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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념
정 수 현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일에 매달려 온 정열을 집중하여야 한다. 이렇게 한 가지 사물에만 끈덕지게 달라붙어 심신을 쏟는 것을 집념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매진할 뿐 다른 일은 포기해야만 한다. 참으로 힘든 수난의 과정을 무한한 인내로 극복하여야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토마스 에디슨은 12세 때부터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여 피나는 노력 끝에 특허수가 1,000여 종을 넘는 발명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주변에 일어나는 인간사를 도외시하고 일념으로 몰두하여 정진했던 사례를 회고해 보고 오늘의 본보기로 삼고자 한다.
후한때 고봉(高鳳)이란 선비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아내가 “마당에 보리를 널어놓고 장보러 가면서 날씨가 변덕이 심하니 혹시 비가 오면 보리를 들이도록 하세요.”하고 일렀다.
고봉은 “그렇게 하지.”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고봉은 독서삼매에 빠져 비가 오는 것도 오불관언이었고 오로지 책만 읽고 있었다. 아내가 와보니 그 사이 쏟아진 비로 보리는 전부 떠내려 가버렸다. 고봉은 이렇게 학문에만 열중하여 큰 학자가 되었다. 어느 분야에라도 대성하려면 이 표맥(漂麥)의 고사처럼 그 일에만 전념하여 다른 일은 버릴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고사로써 1703년(영조 6) 전라도 정의현(지금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서 태어난 오봉조(吳鳳祚) 훈장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므로 계모인 청주한씨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 계모는 여느 계모와는 달리 대단히 현명하고 인자한 분이었다. 그 어머니는 전실 아들인 오봉조를 키우기 위해 오조리에 온 후 잠수질을 배우고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바다에 다녔다. 그리고 훈장을 집에 초청해 오늘의 가정교사처럼 오봉조를 가르쳤다. 하루는 계모가 마당에 곡식을 널어놓고 바다에 잠수질을 나가면서 “너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라.”하고 당부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오봉조는 훈장의 지도에 따라 책을 열심히 읽었고, 어머니는 바다에 가서 자맥질을 하면서 전복을 따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니 먹구름이 덮여오고 ‘두두두~’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보리가 비에 젖으면 안 되니 오봉조는 훈장과 함께 멱서리에 담고 집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려하자 어머니 한씨도 마당에 보리를 멍석에 널어둔 것이 생각나 얼른 옷을 챙겨 입고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보리는 말끔히 치워져있었다.
이때 예사사람 같았으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아들아 너, 참 잘했다.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네가 이렇게 들여놓았으니 얼마나 좋으냐!”하고 칭찬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어머니는 생각이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즉시 “아들아”하고 불러들었다.
“예, 어머니”하고 칭찬을 받을 것으로 알고 그 앞에 가서 섰다.
“내가 바다에 가면서 뭐라 했느냐?”
“예,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너는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할 일이지 보리는 왜 들여놓았느냐?”
“어머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리가 비에 젖어 썩게 될 것이 아닙니까?”
“야, 이 어리석은 아들아, 그것은 이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다. 보리가 젖었으면 내가 다시 말리면 된다. 너는 오로지 글공부에만 몰두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잡념을 가지고 어떻게 그 어려운 학문을 완성하겠느냐?”고 톡톡히 힐책을 하였다.
그러자 오봉조는 알아차리고 “어머니, 소자 아직 지혜가 모자라 어머님의 높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일이 있은 후 오봉조는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일념으로 정진하여 문장과 시조창으로 널리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당시 제주에서는 가히 최고의 훈장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 정조연간 비록 벼슬을 지내지 않아 은사(隱士)였지만 정의서당 훈장으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중 3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가장 변방인 정의현에서 이런 경사가 일어났다.
그 3인의 제자는 정의현 삼달리 강성익(康聖翊)으로 1783년(정조 7)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비안현감, 지평과장령을 역임하였다.
정의현 상효리 고명학(高鳴鶴)은 1795년(정조 19)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이 되었다.
