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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게 크게 당한후 잠시 대반격을 해보았던 금나라는 칭기스칸 생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1217년 8월, 징기스칸은 무카리(木華黎)를 태사로 삼아 국왕에 봉했고, 몽골 - 거란, 투르크, 탕구트 병사들 - 한인 병사들을 이끌고 남정을 하도록 했습니다. 무카리는 연경에 막부를 열었고, 그곳을 거점으로 금을 공략했습니다. 얼마 후 징기스칸은 서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사실상 금나라 방면의 전선은 무카리가 담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송나라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우선 세폐를 중지했습니다. 금나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는데, 송의 입장에선 단순한 세폐라고 쳐도 금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귀중한 자금줄이었던 것입니다. 금나라 경제에 있어서 이 남송이 보내는 세공은 작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몽골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에서는 더 그러했죠.
하지만 다급해진 금은 별로 좋은 선택을 하진 못하게 되는데...무카리가 태사에 봉해진 1217년 그 해. 금나라 군은 세폐 중단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 - 단순한 구실이 아닌 절박한 이유로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대전선을 벌인것입니다.
금태종이 죽고 여진군이 화북으로 돌아간뒤, 금과 송의 평화 사이에 간간히 있었던 전투를 보면 전개 양상은 똑같았습니다. 금이나 송이나, 서로를 향해 공격해서 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점령한뒤, 그것을 오래 유지하거나 할 능력은 못 되었습니다. 이 말은, 공격하는건 몰라도 서로간에 수비는 충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몽골에 시달리느라 사기도 떨어진 금군의 공세는 송나라의 입장에선 별로 대수로울 것도 못대어 금군은 고전하게 됩니다.
금나라는 수렁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먼저 화의를 제안해보지만, 송나라는 거절하고 맙니다. 이미 북쪽과 남쪽에서 공격을 받는 와중에, 서쪽의 서하 역시 금을 공격했습니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공격 하여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둘 당시, 금은 이를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몽골의 압력으로 금과의 전쟁에 나선 서하는 남송에 협조를 구하게 됩니다. 남송에선 첫번째 제의를 거절했지만, 1219년 다시 한번 제의가 들어오자 송과 서하가 힘을 합치는 묘한 상황이 나오게 됩니다.
다만 다행인것이 금나라 입장에서 보자면, 호라즘 왕조의 문제등으로 징기스칸의 역량은 서쪽 너머로 집중되고 있었다는것입니다. 이 틈에 반격을 감행하기 시작한 금은 서하와 남송의 공세를 저지하고, 무카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무카리는 사망하였고, 이때 금은 놀랍게도 막판 저력을 발휘하며 일시적으로 세력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섬서 중부 위수계곡의 전역을 되찾은 것입니다. 또한 장군 완안진화상(完顔陳和尙)이 하남과 산서를 종횡무진했습니다.
징기스칸은 서하 원중 병사했습니다. 그는 죽을때 금나라 공격에 관한 의견을 말했는데, 원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금나라의 정예는...동관에 있고, 남쪽은 산이 연이어 있으며, 북쪽은 큰 강으로 막혔으니 금방 뚫기는 어려운 일이다...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여라! 금과 송은 오랜 원수 중의 원수니 반드시 승락할 것이다."
1229년 몽골 제국의 두번째 대칸이 된 우구데이(窩闊臺)는 1232년부터 몽골이 가진 모든 역랑을 총동원해서 금나라를 공격, 거기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배후를 치는 별동대를 사용했습니다. 툴루이(拖雷)가 이끄는 별동대는 한중을 지나 사천을 넘어 금나라 남쪽에 나타났고 결국 금나라는 남송에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남송에 도움을 권하는것은 몽골이 더 빨랐습니다. 1232년, 몽골의 사자는 남송에 금나라 협공을 권했습니다. 남송 황제들의 무덤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송에게 있어 금은 철천지 원수, 드디어 기회가 오자 경초체치사 사숭지(史嵩之) 등은 적극 찬성했고, 오직 지양주사 조범만이 반대하는 뜻을 보였지만 송나라 정부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몽골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금의 사자가 온것은 이듬해인 1233년 이었습니다. 금나라 사신 완안아호는 남송에 식량을 구걸했습니다.
