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멸망
김종연(18세), 김승길(19세), 김오행(20세),
김약항(19세), 김약시(19세)
공민왕 17년 (1368) 원나라가 중원에서 도읍을 유지 못하고
북쪽으로 옮겨가니 이를 북원이라 한다.
고려를 100여 년 간 지배하던 원나라의 힘 무너지고
중원에 새로운 명나라가 들어섰다.
고려 조정은 대륙정책을 중심에 두고 두 가지 이견이 맞서게 된다.
최영은 오랫 동안 원나라에 가 있어 당시 대륙 정세를 잘 알고 있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세력 형성에 어느 한 쪽으로 결정 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원나라를 업고 명나라를 쳐서 이 기회에 요동땅을 회복하기로 생각하였다.
이성계는 명나라가 이미 중원 땅을 차지하였으니,
고려는 천하대세에 따라 원나라를 섭기듯,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우왕 14년 (1388)에 명의 세력이 커져서 요동을 평정하고
철령 북쪽 땅에서 고려 백성을 남쪽으로 물러 가라고 하였다.
최영은 더 참을 수 가 없어 명나라를 치기로 하고
스스로 8도 도통사가 되었다.
왕을 모시고 개경(평양)으로 나가
조민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요동정벌에 나섰다.
요동을 치러갔던 군대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처서 정권을 잡았다.
공양왕 4년(1392)에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건국 후 475년 만에 멸망하였다
고려가 멸망 후 우리 광산김씨는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같이하는 분들도있었고,
새 왕조 조선에 입조하는 분도 있어 엄격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18세 고려 말 비운(悲運)의 상장군 휘 종연(문숙공파․ 삼사좌사공파)
공(公)의 휘는 종연(宗衍)이니 문숙공(주정)의 손
삼사좌사공(三司左使公:승사)의 장손으로 고려조 후기 무신이다.
벼슬이 봉익대부 동직밀지사사겸 신위호위 상장군이었다.
공의 아버지는 밀직부사 상호군이니 고려 말 정권 농낙을 일삼는
요승 신돈을 죽이려 모의하다가 뜻을 함께한 조사공의 밀고로 붙잡혔다.
유배도중 신돈이 보낸 손연등에게 교살 당하자
본인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여 피신하였다.
그 후 신돈이 주살 당한 후 공민왕 20년에
관계에 나아가 장사(將師)가 되어 외구토벌을 하는데 참가하였다.
우왕 14년 7월에 전라도 부원수로서 광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이어 전라도 절제사와 전라도 원수에 임명되어
구례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공양왕조 당시 이성계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고려가 망할 것을 개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공은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뜻을 알고 살해하려다가
모사가 누설돼 이때 봉주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옥에 갇혔다.
다음날 다시 도망하여 포위망을 뚫고 평양으로 가서
전판사 권충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때 부인과 장인을 순군에 가두고
남편 있는 곳을 밝히라고 혹형을 가했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설사 내가 남편 있는 곳을 안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찌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공은 이어 이방춘, 김식, 이중화와 서경천호(西京千戶) 윤귀택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 도모하다가
동사자 윤귀택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다시 도망해 황해도 곡주의 숲속에 숨었는데,
추위와 기갈에 시달려서
지나가는 촌민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그 사람이「죽을 끓여 오겠다.」하고는,
순군진무 임순영에게 밀고함으로 붙잡혀
모진 혹형 끝에 사지(四肢)를 잘려 각도에 조리 돌리는 바가 되었다.
이 비통한 공의 죽음과 고려 왕조의 운명은
470여년으로 막을 내리고 이씨 왕조가 탄생하였다.
공의 아드님 네 분이 모두 불우하였고
손자 수산공(휘 자진)은 도학이 높아
정몽주 선생과 함께 절의지교(節義之交)가 있었는데
공은 집안의 화로 일찍 평장동에 가신 후,
여주 두곡에 숨어살면서 그곳을 수산이라 이르고 두문종신(杜門終身)하였다.
종보, 1996년,7월1일
김승길(承吉: 19세)은 고려말 함종현령.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신.
김오행(五行: 20세)은 김승길의 아들로
”너희도 나의 뜻을 받아 들여 벼슬 길 에 나가지마라“는
유훈을 받들고 벼슬길에 나가지 았다.
19세 광산군(光山君) 약항(若恒) (양간, ‧척약제공)
고려 말기 절신이요,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제 광성군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공민왕 1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공민왕 21년(1371)에
백형 관찰사공(약채)과 함께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장령으로 직언(直言:곧은 말)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외직으로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로 나아가 곧 강원도 염문계 목사로 승진되고
이어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이때 고려 왕실이 세운으로 기울자
친척과 친인들이 신조(新朝:이태조)에 벼슬을 함으로
함께 추래할 것을 권유하되 공(公)이 그 뜻을 물리쳐서 불가함을 논했다.
그 후에 천명(天命)이 태조(이성계)에 돌아갔음을 알고 벼슬길에 나갔다.
간의대부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서적을 맡아 관리하던 관청의 우두머리 벼슬)로 있을 때
명(明) 나라로 보내는 글
하정표문(賀正表文: 외교문서)을 동료들과 함께 지었다.
