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인 : 아홉번의 시간여행] 송재정 - 시놉시스
판타지 액션 멜로
9 나인 : 아홉번의 시간여행
극본 송 재 정, 김 윤 주
연출 김 병 수
형이 죽었다.
형이 남긴 싸구려 향 9개.
그것은 놀랍게도, 타임머신이었다.
작 품 개 요
/ 제목 / 나인 (Nine)
/ 형식 / 70분 미니시리즈 20부작
/ 제작 / 기획 초록뱀 미디어, JS 픽쳐스
연출 김 병 수
극본 송 재 정, 김 윤 주
/ 내용 / 죽음을 눈앞에 둔 남자가 인생을 바꿔 줄 타임머신, 9개의 향을 얻는다.
가족과 연인, 자신의 목숨까지 구해내려는 남자의 서스펜스 판타지 멜로.
기 획 의 도
1. 가장 흥미로운 SF 테마, 시간여행
운명과 세월의 힘 앞에 모든 것을 잃고 무릎 꿇어야 하는 한 남자.
회한밖에 남은 것 없던 그의 마지막, 기적처럼 손에 들어온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인생의 행로가 어긋난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족을, 사랑을, 행복을,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내 생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시간을 되돌리는 것!
이 기적같은 기회는 과연 축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운명의 횡포가 될 것인가.
누구나 한 번은 꿈꾸어 봤을 시간여행의 판타지를 TV드라마로 마침내 구현하며,
우리는 시청자의 상상 속에 그려졌을 희극과 비극 양면을 모두 건드리려 한다.
2. 사랑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
대체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시간을 역행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를 치솟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강물이 거슬로 올라갈 수 없고, 시간이 되돌아 갈 수 없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운명,
이 거대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났음에 필연적으로 얽혀든 가족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시간여행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물질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절대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3. 미드 못지 않은 박진감 넘치는 활극
그러나, 사랑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용서만 가득한 정적인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시간여행’이라는 흥미로운 SF테마에 맞게,
본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역동적 구성,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복잡할 갈등구조를 지닌다.
그리하여 시청자들이 SF물에서 기대하는 박진감 넘치는 모험의 세계 역시 충실히 구현할 것이다.
‘나인’만의 차별성
1. 한드와 미드의 장점을 결합한 불륨있는 드라마
인물 개개인의 극적 운명을 호소력 짙게 표현하는 한드의 장점과, 장르물의 공식을 냉철히 구현하는 미드의 장점을 결합하여 한 편으로는 SF모험극의 긴장감과 반전이 살아있는 동시에 또 한 편으로는 한국적 정서의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는 드라마이다.
2. 단순한 메카니즘 VS 복잡한 갈등구조
타임슬립의 과학적 메카니즘을 가능한 단순하게 처리하여 지루한 과학적 설명은 줄이고, 대신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사랑, 복수, 배신, 용서에서 말미암은 복잡한 갈등구조의 서사를 펼쳐 시청자의 공감을 얻어낸다.
3. 누구나 내 얘기가 될 수 있는 근과거(近過去)로의 회귀
주인공이 타임슬립으로 당도한 시간대는 황당한 수백년전 과거도 아니고,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도 아니다. 바로 TV를 시청하는 사람들 모두 금세 떠올릴 수 있는 1992년, 즉, 20년 전의 대한민국이다.
시청자들은 일생의 가장 후회스러운 사건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을 보며, 자신의 인생에서 1992년이 어떠했는지, 자신의 청춘과 자신의 욕망을 떠올리며 주인공과 함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4.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새로운 장르의 탄생
최첨단 SF물이면서 동시에 아날로그 시대의 아련한 향수가 함께 숨쉬게 될 본 드라마는
새로운 영상,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세대와 성별을 넘어 모든 시청자가 원하고 즐길 수 있는
복합 콘텐츠를 제공할 것이다.
등 장 인 물
내게 남겨진 향은 정확히 9개.
9개를 다 쓰기 전에 뒤틀린 모든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
아버지, 엄마, 형, 그리고 민영과 내 목숨까지도.....!
박 선 우
남. 38세. CBM 보도국 기자.
남자 주인공.
CBM 보도국 12년차 기자이자, 매일 밤 12시에 뉴스 나이트를 진행하는 앵커.
거침없고 빠른 판단력에, 활달하고 리더쉽이 뛰어나 후배들이 따르는 선배이고,
일찌감치 과감한 특종을 여럿 터뜨려 국장의 전폭적인 신임도 받고 있다.
나이에 비해 파격적으로 빨리 앵커 자리에 올랐고 꽤 인기까지 얻고 있는, 잘 나가는 기자.
대대로 부유한 의사 집안의 귀염둥이 막내아들,
반듯한 외모에 인기도 많았고 공부도 잘했고, 부모님, 특히나 아버지의 유난한 편애까지 받으면서
선우가 자신감 넘치고, 유머러스하고 활기찬 성품을 갖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 2이던 1992년 겨울.
방화가 분명한 불의의 화재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려 요양소에 입원해 지금까지 아들을 못 알아보고,
가업을 이어야 할 형이 의사 가운을 벗어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듯 가버린 때.
그의 늘 햇살만 비출 것 같던 인생은 그때 결정적으로 벽에 부딪치지만
젊고 에너지 충만했던 선우는, 비록 버거웠지만 어떻게든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병원을 가로채 2012년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계 거물이 된 최진철.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하고 병원을 가로채기까지 조작 증거 따위 찾을 방법도 모르고 눈 뜨고 당해야했던 어린 선우는,
자연스런 귀결처럼 대학 졸업 후 기자가 되었다.
무기력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쳐버린 형과 달리
선우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가족들의 복수도 반드시 하리라, 하며
느긋하지만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독이나 복수심에 파묻혀 자신의 꿈을 모두 내던지기에는
선우는 태생이 낙천적인 인물이었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런데...
나 답지 않은 짓을 한다고? 이게 실은 진짜 박선우야. 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바람에 나도 잊었던.
지난해부터 계속된 지독한 두통에, 결국 병원에 가 정밀검사를 받은 선우는
앞으로 1년도 버티기 힘든 악성 뇌종양 4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낙천적인 희망을 갖기란, 제 아무리 박선우라도 힘든 일이었다.
눈 앞에 바짝 다가온 죽음을 직면한 그 순간, 선우의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사람은 어머니였다.
내가 죽으면 저 불쌍한 여인은 누가...?!
그리고, 또 한명, 선우 자신에게도 의외였던, 후배 주민영.
제대로 기자질 하려면 아직도 한참 먼, 데이트보다 회초리가 더 급한 놈이라 생각하며
5년 동안 한결같은 애정공세에도 거리를 두었던 민영이 그 순간부터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아직도 인연이 한참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얼마 안 남은 생의 시간.
평소의 선우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공정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고, 팩트보다 감정이 앞서는,
기자 박선우답지 않은 일들, 늘 자제해왔던 ‘그것들’을 하기 시작한다.
후배와의 동거.
그리고 사심(私心)을 위해 공기(公器)를 쓰는 것.
지난 5년간의 흘려보낸 시간들이 안타까웠던 선우는 민영에게 조건부 프로포즈를 하며 딱, 3개월간의 불같은 연애를 제안하고.
한편으로는 죽기 전에 최진철과 끝장을 보기 위해 자신의 뉴스를 통해 방송사고와 다름없는 폭로로 전쟁을 시작한다.
그런데.. 무너질 듯 위태하게 마지막 생을 걸어가던 선우에게,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히말라야에서 1년 전 동사(凍死)한 형, 정우가 남긴 유품에 들어있던 싸구려 향 10개
우연히 그 향을 태운 선우는, 그게 20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선우에게는, 평소의 선우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기자 박선우 답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추가된다.
팩트가 아닌 ‘판타지’를 믿기.
그는 지금 병의 부작용으로 지독한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신이 그에게 준 마지막 패를 손에 쥔 것일까.
둘 중 무엇이든, 죽음을 앞둔 선우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선우는 라이터를 켜고 향에 불을 붙인다.
주 민 영
여. 30세. CBM 보도국 기자.
여자 주인공.
CBM 보도국 5년차 기자.