"몽골가 나라를 멸망시키기 시작한지 40년이 지나 이제 서하까지 이르렀습니다.(서하는 현재 절명당한 상태) 하나라가 망하니 우리나라(금나라)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금이 망하면 다음은 송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것은 자연의 이치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지만 송나라는 냉담하게 반응했습니다.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이전의 요나라도 송과 대립하였지만 적개심이란 면에 있어서 금에 비할바는 못되었고, 또한 계속 이어지던 평화를 깨고 세폐를 보내지 않았다고 먼저 공격한것도 금이다. 더구나 이제 몽골과 협약한다는 방침까지 세운뒤다. 는 것입니다. 금나라의 사자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그 해 10월, 사숭지와 남송 장군 맹공(孟珙)의 군대가 몽골군과 합세하여 채주를 포위하였습니다.
남송의 병력은 이 당시 2만.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몽골에게 있어 더 큰 도움은 30만석이나 되는 군량의 지원이었습니다. 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몽골로서는 이는 매우 값진 도움이었고, 양군은 채주를 포위해 마침내 금나라의 명줄을 끊었습니다. 금나라 애종은 채주에서 자살했고, 그러면서 달리기가 빠른 종실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제위를 양위했습니다. 빠른 발로 도망을 치라는것이었는데, 승린도 전사하여 금은 완전히 멸망하고 맙니다. 완안아골타가 금을 세운지 딱 120년 만이었습니다.
이제 몽골과 남송은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남송의 지원병은, 급하게 파견된 병력이었습니다. 따라서 몽골과 마땅한 세부계획을 짜놓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말해서 남송 입장에서 하남을 원했다고 치고 군대를 보냈다고 한다면, 몽골의 입장에선 여기에 대해 명확하게 조약을 해놓거나 한 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일단 싸우기전에 일을 해결하진 못했지만, 싸움이 끝난 후에도 양군은 별로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딱히 우호적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죠.
청나라 사람 조익(趙翼)은 이 상황을 가르켜,
"두 나라는 이 시기에는 서로 돈독하여 나쁠 일이 없었다. 송이 삼경팔릉을 되찾기 원했다면 맹공 등으로 군전에서 의정토록 했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삼경은 개봉, 낙양, 귀덕의 세 성이고 팔릉은 북송 8대의 능묘지입니다. 남송 입장에선 매우 바라던 것이었는데, 맹공이 진중에서 이런 문제를 협의하긴 적절하진 못했습니다. 송나라에선 진사에 급제하지 않은 무인이 이런 협약을 하긴 힘든 일입니다.
몽골과 영토 등에 대한 협의가 전혀 되지 않았을 무렵, 송나라 조정에선 주전론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조범(趙范)과·조규(趙葵) 형제가 출병론을 제출했는데, 의외로 당시 남송 조정의 분위기 전체가 출병론 분위기는 아니었는지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재상 정청지(鄭淸之)가 적극 출병론을 지지해 맹공이 이끄는 군대가 군대를 이끌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정보는 몽골군에도 포착되었고 몽골은 동관으로 증원군을 모음과 동시에 하남을 주시하며 감시하고 전쟁 준비를 했습니다.
맹공이 이끄는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봉에 입성했습니다. 개봉은 몽골군의 잔혹한 대약탈에 이미 당한 후라,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때 송군의 병력은 20여만에 달했습니다. 이때 개봉에 입성한 장수는 전자재(全子才)라는 사람이었는데, 별다른 일을 벌이지 않고 가만히 있느라 낙양이나 동관에 공격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몽골의 군대는 사방에서 계속해서 몰려들었고, 처음으로 남송과 몽골군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패배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20만이나 되는 군대를 책임질 군량이 없었습니다. 워낙 갑작스런 출병이라 준비가 부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송은 현지에서 조달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몽골군의 만행으로 하남은 황폐화된지 오래라 어림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송군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하고 맙니다. 양군의 첫번째 대결은 몽골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싸움을 먼저 건 쪽은 송나라니, 우리쪽은 이를 벌하겠다.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집회)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가진바 모든 역량을 전부 기울여 남송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1236년 그 유명한 바투의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진정한 몽골의 가장 강력한 주력은 남송을 집어삼키기 위해 준비 중이었습니다.
우구데이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서 - 중 - 동 크게 세 곳을 전장으로 삼는 공격이었습니다.
서쪽 ─ 사천 공격
중 ─ 양양 공격
동쪽 ─ 회남 공격
이제 전중국을 그 무대로 삼는 거대한 대전이 벌어졌고, 전역의 초기에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남송을 밀어부쳤습니다. 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습니다.