정의현 토평리 부종인(夫宗仁)은 1795년(정조 19)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지평, 장령, 대정현감을 지냈다. 모두 오봉조 훈장의 가르침에 의해 이렇게 출중한 제자가 나왔다.
나는 어느 가을날 오봉조 훈장 묘소를 찾았다. 그곳은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1381번지였고, 그 훌륭한 어머니 청주한씨는 부(夫) 오후찰(吳厚札)공 옆에 잠들어 있었다. 그 묘비는 오훈장의 제자인 고명학 장령이 썼다. 나는 비록 전실 소생이지만 애정을 다해서 돌보고 뒷바라지를 다해 성공시킨 거룩한 어머니묘에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합장을 했다.
나는 전부터 계모가 전실 자식을 잘 양육하기 보다는 학대했다는 말들을 무수히 들어왔고, 우리 주변에서도 보아왔다.
그 한 예로 조선조 때 평안도 철산군에서 작자미상인 소설 장화홍련전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 스토리는 계모가 전실 소생인 자매를 심히 학대하자 그 자매는 견디다 못해 연못에 빠져죽고 말았다. 결국 그 혼령이 철산부사에게 나타나 그 힘을 빌려 계모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는 인과응보가 담긴 줄거리였다.
그렇지만 청주한씨는 전실 소생을 잘 키워 학자로 대성토록 하였으니 매우 후덕한 어머니였다. 그러기에 300여 년이 지나도 오늘날까지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고사와 같이 어느 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집념과 그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겨주고 있다.
날이 갈수록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오늘의 고난을 참으며 땀 흘리며 노력하는 것은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아서이다. 역시 역사는 하늘이 짓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짓는 것이므로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풀이 돋아난다. 언젠가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꿈을 안고 오늘도 전력투구해 나가자!
우리의 뿌리 정 수 현 나도 이제 나이가 팔순에 접어들다 보니 자문자답하는 일을 반복할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민족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였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기로 하였다. 산도 그 근본인 멧부리가 있고, 물도 솟아나는 샘터가 있듯이 우리 사람들도 그 뿌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 한(韓)민족은 어디서 탄생했을까?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던 선사시대 일이고, 오래고 오래 전 일이니 문헌상으로 기록된 것은 없다. 왕왕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신화를 들먹인다. 우리도 단군신화와 삼성신화 등 개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입증할 방법이 없고, 어떤 것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과장시킨 것도 있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실사구시적 입장에서 유전(遺傳), 유물, 언어, 풍습 등을 통해 이를 규명해 내느라 유전학, 인류학, 지질학, 고고학, 민속학자 등이 오늘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본 주제의 핵심인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5억 1천만㎢의 지구는 지금으로부터 50억 년 전에 우주의 한 행성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곳에 생명체가 처음 출현한 것이 30억 년 전 일이다. 이후 무궁한 세월이 흐르고 한 생명에서 인류를 향한 몸부림은 1,500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진화를 거듭했다. 지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에 지질시대가 열렸고, 그 플라이스토세에 인류는 원인(猿人), 원인(原人), 구인(舊人), 신인(新人) 순으로 변화과정을 밟았다. 원인(猿人)은 200만년 내지 100만 년 전인 제1빙하기 이전에 살았던 가장 원시적인 인류였다. 그 표본이 남아프리카의 보츠와나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발견된 어린아이 두개골화석이다. 이게 원숭이란 뜻을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파란트로푸스 그리고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대표적이다. 이 인류는 두발로 직립보행을 했고,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매우 편리한 형태였으나 키는 겨우 1m20㎝정도로 아직은 원숭이와 가까웠다. 원인(原人)은 40만~50만 년 전인 제2간빙기에 살았으며, 자바의 트리닐에서 발견된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와 중국의 저우커우뎬(周口店)의 동굴에 있었던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이 이때에 존재했다. 구인(舊人)은 제3간빙기에서 제4간빙기초에 걸쳐 출현하였고,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네안더 골짜기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이 이에 해당한다. 