명나라의 황제가 이 글을 보고
조선의 문물의 번성함을 꺼리어 글 내용이 불공한 말이 있다고 성죄 하였다.
이를 빌미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와
글 지은이를 징계 한다하여 공이 죄치 않고
개연히 명나라에 가려고 길에 올랐다.
이는 태조의 명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이 토탄에 빠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이때 태조는 중추원 학사로 벼슬을 높여 명나라에 보냈는데
공이 도착하니 고문이 혹독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리(義理)로 따져 조리 있게 답변하였다.
이에 명황제가 고문을 중지시키고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중지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돌아오지 못하시고 변방인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임종하셨다.
태조께서 공의 업적을 기려 광산군(光山君)에 봉하시고
가족에게 후히 보조하셨다.
흉보가 들려오자 정중히 부의(賻儀)를 내리고
유의장(遺衣葬:의복장)을 명하였다.
후에 태종조 때 양촌(陽村.권근)의 소청(疏請:상소해청)으로
고려 말의 충신 포은(정몽주)과 함께 같은 날에
보국숭정대부(輔國崇正大夫)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로 추증하였다.
동시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하고
자손을 등용하라 명하시니 시호는 문온공(文溫公)이다.
묘는 용인군 금령역에 모셔 향화를 받들어 오고 있으며
묘는 이습장으로 배(配) 정경부인(貞경夫人)
아산 이씨와 합폄으로 모셨는데 실전하였다.
지금은 과천 서초동에 설단 하여 향하를 받들다가
1970년 도시계획 편입으로
용인군 묘현면 일산리에 옮겨서 향화를 받들고 있다.
광산군 약항 행장(光山君 若恒 行狀)
공의 휘는 약항인데 태조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 공손치 못하다하여
장차 우리나라를 징벌하려고 글을 지은 사람을 잡아 올리라 하였다.
공은 이에 연경으로 가서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명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죽음을 면하고 멀리 귀양을 보내니 죽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세종조에 양촌 권근이 충직을 상소하여 청하니「광산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소에 이르되 김모은 전조에 집의로
태상왕이 개국한 초기에 홀로 신하의 절개를 가졌다.
태상왕의 명을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멀리 양자강(운남성)으로 귀양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절의가 가상한지라
정몽주와 함께 봉작과 증직을 하고
자손을 등용하여 뒷사람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공은 연경에 갈 때 안주관에서 시를 읊었는데
“여관이 어찌 고요한고, 바람 연기가 들 밖에서 어둡구나.
객지에 회포가 나쁘니 베개 위의 꿈은 번복되네.
궁벽한 땅에 사는 백성도 나를 비켜가니 나는 새도 지저귀네.
타향에 봄이 적막하니 백가지 생각하며 홀로 마루에 기대어 섰네.”
목은 이색이 양자강을 지나가다가 공을 추모하여 이르되
“선생의 호활한 기운은 남주(南州)에서 으뜸인데
그 옛적에 경치가 아름답던 집에 오르던 일이 생각나네.
오늘날까지 살아와도 공을 보지 못하니,
촉강 어느 곳에 외로운 혼이 있는고.”했다.
공의 부인 아산 이씨는 공이 명나라에 가서 돌아오지 못함을 애통히 여겨서
머리를 풀어 얼굴을 손상하고 자손에게 경계하되 벼슬을 하지 말라 하였다.
19세 충정공 휘 약시 (양간공파‧ 직제학공파)
고려 말 조선 전기의 절신. 아버지는 광성군 정,
어머니는 숙신택주 연안 이씨이다.
고려 우왕9년(1382) 사마시 합격. 우왕 10년에 문과급제, 직제학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가 등극하자 부인과 함께
광주 금광리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을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보아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술과 음식을 가져다 대접을 하여도 받지 않으니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不傳語)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하게 심상하여 흐느끼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그를 찾아내어 원래 관직을 주고 벼슬을 하게 하여도
공은 청맹(靑盲:눈뜬장님)으로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는 핑계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태조는 끝내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대접을 더욱 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이성계의 호)이라고 어호를 써서 주었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 죽거든 여기에 장사하 되 봉분은 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어
망국의 천부(천한 죄인)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돌아가시자 자손이 그 말씀대로 하였다.
현종조에 후손 우형(宇亨)이 승지로 입시하였을 적에
임금이 탄식하여 너의 할아버지 절개가 특이하다 하며,
임금이 명하여 표창함이
공자께서 태백(泰伯: 주나라 태왕이 장자인데 셋째 아들 문왕에게
전위할 기미를 알고
아우 중옹과 같이 피했다.의의를 칭찬한 느낌이 있다.
고상한 풍모와 절조는 야은(길재) 제공(諸公)들과 동등하다.
공은 다만 그 사적이 민몰 되었기에,
후인들이 또 감히 포장천양(업적이나 행적을 포상) 하지 못한 것은,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이며 조선조 순조 때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시고 시호는 충정공이다.
묘는 광주군 설촌면 삼합리에 있고 모충사와 장성 경현사에 배향 되었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약사.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