몽골 제국이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기에 조정은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습니다. 내시 동송신은 패닉에 빠져 천도를 이야기 했고, 송나라 조정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문천상은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조정이 전혀 듣지도 않자 그냥 벼슬을 버리고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몽골군은 지금껏 겪어왔던 모든 전투를 포함해도 가장 유례없는 곤혹스러운 사태에 직면하게 됩니다. 남송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여기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기 힘든데다 오히려 뒤로 밀려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남송의 장군 맹공이 있었습니다.
맹공은 호북 양양 출신으로,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4세조는 악비의 부하였는데, 스스로를 무암거사(無庵居士)라고 일컫으며 군대의 진영을 거둘때는 항상 청소를 하고 향을 피웠으며, 재물이나 여색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고 식사도 간소하게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 하는등 도인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맹공은 강릉에 대핸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또 다시 막아내었습니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개척하여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습니다. 특히 양양을 수복한것은 송나라에게 있어 천운이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송은 오랜 시간 버틸 수 있게 됩니다.
몽골이 자랑하는 기병도 하천과 수로가 많은 회수 남쪽에선 별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인구, 빼곡하게 세워진 요새들, 끝도 없이 나오는 풍부한 전쟁 물자, 복잡하게 펼쳐진 하천과 수로, 거기에 막북(幕北)에서 생활하던 몽골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습하고 뜨거운 기후와 풍토병 등, 전쟁은 6년간 벌어졌지만 몽골은 기세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1241년 대칸인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자 몽골군은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송나라는 사천 지방에만 10여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저 멀리 동유럽에서 바투의 원정대가 회군을 시작했습니다.
우구데이 칸이 죽은 후 구유크 칸이 대칸이 되었으나, 바투와 분쟁이 극심했습니다. 다시 전쟁이 재개 된것은 몽케 칸이 즉위한 후였습니다. 몽케 칸은 이번에도 똑같은 전략으로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1258년에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직접 나선 친정이었습니다.
서로군 사령관 ─ 몽케 칸
중로군 사령관 ─ 쿠빌라이
운남을 돌아서 공격하는 별동대 ─ 아리크 부케
대전략은 몽케가 사천을 휩쓸고, 쿠빌라이와 합류해 강남을 일거에 쓸어버리자는 것이었는데, 몽케 칸은 사천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견(王堅)이 지키는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했는데, 몽케 칸은 넌지시 투항을 권하기도 했지만 왕견은 오히려 사자를 살해하고 군민 10여만과 결사항전을 다짐했습니다. 화가난 몽케 칸은 조어성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시작합니다.
본래, 사천의 다른 지역들을 병합시키기는 했지만 대부분 몽골군의 기세를 보고 지레 겁을 먹어 항복한 것이라, 전투다운 전투는 조어성 전투가 처음이었습니다. 몽케칸은 반드시 조어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몽골군의 정밀한 공성 병기도 너무나 단단한 조어성엔 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송군은 계속 몽골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몽골군은 잠시 구름사다리를 타고 성 내 진입에 성공하긴 하나, 다시 큰 저항에 직면해 퇴각하고 맙니다.
몽케 칸은 전투가 전혀 예상외로 흐르자 당황해서 군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선 이곳에 소규모 병사만 남겨두고 쿠빌라이와 합류하자는 의견과, 아예 북쪽으로 도망가자는 의견까지 다양했는데 대부분은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에 몽케 칸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5개월이 넘도록 공성전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몽골의 장수 왕덕신(汪德臣)은 직접 성 아래로 가서 "싸우자!" 고 도발 했지만 성에서 쏜 화살을 맞고 전사 하기도 합니다.
몽골군은 조어성에 대한 지원 자체는 계속해서 차단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조어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조어성의 물자는 매우 풍부했고, 수비군의 사기도 전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송나라 군은 대놓고 몽골군에 물고기와 밀가루를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반면 몽골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5개월동안 싸웠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많은 대신들과 장수들만 죽어버렸습니다. 비가 오는데다 더운 사천의 날씨는 몽골군에게는 쥐약이었고, 군중에서는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더구나 몽케칸까지 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몽케 칸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미 전쟁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었고, 몽골군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이 공성전은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쳐 몽골군의 정복 전쟁은 한동안 좌절되었고, 서아시아에서는 훌라구가 대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적은 병력을 남겨둔채 귀환합니다. 숫자가 부족해진 몽골군은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게 아인 -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쿠빌라이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몽케 칸이 죽었다. 그럼 자기도 대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공적을 쌓는게 유리하다. 또 다른 점으로 쿠빌라이의 부장 우량하타이 - 그 유명하고 용맹한 수부타이의 아들 - 는 안남국을 토벌하고 북상 죽이라, 자신이 떠나면 고립되고 맙니다.