신인(新人)은 인류와 동류인 지혜 있는 인간이란 뜻을 가진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 지금으로부터 1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나타났다. 이어 5만~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는 중동지역으로 진출하여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 화석은 프랑스 남부인 크로마뇽 동굴에서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무튼 인류의 진화과정은 수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적어도 최초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됐다는 점과 발상지가 아프리카라는 점에서는 공통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럴진대 인류의 고장 아프리카와 유인원에 대한 인식을 이제부터는 친근감 있게 전환시켜 나가야 하겠다. 그 후 아시아대륙에서 동진을 거듭한 황색인종인 몽골로이드(Mongoloid)는 아시아의 시베리아까지 진출하였고, 그 한 갈래는 동시베리아남부에 위치한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을 하였다. 그리고 계속 동진한 몽골로이드 일부는 3만~4만 년 전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넘어갔으니 그들은 아메리카인디언이다. 내가 멕시코시티를 방문했을 때였다. 대로의 뒷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어떤 부인이 검은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그 끝에 빨간 댕기를 드린 모습을 보았다. 그 영낙없는 동양계 여인풍모는 첫눈에도 인디언 후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한편,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는 초승달과 흡사하며 남한의 3분의 1에 가까운 3만 1,500㎢나 되는 세계 일곱 번째의 큰 호수이다. 그러나 담수량을 기준으로 불 때는 수심이 무려 1,642m나 되어 세계 1위가 된다. 이런 호수에 2,500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며 온천이 많아서 2만 5천 년 전 쯤 빙하기 때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초기 아시아인에게는 좋은 안식처였다. 이 바이칼호 남동부에 위치한 부리야트(Buryat) 자치공화국과 그 남부 몽골에서 우리와 흡사한 문화를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우선 같은 몽골계이므로 용모, 유전적 특징, 언어도 알타이어로 비슷하다.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도 유사성을 상호 많이 내포하고 있다. 그 한예로 몽골의 샤머니즘적 형태로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당이 있는데 역시 우리나라에도 있다. 그리고 함부로 사람 출입을 못하게 매어놓은 금줄 등이 우리와 매우 흡사하고, 돌로 만들어 세운 석상은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비슷하다. 그리고 부리야트 자치공화국에 부리야트족이 40만 명 정도 살며 그들은 몽골로이드로 칭기즈칸의 후예라 믿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와 같은 설화가 존재하고 있다. 어느 날 한 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와 목욕하는 선녀에 반해 옷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자 목욕을 끝낸 그 선녀가 옷이 없어 당황해 할 때 그 총각이 선녀를 집으로 데려다 동거하며 아들 열하나를 낳았다. 그러다 이제는 총각이 믿고 방심하는 사이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찾아입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또 샤먼(무당)이 추는 춤과 노랫가락이 우리민족과 유사하였고, 춤은 강강술래와 같다. 그리고 오색 천 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도 오리를 조각해 나무꼭대기에 꽂아놓는 솟대가 있는데 이와 비슷하다. 그뿐 아니라 자녀에게 천한 이름을 지어주어야 요절하지 않는다하여 개(犬)란 뜻의 ‘사비카’란 이름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옛적 홍역 등 질병이 만연할 때 아동이 무수히 죽어갔다. 그래서 ‘개똥이’, ‘쇠똥이’ 같은 이름을 붙인 때가 있었다. 아마 염라대왕도 더러운 것은 피하려니 하고 붙인 것이었다. 이런 면면을 살펴볼 때 우리와 공통점이 많아 몽골로이드로 시베리아에 살았던 북아시아인이 한국인의 원류로 보고 있다. 이렇게 나는 내 스스로 묻고 대답을 정리해 보았다. 틀림없이 한민족은 오래전 바이칼호 부근에서 남진을 거듭하여 만주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리고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그리면 내 선조도 몇 천 년 소급해 올라가면 분명히 바이칼호 부근에 살았던 몽골로이드의 한 갈래였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 표시로 나도 태어날 때 엉덩이에 청색의 몽골반점이 찍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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