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찾아서/ 안광환씨 생활수기
“나는 이래서 한국이 좋다”
프랑스 파리에서 10년간 생활하다 방문취업제로 한국 들어온 중국동포 안광환씨의 한국생활 1년 이이야기이다.
[필자소개] 3.1독립운동의 선구자 유관순열사 생가에서 사진을 찍은 필자 안광환씨.
조선족고중, 흑룡강성 공상행정관리간부학원 졸업 후 공상행정관리국에서 10여년 일을 했고,
1999년~2009년 프랑스에서 생활. 2011년 4월 한국에 와 충남 천안시 소재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해 춘삼월에 꽃샘추위를 타고 한국에 왔으니 한국에 온지도 어언간 한해가 다 되어간다.
사십대에서 오십대로 과도하는 시기에 한국생활을 새롭게 시작한 나에게 지난 한해는 내 생에서 참으로 리얼하게 살아온 한해인 듯싶다.
나의 부모님 고향은 강원도이다. 1943년에 만주로 이주, 20년 후에 나는 세상을 보게 되었는데 나의 고향은 흑룡강이 되었다.
삼십 중반에 고향을 떠나 긴긴 여정을 거쳐 프랑스에 도착, 낯설고 물 설은 그곳에서 10여년 살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또한 그곳에서 그 해답을 얻었다.
20세기 80년대 후반기에 한국에 계시는 친 고모님을 KBS방송을 통해 찾았는데 그 때 고모님의 연세는 88세, 슬하에 자식은 없이 고모부와 함께 살고 계셨다.
나의 부모님도 생전이라 한번 상봉의 기회를 마련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부모님의 한국 호적부가 6.25전쟁으로 불타버리고 없었고, 친형제라는 증표로 옛날 함께 찍은 사진도 없어 결국 한 많은 세상, 한을 풀지 못하고 고모부 내외분도, 나의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다.
시간이 참 많이 흐르고 흘러 강산도 두세 번 변화된 듯싶다. 한국에 연고가 있었던 나는 "무연고동포"자격으로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엇다. 무연고동포 방문취업비자를 받았던 날 나는 돌아가신 나의 부모님과 고모부 내외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 나의 뿌리가 깊이깊이 박혀 있는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나는 마치 어머니 품속에 안기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프랑스 드골공항에서 파리로 들어갈 때와는 완연 다른 그런 기분이었다. 프랑스는 모든 것이 서먹서먹했고, 눈 뜨고 있어도 장님이요, 귀 있어도 귀머거리요, 입 있어도 벙어리요. 지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한국은 어떠한가?
내 눈도, 입도, 귀도 그리고 마음도 활짝 열려 내 가슴에 강 같은 평화가 넘실거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천국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언어는 곧 사상이고, 사고방식이고, 사고 방법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말을 하며 자랐고, 우리글을 배우며 성장했다. 내 기억에 중국말로 부모님과 대화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한국인과 호흡이 잘 맞아 떨어지는 듯싶다. 나를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우리민족학교에 보낸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다.
나에게 10여년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사귄 한국 친구들이 참 많다, 그 인연과 우정이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한국에 빠리에서 사귄 친구들이 여러 명이 된다. 지난 해 12월, 몇 년 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친구가 광주시 예술의 거리에서 있는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한달음에 찾아간 적도 있다. 요즘은 파리에서 사귄 한국 친구들과 한국에서 만나는 즐거움 때문에 행복감에 푹 절여있다.
나의 아내도, 한국에 10여년 체류경험이 있는 장모님도, 저의 형도, 빠리의 한국 친구들도 그리고 새롭게 만나는 분들도 나 보고 한국생활에 적응할 만한가? 하고 많이 걱정하고 묻는다. 육지에 나와 있던 개구리가 물에 뛰어 들어가면 빠져 죽을 것이라고 걱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고 대답한다.
“한국, 참 좋아요, 저에게 정서상 딱 맞는 것 같은데요!”
“거참 다행이네”
하면서 갸우뚱하는 분들도 있다.
"두손 바짝 들었소"
주말이다. 함께 회사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들과 분주한 한주의 회사생활을 끝마치고 술 한 잔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오늘도 변함없이 대한민국의 자동차산업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중년을 받치는 우리 형제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치치할에서 온, 나 보다 한 살 연하인 정씨와 연변 용정에서 온, 나 보다 두 살 연하인 이 씨는 히히 웃으며 ‘깐!’한다.
이 씨가 말한다.
“우리 회사 젊은 한국 아이들이 정말 일 잘하오. 나는 그냥 손들었소. 이런 자식을 둔 부모들은 전생에 덕을 쌓은 것 같소. 중국에서 저 나이(20~30대)에 저렇게 일 잘하는 젊은 애들을 형님은 봤소?”
“그러게 말이…….”
“한국 사람들이 정말 일 열심히 하오. 나는 두 손 바짝 들었소.”
나는 이 씨의 말에 동감을 하지만 ‘두 손을 바짝 들고’는 싶지 않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서류상 나는 ‘중국인’이지만 속성은 ‘韓人’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체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 오늘, 이 씨는 나 보고 말한다,
“형, 나 형에게 손 바짝 들었소!”
정씨도 말한다,
“작은 영감(나 벌써 영감이란 말 들어야 해?)이 일하는 속도가 한국 사람들과 어슷비슷해.”
매일 새벽 5시55분에 스마트폰 알람의 ‘상큼 휘파람 소리’로 한국의 아침을 시작하여 저녁 9시에 퇴근하여 기숙사에 와 샤워하고 나면 10시가 되어 간다. 잠깐 노트북을 열고 일기를 쓰고 나면 10시 반이 된다. 그리고 잠자리에 든다.
한국인도 길게는 3개월, 짧게는 한 달 미만하고는 도리머리 하며 자리를 뜨는 그 곳에 나는 오늘도 서 있다. 삼복 철 무더운 여름도, 동짓달 강추위도 나를 어쩌지 못했다.
그 동안 나는 한국에서 이런 걸 배웠다.
‘즉시 한다. 끝까지 한다. 악착같이 한다.’
대한민국의 "한강기적"은 바로 이런 "한국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나는 감히 말 할 수 있다.
@동포세계신문 제263호 2012년 2월 15일 게재
첫댓글 김국장님께: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고모부 내외분도, 나의 보모님도 모두 돌아가셨다."에서 (보모님)이 아니라 (부모님)으로.
2010년4월 한국이 온 것이 아니고 2011년3월에 한국이 왔습니다.
신문지면은 어쩔수 없지만 여기 수정 가능한 게시판의 글은 수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숙한 글 귀한 지면에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