입사하자마자 박선우 팀의 수습으로 들어가 줄곧 선우에게 배우고, 선우에게 혼나고, 선우에게 짐짝이 되며
선우의 밥, 선우의 골칫거리, 선우의 껌딱지로 5년을 보내왔다...
이건 선우의 일방적인 표현에 따른 것이고,
지난 5년간 주민영 기자는 선우의 열렬한 팬이자 선우가 은근 가장 아끼는 후배로서
이제는 둘을 콤비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사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는 것이 보도국 내 다른 기자들이 본 두 사람의 사이.
실제로 민영에게 선우는,
남자로서, 그리고 멘토로서, 이미 민영 인생의 중심이 되어버린 지 오래.
그건 5년 전, 입사 첫날 신입사원 환영회에 뒤늦게 나타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처럼 결정되었다.. 고 민영은 생각해왔다.
그 순간 이후 그녀는 거짓말처럼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민영의 이런 대책없이 해맑은 사랑관은 끊임없이 선우의 화를 돋워 더 이상 관계가 발전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팩트가 생명인 기자가 툭하면 ‘그냥, 우리는 운명처럼 결정된거죠~’라는 19세기 낭만주의 시인같은 소릴 해댈 때마다
선우는 ‘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과 함께 민영에게 한층 더 냉정하게 선을 긋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민영에게는‘운명처럼 사랑하게 된’것이 팩트였으니까.
그녀는 그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치 선우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민영은 선우를 보자마자 저 사람이 내 연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 때문에 마땅히 했어야 할, 밀당을 하지 못해 지금까지 선우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게 천추의 한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팩트인 걸.
좋은 기자가 되려면 엄마한테 물려받은 이 놈의 대책없는 같은 낭만주의 유전자를 지워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대 취재를 위해 원정대를 따라온 민영은, 휴가를 내고 히말라야까지 찾아온 선우의 말에 귀를 의심한다.
‘결혼해서 3개월만 살아보자’는 것.
이건 대체 무슨 의미지? 결혼은 좋은데 3개월은 또 뭐지?
좋기도 하고 뭔가 화도 난 민영은 평소와 다른 태도에 의구심에 사로잡혀 선우의 친구 영훈에게 전화를 하고,
그제서야 선우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개자식...!!
진심으로 선우에게 화를 내본 적 없는 민영은, 그날 처음으로 불같이 화가 난다, 자신을 끝까지 무시한 그에게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선우에게 못할 소리를 해대가며 감정을 마구 토해냈던 민영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시 약해진다.
‘운명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것이 역시 민영의 팩트였던 것이다.
민영은 선우와 함께 하기로 했다.
그가 살아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정말 이대로 끝이라면, 그 마지막까지 곁에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며칠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민영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워너비. 정말로 친해지고 싶은, 그 사람.
민영은 그날 밤,
새아버지가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민영의 법적인 삼촌을 저녁에 초대했다는 말에 설레었다.
인기 절정의 잘 나가는 앵커.
다른 채널 기자인 민영의 워너비.
가족이긴 하지만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관계인, 1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 삼촌이 온다는 것이다.
민영은 늘 그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말이 삼촌이지 여덟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다가 같은 직종,
혹여 시동생에게 피해가 갈까 너무 조심스런 엄마 때문에 더욱 더 전화 한 통 하기가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고 마침내 초인종이 울리고 그가 들어왔다.
박선우 기자.
새아버지의 남은 유일한 핏줄.
그런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했다.
삼촌이 나를 보자마자 굳어 버린 것이다.
유령을 보듯, 얼음처럼 굳어버린 그를 보자 민영도 불안해졌다.
왜 저러지? 내가 뭘 잘못했나? 방송국에 뭐 안 좋은 소문이 퍼졌나?
주민영....?
나를 보고 주민영이라니?
난 박민영이다.
당연하지, 우리는 가족이고, 당연히 같은 박씨 아닌가.
20년 전, 엄마와 새아버지가 결혼한 후, 나는 그때부터 박민영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도 모르는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박 정 우
2012년 47세. 히말라야에서 동사(凍死)
선우의 형.
수많은 비밀과 회한을 간직한 채 히말라야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어,
모든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
20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한국을 떠나, 끊임없이 방황하며 전 세계를 떠돈다.
오랜 방랑 생활로 고독이 지나쳐 현실감을 잃고 정신이상자처럼 보였던 모습이 죽기 전 그를 만난 선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는 동생 선우가 곧 죽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평생을 갈구해 온 무언가를 드디어 찾기 위해 히말라야로 갔다가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그가 남긴 유품은 암호같이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한 다이어리와 싸구려 향 열 개. 그리고 그 다이어리와 향은 선우의 운명을 바꿀 뿐 아니라, 가족과 민영, 그리고 정우 자신의 운명까지도 재구성한다.
다이어리에 쓰인 비밀은 정우의 나레이션을 통해 밝혀지며,
그것을 통해 선우는 과거로 통하는 길을 찾게 된다.
1992년 27세. 대학병원 외과 레지던트.
똑똑하고 반듯한 모범생으로 우리나라 최고 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로 근무 중이다.
선우와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의사로서 살게 될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으며 아버지와 같은 의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예민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선우에게는 늘 든든한 형이지만, 이 세상에 혼자인 듯 언뜻언뜻 비치는 서늘한 고독감은 선우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자신도 어쩌지 못하고 애 딸린 이혼녀, 유진을 사랑하게 되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그간 조용히 가라앉아있던 가족의 비밀은 한꺼번에 비극으로 터진다.
불륜으로 태어난 생부를 알 수 없는 사생아. 어머니의 원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순간의 실수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후, 자신을 위해 공범이 된 어머니와 동생을 도저히 볼 수 없어, 속죄를 하듯, 도망치듯, 가족과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 처절한 자책의 인생을 살게 된다.
손 명 희
2012년 65세. 정신분열증 환자.
선우의 어머니.
남편의 죽음, 아들의 살인, 방화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충격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있다
선우를 알아보지도 못하며 맏아들 정우의 죽음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으며 오랜 병으로 인해 나이보다 더 늙고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92년 45세. 명세병원 원장 부인.
정신분열에 걸리기 전의 명희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여자였다.
명망 높은 학자 집안의 딸로 태어나, 부모끼리 친분이 깊었던 명세병원의 며느리로 일찌감치 점 찍혀, 그야말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손에 물 묻힐 일 없이 살아온 타고난 귀부인이다.
선우는 나이가 들어서도 어머니의 사려 깊은 미소, 맵시 있는 옷차림, 고상한 취향, 화초를 가꾸는 정성스런 손놀림을 그리워했다.
지금의 명희는 선우가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바로 그런 엄마였다.
독선적인 남편과 재미나게 살지는 못했으나
두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무조건 아들들의 편이 되어준다.
후에 선우를 꼭 닮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 미래에서 온 선우 -를 만나면서 그녀는 앞으로 자신과 가족이 겪게 될 끔찍한 비극에 대해서 알게 되고, 자신이 20대에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만회해야만 이 비극이 끝난다는 사실에 갈등에 빠진다.
그리고 미래에서 온 아들은 그녀에게 감당하기 힘든 버거운 선택을 맡긴다.
최 진 철
2012년 남. 67세. 명세 병원 그룹 회장
1992년 남. 47세. 명세병원 부원장.
천수의 의과 동창이자 동업자.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철한 사업가.
고학생 출신의 산부인과 전문의로 천수의 병원에 들어와 부인과 쪽을 맡다가 점차 경영에 더 자질을 보이며 병원 운영 전체를 맡으며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도통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천수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고, 천수의 맏아들 정우가 의사를 그만두고 떠나버리면서
그렇게 갈망하던 병원은 너무나 쉽사리 진철의 손으로 들어왔고
재빠른 사업 감각으로 명세병원을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그룹으로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
시대의 흐름을 보는 눈도 정확해 일찍이 줄기세포 연구에 공을 들여 최대 규모의 줄기세포 치료 연구센터를 설립해 전력투구,
재생의학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어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다.
그런데, 완전히 잊고 있었던 천수의 둘째아들, 깜도 되지 않았던 선우가 그동안 뒤통수 칠 기회만 노리며 조용히 뒤를 캐고 있었을 줄이야.
