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기 위해 가수가 된 양희은
양희은 열전 그리고 세노야
1952년 8월 13일, 무더운 여름에 양희은은 육군 대령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엘리트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양희은에게 클래식을 비롯해 많은 음악을 들려주었고 종로에서 노래 잘 부르기로 유명했던 어머니는 양희은을 데리고 항상 동요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가정이 채 10년도 가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1961년, 그녀가 10살 때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집을 나와야 했다.
아버지와 떨어지는 순간부터 가혹한 생존경쟁에 휩싸여야 했던 양희은은 동생 양희경과 함께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끼니를 연명해야 했고 어렵사리 마련한 가게에 화재가 나는 등 가난을 몸소 겪어야 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몸 한 쪽이 약간 이상한 그녀는 웃을 때도 한 쪽만 웃고 술을 마셔도 한 쪽만 빨개진다고 한다.
어두웠던 그녀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 때는 바로 19살 되던 1970년이었다.
단순히 돈을 벌고 싶었던 그녀는 당시 잘 나가던 송창식을 찾아갔고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경기 여고 다닐 때부터 이미 노래와 끼로 유명했던 그녀.
한 시대를 풍미한 '포크가수' 양희은의 탄생이었다.
김민기를 만나고, 음악을 배우다.
송창식을 만난 그 때, 양희은은 그녀의 음악 세계와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한 명의 작곡가를 만나게 된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의 살아있는 천재, 김민기가 바로 그였다.
한국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투철했던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던 작곡가, 현실에 참여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진정한 예술인.
그가 바로 김민기 아닌가.
양희은과 김민기의 만남은 한국 포크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신 독재가 시작되고 시대 상황이 암울해지던 그 때,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우연찮게 김민기를 찾아간 양희은은 김민기가 부르던 노래에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울렁거림을 느꼈다고 한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김민기는 부르던 노래의 악보를 찢어 바닥에 버렸지만 양희은은 그 악보를 테이프로 일일이 다시 붙였다고 한다.
그 노래가 한국 가요계에 길이길이 남을 명곡이 될 줄이야.
이 곡이 바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로 유명한 노래, 아침이슬이었다.
통기타와 청바지, 맑고 청아한 목소리, 암울한 시대의 빛나는 저항정신을 노래한 그녀의 아침이슬은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과 강요된 굴종을 넘어서는 시대정신의 심벌이 됐고 그녀는 가수로 급성장했다.
스무 살, 막 터질듯한 꽃봉오리 같은 그녀가 불렀던 아침이슬이 시대를 울리고, 사람을 울리고, 70년대 가장 사랑 받는 포크 송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김민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가수 양희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김민기라는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을 만나면서 70년대 가장 뛰어난 포크 가수로 성장한 양희은은 '긴급조치 9호' 가 발동되면서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녀의 많은 곡들이 금지곡으로 됐지만 대중들은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집안에서, 마음속에서 그녀의 노래를 끊임없이 불렀다.
'노래로 할 이야기가 사랑밖에 없다면 난 노래를 하지 않았다.'던 양희은의 당찬 마음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 정보부의 감시를 받으며 도피 생활을 하던 김민기와 그의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던 양희은.
높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돈을 벌지 못했던 양희은은 여전히 가난했고 결국
81년 가수 생활을 접고 해외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녀는 예전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아닌 환자의 모습으로 고국에
쓸쓸히 돌아왔다.
병명은 난소 암 말기.
그녀의 인생에 불어 닥친 가장 큰 시련이었다.
청바지에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던 소녀는 82년에 조용히 병상에 누웠다.
두 번에 걸친 수술과 힘겨운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은 빠지고 예전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겨운 투병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84년 하얀 목련을 발표해 히트를 쳤고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희망은 절망이 되고 웃음은 슬픔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날 밤, TV 탤런트이자 뮤지컬 배우로 성장한 동생 양희경이 병실을 지키고 있다가 양희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고 한다.
양희경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양희은은 천장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고 한다.
"희경아...... 언니 먼저 간다...... 잘 있어......"
지루한 항암치료와 대 수술로 인해 말할 힘조차 없었기에 입 모양만 겨우 움직였던 그 때 기적처럼 동생 양희경이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언니, 나 두고 어디가!"
그것이 양희경이 깨자마자 외친 소리였고 양희은은 다행히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듣지 못한 그 목소리를 잠들어있던 동생 양희경은 들었던 것이다.
양희은의 말대로 기적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항상 양희은, 양희경 자매는 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결혼하고, 이민을 가고, 그리고 40대.
기적적으로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은 양희은은 87년, 지금의 남편 조중문 씨를 만나 미국으로 떠났다.
남편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줬고 만난 지 3주 만에 초스피드로 결혼했다.
양희은에게는 무엇보다도 안식처가 필요했고 남편은 그런 양희은에게 가장 적합한 존재였다.
