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집은 하느님이 지으십니다
서상돈은 다른 시찰관과는 달리 세금을 대납하고 세금 징수 후 남은 수만금의 이익금도 모두 나라에 바쳤다.
“결전(結錢)은 나라만이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라에서 손이 모자라 시찰관에게 맡기고 이익금을 시찰관에게 넘긴다고 했으나 그 이익금은 나라의 돈이다. 근자 나라 재정이 곤핍하다는데 어찌 나랏일을 하고 대가를 받을 수 있겠느냐?”
부정부패에도 흔들리지 않으니
아전들은 서상돈으로 인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없었다. 자연히 아전들에게 서상돈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아전들에 대한 대우는 매우 열악해 조선 초기에는 그나마 수조지(收租地)로 호장 이하의 향리에게 인리위전(人吏位田)이라 하여 5결(結)의 토지를 지급했으나 세종 때 혁파되고 아예 녹봉 자체가 없었다.
결국 아전들은 전세ㆍ공물ㆍ병역ㆍ소송 등 직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 착취의 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관아의 비리는 백성들에게 세금으로 걷은 창고의 곡식과 문서를 다르게 작성하거나 혹은 봄의 춘궁기에 백성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주지 않고 나누어준 것처럼 허위 문서를 만들고
남은 곡식을 사또와 결탁한 토호가 수레로 빼돌려 경강상인에게 팔고 이익의 절반씩 착복했다. 이러한 부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전이 중간에 끼어야 한다.
가장 큰 비리는 방납인이었다. 각 지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왕실에 특산물을 진상하는데 관아에서는 매년 그 지방의 특산물을 진상한다.
이를 산지에서 구입해 바치는 사람이 방납인인데 이들은 항용 시가(市價)보다 비싼 값을 관아로부터 받아냈다. 가장 높이 시세를 부를 때는 인삼 한 근 값으로 면포 16필,
표범 가죽 한 장 값으로 무명 70필, 호피 깔개 한 장 값으로 무명 200필, 송이버섯 세 사발 값으로 무명 40필, 은행 한 말 값으로 쌀 80말이라는 터무니없는 값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익의 절반을 사또에게 바쳤기 때문에 방납인의 비리는 항상 묵인되어 왔다. 오죽하면 정약용은 ‘용산 마을 아전’이라는 시까지 지었겠는가. 그중 일부를 옮겨본다.
아전들 용산 마을 들이쳐
소 끌어내 관가로 넘기누나.
소 몰고 멀리멀리 사라지는걸
집집이 문밖에 서서 멍하니 바라만 보네.
사또님 노여움 풀어 드리기 급급한데
백성의 아픔이야 누가 아랑곳하랴.
관아에서 파직된 아전들이 서 시찰을 모함하는 투서를 올렸다. 그때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김보록 신부는 이러한 고발과 투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등 서상돈을 옹호했다.
“만약 서상돈이 진실되지 않다면 조선 사람 전체가 다 진실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인 신부는 언제나 서상돈을 믿었고, 그의 호소는 절실함을 지니고 있었다. 서상돈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구의 수많은 걸인이 상여 행렬을 따라가며 통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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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성당 증축 전 계산성당(맨위쪽)과 1910년 경 찍은 증축 후의 계산성당(위쪽). 두 사진 속 성전 종탑 부분의 높이가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사진출처=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누리집 |
어렵사리 봉헌한 성전이 잿더미로
수많은 적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다윗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다 물리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마음 놓고 살게 되었다. 향백나무 궁을 짓고 다윗은 하루하루를 편하게 지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각한다.
“하느님은 아직 천막 속에 계시는구나. 하느님의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
다윗이 하느님을 모실 성전을 지으려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하느님은 왕궁 건축을 비롯해 이제껏 다윗이 이룬 업적 모두가 당신께서 하신 일임을 일깨우신다. 하느님의 집은 인간의 힘이나 재물이 아닌 하느님에 의해 시작되며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을 지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주신다.
하느님의 약속은 복음에서 실현됐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고 알리자 놀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한다.
천사는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집을 지어주시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과정이다.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엄청난 사건이 우주적 변모나 정치 사회적 대변혁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한 시골 처녀의 순박한 받아들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서상돈은 마침내 하느님의 집을 지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신부님. 성당을 지읍시다.”
“아우구스티노,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우리 힘을 모아봅시다.”
한국 이름을 김보록이라 한 이 벽안의 신부는 세 분 순교 선조를 둔 서상돈을 지극히 사랑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온 김보록 신부는 현재의 계산동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했다.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3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 건물 등을 건축했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동양 건축이었다. 1899년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에 원인 모를 불에 모두 타버렸다. 그때의 화재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한 김보록 신부의 서한 중 일부를 옮겨본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트르담의 루르드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화하였다. …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엔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라 들었다.”
시련을 은총으로 받아들여
성당이 전소했지만 김보록 신부만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 신부는 화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어려서부터 신앙 공동체 속에서 성장하고 또 성경을 읽은 서상돈에게 삶의 고빗사위마다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예수님을 대신해 신ㆍ구약 저자들이 기록한 말씀이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삶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성전 건축은 삶이 어렵고 힘겨운 신자들에게 구원의 우물가나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성체조배라도 마음 놓고 할 공간이 필요했다. 빛이신 주님 품에 안겨 따스한 온기와 밝은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성당 건축이 시급했다. 그것은 또한 서상돈에게는 순교한 세 분께 한 약속이기도 했다.
서상돈은 정규옥, 김종학 등 신자들과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2개의 종탑을 가진 고딕식 벽돌 성당인 새 성전을 건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계산성당은 1902년 11월 완공된 후 1911년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했고,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100년을 훌쩍 넘긴 성당이다.
서상돈은 9000냥을 헌금하여 1906년 12월 8일 성전 건축으로 진 모든 빚을 청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