예고도 없이 터뜨린 선우의 폭로로 진철은 수십 년간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고,
진철은 반격을 위해 권력의 힘에 기대 선우의 목줄을 죄기 시작한다.
진의를 밝히지 않은 채 선우의 어머니가 있는 정신병원에 가끔 선우 몰래 찾는데,
진철이 젊은 시절, 친구의 여자였던 명희, 선우의 어머니를 열렬히 흠모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진철의 아내밖에 없다.
오 철 민
2012년 남. 52세. CBM 보도국 국장
1992년 남. 32세. CBM 보도국 기자.
보도국 국장.
선우가 입사한 이후부터 한결같이 선우를 신뢰하고 밀어주는 인물.
기자생활 30년, 산전수전 다 겪었고 발길질과 쌍욕은 기본이지만 살벌한 말투와 달리 속정이 깊다.
선우의 수습사원 시절, 현장에 데리고 다니며 굴리고 밟고 괴롭히면서 이 놈이 자신과 꽤 많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것이 아니고선 믿지 않는 천성, 얄짤없고 까칠한 그 천성이 기자질하는 데는 최고의 자질이라는 걸 알기에
경험이 일천한 선우를 처음 앵커 자리에 올릴 때의 수많은 반대들,
그리고 지금, 난데없이 대한민국 최고 이슈의 인물, 최진철을 건드린 선우를 향한 방송국내의 엄청난 반대들을 모두 물리치고 기꺼이 선우의 방어벽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곧 죽는다고? 기껏 밀어줬더니?
사표를 내? 네 복수심으로 저지른 이 모든 엄청난 일들은 모두 나한테 던져놓고 간다고?
어디서 개 짖는 소릴 하고 있어? 누구 맘대로 병원 침대에 편히 누워 죽어? 차라리 데스크에서 방송하다 쓰러져 이 자식아...!!
그게 오국장의 애정표현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이기도 했다.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 선우는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매일 국장에게 걷어차이고 술만 먹으면 ‘난 기자질 소질이 없다’며 울던 햇병아리 시절의 오국장, 오철민 기자를 찾아가 도움을 받게 된다.
한 영 훈
2012년 남. 38세. 신경외과 전문의.
선우의 죽마고우.
종합병원 신경외과에서 근무 중이며 건실하고 따뜻한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엄살 피우지 않는 성격임을 잘 아는 선우가, 어느 날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자 직감이 안 좋았다. 그리고 그 직감은 예외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친구의 종양을 확인하고,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 종양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친구에게 자신의 입으로 1년 시한부의 선고를 내려야 하는 일은 정말 끔찍했다.
살려달라느니, 이렇게 죽을 순 없다느니, 인간이라면 마땅한 호소조차 안하는 자식임을 알기에 영훈은 자신이 더 미칠 지경이었다.
앞으로 우리의 인생엔 그저 신나는 일밖에 없을 줄 알고 그저 낄낄거리던 학창시절이
20년 전 선우 아버지의 끔찍한 사고와 함께 박살이 나고, 선우가 그 순간 어른이 되어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면서 영훈은 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후에 타임머신의 실체를 알게 되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걸로 선우가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갖는다.
1992년 남. 18세. 고등학교 2학년.
선우와는 중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단짝 친구로
고등학생이 되어 선우가 한소라와의 데이트에 몰두하고 있는 중에도
이성 쪽 관심은 전무.
답답할 정도로 성실한 모범생.
놀기 좋아하는 선우에게 늘 휘둘리고 유혹당하면서도 자기 생활을 지키는 고집이 있고 마누라처럼 옆에서 선우에게 잔소리 하고 챙기는 친구.
크리스마스 이브, 미래의 선우가 보냈다는 카드를 받고 의문에 휩싸이는데
20년이 지난 2012년에 이르러서야 선우에게서 두 번째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고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김 유 진
2012년 여. 50세. 미국 교포.
민영의 엄마.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 그곳에서 부유하고 점잖은 교포 변호사를 만나 재혼했고
지금은 텍사스에 살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지 오래되면서 한국에서 겪었던 수많은 풍파가 이미 희미해졌고, 기억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어진 지 오래다.
딸이 굳이 자신과 떨어져 한국에서 사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지만 민영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가 일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줄 알았던 민영이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기뻤던 엄마는, 그러나 우연히 그 남자가 시한부라는 걸 알게 되고,
딸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던 유진은 선우를 따로 불러내 만났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1992년 여. 30세. 중고 레코드샵 주인
스무 살에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자마자 임신 중에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그 후부터의 삶은 생각했던 어린 유진이 상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음악을 했던 남편이 남겨준 건 수만장의 음반뿐.
그걸로 중고 레코드샵을 열어 매일 손님도 거의 없는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으며
희망도 미래도 없는 30대를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레코드샵에 들렀던 젊은 의사와 만나게 된다.
죽은 남편과 음악취향까지 꼭 닮은 예민한 연하의 의사는 정우였다.
그냥 의사도 아니고 종합병원 원장의 아들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던 유진은
타고난 불꽃같은 열정을 제어 못하고,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든 딸도 미처 배려 못하고는 정우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의 끝은 또 한번의 배신.
결혼을 약속했던 정우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자 믿을 수 없을만큼 흔들렸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유진은 민영을 데리고 이민을 결심하고 통보하는데 그래도 붙잡지 않는 정우. 끝까지 공항에도 나타나지 않는 정우를 원망하며, 유진은 서울을 떠났고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강 서 준
남. 31세. 외과 레지던트
민영의 남자친구.
정우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의 전문의로 정우를 만나러 병원에 온 유진의 눈에 띄어 민영을 소개 받았다.
말수가 적고 진지하고 예민한 성격으로,
자신과는 다르게 활달하고 허물없는 민영을 보자마자 호감을 느껴 답지않게 처음으로 먼저 대시를 했다.
1년 넘게 교제중이며 내년 쯤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민영에게 되도록 자신의 모든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도 민영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다.
걸핏하면 병원에서 술에 취해 문제를 일으키는, 민영의 양부 정우가 점차 짜증난다는 것과,
엄밀히 따지면 남이나 다름없는 민영의 삼촌 박선우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 다는 것.
선우가 신경이 쓰이면 쓰일수록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 선우를 곤란하게 한다.
이 창 민
2012년 남. 45세. 진철의 운전기사
공사판을 전전하며 마땅한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두달 전 쯤 진철에게 접근했다.
20년 전의 일을 언급하며 진철을 압박. 돈을 뜯어낼 속셈이었지만 이미 넘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위치에 오른 진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오히려 협박죄로 경찰에 넘길수도 있는 상황에서 선심 베풀 듯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뒤로 진철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도박을 끊지 못하고 있다.
얼굴의 흉측한 흉터를 볼 때마다 20년 전 그날, 마치 자신이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원장실에 숨어있던 그 남자가 떠오른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얼굴.
그러던 어느 날, 그는 TV에서 20년 전 그 남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뉴스 앵커이자, 그가 죽이려고 했던 천수의 아들인 박선우.
그런데 어떻게 20년이 지난 지금, 그 얼굴 일수가 있는 거지??
그날 이후로, 선우의 뒤를 몰래 밟던 그는 마침내 선우가 가지고 있는 향의 정체를 알게 되고, 훗날 선우의 운명을 뒤흔들며 커다란 위협이 된다.
1992년 남. 25세. 건달
진철에게 거액을 투자한 투자자가 천수를 제거하기 위해 고용한 건달, 양아치.
감당할 수 없는 도박빚을 청산하기 위해 일을 맡았으나 사람을 죽인다는 일이 쉽지 않아 결국 소주 한 병을 단번에 들이키고 원장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날, 원장실에 있던 사람은 천수가 아닌 누군지 알 수 없는 30대의 남자였고, 남자와의 격투 끝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천수를 죽이려던 칼에 오히려 자신이 상처를 입고 얼굴에 깊은 흉터가 남았다.
그로부터 3일 뒤 또 다시 천수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 또한 실패를 하게 되고,
그를 본 목격자까지 생겨 도망자처럼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선우가 1992년에 만나는 인물들.
