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 프로바둑 전망과 제언
다사다난했던 계미년(癸未年) 한해가 가고 갑신년(甲申年) 새아침이 밝았다. 새 달력의 겉장을 뜯어내며 돌아본 2003년 한해 한국바둑의 수확은 풍작일까, 흉작일까. 겉으로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풍작이다. 2003년에 개최된 다섯 개의 메이저 세계대회( LG배, 도요타덴소배, 춘란배, 후지쯔배, 삼성화재배-이상 타이틀전 개최일정 순)를 휩쓸다시피 했으니까 말이다.
지난해에 개최된 국제대회 중 한국이 놓친 타이틀은 삼성화재배(조치훈 우승)와 CSK배(일본 우승), TV아시아선수권전(저우허양 우승)뿐이다. 박영훈이 아깝게 준우승에 머문 삼성화재배는 메이저대회지만 CSK배는 단체전이고 TV아시아선수권전은 초청 속기전이라 2003년에도 한국이 세계최강국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는 데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2003년의 한국바둑은 풍요로웠다고 결론지어도 될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2003년 한해 한국바둑의 풍작은 진정한 풍작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극심한 흉작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잔치는 소수정예가 출전해 부와 명예를 다툰 바깥세계의 이야기일 뿐 세계최강국의 눈부신 위용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2004년도 한국바둑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세계최강국이라는 한국바둑의 위상은 큰 변화 없이 이어지겠지만 그 바깥세계의 풍요 속에 도사린 빈곤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그 우울한 전망을 뒤집어보기 위한 작은 목소리다.
전망1- 외화(外華)
세계바둑에 관한 한 한국은 갑신년에도 최강국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도요타덴소배와 춘란배를 거머쥔 이창호와 LG배, 후지쯔배 2관왕으로 단숨에 최정상까지 솟구친 이세돌은 ‘퇴조’를 이야기하기에 너무 젊고 중국, 일본 쪽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경쟁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의 지붕을 형성하고 있는 이창호-이세돌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국내에 있다. 걸음을 늦추긴 했지만 조훈현, 유창혁의 브랜드파워는 여전히 중국, 일본의 경쟁자들보다 강하고 정상의 문턱에서 번번이 무릎을 꺾은 안조영, 조한승도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다. 이제는 다 자란 황소가 돼버려 ‘송아지삼총사’라는 닉네임이 무색하게 된 박영훈, 원성진, 최철한의 약진은 충분히 정상을 위협할 만하고 그 뒤로 바짝 따라붙은(어떤 의미에서는 추월한 것 같기도 한) 송태곤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마지막 날 속개된 춘란배 16강전에서 한국은 이창호만이 살아남았고 중국이 8강에 6명이나 포진됐다. 일부 성급한 관계자들은 ‘드디어 중국이 한국을 추월할 준비를 마쳤다. 한국바둑의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다. 드물긴 해도 전혀 낯선 풍경은 아니라는 얘기다. 응씨배에서도, LG배에서도, 삼성화재배에서도 중국이나 일본이 본선 16강 또는 8강을 대거 점령했던 때가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도 우승컵은 한국의 품에 안겨졌다는 것이며 그때마다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등이 홀로 남아 끝내 우승을 견인해온 것은 결코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승부란 강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며 한국은 그런 진리를 지속적으로 증명해왔다.
‘한국에는 조훈현밖에 없다’며 한국바둑의 층이 엷음을 조소하던 말은 흘러간 시대의 화석이 된지 오래다. 인적(人的) 요인으로만 따진다면 2004년에도 한국바둑이 지존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 일본의 간판스타들은 한국의 정상급 기사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만큼 위협적이지 않다. 뚜렷한 실력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승부를 가름하는 무엇인가가 한국기사들보다 부족한 것만은 분명하다.
2004년에는 새로운 세계대회와 세계적인 바둑이벤트가 속속 이어질 것 같다. 4년 주기로 돌아오는 바둑올림픽 잉씨배가 있고 대만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JP모건배는 세계대회로는 B급 규모지만 서구자본으로 유치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또 중국에서도 초대형 바둑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적어도 바깥세계에서 바라본 한국바둑은 올해도 예년 수준 이상의 화려한 잔치를 갖게 될 것이라는 보증서를 받아든 셈이다.
전망2- 내빈(內貧)
밖은 화려하지만 그 안은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 새해 아침부터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한국바둑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한국바둑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바둑의 가장 큰 문제는 외화내빈의 구조에 있다. 이 구조는 2004년도에도 쉽게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아니, 무엇이든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상황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도 없다. 2003년 한해를 뒤돌아보면 한국 프로기전 황폐화의 현실과 직면하게 되니까. 연초부터 패왕전이 개점휴업을 선언하더니 국내 최고의 상금을 자랑하던 KT배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걸었다(패왕전과 KT배에서 각각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을 연파하며 모처럼 국내 타이틀홀더의 반열에 올랐던 유창혁 9단은 불운의 2관왕이 됐다).
