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사(多率寺) 소풍길을 다시 걸으며
다솔사를 무려 45년 만에 찾았다.
다솔사는 경남 사천시(泗川시) 곤명면(昆明面) 용산리(龍山里) 이명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이절은 부산 금정구 청룡동(靑龍洞)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末寺)이다. 말사(末寺)란 큰집 역할을 하는 본사(本寺)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을 말한다.
다솔사의 사찰 규모는 작지만 신라 지증왕 12년(511년)에 연기(緣起) 조사(祖師)가 영악사(靈嶽寺)란 이름으로 처음세운 절이라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의 가람배치(伽藍配置)는 탑이나 금당(金堂) 강당(講堂)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는 불교의 종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금당(金堂)이란 말은 본존불(本尊佛)을 모셔놓은 가람(伽籃)의 중심 건물 즉 대웅전(大雄殿)을 말한다.
이절은 필자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에는 그의 해매다 이곳으로 소풍을 갔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려운 시절이라 점심은 대부분 주먹밥을 뭉쳐서 보자기에 싸들고 뒤꿈치가 떨어진 검정고무신을 신고 40십리길 자갈 신작로를 걸었다.
가정형편이 괜찮은 학생은 멸치볶음이나 달걀을 삶은 벤또(일본어べんとう辨當→도시락)를 가져온 학생도 있었다. 소풍가는 날은 마냥 즐거워 도시락 내용이 문제가 될게 아니었다.
또 음력 3월 3일 삼짇날(重三)에는 누님들을 따라 다솔사에 “물맞이”를 갔다.
삼짇날에 절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로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면 땀띠도 않나고 더위를 안탄다는 것이다. 물맞이 뒤에는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지지는 꽃전(花煎화전)을 부쳐 먹었다. 그날의 즐거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솔사에 소풍을 자주가면서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최범술(崔凡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김동리 김법린(金法麟)등의 이름을 자연히 알게 되었다. 어릴 때야 그냥 선생님이 설명하여 주신대로 이름만 외울 뿐이었는데 나이들 면서 이분들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게 됨에 따라 다솔사는 필자의 일생에 소박한 추억이 되었다.
최범술(崔凡述1904.~1979)은 다른 이름을 최영환(崔英煥)이라고도 하며 법명는 효당(曉堂)이다. 경남 사천(泗川)출신으로 1916년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면서 이 절과 인연을 맺었다. 선생을 먼빛으로 간혹 뵙기도 하였지만 그분이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철이 들면서 알았다. 선생은 독립 운동가며 승려요 정치인이다. 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의 일본 왕 암살계획 때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폭탄을 운반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용운(韓龍雲)의 불교계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에 가입하여 독립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해인사 주지를 거쳐 제헌의원을 지낸 분이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너무나 유명한 분이므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만해(萬海) 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이절에서 수도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어린 시절 일찍이 다솔사 때문에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얼굴한번 보지 못한 인연(因緣)이었는지 고교시절 일찍이 “님의 침묵”을 외었고 한시(漢詩)를 수집하고 성북동 만해한용운심우장(萬海韓龍雲尋牛莊)을 지금도 찾고 있다. 아쉬운 것은 대양루에 만해선사가 쓴 한시가 걸려 있는 기억이 나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김동리(金東里)선생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유학자이며 본명은 김시종(金始鍾)이다.
김동리(金東里)의 “동리(東里)”는 경주시에 있는 동네이름으로 필명(筆名)이며 아호(雅號)는 산인(散人)이다. 산인(散人)이란 뜻은 “세상일을 멀리하고 한가로이 사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동리(東里)를 아호(雅號)로도 생각 했다고 한다.
김동리는 이곳 다솔사에서 그의 주옥같은 작품인 “황토기” “역마” “등신불”을 이곳에서 썼다. 김동리 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등신불”을 이곳에서 쓰게 된 동기는 만해 한용운과 김동리의 형님인 김범부가 평소에 친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분신공(焚身供)을 한 승려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아 소설로 집필하여 발표 했다고 한다. 분신공(焚身供)이란 자기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바치는 것을 말한다.
김동리(金東里)선생은 문단에서 이름을 세 개나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호적명은 김창귀(金昌貴)로 되어있고 가문(家門)의 족보(族譜)에는 김창봉(金昌鳳)이고
김시종(金始鍾)은 아명(兒名)이면서 본명(本名)이고 김동리(金東里)는 필명(筆名)라고 하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작품 당선을 거듭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백로”를 1934년에 동아일보에 발표 할 때 이름을 김창귀(金昌貴)으로 하였고
“화랑의 후예”를 1935년에 중앙일보에 발표 시는 김시종(金始鐘)으로
“산화”를 1936년에 동아일보에 발표 시는 김동리(金東里)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또 다솔사(多率寺)에 남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본존불(本尊佛)을 모신 금당(金堂)인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현판 글씨는 필자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신 스승인 도연(陶然) 김정(金正)의 글씨다. 도연(陶然)선생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통영출신으로 영남의 서예대가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선생의 제자이다.
우리가 절을 찾게 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곳이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면 “대웅보전(大雄寶殿)” 이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절마다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 각 다르기 때문에 본전(本殿)의 이름도 각각 다르다. 참고로 간단히 설명을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석가모니불상을 중심에 두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봉안한 것이다. 마곡사(麻谷寺)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대표적이다. “大雄寶殿”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글씨로 전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절이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舍利)와 정골(整骨)을 나눠서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보궁,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5대 성지로 꼽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극락전(極樂殿)-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는데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봉안하고 있다. 영주 부석사(浮石寺)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약사전(藥師殿)-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상을 중심으로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이 좌우로 봉안한다. 양산 통도사가 약사전(藥師殿)이다.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하는데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배치하고 있다. 설악산 낙산사(洛山寺)가 원통보전(圓通寶殿)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화엄전(華嚴殿) 또는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하는데 불전(佛典)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을 중심으로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과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좌우에 봉안하고 있다. 해인사(海印寺)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