박 선 우(아역)
남. 18세. 고등학교 2학년.
선우의 어릴 적 자신.
부잣집 아들에, 공부 잘하고, 인물 반반하고, 친구 많고, 잘 놀고,
항상 자신을 지지해주며 사랑해주는 부모님 덕분에 또래 친구들의 전유물인 사춘기, 반항과는 거리가 먼 그저 매일 매일이 신나고 재밌기만 하던 시절.
선우의 고민이자 목표는 영화처럼 멋진 첫사랑을 시작해보는 것 뿐이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 아버지를 졸라 삐삐를 손에 넣은 뒤 승승장구 날개를 달아
독서실과 도서관 등 활동 영역을 넓히며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에게 삐삐 번호를 뿌리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영화처럼 멋진 첫사랑의 상대로 손색이 없는 얼짱 여고생 한소라와 만나 데이트 약속까지 잡았다.
머릿속엔 온통 그녀와의 첫 키스를 성사시키기 위한 계획 뿐,
형과 아버지가 어떤 갈등을 빚고 있는지, 병원 경영권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데이트를 며칠 앞두고 소중한 삐삐를 잃어버리게 되고,
삐삐를 가져간 이상한 아저씨와 통화를 하면서 평온했던 선우의 일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이미 예정된 소용돌이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윤 시 아(아역)
여. 10세. 초등학교 3학년.
과거로 간 선우가, 정우의 일기장에 쓰인 대로 행적을 쫓다가 알게 된 여자아이.
형이 당시에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일로 아버지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는 걸 당시엔 전혀 몰랐던 선우는, 과거로 돌아가 형이 평생 그리워했던 그 여자, 유진을 찾아간다.
유진의 레코드샵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유진의 딸, 시아.
철없고 감성적인 엄마가 또 연하의 남자를 만나는 걸 알고 반항을 일삼는,
비만 되기 일보직전의 이 통통하고 말많은 여자아이가 어쩐지 웃기고 마음에 들었던 선우는, 이런 저런 일로 과거에 갈 때마다 자꾸 시아와 엮이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시아라는 이름을 유진은 끝끝내 개명해버렸고,
선우는 그녀의 진짜 이름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민영.
훗날 어머니를 따라 이민 간 이후,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주민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와 CBM 기자가 된다.
감수성만 가득한 사랑지상주의자, 생활력 없는 엄마가 너무 한심하고,
그래서 자신은 반드시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 되겠다며 큰소리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크리스마스 이브, 레코드샵을 찾아온 낯선 아저씨한테 완전 꽂혔다.
그 남자 직업이 방송기자라는 걸 알고, 갑자기 기자가 되고 싶어진, 엄마를 꼭 닮은 낭만주의자.
박 천 수
남. 47세. 외과의. 명세 병원 원장.
선우의 아버지.
대대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개인병원이었던 명세병원을 종합병원으로 키우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천재적일 정도로 명석하고 카리스마까지 갖춰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런 천재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치명적 결점, 독선과 아집 또한 그의 특징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가장 옳다는 확신에 전혀 흔들림이 없으며, 주변을 잘 믿지 못하고 늘 불안해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체크한다.
이런 사람의 치명적 결점이 또 하나 있다면,
자신의 판단력을 너무 믿는 나머지 한번 좋게 판단한 사람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신의 친구 최진철에 대한 무한신뢰를 갖고 있었고, 진철이 조만간 병원을 가로챌 것이라는 친지들이 경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오판은 어쩌면 진철의 자신보다 한참 아래로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키운 병원, 자신의 친구인 동업자, 자신이 콘트롤하고 있는 가족들이 앞으로 자신이 이끄는 방향대로 따라와 결국 모두 행복해지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밤, 정우의 손에 떠밀려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내 명희를 깊이 사랑하여 온실속의 화초처럼 보호하면서도 내면에는 깊은 증오심이 있다는 것은 명희만이 안다.
모두에게 엄격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살갑게 구는 둘째 선우를 몹시 편애해 정우에게 절망감을 안겨 준다.
한 소 라
여. 18세. 여고 2학년.
고등학생 선우가 당시에 열중하던 첫사랑 소녀.
휘날리는 긴 생머리와 눈같이 흰 피부가 매혹적인 얼짱 여고생으로 채팅으로 선우를 만나 금세 불이 붙는다.
자기가 예쁜 걸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공주노릇이 몸에 밴 타입.
어리지만 충분히 여우였던 소라는 선우의 나무랄 데 없는 스펙이 자신에게 훈장같은 역할을 해줄 것 같아 기꺼이 연애에 빠졌다가
선우가 사고를 당하고, 집안이 무너지게 되자 연락을 끊어버린다.
선우에게 포부 당당하게 선언했듯이 연극영화과에 진학.
졸업도 하기 전에 연예계에 화려하게 데뷔해 화장품 CF 모델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마약과 스폰서 등 문란한 사생활 문제로 은퇴한 후 매스컴에서 사라져버린 반짝 스타.
시 놉 시 스
9 주민영 결혼하자..! 오래는 너무 지겹고 딱 3개월만, 그리고 깔끔하게 헤어지는거야. 어때?
2012년 겨울.
CBS 방송의 12년차 기자이자 매일 밤 12시에 뉴스 나이트를 진행하는 앵커 박선우는
모처럼 휴가를 내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가 있는 휴양도시 포카라로 향한다.
선우는 두 가지 목적으로 이곳에 오는 길이다.
하나는,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원정대 취재를 위해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까마득히 어린 후배,
입사 첫해부터 숨길 줄도 모르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철없이도 열렬히 표현해 온 주민영을 만나기 위해.
다른 하나는, 소식이 끊긴 형 정우의 행방을 찾기 위해 고용했던 사설탐정이
이곳에서 정우와 비슷한 신원의 시신 자료를 찾았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짝사랑만도 아닌 것 같고, 그저 선후배 사이라기엔 분명히 묘한 선을 넘었는데
그렇다고 정식으로 애인으로 대해주지도 않는 선우의 태도에 늘 안달 나 있던 민영은,
공항에 마중나간 자리에서 선우가 대뜸 프로포즈를 하자 믿을 수가 없다.
늘 뭐에 쫓기는 인간마냥, 그저 일, 일, 일밖에 모르던 선우가 갑자기 자길 보러 히말라야까지 찾아온다는 것도 신기해 죽겠는 마당에
프로포즈까지?!
허나.. 그럼 그렇지. 감격스런 프로포즈 뒤에는 영 기분 나쁜 조건이 붙어있었다.
‘지겨우니 딱! 6개월만’ 연애하자는 것.
사람을 놀리는 건지 뭔지, 짝사랑이 불쌍해 짧은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선우의 석연찮은 프로포즈에 자존심 팍 상해버린 민영은 기쁘기는커녕 불같이 화가 치미는데.
잔뜩 부은 민영을 뒤로 하고 선우가 찾은 곳은 포카라의 작은 경찰서.
경찰은 선우에게 형, 정우의 유품과 사진을 내민다.
1년 전, 정우는 안나푸르나로 향하는 산간마을 부근에서 눈사태로 사망했고
시신은 여름이 되어서야 끔찍하게 부패된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선우에게 남겨진 건 유골도 없는, 초라한 유품 몇 가지.
때 묻은 20년 전의 가족사진과, 죽기 직전 들고 있었다던 히말라야 특산품인 듯한 싸구려 향 열 개.
그나마 그 중 하나는 부러져 엄지손가락만큼 길이만 남았을 뿐이었다.
선우는 말할 수 없는 허망한 마음으로 유품을 들고 호텔로 향한다.
1년 전, 정우가 정말 오랜만에 선우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정우는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에게 제법 큰 돈을 부탁했고, 선우는 두 말 없이 돈을 마련해주었다.
어디에 쓸 요량인지 묻자 정우는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었다.
선우는 형이 엄마처럼 정신이상이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는데,
정우는 동생에게 받은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여기까지 왔으니 결국 선우는 형의 죽음에 노잣돈을 얹어준 셈이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화재로 돌아가신 아버지, 정신이상으로 20년 가까이 정신병원 요양소에 계신 어머니,
그리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는지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오지로 방황만 하고 있는 형까지.
