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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23) 다윗의 인구조사(1) 역대상 21:1-14
본문에서 저희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인구조사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징계하시면서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뜻 생각해보기로 왕이 자기의 권한을 가지고 인구조사를 해서, 세금도 매기고 군대도 선발하고 하는 것은 국정을 운영하면서 필요한 일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모든 행정의 기반을 닦는 일이 인구조사인 것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의 숫자는 어떻게 노인들의 숫자는 어떠한지, 그리고 얼만큼 세금을 걷어서 어떻게 지원을 하고 도움을 줄 것인지 뭔가 기초가 되는 자료가 있어야 이 모든 일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진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 인구조사를 싫어하셨고, 왜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내리셨는지,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인구조사는 무엇일지,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진정 자유한 삶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를 해보아야겠다는 충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에 대한 충동이 욕구가 얼마나 강했든지, 다윗은 신하들이 반대하고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10개월이 걸리는 인구조사를 감행하고야 맙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대상21:1-2)
다윗이 인구조사를 감행한 시기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방대한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주어진 다윗의 노년의 시기이거나, 다윗이 한창 더욱 힘을 내어 주위 나라들을 정복해 나갈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더 많은 군대를 소집해 더 큰 화력으로 전쟁을 하고자 했던 것일테니 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까지 다윗이 해왔던 전쟁은 결코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정복하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했던 나라들은 모두 다윗을 먼저 공격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악한 나라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오랑캐, 왜구들 같은 가만히 있는 다윗과 백성들을 수탈하고 노략하는 민족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방어일변도의 전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전쟁이었고, 다른 사람들, 이방민족들로부터도 칭송과 존경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전쟁을 하다보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매번 방어만 해야하는가! 다른 방식의 전쟁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을까요? 기왕 해가 돌아오면 왕들이 출전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고, 힘도 있고, 실력도 있으니, 깔짝 깔작 대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만 정복해서 조공을 받느니, 저 큰 나라들도 다 정복해서 우리의 깃발 아래 두면 어떨까, 천하의 이스라엘이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지, 농경지는 적고 산과 광야만 가득한 이 좁은 땅덩어리를 벗어나 다른 땅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정복욕이 생겨났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안 그래도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역사해주시는 승리를 경험한 다윗, 어느 순간 그에게도 나라의 군사력을 정확하게 한번 확인해서, 다른 여러 전쟁 영웅들처럼 주위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받으며, 이름을 떨치는 그런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이 이런 충동을 받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욕심, 개인적인 야망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보게 됩니다. 사무엘하에는 평행본문(24:1)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오늘 이스라엘의 범죄함 때문에 오늘 다윗이 이러한 충동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희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지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거룩한 뜻이 아닌,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늘 목이 곧은 백성들, 늘 저들을 지키고 일끌고 지키는 주인을 향해 뒷발질 하는 이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 왕을 세워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철저하게 당신의 뜻 가운데만 살아가는 다윗을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고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울이 죽은 이후에도 무려 7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다윗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인간적인 통치를 주장하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곧바로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로 다 붙었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참 좋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러분, 그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법과 기준과 말씀대로가 아닌, 사람들의 욕심과 유행과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려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정해주신 안전하고 아름다운 구역을 넘어서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위험한곳 금지된 곳, 위험한 일, 금지된 일을 늘 소망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마치 저 최초 인간 아담때부터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어기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주신 복을 하찮게 여기고, 지겹게 여기고, 불편하게 여기고,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인간적인 마음,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피력하고 살기 시작했을 때, 은밀하게 하다가 이제는 대놓고 그 마음을 비치고 표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오늘 이들을 치시기 위해 다윗에게 욕심을, 그리고 교만을 심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지도자들도 그러하지요? 유권자들의 뜻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요구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유권자들이 이것을 원한다 저것을 필요로 한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욕망을 욕심을 펼쳐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들의 요구와 필요를 허락하겠노라고, 저들의 욕망과 자유를 누리게 해주겠노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씩 둘씩 오래토록 잘 서 있는 견고한 성을 허물어 버리는 영웅이 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규례와 율례와 법도,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산을 동산되게 하는 울타리들을 하나씩 둘씩 걷어내는 것이지요, 자기네 같은 짐승들이 마음대로 들어와 헤집고 다닐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욕망과 다윗의 욕심이 맞물려 떨어지면서 오늘 정복전쟁을 위한, 내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인구조사라는 짓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여러분, 무서운 말씀입니다. 오늘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발이 나아가는 일들이, 오늘 우리가 아무리 신앙인이라고 한들, 제 아무리 다윗이라 한들, 여호와께서 사탄을 일으켜 충동시키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마음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생각들이, 지금 나를 붙들고 있는 이 마음이 사탄이 주는 마음인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인지,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의 기준에 붙들려 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하자, 이걸 요압이 반대합니다. 3절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대상21:3)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오늘 요압이 다윗의 인구조사를 반대하고 막아섰다는 것입니다. 아니, 요압이 계속해서 다윗을 부추겼던 것이 아니라구요? 오늘 저희는 참 신기한 요압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요압은 다윗에게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 다윗의 악역을 대신 다 감당해주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실속을 차려내는 성경이 기록하는 용사들의 명단에 그 이름이 슬그머니 누락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다윗이 사탄에게 충동당하고 있는 이 때에, 어찌 이 기회주의자요, 야망가인 요압이 반대를 했느냐는 것입니다.
