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0회 노자와 불교의 회통 1 – 3
↑여기를 보시면서 스님의 주석의 양상을 한 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노자 도덕경은,
[송상성이라는 분의 “태상도덕경 강의”라고 하는 책을 중심으로
탄허스님자신의 주석을 포함해서 총 33가의 주석을 망라]
했습니다. ‘서른 세 명의 주석이 담겨있다.’ 이말입니다.
1980년대 초에 노자 번역으로써 주석으로 이만큼 많은 학자들의 주석을
담았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일입니다.
스님이 감산덕청스님의 노자ㆍ장자같은 책을 굉장히 보시고싶어 했음에
도 불구하고 책을 구해서 보시지를 못했답니다. 그럴 정도로...
그래서 스님의 제자였던 통광스님이나 송찬우 교수같은 분은 스님이
그렇게 보고싶어 하셨던 감산덕청의 “노자주” 같은 것을 번역을 하셨
지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 중국과 대륙과는 우리는 소통이 되지 않아서
대만 책들만 구해서 봤어야 하는 그런 장애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처럼 외국의 책을 쉽게 살 수도 없고 그랬지 않습니까?
그때 스님은 산사에서 이런 책들을 다 구해서 일일이 다 보시고,
‘어느 누구의 말이 정확하게 좋으냐? 옳으냐?’ 이런 것들을 다 보셨던
것 같습니다. 참 대단한 느낌이 듭니다!!! 그 가운데
[소자유의 노자신해] 같은 것.
소동파의 동생 소자유가 노자를 유교ㆍ도교ㆍ불교로 회통해서 막
종횡무진으로 주석을 달아놨거든요.
그러다보니 조선조 유학의 기본이 되는 주자학. 주자 같은 분은
“왜? 유교하고 다른 불교를 노장하고 섞느냐?”
“노자신해” ←이런 책들을 굉장히 비판을 많이 해놨거든요.
노자신해 ←이런 주석들.
소자유의 노자신해같은 주석은 한국에서는 거의 본적이 없는 주석입
니다. 이런 것까지 스님은 다 보셨습니다. 그 다음에
스님주석에 굉장히 독특한 특색이 있습니다.
중국의 주석을 많이 사용을 하셨고, 일본의 주석은 하나도 쓴 것이 없
고요. 그 다음에
좋은 주석이 있다면, 한국의 주석은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습니다.
대승기신론같은 경우에, 원효스님의 “기신론 소 별기”를 씀으로 인해서
한국에서 원효대사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가 교재로 무엇을 썼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승가대학 강원에서 원효스님의 주석을 가지고 대승기신론을 보게 되는...
원효스님의 주석을 교재로 만들어 놓으니까요.
현장법사라든지 그 이외에 중국의 많은 법장스님이라든지 이런 분들의
주석들도 많이 있지만, ‘어? 우리 원효대사가 이렇게 대단했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점점 연구도 많이하고, 이렇게 될 수가 있겠지요.
그렇듯이 노자ㆍ장자에는,
[조선의 서계 박세당 선생의 신주도덕경]
‘새롭게 도덕경에 주를 달았다.’ 고 하는 뜻에서 신주도덕경을 굉장히 잘
쓰셨습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인용을 합니다.
어떤 형태로 쓰냐하면 노자 주석을 달때에 맨 앞에 서계 주석부터 답니다.
조선의 박서계 주석부터 답니다.
장자같은 경우에는 서계 주석을 맨 마지막에 결론적인 부분에 답니다.
활용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제자 분들이 그러셨대요.
“중국에 노자ㆍ장자 주석들이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나라에 노자ㆍ장자의 주석이 전부 다 되어 있는 것이 조선조의
서계 주석 외에는 잘 없습니다.
단편적으로는 있어도 한 권 전체를 주석을 다 다는 경우가 잘 없지요.
왜냐면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였고 유교 사회였는데, 노장의 주석을 달고
이러면 굉장히 이단시 됐던 그런 사회 분위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계 주석이 중국의 주석보다 그다지 낫지 않을텐데, 왜 이렇게
중시해서 노자는 맨 앞에, 장자는 맨 뒤에 이렇게 다셨습니까?” 했더니,
스님 말씀이
“한국 것 아니냐? 우리가 우리의 주석을 적극적으로 써야지,
이 땅에 같이 살았던 우리 선인들의 주석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체질에 더 맞을 수가 있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는 굉장히
큰 느낌을 줄 수가 있다. 그 다음에 조선시대는 유교 사회인데,
이 사회에 그렇게 금기시 되었던 노자 장자의 주석을 이 분이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노장학자다.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노장학자다.”
이런 말씀을 탄허스님이 하셨거든요. ‘다들 꺼려하는 책들을 누가 주석을
다느냐?’ 이 말입니다.
“서계” 라는 분이 수락산 서쪽에 계셨다고 해서 서계입니다.
그래서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굉장히 대단하셨던 분입니다.
굉장히 자유롭고 사상의 폭이 아주 넓은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장의
핵심을 다 알고 있는 것이지요.
‘서계 박세당 같은 분은 굉장히 특별한 분임에 틀림없다.’ 하셔서,
탄허스님은 이때에 “서계 전서”를 구해서 적극적으로 노자 도덕경
주석을 남기셨습니다.
서계의 노자ㆍ장자 번역이, 마지막 되어서 나온 것이 탄허스님 이후
에는 거의 2000년 대에 와서 처음 번역이 시작된 겁니다.
벌써 그 예전에 탄허스님은 이 “서계 전서”를 다 봐서 주석을 다 달고
계셨는데요. 이것은,
‘탄허스님은 굉장히 선구적인 분이셨다. 앞서 나갔던 분이셨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 불 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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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탄허스님의 학구열에 감탄합니다.
또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도 뛰어난 분이 많이 계셨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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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_()()()_고맙습니다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0-1-3. 老子와 佛敎의 會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