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층산] 제2부 큰 값을 치르고(4)-1
컬럼비아에서 보낸 마지막 주간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랙스와 세이머가 바쁘게 짐을 꾸려 집에 돌아가려고 수선을 피우는 바람에 그 방에 기거하고 있던 브라마카리는 별수 없이 책더미 위에 걸터앉아 있어야 했다 랙스는 소설 창작과의 놉베 교구에게 제출할 소설을 매듭짓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 꼴을 보다못한 친구들이 한 대목씩 나누어서 동시에 마구잡이로 써 갈기다가 결국 다른 친구들은 손을 다 떼고 렉스와 나 그리고 도나 이튼 셋이서 그 소설을 끝마쳤다. 놉베 교수는 그 작품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인데도 B 학점을 주어서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랙스의 어머니가 졸업을 앞둔 떠들썩한 마지막 몇주간 동안 아들을 곁에서 돌보아 주려고 뉴욕으로 왔다. 랙스는 그의 어머니가 버틀러 관에 세낸 아파트에서 식사를 했다. 나는 가끔씩 그곳에 가서 건강에 좋은 여러 가지 음식을 늘 먹어야 하는 그를 도와 주었다.
어느 날 우리는 석유사업을 하는 랙스의 매부 덕분에 유조선을 타고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 에리 운하를 거쳐 버팔로가지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그러고 나서 랙스의 본가가 잇는 뉴욕 주 서남부 올리어까지 갈 예정이었다.
졸업식 날, 우리는 랙스의 방 창문에서 샴페인을 병째 들고 마시면서 졸업생 일동이 집합하여 연설을 들은 다음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 총장과 악수하기로 되어 있는 해밀튼 관 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실 6월에 졸업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지난 2월에 대학 본부 교무처에서 학위증을 받음으로써 내 졸업은 이미 인정된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지난해에 도나 이튼이 바너드 대학 졸업식 때 입었던 학사모와 가운을 빌려 입고 다른 친구들 틈에 끼여 연설을 조롱하며 앉아 있었는데, 방금 퍼날드(기숙사)에서 샴페인 축제를 한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차레대로 천천히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 임시로 마련된 단상에서 대학교의 모든 임원과 악수를 했다. 버틀러 총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그는 사뭇 비참한 표정으로 악수하면서 학생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지난 6,7년 동안 학생들이 작별 인사를 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총장을 모욕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악수만 하고 지나갔다. 그 옆에 있는 호크스 학장에게 다가가자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듯이 흰 눈썹을 치켜뜨고 노한 음성으로 꾸짖었다.
"자네 여기 뭣하러 왔나?"
나는 빙긋이 웃고 그냥 지나갔다.
우리는 결국 유조선을 타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올리언으로 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행복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될 세계의 일부를 본 갓이다.
뉴욕 주 산악지대는 바로 그 행복이 연상되는 장소로 내 기억에 참 아름다운 곳으로 남아있다. 하기야그곳은 사실 어떻게 보아도 아름답다. 깊은 계곡들, 끝없이 이어져 굽이치는 숲이 울창한 산맥, 널따란 들판, 큼직한 붉은 창고들, 하얀색으로 단장한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평화스러운 마을 등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차가 엘미라를 지나자 이 모든 풍겨이 비스듬히 길게 비치는 석양빛을 담뿍 받아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으로 비쳤다.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끝없이 달리다 보니 미국이 과연 얼마나 넓은 땅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고, 한없이 맑은 하늘 아래 광대무변한 이 나라의 대륙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땅은 신선하고, 풍요롭고, 호화찬란하고, 깨끗하고, 건실하고, 새롭고도 예스럽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올리언에 도착한 우리는 대자연의 위엄과 침묵 앞에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여 그곳에 일주일 밖에 머물지 못했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큰길을 벗어나 프란치스코회에서 운영하는 성 보나벤뚜라 대학의 평범한 벽돌 건물을 보러 샛길로 들어섰다.
랙스는 그곳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저녁마다 거기서 프란치스코회 신부들이 강의하는 문학 강좌를 청강하고 있었고, 랙스는 그곳 도서관장 신부와 친했다. 우리는 안마당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어느 건물 옆에 차를 세웠다.
랙스가 나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을 때, 나는 그를 잡아끌었다.
"여기를 떠나자."
"왜 그래? 여기는 멋진데야."
"그래, 좋은 곳이야. 그렇지만 가자. 인디어 보호구역으로 어서 가자."
"너 도서관 구경하고 싶지 않니?"
"여기서도 충분히 볼 수 있어. 자, 빨리 나가자."
그때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옆에 수녀와 신부들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공적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서원의 냄새가 풍기기만 해도 오금이 얼어붙는 지옥 시민의 기본적 공포였을 것이다.십자고상이 너무나 많았고 거룩한 동상도 참 많았다.그리고 주위가 사뭇 고요하고 쾌적했다. 하여간에 무척 신심 깊고 평화로운 곳이었다.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나는 안절부절못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나는 뉴욕에 돌아오자마자 우선 더글라스톤 식구들을 떠나 따로 살림을 차렸다. 우리 가족은 외조부모의 죽음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다 헤어져서 살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과 롱아일랜드 기차를 타느라고 숱한 시간을 길에서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6월 어느 비 오는 날, 나는 '허브'라는 더그라스톤의 흑인 택시 운전사와 흥정을 하고 짐을 옮겼다. 옷가방과 책들, 휴대용 축음기와 고상하지 못한 레코드판들, 그리고 벽에 걸 그림들과 심지어는 내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테니스 라켓까지 택시에 싣고서 나는 컬럼비아 도서관 바로 뒤에 있는 114번가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운전사와 나는 한때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의 신비에 쌓인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발렌티노가 죽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므로 그것은 신나는 화젯거리가 못 되었다.
내가 한 주간에 7달러 반씩 내기로 하고 얻은 방을 보고 허브는 "꽤 쓸 만한 방을 잡앗군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양지바르고 깨끗하고 산뜻한 새 가구가 있는 이 방의 창문을 열면, 대학교 테니스장 옆 공터에 높이 쌓인 석탄 더미와 남쪽 운동장과 그 뒤로 둥근 지붕의 구 도서관 층계와 그 옆의 나무들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허브가 작별하면서 "이제 식구들과 헤어졋으니 어지간히 진땀 빼겠습니다.." 하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
이 방에서 일어난 일은 여러 가지였지만, 무엇보다 나는 다시 규칙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라마카리가 제안한 대로 「그리스도를 따라」를 읽었다. 그 결과 거의 강박 같은 충동에 이끌려 가톨릭 사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