역시 왕께서는 탁월하십니다. 당장에 그 일을 하겠습니다고 하면서 인구조사를 허위로 작성하며, 중간에 세금을 가로채고 자신의 군대를 만들 그런 계획을 시행해야 되는 것이, 요압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요압에게 요압이 느끼기에도 다윗이 지금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명령만큼은 다윗이 내리는 명령이 아닌 것 같았고, 신앙적인 결정이 아닌 것 같은 판단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대로 했다가는 큰 일 날 것 같았던 것이지요. 지금 다윗왕이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야망으로 욕심으로 가득 차서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짧은 믿음과 얼마 안되는 들은 풍월로 비추어봐도 이것은 왕이 한참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요압답지 않은 간언을 오늘 왕께 했던 것이지요.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삼하24:3)
그러나 이미 사탄의 충동질에 넘어간 다윗은 요압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끝내 인구조사를 강행합니다. 요압과 군대사령관들을 재촉합니다. 물 마시고 싶다고 했다가 다시는 나를 위하여 부하들의 목숨을 거는 일, 피 흘리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다윗이 자신의 욕심과 충동을 위한 일에 부하들을 또다시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피를 흘려야 하는 일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이번에는 막 재촉하면서 말입니다. 4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대상21:4)
어땠던 다윗이요?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삼하23:17)
그렇게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못 이겨 전국을 돌고 돌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9개월 스무날이 꼬박 걸린 인구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최종 결과가 5절, 다윗 앞에 보고가 됩니다.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대상21:5)
보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110만, 유다 47만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그래? 생각보다 적네? 내일부터 출산장려정책을 펴도록 하게! 셋째를 낳으면 100만원씩 준다고 해”! 아니면, “좋아! 충분하구만, 나는 400명으로도 전쟁을 했던 사람이야. 그럼 다음달부터 그 숫자에 맞추어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시작하고 준비되는 대로 보고해” 뭐 이래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다윗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사무엘하의 본문으로 24장 10절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24:10)
보십시오. 오늘 인구조사 후에 새로운 뭔가, 인구조사가 벌어졌던 10개월간, 다윗이 궁에서 대신들과 만들어낸 청사진이 보여지고, 이 인구조사를 토대로 한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욕심과 야망으로 가득했던 다윗 안에 죄의식이 가득 일어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구조사 후에 다윗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이 회복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가 행한 일이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며, 이것이 큰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참 신기한 일입니다. 사람이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내 하고 싶은 대로 드디어 뭔가 일을 저지르게 되면, 뿌듯하고 보람있고, 행복할 것 같은데, 아뇨, 전혀 반대입니다. 오히려 불안하고 기쁘지가 않고 행복하지가 않은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욕심과 야망대로 일을 추진해 놓고 나면 꼭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성령이 주시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죄를 잘못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어야 정상입니다.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기 맘대로 했기에 기분이 좋고 속이 후련한 사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진행한 일임이 끝까지 깨달아지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것이지요. 그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죄의식이 밀려듭니다.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내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어! 인구조사 쫌 한게 뭐 죄야!? 이게 회개할 일이야?” 하면서 우리들 종종하듯 생겨나는 그 마음의 찔림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와서 이 행진을 멈출 수는 없어” 하며 버티기로 굳히기로 나가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 자기에게 주시는 성령의 감동대로, 오늘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 다윗에게서 볼 수 있는, 성경이 꼭 소개하고 싶은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지요? 내 말 한 마디, 내 행동 하나, 내 결정 하나에 오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실지, 오늘 그분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 예민했던 사람, 그분의 심장의 소리에 자기 심장의 소리를 맞추고 싶어했던 다윗인 것을 우리는 확인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구조사가 진행되는 10개월 동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 싶습니다. 비를 내리지 않고 하늘을 닫으시는 하나님, 그렇게 응답을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된다고 말씀드렸지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아멘!