그뿐인가. 1968년 출범 이후 한국 프로바둑을 대표해온 중심기전 중 하나였던 명인전의 난항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한국 프로바둑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후원사나 주최사 모두 지난 34년 동안 독점적으로 유지해왔던 ‘명인’이라는 브랜드에 별다른 미련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좀더 충격적이다.
한국기원 소속 전체 기사가 출전하는 공식기전이 16개에 이르는 절정의 시기였던 1997년부터 프로기전의 황폐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다시 말해서 한국바둑은 1945년 조남철 선생이 이 땅에 현대바둑을 보급한 이래 반세기 동안 가파른 오르막길을 달려왔으며 97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이다.
97년에 비씨카드배가 신예기전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국기전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한국 최초의 세계대회였던 동양증권배가 간판을 내리는 사태가 이어졌다. 이 일련의 현상은 ‘한국 프로기전 황폐화의 첫 번째 징후’였는데 10년간 지속된 한국바둑의 황금기에 취한 모든 관계자들은 이 징후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같은 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해온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이 중단된 것은 바둑계에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으나 후원기업의 내부사정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아쉬움을 드러냈을 뿐 크게 우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97년은 프로제도와 기전시스템 등 한국바둑 전반에 걸친 총체적 개혁의 원년으로 삼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해였다. 후원기업의 프로모션을 생각하는 다양한 기전시스템의 도입과 거기에 부합된 프로제도의 개혁이 단행될 시기였던 것이다. 변화해야 할 시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최강국의 환상에 젖어 이후 6년을 허송세월한 대가는 컸다.
지방신문기전의 중심축으로 지역바둑 저변확대에 기여해왔던 대왕전(대구, 98년 이후 여류명인전으로 전환), 최고위전(부산, 99년 폐쇄)이 차례로 문을 닫아걸었고 기전을 후원하던 각 기업들이 하나, 둘 규모를 축소하거나 폐쇄했다. IMF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건전한 정신문화를 장려한다’는 설익은 명분으로 바둑을 지원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2004년 현재 한국기원 소속 197명의 기사가 모두 출전할 수 있는 공식기전은, 차기대회 개최가 불투명한 명인전을 제외하면 모두 9개(국내대회 6, 국내개최 세계대회 3). 정점에 올랐던 97년과 비교할 때 절반에 가까운 7개의 기전이, 소수만 참여하는 제한기전으로 축소되거나 폐쇄된 것이다. 어떤가. 이러고도 세계대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바둑의 앞날은 밝다’고 부르짖을 것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이런 영화제목이 쉽게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일까. 한국바둑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꼭 같은 제자리걸음을 되풀이하는 한 2004년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대제언- 개혁만이 살 길이다
기전운영과 프로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제도권 안팎에서 프로, 아마를 망라한 많은 전문가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프로들의 단위제도, 연구수당 철폐, 랭킹제 적용, 입단문호 확대, 진보된 기전시스템의 도입 등 현행 프로제도나 기전운영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해온 것으로 안다.
문제는 반세기 동안 지속돼온 낡은 제도의 틀에 갇혀 시야가 좁아진 기득권층의 개혁안 수용의지에 있다. 개혁이란,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필연적으로 기득권층의 일정한 희생을 요구하게 되는데 그동안 제시된 많은 개혁안들이 그 당위성을 인정받으면서도 실행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의 이해와 설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보자. 국내 1등이라는 우물 안에서 벗어나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탈바꿈하는 혁신적인 경영으로 재계의 신화가 된 모그룹의 회장이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던진 말이다. 바뀌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은 재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든 계층에 적용되는 시대의 철리다. 바둑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시대가 바뀌면 그 흐름에 맞는 새로운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고 그 비전에 맞춘 시스템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곧 제도개혁이다.
