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
조 인 숙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지난 계절의 늦은 비인지, 다가올 계절의 이른 비인지, 비가 내리고 있다. 집 안은 싸 놓은 짐들로 어수선하다. 창밖 너머 포장 이사 차량이 빗소리와 함께 이른 아침을 깨운다.
오늘은 이사 가는 날이다. 묵은 살림을 정리하느라 요 며칠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젯밤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창문 앞에서 한참 동안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 밤을 붙들고 늘어지기도 했다.
남편의 사업 규모를 더 키우기 위해 생활 공간을 줄여서 살아온 집이었다. 비록 평수가 작은 집이긴 했지만, 이곳에서 남편의 일이 잘되었고, 딸도 결혼을 시켜 내보냈다. 6년을 조금 더 살고 이사를 나가게 된 것이다. 처음 이사를 올 때 남편은 내가 좁은 곳에서 시작하게 되는 새로운 삶에 대해 걱정을 했다. 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6년 동안 좋은 추억을 참 많이도 안겨주었던 고마운 집이었다.
그렇게 부대끼며 살다가 3년 전 분양을 받아 올해 2월 새집으로 이사 날짜를 잡았다. 이사를 하면 꼭 느끼는 것은 짐이 그렇게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집 안에 있으면 다 있어야 할 것들인데 내어놓으면 뭐가 그리 많은지,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닌 게 정말 많다. 이사를 하면서 짐도 버려지고, 애착도 버려진다. 이젠 갖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옛날에 소중했던 것이라고 끼고 살았던 물건들이 다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책하고 옷이 제일 많다. 옷은 나눔 봉사로 재활용하고 책은 새집에 책방을 마련해서 가져간다. 이사 들어오는 분이 필요로 해서 소파와 쓰던 가전제품 몇 가지는 남겨 두고 간다. 짐들이 모두 나갔고 우리도 떠날 때가 되었다.
포장 이사 차량을 앞세우고 남편과 내가 뒤따라 새집으로 향한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나 보다. 이사하는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데 어디서 나온 말일까. 이제 잘 살면 얼마나 더 잘 살까, 살짝 웃음이 배어 나온다.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면 잡귀를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비 오는 날 이사하면 짐도 사람도 다 젖고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위로하려고 만든 말인 거 같기도 하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한번은 새벽에 자다가 짐을 싼 적도 있었다. 집주인의 사정에 따라 방을 비워 달라는 말이 떨어지면 곧바로 짐을 싸서 집을 옮겨야 했다. 아버지 하던 일이 잘 안되면서 시골로 내려와 친척 집에 얹혀살기도 했다. 하지만 힘겨움 속에서도 선하게 산 끝은 있었다.
드디어 부모님은 내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몇 날 며칠 축하 잔치가 벌어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팥죽을 쑤었다. 이사 온 날 뒷마당에 솥단지를 걸어 놓고 팥죽을 쑬 때면 어머니 옆에 앉아 주걱을 함께 돌리곤 했다. 젖기에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운다 싶으면, 여지없이 죽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다녀 잠시도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그럴 때면 ‘변덕이 팥죽 끓듯 한다,’라는 속담을 어머니가 들려주기도 했었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막내딸의 순탄한 첫발을 위해 팥죽을 쑤어 오셨을 것이다. 액운을 막아 주며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한솥 가득 쑤어 오셨으리라.
남편과 그 시절 얘기를 나누는 사이 새집에 도착했다. 여러 세대가 같은 날에 이사를 하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가 분주하다. 이삿짐 차보다 먼저 도착해 밥솥을 들여놓았다. 새 가구와 가전제품이 차례로 들어온다. 그렇게 비어 있던 공간에 하나둘 이삿짐이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이사는 마무리됐다.
나는 지금 새집의 새 자리에 앉아있다. 이사는 단순히 사는 공간의 이동만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생활 규칙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한 새로운 습관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익숙하고 적응하기까지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어느 정도 짐 정리가 되어가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집안 가득 울리도록 틀어 놓고, 창가 옆자리에 앉아 좋아하는 시도 자주 낭송해야겠다. 집은 내가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질수록 더 따뜻한 온기가 만들어져 가족들과 함께 화목해 지리라 믿는다.
이사는 끝났다. 이제는 새집이 아니라 그냥 평온하고 오랜 친구 같은 내 집이다. 인정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도록 만들어야겠다. 머지않아 그 터전에 꽃향기가 그윽하기를 그려본다. 봄이 오고 있다.
첫댓글 採花東林
美哉春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