선우에게는 명절에 한번 눈을 마주치고 안부 물을 가족조차 사라진 지 오래.
그리움도 기대도 없는 그런 삶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해왔건만
막상 그 존재감 없던 형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선우는 무너진다.
선우가 왜 지금, 사설탐정까지 고용하며 형을 찾아야만 했는지, 형에게 무슨 말을 전하러 온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정우는 이미 1년 전 연기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날 밤, 호텔방에서 정우의 유품을 정리하던 선우는
형이 죽기 전 들고 있었다던 조각난 향을 라이터로 무심코 불 붙여본다.
짙은 향과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그 연기에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잠을 청하는데 잠시 후...
귀를 때리는 시끄러운 바람소리와 함께 오한을 느끼며 눈을 뜨고는 경악하는 선우!!
어두운 밤의 설산, 휘몰아치는 거대한 눈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공간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눈앞에 다가오는 거대하게 밀려오는 눈사태를 보며 죽는구나...! 생각을 떠올린 순간,
다시 눈을 떠보니 여전히 호텔방.
쓰러지는 바람에 꺼진 향이 마지막 연기를 태우고....
꿈을 꿨다 생각해버린 선우는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어느새 쌓인 흰 눈송이가 녹아내리는 것은 미처 보지 못한다.
국장님, 저는 곧 죽습니다. 그러니까.. 전 시간이 없어요. 젠장, 너무 바빠요.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선우가 진행하고 있는 뉴스 프로그램에
줄기세포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특허를 연달아 확보하며 지난 며칠간 언론을 뜨겁게 달군 명세병원 회장, 최진철과의 인터뷰가 잡히고.
선우는 내심 지난 1년간 별러왔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내심 흥분하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예정대로 생방송 뉴스는 시작되고 외국에 머물고 있는 진철과의 위성 대담을 침착하게 진행하던 선우는
도중에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민감한 질문들을 공격적으로 쏟아내다.
오국장도, 모든 스탭들도, 당사자 진철도 생각지 못한 폭로성 질문들에 미처 대응도 못 하는 사이
앵커석에 앉은 선우는 자신에게 오롯이 주어진 그 몇 분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한 인터뷰는 그대로 끝이 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오국장, 선우를 불러 사태를 해명하라 윽박지르는데 선우는 도리어 국장 앞에 사표를 내민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 달 전에 병원에서 뇌종양 선고를 받았고, 앞으로 길어야 1년도 못 갈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 곧 죽게 됩니다 국장님.‘
오국장은 생각지도 못한 선우의 답변에 놀라 굳어버린다.
몇 달 째 고약한 두통에 시달리던 선우는, 한 달 전 친구 영훈의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었다.
수술도 힘든 악성 뇌종양 4기. 정상적인 생활은 길어야 6개월이라는 말.
그 순간에 선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어머니.
아들도 못 알아보고 요양소에 20년째 있는 명희.
이제 자기가 죽으면 누가 저 불쌍한 여인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머니와 함께 떠오른 또 한 사람,
후배 주민영.
제대로 기자질 하려면 아직도 한참 먼, 데이트보다 회초리가 더 급한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5년 동안 한결같은 애정공세에도 거리를 두었던 민영이 그 순간부터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아직도 인연이 한참 많이 남았을 줄만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죽은 뒤의 어머니를 부탁하기 위해 형을 찾았으나 형은 무책임하게도 더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병원에 불을 내 아버지를 죽이도록 사주하고, 병원을 가로채고, 어머니를 미치게 만들고 형을 죽게 만든 최진철은,
벌을 받기는커녕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대통령보다 유명한 인물이 됐다.
그리고 민영에게 자신이 아껴뒀던 사랑을 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6개월도 안 남았다.
선우는 마음이 초조했다.
‘국장님. 죄송하지만 그래서.. 이런 식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절차를 밟기에는 전 너무 바빠요.’
오국장은 선우의 폭탄같은 선언과 사표, 그리고 그가 건네준 진철의 병원 비리 자료 파일을 보며 밤새 고민하고..
선우의 도발적인 인터뷰가 나간 직후부터,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섭게 들끓는다.
줄기세포와 관련된 또 하나의 대형 비리. 제2의 황우석 사태가 될 것인지에 대한 온갖 루머와 억측, 논쟁.
최진철의 비리와 국익을 둘러싼 찬반양론이 이미 거세지는 가운데,
오국장이 이제 이것을 앵커 한명의 개인적 실수로 마무리 지을 것인지 보도국의 기조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압박의 순간,
그는 결국 늘 믿었던 선우를 밀어주기로 한다.
선우에게 사표를 돌려주며 쓰러지기 전까지는 진행을 계속하라고 지시하는데
허나 오국장의 이런 결정은 노선이 다른 윗선들의 분노를 사, 오국장의 입지 또한 벼랑 끝으로 점점 내몰리게 된다.
그날 밤, 선우는 귀국한 뒤 팽개쳐놨던 정우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 향을 다시 발견한다.
향을 피워놓고 잠시 지친 몸을 쉬던 선우는 잠시 후.. 귀에 익은 목소리에 멈칫한다.
말문을 닫은 지 20년이 넘은, 요양소에 있는 엄마, 명희의 목소리가 방 밖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일어나 방을 나갔다가 그대로 굳어버린다.
정신이 나가기 전의 아름다웠던 엄마, 40대의 명희가 어렸을 적 기르던 수족관의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선우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이성도 잃고,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그리웠던 엄마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이때 나타나는 또 한사람.
형이다!
20대의 젊은 정우는 선우를 강도로 오인하고는 다짜고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얼결에 피해 도망가던 선우는 눈 깜짝할 순간, 자신이 다시 원래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깨닫는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연 선우.
명희도, 수족관도, 정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온기없는, 적막만이 감도는 차가운 거실이 눈앞에 보일 뿐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핏방울.
수족관 유리파편에 찔렸다고 생각했던 선우의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떤 해석이 더 필요하겠는가.
환각, 환청..!
영훈이 일찍이 경고했던, 병이 악화되면 일어날 증상들이 벌써 닥친 것이다.
영훈은 진작부터 입원해 약물치료를 받을 것을 강권해왔지만 선우는 그런 식으로 남은 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 지겹도록 많이 남았다 여기고 미뤄왔던 일들을 이제야 시작한 선우.
이제 겨우 최진철에게 반격을 시작했을 뿐인데,
남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민영은 아직 안나푸르나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는 건가?
겨우 마음을 다잡아 자신을 지탱해오던 선우는 다시 혼란과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8 이건 환각...?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진짜 지금 과거에 와 있다구..?!
그런데 다음날.
집 청소를 해주는 아주머니의 전화 한통과 함께 선우의 인생은 다시 예측할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선우 옷 주머니에 든 삐삐가 계속 울린다는 아주머니의 전화.
삐삐...?
이제 그 이름도 쓰기 어색한 단어. 삐삐라니? 삐삐가 사라진 지 이미 언젠데?
삐삐에 찍힌다는 전화번호를 눌러보니 게다가 결번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선우는, 순간, 자신이 밤에 봤던 환각을 떠올리고 깜짝 놀란다!!
과거의 자신의 방에서 자신이 얼결에 손에 쥐었던 검정색 모토로라 삐삐..?!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이상하다는 의심을 하는 선우는 그제야 향과의 연관성을 떠올리고..!
선우는 향에 든 마약 성분 때문에 자신이 환각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며
방송국 분장실 안에서 시험 삼아 향에 불을 붙여보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시대의 방송국 분장실에 와 있는 선우....!
뉴스 시작 5분을 남기고 사라진 선우를 찾아 온 보도국이 난리가 난 그 시각,
선우는 1992년의 방송국에 와 있다.
그리고 손에 든 삐삐에 다시 찍히는 전화번호.
지금은 찾기도 힘든 구식 구내전화를 들고 전화번호를 찍어보는 선우,
분명히 그 번호는 결번이었는데 이번엔 수화기 너머 남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 잃어버린 삐삐 주인인데 누구세요?’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누구지?
‘그쪽 이름이 뭐죠?’
‘전 박선우인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
그래...! 이 목소리는,, 이 목소리는, 내 어릴 적 목소리였어...!