제언1- 기전운영, 세상의 변화에 동참하라
지난 반세기 동안 프로바둑은 신문기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원사가 지원한 예산으로 프로기사들이 대국을 하고 그 결과물인 기보는 주최사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게재되었다. 바둑에 관한 정보의 전달경로가 원활하지 않았던 6, 7년 전까지는 이 시스템에 무리가 없었다. TV라는 강력한 방송매체가 있었지만 바둑의 방송시간 대비 효용가치의 한계와 중계에 따른 과비용의 문제로 신문과 방송이 양립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PC통신이 개발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초고속의 인터넷시대가 열리면서 신문에 게재되는 프로바둑의 효용성이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데 있다. 이튿날 신문에서나 볼 수 있었던 프로들의 대국결과가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상세한 소식과 해설을 곁들인 기보로써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것은 곧 신문기전 중심의 바둑시대가 마감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바둑이 누려왔던 신문지상에서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는 말은 매일 신문에 게재되는 광고효과를 기대하고 적지 않은 예산을 지원해왔던 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바둑이 각 신문지상에서 과거와는 크게 다른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역파급효과일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필연적으로 바둑에 관한 정보 전달매체의 역할과 위상에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 연장선상에 최근 몇 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바둑TV와 우후죽순처럼 성장하고 있는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존재가치가 있다. 한국 프로바둑을 총괄하는 (재)한국기원은 이 점에 좀더 주목해야 한다. 프로대국의 결과물 즉, 기보의 신문게재 효용성이 크게 하락한 지금 기전 운영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후원기업 프로모션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 기획과 실행의 성패가 기전유치 및 지속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처럼 팬들의 시선이 차단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프로들의 대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향후 프로기전의 형태는 철저하게 팬들에게 보여주는 ‘쇼’가 되어야 한다. 관전의 재미를 주지 못하는 기전은 철저하게 외면당할 것이다. 프로대국도, 그 대국의 주체인 프로기사도 신문,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팬들의 시선에 노출될 때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전을 후원하는 기업의 시각에서 볼 때 현행의 기전형태는 고비용, 저효율의 프로모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진행되는 대다수 신문기전의 경우 후원기업이 기대할 수 있는 프로모션 보너스는 고작 신문에 단신으로 실리거나 프로기사들의 대국이 연재되고 있다는 것뿐이다. 기업의 프로모션이라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대국 실황중계나 실시간 뉴스전달이 더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이 또한 기업의 요청이나 한국기원의 기획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둑사이트의 기본적인 회원 서비스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프로모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신문의 바둑소식이나 기보연재가 프로모션 보너스를 획득하는 데 전혀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비교할 때 정보전달의 속도나 파급효과에서 신문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입수의 선택적 편의성에서는 여전히 신문의 힘이 크다. 다시 말하면 방송은 방송대로, 인터넷은 인터넷대로, 신문은 신문대로 각각 바둑 프로모션에 적합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 각각의 역할이 최선의 조화를 이루도록 유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둑도 기업에 당당하게 후원을 요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며 반세기 동안 한국바둑을 총괄해온 한국기원의 미래 역시 그 조정과 균형의 중심에 설 수 있느냐의 노력 여하에 걸려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제언2- 기전 및 프로기사 랭킹제 도입 시급하다
기전 및 프로기사 랭킹제 실행 역시 처음 꺼내는 제안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제도권 안팎에서 관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돼왔던 논제다. 논의만 무성하고 단 한 차례도 실행되지 못한 이 일은 전적으로 한국기원 집행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기전 랭킹제를 실시할 경우 예산규모가 적은 기전을 후원하는 기업의 반발이 클 것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기전마저 없애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자신감의 결여에서 오는 기우(杞憂)다.
위와 같은 우려는, 후원기업이 투자하는 만큼 프로모션 보너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며 지금까지의 기전운영이 후원기업의 프로모션과는 별개의 형태로 면밀한 기획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안일하게 이루어져왔다는 반증이다(기전운영의 시스템이 바뀌어야한다는 첫 번째 제언의 근거이기도 하다). 투자한 만큼 프로모션 보너스를 획득할 수 있다면, 기업에 그런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면 기전 랭킹제를 실행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현행의 기전운영은 15억을 투자한 기업이나 1, 2억을 투자한 기업이나 똑같은 프로모션 보너스를 얻게 된다. 15억짜리 기전의 타이틀을 획득해도, 2억짜리 기전의 타이틀을 획득해도 ‘타이틀을 획득했다’는 뉴스가 똑같이 나가고 세계대회 출전의 프리미엄도 똑같은 타이틀홀더의 대접을 받는다. 이것은 기업의 투자의지를 원천봉쇄하는 대단히 불합리한 구조다. 기업은 바보가 아니다. 똑같거나 비슷한 광고효과를 얻게 된다면 누가 더 많은 예산을 지원하려고 하겠는가?