애가 타는 일이지만 쿠빌라이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악주를 포위하고, 돌아가지를 않았습니다. 우량하타이의 합류는 늦어졌는데, 호남 담주에서 전투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곧바로 합류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침내 아리크 부케가 쿠릴타이를 소집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쿠빌라이 본인이 어떻게 생각했건간에, 쿠빌라이가 보여주던 태도는 중국 문화 애호가였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자신의 봉지에 있을때, 그 자리에 성곽을 쌓았는데 이는 보수적인 몽골인들에게는 매우 의뭉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몽골의 나이든 장로들은 쿠빌라이를 비난했고, 쿠빌라이를 도와줄 수 있는 훌라구는 저 먼 서아시아에서 귀환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대응을 하건 간에, 쿠빌라이는 어서 귀환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송에는 가사도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쿠빌라이는 이제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돌아갔고, 가사도 휘하 송군은 도하중인 몽골군을 공격했는데 그 결과는 수급 170급이라는 비교적 경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우량하타이 군도 부교를 건너 강 건너로 무사히 돌아가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쿠빌라이와 가사도 사이에 밀약이 있지 않았나 하는 말들을 꺼냅니다.
어찌되웠건,
몽골군의 두번째 공격도 이렇게 저지되었습니다.
그 후, 쿠빌라이가 대칸이 되고 내부 문제가 해결된 후, 남송에 학경이라는 사절을 보낼일이 생기는데 가사도에 의해서 곧바로 수감되어 버리고 맙니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이전의 두 패배를 가만히 복습해보았습니다. 주변 참모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 대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양을 집중 공격하기로 전략을 세웠지요
양양은 그야말로 요충지로, 이곳을 잃으면 송나라는 끝이다. 쿠빌라이 칸의 주위 신하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고, 항복한 남송 측의 인물에서도 양양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사천등을 한꺼번에 공격했던 지난번 과는 다르게 양양에 온 힘을 쏟는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268년 장장 10여만의 대군이 양양으로 출격하여 주변의 거점을 점령하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양양성은 견고한 시설이라 공격이 어려웠기에, 적극적은 공격보단 말려죽이는 것이 기본 정책이었습니다. 이에 송나라는 양양으로 지원병들을 급파합니다.
하지만 이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몽골도 지원군이 드나들면 전략은 실패라는것을 알았기에 저지했고,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 정도를 빼면 몽골군에 전부 패배했습니다. 대신, 한수가 불어나자 그 틈을 타 배를 타고 물자를 지원해주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몽골군은 크게 당황했지만, 곧 한수를 목책으로 막아버렸습니다.
몽골군의 양양 공격군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더 불어났습니다. 수만의 군대가 지원되고, 저 멀리 중동에서 공성 병기들이 도착했습니다. 반면에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양양은 고립되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1272년까지 양양이 떨어질 생각을 안하자, 다시 몽골군은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양양과 번성 중에, 우선 번성부터 함락시키고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번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양양성의 상황은 절망적이 되었습니다. 물자는 모자르고, 사람들은 동요하고 투항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성의 수비대장 여문환은 매일 남쪽을 바라보며 울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했지만 상황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럴때 쿠빌라이 칸은 사람을 보내 여문환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그대는 수년동안이나 이 성을 지켰다. 허나 이제는 나는 새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황제꼐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신다! 투항하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
"우리 군대는 지금껏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다. 너는 지금 고립 된 성에 있고 탈출로도 없다. 바깥에는 지원군도 없다. 너는 성을 지키다 죽었다는 헛된 공명을 바랄지 모르겠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결국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 여문환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송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명신상해에 실린 바얀의 그림 마태화보에 실린 바얀의 그림
바얀(佰顔 1236년 ~ 1295년1월 11일)은 원나라의 명장으로, 정확히 말하면 쿠빌라이 칸의 명장으로 활약했던 장수입니다. 시황제의 왕전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아그리파처럼 쿠빌라이 칸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칼" 이었지요.
