헌정 전통에 의하여 축적된 정당성이 하루아침에 무력에 의하여 망가지는 실례를 남기고 만 것이 된다(Hume 1978: 565-567). 즉, 반역과 정당한 저항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함으로써 정의의 존재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흄은 윌리암 3세 이후의 영국 헌정은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발전에 해당한다고 본다. 파당에 몰입한 시각에서는 흄의 태도가 모순덩어리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가 정의와 관습을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초기 스튜어트 왕조의 존재로써 하나의 정의가 구현되고 있었듯이 명예혁명 이후의 의회주의적 헌정질서로써 다른 하나의 정의가 구현되고 있다는 그의 판단이 전혀 모순일 까닭은 없다.
6. 맺는말
사람들에 의하여 모순으로 지목되는 것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진실로 그리고 반드시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두 개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모순으로 바라보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인식 주체의 제한된 안목 또는 세밀하지 못한 이분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흄은 일반적 형식으로서 정의가 수행하는 역할과 구체적 현실 정치의 공방에서 "정의"라는 구호가 수행하는 역할을 세밀하게 구분하였다. 어떤 이념이나 가치로 포장을 하든지, 현실 정치에서 "정의"라는 구호가 수행하는 역할은 결국 그 당파의 이익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정의의 실질적 내용을 보편적으로 구획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흄은 그 실질적 내용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정치의 본령에 해당하는 문제로서 그 어떤 이론가나 철학자가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 논쟁은 대부분 "정의"를 향한 추구라는 형태를 띠지만, 정의 그 자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고정된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적 관습의 형성에 의하여 결판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관습이라는 것 역시 지속적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한번 결판이 났다고 해서 그대로 영속되어야 할 까닭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흄은 19세기에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하여 본격적인 형태로 정리되었고, 실제 19세기 및 20세기의 영국 정치사에서 그 핵심 요소들이 상당 부분 구현된 자유주의 이념의 선구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실제로 그 자신의 독창적 주장들로써 자발성의 실례를 보여주었고, 이분법적 도식에 몰각된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주장들을 펼침으로써 이분법적 사고의 한계를 알려주었다. 그는 생애의 후반기에 상당한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영국에서 그가 받는 평가에 비하면 생전의 명성은 미미한 수준이다. 즉, 영국 사회가 흄을 이해하게 된 정도와 영국 사회가 미신적이며 당파적인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 경로가 비례하였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분명히 계몽주의자였지만 계몽주의 자체가 교조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일생을 통한 탐구와 저술로써 경고한 철학자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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