기전 랭킹제가 이루어지면 기사 랭킹제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기전 랭킹이 다른 만큼 각 기전별 승패에 따른 획득 포인트도 차등이 생기고 그 점수에 의해 쉽게 기사 랭킹이 정리된다. 기사 랭킹 역시 기업의 투자유치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프로기전 개최를 희망하면서도 예산이 부담스러워 주저하는 중소기업에 합리적인 랭킹제한 초청전 같은 기전을 쉽게 제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사 랭킹으로써 메이저, 마이너리그의 분할이 가능하므로 전체 기전운영에 탄력을 갖는 효과도 있다(마이너리그의 운영은 하위 랭킹의 기사들의 수입을 일정부분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참고로 말하면, 현행의 기전형태에서 임의로 개인별 획득 상금을 집계해서 랭킹을 정하는 방법은 불합리하다. 공식기전보다 출전자격을 가리는 제한기전의 숫자가 더 많은 데다 전체기사가 출전하는 공식기전도 모든 기사가 공평하게 1차예선부터 출전하지 않는 문제가 있고 예선 대국료의 단위별 차등 역시 상금랭킹 적용에는 불합리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기사 랭킹제의 실행이 시급한 이유는 또 있다. 현대는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다. 어떤 분야든 스타를 양산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기사 랭킹제의 실행은 스타기사를 만드는 기초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각 기전별 승패에 따라 등락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기사 랭킹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바둑데이터는 스타기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입체적으로 전하는 전령사로써 팬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기록을 보는 재미’를 주게 될 것이다. 모든 스포츠신문이 2, 3면을 프로야구 기록으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라. 바둑은 모든 것을 기록으로 보여줄 수 있는, 프로야구보다 더 섬세한 ‘기록의 게임’이다.
제언3- 연구수당 폐지하고 입단문호 확대하라
지금부터 꼭 1년 전 ‘연구수당제도를 폐지한다’는 전체 프로기사들의 결의는 바둑계는 물론, 팬들까지 한순간에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2003년 한해에 ‘한국바둑의 미래를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이 결의만큼 더 아름다운 소식이 있었을까. 이 결의가 프로기사 각 세대간의 갈등 없이 깨끗하게 실행되기만 했어도 한국기원은 차원이 다른 희망의 세계로 힘차게 도약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쉽게도 이 결의는 물거품이 됐다. 물거품이 됐을 뿐 아니라 반세기를 끌어온 구태 그 이전으로 뒷걸음질했다.
연구수당은 4백여년 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은 바둑 4대가문으로부터 이어진 일본문화의 잔재다. 당시는 바둑을 후원하는 기업이라든가 기업의 프로모션을 위한 프로기전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므로 국가가 바둑을 장려하는 후원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의 프로기사와 같은 4대가문의 기사들이 국가로부터 봉록을 받았다. 4대가문이 무너지고 일본기원이 설립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은 오늘날처럼 프로기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기사들의 생계보호 차원에서, 4대가문의 세습봉록을 변형시킨 단수당(연구수당)이 지급된 것이며 한국기원 역시 그 제도를 고스란히 답습해온 것이다.
연구수당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우선은, 기사들의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기사들은 한결같이 용돈도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기원 재정에는 매년 6, 7억을 지출해야 하는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담은 프로기사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커질 것이며 이미 심각한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프로입단의 문호를 넓히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
진통 끝에 ‘연구수당 동결(시행 당시 저단이었거나 새로 입단하는 프로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이라는 기상천외한 결론을 내린 한국기원 집행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 결정은 제도의 개혁이 아니고 개악(改惡)이 분명하다. 이 문제는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한국기원 집행부만의 의지로 해결될 일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전체 프로기사들이 진정으로 한국바둑의 미래를 생각하는 긴 안목으로 공존을 위한 대타협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기원은 정해진 절차를 거쳐 프로의 라이센스를 받은 사람에게 프로기전의 출전자격을 주고 프로기사로서의 활동을 보증하는 단체지 프로기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구호기구가 아니라는 사실의 냉철한 자각이 필요하다. 연구수당은, 한국기원 재정에 부담을 키우지 않는 일정액 지출의 발전기금으로 전환하면 전체 기사들의 복리를 위해 더 좋은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갈등 끝에 중단된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연구를 거쳐 효율적이고 투명한 기금운영기획이 뒤따라야 한다.
연구수당제도 폐지는 바로 프로 입단문호 확대와 직결될 것이다. 프로는 많을수록 좋다. 늘어난 프로기사들의 생계는 한국기원이 우려할 일도, 우려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이미 지금도 프로기사들의 생계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바둑에는 아직 스타가 부족하다. 역동적인 프로의 양산 속에서만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할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스타들은 바둑팬들의 세대간 계층간의 저변을 넓히고 많은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이는 첨병이 될 것이다. 한국기원이 해야 할 일은 ‘끝없는 걱정’이 아니라 확신에 찬 비전을 제시하고 그 모든 제도개혁과 발전의 구심점이 되는 일이다.
첫댓글 장순섭(3lovejesus7@hanmail.net )님이 한국기원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을 퍼왔습니다. ^^
대략 공감...........
좋은글이네요...
옳소...... 많은분들이 힘을 써주셔야 될텐데
잘 모르겠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