바아린 부 출신이었던 바얀은 본래 서방을 정복중인 훌라구를 따라 아버지와 함께 그쪽에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일 칸국의 사신으로 원나라 조정에 입조했을때 장군 다운 당당한 체격과 언사로 쿠빌라이의 신임을 듬뿍 받았습니다.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했죠.
"바얀은 큰 인재다. 짐의 신변에 남겨라."
이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후로 쿠빌라이의 최측근이 된 바얀은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 1265년에는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이 되었습니다. 그때문에 바얀승상(佰顔丞相)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이때쯤 되면, 이제 몽골 제국에 대항하는 나라는 남송밖에 없었습니다. 쿠빌라이의 가장 큰 소망은 전중국의 통일이었으나, 동시에 쿠빌라이는 중국 문화의 애호가 이기도 했습니다.바얀이 출정하기 전에 쿠빌라이는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 예전 송나라의 태조의 부하였던 조빈이라는 신하는 남당을 멸망시킬때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지 않았다고 하네. 자네도 그 마음을 본받아 짐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게나."
1274년 9월 바얀과 아술(阿術 아주Aju 그 유명한 수부타이의 손자)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남송을 공격했는데, 바로 작년에 양양 방어선이 무너진 남송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은 강주(江州)에 이르렀고, 송나라의 병부상서 여사기는 바얀에게 투항했습니다.
바얀은 여사기를 강주 태수로 책봉했습니다. 그런데 여사기가 자기를 끌고 와서 보니, 술판을 벌이고는 여자 둘을 바얀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얀은 몹시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나는 황제의 명을 듣고 송나라를 문죄하거늘, 어찌 나의 뜻을 동요시키느냐?"
여사기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꿇고 빌기만 했습니다.
바얀은 쿠빌라이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지나가면서 역병이 든 백성들에게 약을 주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어 환심을 샀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바얀의 군대를 '왕자의 군대' 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북방 병사들은 남방의 더위를 먹자 영 힘을 못쓰고 있었고, 쿠빌라이는 넌지시 세력을 정비하고 가을에 공격을 할 것을 주장했지만, 바얀은 거절했습니다.
"아군의 공격은 한참 사냥감을 쫓고 있는 격입니다. 지금은 질풍처럼 전진해야 합니다."
"그럼 스스로 결단을 내리게."
이 무렵 남송에서는 가사도는 1275년 사실상 남은 거의 모든 군사인 13만의 군대를 싹싹 긁어서 출정했습니다. 하지만 가사도는 이길 자신이 없어 싸울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칭신(稱臣)하고 세폐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바얀에게 강화를 제안했으나 바얀은 단칼에 거절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가사도는 내키지 않는 싸움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으니 제대로 될리가 만무했습니다. 남송군은 괴멸되었고 주력군은 완전 소멸, 결국 남송의 멸망은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바얀은 건강에 사령부를 두고 아주를 회남일대로 파견해 임안과 회남 사이를 차단, 그 주변 지역들을 쓸어담듯이 점령을 했습니다. 어느정도 준비가 끝나자, 바얀의 군대는 남송의 수도는 임안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미 군대도 없는 남송은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했고, 송나라의 대신들은 어린 황제와 늙은 태후를 불쌍히 여겨 제발 돌아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바얀은 거절했습니다.
"따지고보면, 자네들 조씨 왕조도 어린 고아와 늙은 과부의 손에서 정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오늘날 어린 고아와 늙은 과부가 자기들 손으로 정권을 잃어버리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 세종의 후예에게서 정권을 탈취한 일을 말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남송의 재상이던 유몽염과 진의중이 달아나는 초유의 사태까지 있었습니다. 남송의 태황태후는 이런 소식을 듣자 한숨을 쉬었습니다.
"왕조가 이제 삼백년. 사대부를 대접하기를 그 예로 하였건만은."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은 바얀를 만나러 했지만, 바얀은 문천상을 아예 구금시켜버리고 결국 1276년 남송은 항복,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바얀은 송나라 황실의 기물, 책, 황족을 성도로 압송했습니다.
남송의 마지막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천상의 자는 송서 (宋瑞) 또는 이선 (履善), 호는 문산 (文山)이고 강소성 길주현 노릉 출신 입니다. 어린 시절 문천상은 구양수 등의 과거의 유명한 문사들을 동경하였는데, 과거에는 뛰어난 실력으로 장원으로 합격했습니다.