근 10여 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던 양희은은 93년 다시 한국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암울한 시대에 자유를 노래했던 소녀는 30대에 암을 앓고, 결혼하고, 이민을 갔다가 40대가 돼서야 다시 대중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시기에 김민기 역시 자유의 몸이 되어 극단을 세우고 예술혼을 불태웠으니 이들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가 다시 시작했던 일은 당연히 노래였다.
95년도에 드라마 '목욕탕 집 남자들'이 히트하면서 동생 양희경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예전엔 희경이가 내 동생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희경이 언니가 됐네.'라고 말할 정도로 시대는 변했지만 90년 대에도 여전히 그녀의 노래는 많은 사람들에게 통했다.
그녀는 라이브 홀을 만들어 라이브 문화를 선도했고 전 관객수 매진을 기록하면서 공연 제작자들을 놀라게 했다.
서태지, H.O.T. 그리고 핑클이 나오던 그 시절에도 여전히 양희은은 포크 계의 대모였고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것이다.
공연관계자들은 '양희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공연문화의 흐름이 바뀌었다.'라고 말한다.
그녀가 지금도 가요계의 공로상을 받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노래했던 가수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연 문화를 개척하고 한국 대중문화사를 다시 쓴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블로거 뉴스에서 재정리)
"세노야"가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 혹시 아세요?
자료에 의하면 동해안에서 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부르는 소리 가운데 어원을 알 수 없는 "쎄누야 쎄누야"라는 말이 "세노야"로 둔갑하여 시와 대중 가요로 불리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혹은 일제시대 일본 뱃사람들이 부르던 일본 노동요의 잔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魚謠나 童謠가 일제의 영향을 많이 받은지라 그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좀더 알아보면 양희은의 "세노야 세노야"는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지금의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나 자란 고은 시인이 지은 시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고은 시인의 이 시는 옥구 앞바다에서 뱃사람들이 멸치잡이를 할 때 부르는 흥겨운 앞소리 ‘세노야’를 소재 삼아 지은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사평역에서"로 유명한 곽재구 시인도 "서울 세노야"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감상을 겸해 두 시의 전문을 올려드립니다.
세노야 세노야
고은 작사/김광희 작곡/양희은 노래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서울 세노야
곽재구
오 년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살 보러 새로 두시 밤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잡아 그물 온방내 던져봐도
멸치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아래는 뱃사람들이 부르던 노동요 "그물질 소리"란 전통민요입니다.
어야디야 어허야 에야디야 오호야
이 그물로 대리거들랑 억수만대 올라오고
어야디야 어야디야 에야디야 오호야
오동추야 달밝은데 님오생각 절로난다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허야 어야디야
고기안들면 임생각나고 고기가 많이니 임생각 안난다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허야 어야디야
이고기를 싣고서는 부산시장으로 갈거나 서울시장으로 갈거나
어어야 디이야 호호야
짐대끝에 봉기달고 만선 노래 불러보자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허야 디이야
조르자 조르자 처자 어마시를 조르자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허야 디이야
그물조르듯 조르자 처자 어마시를 조르자
어야디야 어야디야 어허야디야
세노야 세노야 어야디야 세노야
어기여차 어기여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담아내라 퍼내어라 저건전부 싣고가자
세노야 세노야 어야디야 세노라
한배 실었다 세노야 어디로 갈까 세노야
올려나 봐라 세노야 어서 퍼라 세노야
만선이다 세노야 어이야 차야 세노야
한배 실었다 세노야 따라 오너라 세노야
어허야디야 세노야 어야디야
어허야디야 오호야 산이로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어업을 장악하여 현대화 하고 일본 방식으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魚謠 중에는 대부분 일본 소리가 많이 남아 있지만 "그물질 소리"는 우리 소리로 비교적 잘 남아 보존되고 있는 노동요입니다.
저녁에 바다에 나가 그물을 쳐 두었다가 다음날 새벽에 나가 그물을 걷어 올린다.
그물을 걷어 올리는데 힘이 들었다. 오동추야 달 밝은 새벽에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부는 파도에 흔들리면서 고적함을 달랜다.
어촌의 온 마을은 달빛 속에 잠들고 평화스럽게만 보인다.
집에는 어린 자식들과 부인이 곤히 잠을 자고 있다.
그 잠이 깰까 싶어 단잠에서 일어나 바다로 나온 어부의 마음은 고기가 많이 잡혀 만선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소원이다.
당시는 잦은 흉년에 굶다시피하고 살 때 였다.
이른 새벽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내고 배고픔을 잊었던 시절.
그래서 민간인 사이에 한의 정서가 담긴 민요들이 유행했을 것이며, 그 한의 정서와 함께 "새노야"란 어원을 알 수 없는 말까지 오늘날에 이어지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