얼른 다윗처럼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걸음, 잘못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다윗의 기도는 그렇게 백성들의 죄마저도 자신의 죄로 책임을 지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아까 왜 하나님께서 사탄을 일으켜 다윗을 격동시키셨다구요?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런 상황임에도 다윗은 다시 한번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돌립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삼하24:10 중)
단 한 마디도 백성의 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 때에도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24:17)
여러분, 이런 지도자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이렇게 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나 때문입니다. 나를 벌하소서” 하고 말입니다. 끝까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탓하며 우기는 인생이 얼마나 추한지요. 우리는 추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날마다 이 땅의 죄악과 고통을 볼 때마다 나의 범죄함을 고백하며 기도하는 우리가 되시어 하늘이 닫히고 재앙이 내린 이 땅에 다시 비가 내리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은총을 넉넉하게 선물하시는 한분한분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렇게 회개한 다윗의 기도를 받아주시지 않는 것 같으신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잘못했더라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물을 덮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더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다윗의 인구조사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징계를 하실 것이니,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왜 하나님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다음 수요일에 계속 이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만 정리합니다.
첫 번째,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계속 하시라는 것입니다. 변화없고 게으르고 도전없는 모습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마음,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말고, 지금 걷고 있는 길,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에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 걸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의해 시작하였음에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지루해합니다. 또한 ‘꼭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가’ 하며 지금까지 해온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르는 그 축복의 삶에 불만을 제기하고 다른 길로, 다른 지도자를 세워, 인간적으로 융통성있게 나아가자고 하듯 말입니다. 주변의 이방문화 이방종교 다른 방식들이 더 좋아보이고,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막 이런 생각이 들 때, 이만하면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여러분, 오늘 다윗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뇨, 지금 하고 있는 방식이 왜 주어졌는지, 우리가 지금 이 길을 왜 이렇게 걷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마음속에 생겨나는 불만과 불평을 잘 이겨내시라고 오늘 본문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식을, 가장 좋은 길을 우리에게 허락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은 방식, 더 나은 길이 있다. 우리가 그 길을 찾을 수 있고 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오늘 우리는 어느 새 마귀가 와서 충동질하면, 고스란히 당하고 마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죄를 짓는 사람이 되고 마는 까닭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3:16)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식,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기 까지 우리는 그대로 행해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인구조사가 필요하면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정복전쟁이 필요하면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소견이 아닌, 절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생애를 더욱 아름답게 꾸려 가시는 복된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 이어지는 내용인데, 오늘 우리 인간의 결정으로 나아간 길은, 결코 기쁨이, 만족이, 행복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쁨,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당신의 양식을 삼으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오늘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뒤로하고 덮어놓고 무시하고 끝내 내 뜻대로 나아간 길은, 기쁨이 사라집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안과 염려가 찾아옵니다.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가 바로 그 고통을 당했던 것이 아닙니까? 내 남편이 내 아들들이 다 죽은 것, 내 결정 때문이라는 내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내 책임, 나 때문이라는 무거운 짐이 주어지는 까닭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오늘 우리의 길은 더욱 하나님께 맡기시길 원합니다. 상황에 흔들리지 마시고, 그것이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오늘도 내게 허락하신 자리, 내 본분, 내 신분을 잘 지키며, 내게 허락하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 길은 가기 쉽지 않습니다. 대적들과 충돌하여 지나가야 하는 길입니다. 목숨을 걸고 피를 흘려야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그러나 그 길이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입니다. 우리만 가라고 떠미시는 길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을 보내시며 평강을 빌어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만져보게 해주시며 함께 하십니다. 모든 곳에서 여호와 샬롬, 에이레네를 외치며 힘껏 우리의 싸움을 승리하시는 주의 종들, 더욱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분께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는 모든 역사의 현장에 주인공으로 서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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