바얀의 군대가 쳐들어와 송나라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문천상은 지체없이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 1만명의 장사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이런 오합지졸 군대가 20만 원나라의 군의 상대가 될리는 만무했습니다. 친구들이 무모함을 지적하자, 문천상도 뜻밖에 동의하면서 말했습니다.
"상황이 어려운것을 나라고 모르겠나? 허나 국가가 삼백년동안 신하와 백성을 돌보았는데, 드디어 위급한 때가 되자 한 사람도, 한 마리의 말도 모이지 않고 있다네. 내가 가장 가슴 아픈것이 바로 이것이야. 그래서 내가 역량도 안되지만 일어나는것이야. 내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천하의 충신의사들이 소식을 듣고 일어나 모두가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일세. 그렇게 된다면야 성공할 수 있네. 사직을 지킬 수 있네."
문천상은 게릴라 활동을 벌였고, 조정으로부터 우승상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몽골군은 수도 임안 코앞까지 다가왔던 상태였습니다.
문천상은 몽골군이 임안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리를 듣자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세가 좋지 않구나.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당신이 죽으면, 우리 모두가 따라 죽을 것이오."
그러자 문천상은 이 절박한 상황에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며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유옥천이라는 사람이 기녀와 사랑을 했는데, 그 기녀는 유옥천만을 위해 다른 손님을 받지도 않았다고 했지. 유옥천이 진사가 되자 당연히 기녀도 부임지에 따라 가려고 했지만, 웬걸! 유옥천은 그게 싫었던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지.
'조정의 규정으로는 가족을 데려갈수가 없어. 차라리 우리 둘이 죽어버리자고. 나 혼자서는 갈 수 없어.'
그리고 독약을 마셨지. 기녀가 먼저 마시고, 절반을 유옥천에게 주었는데, 유옥천은 그걸 마시지 않았어. 기녀가 죽는것을 본 유옥천은 혼자 떠났지. 여보게나. 자네들이 그렇게 말하는것이 유옥천을 본받자는 소리 아닌가?"
여하간 문천상은 홀로 바얀의 진영으로가서 그와 담판을 벌였습니다. 문천상의 시에 의하면, 이때 북쪽 몽골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고 합니다.
"강남에도 아직 사람이 있구나."
생사가 상대방에 달린 상황에서도 문천상은 전혀 물러서지를 않았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바얀은 문천상을 잡아다 가두어버렸습니다. 욕을 마구 퍼붓은 문천상이지만, 이렇게 가두어진 상태에서 그는 조국이 항복을 하는 광경을 지켜봐야했습니다.
처량한 신세로 북쪽의 도시 대도로 끌려가던 문천상은 그러나 기회를 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진강에서 도주한 그는 병력을 모아 치열하게 유격전을 벌였으나, 1278년 원나라 장수 장홍범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문천상이 이끌던 전 병력은 전멸했고, 그를 따르던 문인들도 모두 전사했습니다.
자살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문천상은 포로로 끌려와 떠있는 바다위 의 배에 갇히는 상태에 놓였습니다. 장홍범은 마지막 남은 송나라 부흥 세력에게 항복 권고문을 작성하라고 문천상을 협박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송나라의 명운은 이미 끝난 뒤였습니다.
1279년 2월 6일. 원나라 군은 애산을 공격했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남송의 육수부와 장세걸은 가지고 있는 칼이 다 부러지고, 화살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싸웠지만 힘이 부족했습니다.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황제의 어머니도 물에 빠져서 자살했고, 장세걸은 배가 뒤집혀서 죽었습니다. 병사들은 원나라의 군대의 칼에 찔려 죽고, 궁녀들은 수난을 피해 물 속으로 몸을 던져 자진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문천상은 적의 배에 갇혀서 똑똑히 지켜봐야 했습니다. 감시가 심해 바다에 몸을 던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데, 문천상은 이렇게 시로 담담하면서도 비통하게 심정을 표시했습니다.
산을 하나 도니 물 하나.
나라도 없고 또한 집도 없다.
남아의 천년 뜻.
내 생은 아직 다하지 않았다.