그 순간 향이 꺼지면서 선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방송시작 1분 전에 가까스로 스튜디오에 나타나 진행을 해 방송사고를 막는 선우.
이건 꿈도 환각도 아니다...!! 이건 분명히...!!!
집으로 달려가 네팔에서 온 뒤로 내팽개쳐 뒀던 형의 일기장을 찾아내 암호처럼 쓰여진 메모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는 선우.
그제야 형이 왜 일생을 오지를 헤매며 뭔가를 찾고 다녔는지,
형이 왜 죽는 순간 이 향을 들고 있었는지 알게 된 선우.
이건, 이 향은, 믿을 수도 없고, 믿기지도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타임머신....!!
그리고 형은..., 이 향을 통해 가족 모두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가 인생을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선우는 남겨진 메모를 근거로 향이 다 타서 재가 되는 동안 과거로 갔다온다는 걸 알게 된다.
향이 재가 되는 시간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분 내외
그리고 정확히 20년 전의 같은 장소, 같은 날짜, 같은 시각으로 가도록 만든 향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20년 전 겨울이라면,
아버지가 병원에서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로 돌아가셨고, 형은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떠났으며, 어머니가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던 그 겨울이 아닌가.
지금 날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가슴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하는 선우.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향에 불을 붙인다.
7 내 인생 최고의 해, 그리고 내 인생 최악의 해 1992년...!
1992년 12월, 서울.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전국을 휩쓸고 최진실이 대한민국 남성들의 로망으로 떠올랐고, 비로소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삐삐가 신세대 문화를 대변하던 그 시절.
고등학교 2학년 박선우는 얼마 전 아버지를 졸라 얻게 된 삐삐를 가지고 자신의 최근 목표이자 소망을 이루고자 고군분투 중이었다.
선우의 목표이자 소망은 바로 영화처럼 멋진 첫사랑을 시작해 보는 것..!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에게 삐삐 번호를 뿌리며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마침내, 영화처럼 멋진 첫사랑의 상대로 손색이 없는, 옆 동네 얼짱, 한소라를 만났고,
며칠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서울극장에서 보디가드를 보며 성공적인 첫 데이트를 마쳤다.
이제 선우의 다음 목표는 소라와의 첫 키스..!
대학로에서의 두 번째 데이트를 약속하고 그 날을 디데이로 잡은 선우는
소라에게 어떻게든 어필해보기 위해 되지도 않는 기타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와 형 사이에 요즘 냉기가 흐르고, 가끔씩 큰소리가 오가는 거 같지만 그게 선우에게 뭐가 중요하랴.
중요한 것은 오직 소라가 뻑 갈 만큼 멋지게 기타를 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 뿐.
1992년 12월 28일.
선우는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귀를 뚫고 근사한 컬을 말고 나온 진짜 대학생 같던 소라와 대학로에서 만나, 어설픈 대학생 흉내를 내며 스테이크를 썰었던 날,
마로니에 공원 한 켠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한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결국 소라와의 첫 키스를 달성하고 날아갈 듯 들떴던 그날 밤,
연극영화과를 지망할거라며 선우에게 같은 과에 가서 같이 학교를 다니자는 소라의 말에 혹해,
철없는 흥분에 들떠 아버지에게 연극영화과에 가겠다는 돌발 선언을 하러 병원에 찾아간 선우는
원장실 문을 여는 순간 폭탄처럼 터져 나오는 거센 불길에 소스라친다.
불은 금세 번져 병원 1층을 다 태우고야 진화되었고 아버지의 시신은...
불에 타 유골 수습조차 어려운 정도였다.
왜 불이 났는지, 불이 나기 전에는 아버지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던 병원에 증인은 없었고.
병원 소유권을 둘러싼 다툼의 주인공, 악랄하기 그지없는 동업자 최진철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모두 의심했으나,
선우도 불길에 다쳐 몇 달을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증거를 잡을 수 있는 모든 정황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모두 사라져버렸다.
선우가 퇴원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아들을 못 알아보기 시작했고, 엄마는 더 이상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선우의 진짜 엄마는 그렇게 사라졌다.
정우는 레지던트를 그만두고 쉬고 싶다며 떠나버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정우는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황홀한 첫키스를 나눴던 소라가 연락을 끊고
홀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하이힐과 게스 청바지를 입고 락카페를 누비며 대학생활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그 시간 동안,
남은 재산이라도 지키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서류들을 들고 변호사들을 쫓아다녀야 했던 선우는,
더 이상 의대에 가라고 강요하는 아버지 없이 자신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어머니를 정신병동에 입원시키는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선우는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뒤를 쫓으며,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고 돌아온 선우.
자신이 타임머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명명백백하고
하필 20년 전, 1992년의 겨울로 돌아간다는 건, 이 향을 구하는 데 평생을 건 형의 의도였으리라.
2012년의 선우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죽어가고 있고,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사흘이 남았고
향은 아직 여섯 개나 남아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어머니는 정신병동에 갇힐 일이 없었을 것이다.
형이 의사의 길에 회의를 느끼고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거로 가서 상황을 바꿔놓는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의 목숨을...!
선우가 이 시점에서 정우가 필생을 걸었던 일을 대신 해내야만 하는 것은 이제 예정된 운명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한 종류의 삶이 다시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우는 가슴이 떨렸다.
신이 어째서 최악을 패를 내게 던져놓고 이번엔 또 다시 행운의 조커를 내미는지 모르겠지만
선우는 그 순간 어떤 종류이든, 종교라도 갖고 신에게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선우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판을 짤 기회가 온 것이다.
이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문을 연 선우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차려 입은, 짐가방을 끌고 서 있는 민영을 보고 놀란다.
‘뭐야....? 너..?
‘3개월만 결혼하자면서요. 해요 결혼. 피차 바쁜데 결혼식 생략하고 오늘부터 신혼여행이라 치자구요.’
거침없이 들어와 선언하는 민영이다.
당신은 정말 개자식이야... 그치만 어쩔 수가 없어. 난 늘 선배한테 약하니까. 연애해요, 3개월. 평생 후회할 지도 모르지만..
선우가 서울에서 연달아 터지는 믿기 힘든 사건들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동안,
민영은 전화통화도 하기 힘든 해발 4000미터 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선우가 찾아와 했던 말, 눈빛, 표정들을 되씹으며 고민했다.
까칠하고 얄짤없는 평소의 선우가 아니었다. 단지 형의 죽음 때문만도 아닌 거 같았다,
며칠을 찜찜해하던 민영은 결국 서울의 영훈에게 전화를 하고, 그가 얼마 못살거라는 말을 듣게 된다.
.... 개자식...!!!!
민영이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 내뱉은 말.
5년 동안 바라만 보게 해놓고, 다정한 말 한번도 해준 적 없이, 늘 애 취급,
그런 인간이 갑자기 찾아와 연애하자 할 때 그 마음이란 게, 곧 죽으니까였어..?
죽기 전에 불쌍하니까 한번 사겨주자? 나를 뭘로 보고...?! 이 개자식...! 끝까지 개자식인 인간...!!
민영은 선우에게 위성전화로 퍼부었다.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그냥 혼자 조용히 가라’는 잔인한 독설까지 함께.
하지만 그런 말을 뱉어내고, 더 괴로운 것은 민영이었다.
그가 진짜로 이 세상에서 곧 사라진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지..?
그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남자로서, 그리고 멘토로서, 선우는 이미 민영 인생의 중심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아니 그건 이미 5년 전, 입사 첫날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결정되어 버렸다.
그녀는 그 순간 이후 그의 모든 것을, 그 지랄 맞은 단점까지도 사랑해왔던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하산할 때 민영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다.
민영은 이제 그와 함께할 것이다.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고, 정말 끝이라면 그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선우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민영을 보는 선우는 히말라야에서의 그 흔들리던 눈빛이 아니었다.
지난 5년간 줄곧 봐왔던 자신감과 장난기 담긴 표정으로 돌아간 선우.
‘연애하자구 3개월?’
‘그래요 3개월’
‘3개월이 아니라 30년이 될 지도 모르는데 괜챃아?’
‘.....?’
