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Bae | Biblical Humanities & History
하나님의 정의, 인간의 회복: 요나서의 열린 결말이 묻는 것
들어가는 말: 침묵으로 끝나는 책
성경의 많은 독자들은 요나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으로 끝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 . 요나의 대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요나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니느웨에 대한 미움은 해결되었을까요?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화하였을까요? 요나서는 왜 결말을 쓰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요나서의 결함이 아니라, 요나서가 던지는 또 다른 신학적 메시지가 숨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서의 결론에서 이 침묵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피해자의 자리에서 다시 읽기
이 결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책의 주인공과 독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요나는 단순히 편협하고 불순종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아시리아 제국의 잔혹한 만행(Tiglath-pileser III의 비문 등)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으며, 조국의 멸망을 예감하는 선지자입니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편협함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서 갈등하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저토록 잔인하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첫 번째 독자들입니다. 학자들이 추정하듯, 이 책의 독자는 바벨론 포로기 혹은 그 직후의 유대인 공동체였다면, 그들 역시 요나와 정확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성전을 불태운 제국(바벨론)의 한복판에서, 요나의 딜레마를 자신의 딜레마로 읽었을 것입니다.
'값싼 은혜'를 거부하다
만약 요나서 5장이 존재하여, "이에 요나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고 니느웨로 달려가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라고 끝났다면, 그것은 포로기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무시하고 교리나 도덕만 강조하는 완고함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완고한 교조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정답을 찾고, 상대방의 고민과 아픔을 외면한 채 정답만 말하는 답답함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 앞에서 용서는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려는 친구들에게 분노했듯, 섣부른 화해의 강요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 다 이해한다는 듯이 너무나 쉽게 동정을 표하거나, 이해한다는 식의 표현 역시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가해이기도 합니다. 원리와 원칙, 도덕과 교리보다, 사람이 훨씬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강요가 아닌 초대: 하나님의 질문법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서 4장 내내 요나와 논쟁하시지만, 그를 '강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노를 정죄하거나 그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통해 그의 감정을 직접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하나님은 명령이나 선포가 아닌 '질문'을 하 십니다. 이것은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가 '배제와 포용'에서 말한, 고통과 돌봄의 구조 속에서만 일어나는 '용서의 기적'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너는 이 하찮은 박넝쿨도 아꼈거늘... 하물며 나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의 그 작은 긍휼의 마음을 확장하여 나의 긍휼을 이해해보지 않겠니?"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감정(니느웨에 대한 분노와, 박넝쿨에 대한 긍휼의 감정)을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십자가와 '회복적 정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응보적 정의'를 넘어선 '회복적 정의'라는 하나님의 더 큰 그림을 봅니다. 요나가 원했던 것은 아시리아의 죄악에 상응하는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즉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행하십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이 '회복적 정의'와 연결됩니다. 십자가는 '응보'와 '회복' 즉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폭력, 피해자의 고통(응보의 대상)이 정점에 달한 자리인 동시에,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이 직접 감당하심으로써(희생),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신 '값비싼 용서'(회복)의 현장입니다.
요나서는 바로 이 십자가의 논리를 구약의 언어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트라우마와 분노를 무시하고 "그것은 죄악이니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회복적 정의'의 핵심 대상으로 여기고 끌어안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니느웨라는 가해자의 회개만큼이나, 증오의 지옥에 갇힌 요나라는 피해자의 영혼 회복에 더 마음을 두셨을 것입니다. '회복된 피해자'만이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고 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독자에게 넘어온 '오래참으심'
요나서의 열린 결말은, 요나가 이 초대에 응답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 침묵은 의도된 것입니다. 그 침묵은 요나의 선택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강압을 통해 복종하는 선지자를 원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한 사람을 원하셨습니다.
결국, 요나서의 마지막 질문은 요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책을 덮는 바벨론 포로기의 독자들에게로, 그리고 오늘날 '피해자'의 자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로 향합니다. "너의 고통과 분노를 내가 안다. 그러나 너는 너의 그 '정의로운 분노'의 틀을 깨고, 너의 원수까지도 아끼는 나의 마음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느냐?"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고, 또한 우리의 몫입니다. 요나서의 침묵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긍휼과 공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증오의 굴레를 벗고 응답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오래참으심'(long-suffering)이 머무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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