문천상은 다시 북쪽으로 끌려갔고,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끌려가는 도중, 그는 8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충성을 보여주자.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제국을 이끌어갈 인재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포로인 문천상이 도착하자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는 대단히 성대했고 문천상의 마음을 흔들어보자는 수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천상은 놀랍게도 준 침대에도 눕지 않고 아침까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연회가 끝난 후엔 원나라의 승상이 찾아와 문천상을 협박했습니다. 회유와 강압을 모두 써본 것인데, 문천상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원나라에 항복한 문천상의 동생 문벽이 나서서 형을 설득했고, 이제는 송나라의 폐제가 된 황제까지 문천상을 설득했습니다.
문천상이 지켜야할 충성의 대상인 송나라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저항 운동도 무너졌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세계의 지배자였고, 그를 따른다면 최고의 부귀는 당연히 보장되었으며 쿠빌라이를 따른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천상은 이 모든것을 거절했고, 댓가는 차가운 지하의 감옥 굴이었습니다. 햇빛도 잘 비치지 않고, 사방에선 차가운 기운만이 가득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문천상은 가장 위대한 한시중에 하나인 정기가(正氣歌)를 썻던 것입니다. 문천상에 대한 글은 쓴게 있으니, 그 내용의 처음 부분과 끝 부분만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天地有正氣 雜然賦流形
하늘과 땅에 정기가 있으니.
서로가 뒤섞여 온갖의 형상을 만들었네……
下則爲河嶽 上則爲日星
아래로 강과 산을 이루었고, 위로는 해와 별을 이루었고
於人曰浩然 沛乎塞蒼冥
온천지에 또한 가득 들어찼더라. 한길 맑고 번듯할 때는
含和吐明廷
화기를 머금어 맑은 뜰에 뱉고
時窮節乃見 一一垂丹靑
때 막히면 굳게 잡은 것 드러나 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웠더라.
맹자는 호연을 이야기 했고, 그것은 형태가 없어 아래로 가면 강이 되고 위로 가면 별이 되는데, 사람에 이르러선 바로 호연의 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화하면 그것은 밝은 형태로 나타나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호연의 정기는 바로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절의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在齊太史簡 在晋董狐筆
제나라에는 태사의 간簡, 진나라에서는 동호의 필筆
在秦張良椎 在漢蘇武節
진나라에서는 장량의 추椎, 한나라에서는 소무의 절節
爲嚴將軍頭
엄장군의 머리가 되었고
爲혜侍中血
혜시중의 피가 되었고
爲張수陽齒
수양 장순의 이가 되었고
爲顔常山舌
상산 안고경의 혀가 되었더라.
或爲遼東帽
혹은 요동의 삿갓이 되었으니
淸操여氷雪
맑은 뜻은 얼음과 눈과 같으며
或爲出師表
혹은 출사표 되어
鬼神泣壯烈
그 장렬함, 귀신을 울렸으며
或爲渡江楫
아니면 강을 건너는 노가 되어
慷慨呑胡갈
그 강개는 오랑캐를 삼켰고
或爲擊賊笏
아니면 역적을 치는 홀 되어
逆揷頭破裂
반역자의 머리를 부셔 놓았다.
제나라의 재상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을때, 그 기록관은 죽간에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 고 썻기에 처형당했습니다. 기록관의 동생은 다시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 고 작성했고, 최저는 다시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기록관의 막내 동생이 '최저가 주군을 살해했다'고 또 다시 작성하였으니, 최저도 결국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진나라의 조천이 군주인 영공을 죽이자, 기록관이던 동호는 조천의 형이자 권력가였던 조순이 동생을 처벌하지 않았기에, '조순이 주군을 살해했다.' 고 기록했습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장량은 진시황제를 죽이려고 역사를 고용해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폭군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한나라의 소무는 흉노에 무려 19년이나 잡혀있었으나, 자신이 사자로 왔음을 상징하는 부절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불타는 애국심의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엄장군, 엄안은 장비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차라리 목이 잘릴 지언정 항복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끝없는 용기의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혜시중 혜소는 진 혜제를 보호하다,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자신의 몸으로 화살을 막아 주군을 살리고 죽었습니다. 혜제는 자신의 옷에 묻은 혜소의 피를 결코 지우지 않았습니다.
지극한 충성심의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장순과 안고경은 안록산의 난때 반란군을 막다 잡히게 되었지만,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아 죽어버렸습니다. 장순은 전쟁을 지도하면서 분노로 이를 갈아 가지고 있던 이가 다 부러졌고, 안고경은 안록산을 욕하다가 혀가 뽑혀서 죽었습니다.