‘아니, 안 괜찮아도 소용없어. 네 발로 들어왔으니까 이제 나갈 생각 마. 넌 내 낚시에 완전히 걸렸어 멍충아’
‘그게 무슨...’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의 키스가 이어지고 민영은 생각을 놓아버렸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리라 짐작해버리며.
치료를 받겠다는 말이겠지.
잘됐다, 내일부터 끈질기게 달래서 병원에 입원을 시킬 거야, 이렇게 사라지게 놔둘 순 없어.
그러나 선우의 해결책은 치료가 아니었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 선우, 어린 자신에게 훗날 두통이 시작되면 바로 병원에 가 정밀검진을 받으라고 충고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 해결책인가,
물론 의심 많고 남의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자신을 설득해 훗날까지 그 말을 염두에 두게 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만,
가망도 없는 수술을 받는 것 보단 100배쯤 확률이 높은 해결책이었다.
민영과 함께 밤을 보내고,
품에서 잠이 든 민영을 보며 선우는 지금의 이 삶을 놓치지 않겠다 생각했다.
너무 늦었지만, 또 아직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다.
그는 살아날 수 있고, 민영과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6 인간에게 불을 내준 프로메테우스처럼, 감히 운명을 바꾸려 한 선우에게 주어진 신의 형벌...?!
형의 다이어리를 꼼꼼히 살피던 선우는 형이 두 가지 사건을 되돌리고자 열망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92년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에는 아버지의 죽음 뿐 아니라 또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잡고 싶었던 여자에 대한 기억..
그녀가 떠나도록 방치했던 날에 대한 뼈저린 후회.
선우는 당시 정우에게 여자가 있었던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선우가 겨우 고등학생일 때 형은 이미 30대를 바라보는 어른이었고, 정우는 늘 집에서 과묵한 편이었다.
향을 피워 과거로 가 정우의 뒤를 밟는 선우.
선우는 포장마차에서 홀로 흐느끼는 정우를 보게 된다.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정우가 떨어뜨린 한통의 편지.
차마 보내지 못한 그 편지엔 유진을 향한 정우의 절절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종로 뒷골목의 레코드점. 중고 음반사를 운영하는 여자, 유진.
애 딸린 연상녀.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여자, 게다가 음악을 하던, 불안정한 감성의 소유자.
왜 형이 비밀로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런 여자를 며느리로 용납할 리가 없었다.
선우가 찾아갔을 때는 이미 정우가 유진에게 결혼 하자 했었고, 그걸 알게 된 아버지가 유진을 찾아가 폭언을 퍼부었으며,
상처 받은 유진이 홧김에 가게를 정리하고 이민을 가기로 결심을 끝낸 상황이었다.
미국으로 떠난다는 통보에도 정우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형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형은 늘 아버지를 두려워했으니까.
크리스마스 이브, 유진이 이민을 떠나기로 예정돼 있는 그 날,
레코드점을 찾아가 정우가 전하지 못했던 편지를 놓고 오는 선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그럼 형이 방황하다 그리 비참하게 죽지는 않겠지.
두 사람이 만나 오해를 푸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선우는, 안도하며 떠난다.
그런데... 어느새 꽤 친해진 유진의 딸, 시아가 떠나는 선우를 쫓아오며 하는 작별인사,
‘아저씨, 제 이름 시아 아니거든요? 그건 예전 이름이고, 지금 이름은 민영이예요.’
‘... 민영?’
‘윤민영이요!’
그때서야, 멀어지는 저 통통한 어린 소녀의 눈빛이 어쩐지 민영과 닮은 듯하다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선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선우는 돌아오자마자 형의 생사부터 확인하는데...,
그렇게 바랬던대로 형은 살아있었다..!
정우는 의사를 그만두지도 않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진과 결혼했다.
선우가 살고 있던 아버지의 집에는 이제 형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죽은 형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형이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자신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
그거만으로도 선우는 다 얻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형의 건강한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전에, 자신을 반기는 한 여자를 보고 그 자리에 굳는다.
성장한 시아.
유진의 딸이 눈앞에 서 있는데.. 그녀는 분명 자신의 여자, 주민영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시아라는 이름을 유진은 끝끝내 민영으로 개명했고,
그 윤민영은 미국으로 이민 가 엄마가 재혼한 후, 새 아버지의 성을 따 주민영이 되었음을,
그러니까 형이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 선우가 사랑하는 여자임을 그 누구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이제 선우가 그 사실을 항변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민영은 이제 윤시아도 주민영도 아닌, 형의 수양딸 박민영이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 사실은 20년의 세월이지만- 선우와 민영은 법적인 가족이 되어 있었다.
친해지기 힘든, 영 어색한 관계의, 그렇지만 분명한 삼촌과 조카.
이것이 타임머신을 갖게 된 선우가 최초로 행한 작은 선의의,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댓가였다...!
거기에 더해.. 달라지지 않은 형.
정우는 결혼과 함께 도망갈 생각을 버리고 의사의 생활을 지속했으나, 그건 그저 껍데기였을 뿐.
형은 최진철로부터 아버지의 병원을 지키지 못했으며, 여전히 우울했고,
수술을 하는 외과의면서도 술에 쩔어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를 잊은 듯 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을 뿐, 아버지가 죽은 뒤 여전히 빗나간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며칠이나마 희망을 꿈꾸었던 선우는, 다시 미칠 듯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형이 살아있음에 대한 댓가..? 그것을 내가 치러야 한단 말인가?
형이 원하는 여자를 얻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평생 가족으로 대해야 한다고..?
이 행운의 패는 결국 신의 축복이 아니라 신의 저주였나?
선우는 아무도 모르는, 말 할 수도 없는, 혼자만의 고통 속에 며칠을 보내며
원래의 목적이었던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신념마저 흔들린다.
다시 가서 아버지를 살리면, 또 어떤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이제는 희망보다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이다.
혼란 속에 독배와도 같은 향을 차라리 없애버리는 게 낫겠다 생각했던 선우는,
그러나 정신병원에 갇힌 엄마를 보고는 마음을 바꾼다.
형처럼 엄마를 살릴 기회일 수도 있는데, 그걸 차마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기록과 신문과 은퇴한 간호사들을 찾아 다시 증언을 듣고
화재 발생 시각을 체크하고, 아버지를 언제쯤 만나 사고를 미리 막아야할지 시간을 예측하고 그날을 기다린 선우는
마침내 2012년 12월 28일 밤 10시.
옛 병원 자리를 찾아가 향을 피운다.
5 비밀은 비밀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1992년 12월 28일 밤 10시.
선우는 아버지의 원장실로 향하다가 아버지가 누군가와 이야기하던 소리에 멈칫한다.
역시 혼자 있던 게 아니었어.. 최진철...?
그러나 방에 가까이 갈수록 커지는 그 목소리는... 명희였다.
엄마....? 엄마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다시 떨며 원장실 창을 들여다보는 선우.
그 순간, 선우는 할말을 잃고 만다.
격렬한 다툼과 함께 아버지가 형을 집기로 폭행하는 모습.
그것은 선우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말,
‘결혼? 그래 하고 싶으면 해! 피는 못 속인다더니!! 내가 너한테 이 병원을 물려줄 줄 알았냐? 누구 자식인지도 모르는 놈한테 내 병원을 물려주라고? 그럴 순 없어!! 이 병원은 선우 몫이야, 당신, 정우가 내 아들이 아니라는 걸 내가 모르고 있었을 줄 알았어?!! 어떤 놈의 자식인지도 한번 맞춰볼까? 그게 누구인지?! 당신이 얼마나 요망한 여자인지?!!’
!!!!
감정을 제어 못하고 격분한 아버지가 달려드는 순간, 아버지를 거세게 밀친 누군가의 손.
정우였다.
실랑이 끝에 덩치 큰 아들에 밀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 크게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가족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고 만다.
선우가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와, 떠나버린 형에게 20년간 듣지 못했던 비밀.
아버지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라 타살이었다.
그리고 범인은 바로 형이었던 것이다.
난장판인 사무실, 극심한 충격과 혼란에 빠져 굳어 원장실을 뛰쳐나가버린 형.