열사의 피의 절의의 정기가 역사에 남았습니다.
관녕은 삼국시대의 인물인데, 요동으로 피난해있는걸 조조가 불렀으나 끝까지 한의 유민으로 행세하며 결코 위나라의 관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소박한 옷차림과 모자 하나만을 쓰며 지냈습니다.
단수실은 탈라스 전투에도 참가했던 당나라의 장수로 반란을 일으킨 주자를 만나 홀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으며, 동진의 장군 조적은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강을 건너며 노를 부셔버리면서, 땅을 수복하지 못하면 절대로 살아서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정기는 출사표에도, 단두실의 홀에도, 장순의 이에도, 관녕의 모자에도, 안고경의 혀에도, 소무의 절에도, 장량의 추에도, 동호의 필에도, 태사의 간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귀신도 눈물을 흘릴만한 장렬함이 되었습니다.
悠悠我心悲
끝없는 내 마음의 슬픔이여
蒼天曷有極
푸른 하늘은 다함이 없는가.
哲人日已遠
어진 이들 가신 날은 이미 멀어도
典刑在宿昔
모범은 예부터 있구나
風첨展書讀
처마 밑에서 책 펴 읽고 나니
古道照顔색
옛 성현의 도가 내 얼굴을 비추는구나.
그도 사람입니다. 저 하늘을 바라보면 어느순간 슬프고, 두렵고, 불안하지만은, 그럴때마다 책을 펼치고, 이 앞에 열거한 사람들은 이미 먼 아득한 과거의 역사가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그 정기만은 그대로 남아, 그 자리에 있어, 역사를 지나 살아 숨쉬고, 시대를 지나 천년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뜻을 불태웁니다. 책을 폅니다. 역사가 거기에 있고, 충의가 거기에 있고, 푸른 하늘이 거기에 있습니다. 책을 펴면 상쾌한 바람이 됩니다.
그로인해 그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더럽고 어두운 토굴에서 문천상은 2년간이나 갇혀있었고, 쿠빌라이는 정말 집요할 정도로 문천상을 설득했습니다. 또한 송나라의 대신이었다가 원나라의 장관이 된 왕적옹은 문천상을 안타까워해 구명운동을 벌였습니다. 자신과 같은 귀순자들을 모아 문천상을 석방하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일전에 송나라의 재상으로 도망간 적이 있던 유몽염은 반대했습니다. 문천상이 풀려난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 틀림없이 또다시 송나라 부흥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그럼 자신들은 어떻게 되는가?
시간만이 흐르고, 문천상은 더러운 토굴에서 3년째를 버텼습니다. 쿠빌라이는 끝까지 애가 탔지만, 문천상이 살아있는것만으로도 송나라의 사방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송나라는 멸망했지만, 그 정신만은 문천상이 변절하지 않는한 끝까지 남아서 부흥 운동의 중심이 되어버렸던 것이었죠. 결국 쿠빌라이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을 지배했던 쿠빌라이 칸은, 문천상의 정신만은 지배할수 없었습니다.
쿠빌라이는 문천상을 마지막으로 설득했지만, 위대한 대충신은 거절했습니다. 1282년의 12월, 문천상은 끌려나와 처형을 맞이했습니다. 최후의 마지막때, 그는 남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합니다.
남송은 멸망당했지만, 그 마지막 여명은 문천상이라는 존재 때문에 끝까지 빛났습니다. 시간을 돌려, 쿠빌라이 칸은 멸망한 남송의 어린 황제와 황후를 데려와서 몽골식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쿠빌라이 칸의 아내는 그들을 보고 안쓰러움과 걱정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예부터 천년을 이어간 왕조는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의 자손들도, 언젠가 저런 운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30년, 그 전성기가 끝난 원나라는 100년이 되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역사는 그런식으로 계속 흘러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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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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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대협께서 다 막아주실꺼야. (응?)
항룡십팔장! (응?)
오오 감사히 읽겠습니다.. 요새 신불해님 글 읽으러 카페 옵니다...
황용의 용병술....
누구를, 무엇을 위한 충정이었는지.....그저 남아의 기상인지 아니면 민족혼인지....
자기만족이겠지만,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겠습니까.
충신은 아름다워라 읽다가 마지막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