용서할 수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 미친 듯한 분노로 정우의 뒤를 쫓아,
어쩌면 살인이라는 게 이렇게 저지르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형의 뒷덜미를 잡는 순간,
향은 다 타고, 선우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역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떠밀려 불에 타 사라져버렸고
엄마는 정신분열로 여전히 병동에 갇혀있다.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뛰어오던 간호사가 스치던 선우를 기억해내고 경찰에 방화 용의자로 자신을 지목한 것이다.
신문에 난 인상착의 몽타쥬는 정확히 선우와 일치했고
이제 선우는 1992년에 아버지를 죽인지도 모르는 방화용의자가 되어버렸다.
이제야 형이 떠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형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자신에게 의대에 가라 강요했던 이유도,
뛰어난 레지던트였던 큰아들을 아버지가 이상할 정도로 냉대했던 이유도,
형을 보는 엄마의 눈빛이 늘 슬퍼보였던 이유도.
몇 년만에 만난 형이 선우에게 했던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분노, 좌절감, 배신감을 안고 형을 찾아간 선우.
다짜고짜 죽일 듯 패는 선우,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형을 패고 또 팬다.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 집에서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 수가 있어, 이 개자식아!! 넌 인간도 아냐!!
정우는 선우가 그걸 어찌 알았는지, 놀라 경악하고.
정우는 무너지며 울부짖는다.
‘어머니가, 엄마 부탁이었다!!! 나야말로 사는 게 사는게 아니었어!!’
....!!
그날 밤, 그 현장에 있던 명희는,
무조건 수습을 해야겠다는 본능에, ‘불을 피워야 해.. 정우가 잡히면 안돼.. 선우가 알면 안돼..’중얼거리며 라이터를 찾아 불을 지폈다.
화재 사고는 엄마가 두 아들을 위해 선택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명희는, 남편과 평화로운 삶을 잃었지만 아들들까지 잃을 순 없었다.
명희는 뒤늦게 집에 돌아온 정우에게 입막음을 시켰다, 네가 감옥에 가면 자신이 죽을 거라며.
두 사람은 이제 공범이 되었고, 그 순간 함께 지옥불에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본능으로 일을 수습하고 나서, 그 일을 감당하기엔 너무 여렸던 명희는 미쳐버렸다.
동생 앞에서 울부짖는 정우.
‘미안하다... 미안하다 선우야...’
그래, 형은 나한테 미안해해야 돼.
형은 나한테서 아버지를 뺏어갔고, 다정한 어머니를 뺏어갔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어린 나를 남기고 떠나갔고, 겨우 시신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엄한 최진철을 향한 복수심으로 내 청춘을 낭비하게 했고,
저주받은 타임머신을 남겨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만들었고,
사랑했던 내 가족들 모두를 미워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내 여자를...!
더 이상 말을 못 잇는 선우.
형은... 내 인생을 너무 망가뜨렸어...
선우가 어쩌지 못하고 나가버리고 나서, 정우는 무너지면서도 그 순간, 20년 만에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낀다.
이 순간이 오기를 사실은 너무 오래 기다렸던 것일까?
정우는 이제야 늪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4 취하신거예요? 전 주민영이 아니라 박민영이죠. 아니.., 넌 주민영이야. 넌 기억 못하겠지만.
정우의 집을 나와, 본능에 이끌려 무작정 민영을 찾아가는 선우.
다른 방송국에서 근무 중인 기자 민영은, 갑자기 찾아온 선우에 놀란다.
존경하는 선배, 핏줄은 안 섞였지만 내심 자랑스러웠던 가족, 내가 기자를 꿈꾸게 만들었던 사람,
왜 결혼을 안하는 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1년에 몇 번,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것이 다 인지라 그런 질문도 던지기 힘든, 그런 가족.
그런 선우가 한밤 중에 자신을 찾아오자 민영은 당황한다.
‘어떻게 오셨어요? 혹시 아빠한테 무슨 일이..?’
막상 민영을 보자, 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저 애한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달콤했던 키스의 기억, 서로의 걱정에 잠못 이루던 밤들,
함께 일하며 울고 웃었던 추억들을...
선우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건강해질 수 있지만,
막상 남은 긴 삶을 어찌 보내야할지 주체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주민영...’
‘네? 주민영이요? 취하셨어요? 전 박민영이죠. 아, 물론 어릴 땐 윤민영이었지만.’
‘아니, 넌 주민영이야. 기억 못하겠지만.’
네....?
거기까지.
갑자기 찾아왔던 선우는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다시 사라지고,
선우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 민영은, 너무 당황스러우면서도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것처럼 가슴이 아려온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주민영이라니...?
그날 밤,
선우는 남은 네 개의 향을 들고 망설인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를 살릴 기회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형을 응징한다고 아버지가 돌아오실 리도 없다.
그의 가족은 그저, 이렇게 깨지게 되어 있었던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은 마치 그의 희망을 비웃기 위해 타임머신이라는 패를 던져준 듯 했다.
맞다. 평생을 방황하다 히말라야에서 눈을 감는 것이 형에게는 그나마 괜찮은 결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동생에게서 이런 경멸에 찬 저주를 듣게 될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렇다면 민영이는..?
형 인생을 마음대로 바꿔놓고 이제 와 형에게서 또 아내마저 뺏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고통스럽지만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민영을 다시는 영원히 품에 안을 수 없다 해도.
선우는 결국 향을 부러뜨려 모두 쓰레기통에 버린다.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운명을 바꿔야겠다는 희망도, 모두 버린 것이다.
그런데...
3
2
1
0 .... 그 후의 이야기
죽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시아.
홀연히 나타나 홀연히 사라진, 그 아저씨가 없었으면 그녀는 당연히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고 민영은 그 후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기자라고 했지만 모든 언론사에 다 물어봐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엄마는 시아가 또 상상 속 이야기를 지어냈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아는 그가 자신을 구하러 미래에서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미래의 연인이라는 것도.
그가 떨어뜨리고 간 전화기처럼 생긴 이상한 물건을 시아는 소중히 간직했다.
언젠가 이것과 똑같은 물건이 세상에 나오는 날, 그때가 그 아저씨와 재회하는 날이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 후 엄마는 시아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는 동안
마트 계산대에서 힘들게 일하던 엄마는 기적처럼 착하고 성실한, 상처한 변호사를 만나게 됐고, 재혼했다.
그리고 대학생이던 어느 날, 한국방송을 비디오로 빌려보던 민영은,
마침내 뉴스 화면 속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그 남자를 발견했다.
CBM 기자 박선우...!!
그 후 오로지 CBM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튀어온 민영은 결국 합격했고,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만난 박선우에게 15년을 기다려온 뜨거운, 열렬한 포옹을 했으나, 그때 그의 눈빛은, 한마디로 이랬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똘아이야?’
당연하시겠죠.
당신은 아직 내가 당신 인생에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도 못할테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5년만 지나면
내가 아무한테다 들이대는 똘아이가 아니라 20년 간 한 남자만을 기다려온 몹시도 지고지순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될테고
나 없는 인생은 의미 없다며 당신 스스로 찾아와 나의 노예가 될테니까.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날 구하기 위해 수십 년을 건너뛰어 기꺼이 목숨을 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난 열심히 일하며 그가 무릎 꿇고 프로포즈할 때를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 참,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며 두통약을 찾기 전에, 때려눕혀서라도 건강검진을 받게 하는 건 절대 잊지 않으리라..!
9개의 향. 그리고 9가지 법칙
1, 향을 태운 뒤 연기를 맡으면 과거로 이동한다.
2, 정확히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
3, 향을 피운 장소와 동일한 장소의 과거로 돌아간다.
4, 향이 재가 되는 동안 시간여행이 가능하며, 재가 되는 시간은 대략 30분 내외이다.
5, 향이 모두 타면 자동으로 현재로 돌아오며 도중에 시간여행을 끝낼 수 없다.
6, 향을 태운 장소의 현재로 돌아온다.
7, 시간여행자의 신체가 접촉되어 있는 의류와 물품들도 함께 시간을 이동한다.
8, 시간여행을 하는 과거에서의 30분은 현재에서도 동일하게 흘러간다.
9, 시간여행을 하는 동안 현재의 육신은 사라지며, 여행이 끝나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