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중생왕생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라의 보살들은 모두가 반드시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나 그 본원이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큰 서원의 공덕으로써 스스로를 장엄하고 두루 일체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고자 하는 보살들은 제외된다.
아난아. 저 불국토의 모든 성문(聲聞)들이 몸에서 발하는 광명은 한 길이며, 보살들의 광명은 일백 유순(由旬)을 비추느니라.
그리고 두 보살이 있는데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위신력과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비추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 두 보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분은 관세음(觀世音)이라 하고 또 한 분은 대세지(大勢至)라 하느니라. 이 두 보살은 이 세계에서 보살행을 닦다가 수명이 다하자 저 불국토에 홀연히 화생하였느니라.
아난아. 어느 중생이나 저 나라에 태어난다면 모두 삼십이상을 구족하게 되고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법의 이치를 깊게 깨달아 묘법을 밝히고 신통이 자재하며 제근이 밝고 이익되느니라. 그 중에서 가장 둔한 사람이라도 이인(二忍)을 성취하게 되나니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깊고도 넓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되느니라. 또 저 나라의 보살들은 성불할 때까지 악취에 다시 떨어지지 않고 신통이 자재하여 항상 전생을 알 수 있게 되느니라. 그러나 각자의 희망에 의하여 오탁악세에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라의 보살들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한끼의 식사 시간동안에 시방의 무량세계에 나아가 모든 부처님 세존을 공경하고 공양하나니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에 따라 꽃과 향과 기악과 증개와 당번등의 무량 무수의 공양거리가 생각에 응하여 자연히 바로 나타나는데 이 세상에서는 볼 수도 없는 진기하고 묘하고 특수한 것들이니라. 바로 이것들을 가지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성문 대중들에게 봉양하고자 뿌리면 그 공양거리들은 이내 허공 중에서 아름다운 꽃 우산으로 변화하는데, 그 광명은 찬란하게 빛나고 향기는 한없이 온 세계에 퍼지느니라. 그런데 그 꽃 우산은 둘레가 사백리나 되는 것에서부터 삼천대천세계를 덮는 것까지 있는데 다음 것이 나타나면 그 전 것이 사라지느니라. 그러면 모든 보살들은 모두 모여서 한없이 기뻐하며 허공 중에 있으면서 함께 하늘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 미묘한 소리는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노래이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무량한 환희심을 내느니라. 이렇듯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서 보살들은 미처 밥 한끼 먹는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홀연히 가볍게 날아서 극락세계에 돌아오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무량수불께서 모든 성문과 보살대중들을 위하여 법문을 설하실 때에는 모두 다 칠보로 된 강당에 모이게 하여 자세히 성불하는 가르침을 말씀하시며 미묘한 진리를 밝히시느니라. 법문을 들은 대중들은 환희에 넘치며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깨닫지 않은 이가 없느니라. 이 때 사방에서 자연히 미풍이 불어와서 보배나무에 살랑거리면 다섯 가지의 미묘한 음악이 울려퍼지고, 헤아릴 수 없는 천상의 꽃들이 바람에 불려와서 비오듯이 온 세계에 흩날려 춤을 추느니라. 이와 같이 자연의 공양이 끊임이 없는데, 모든 천신들도 백천가지의 꽃과 향과 만 가지의 음악으로 그 부처님과 모든 보살 성문대중들을 공양하고 널리 꽃과 향을 뿌리며 갖가지 음악을 연주하면서 서로 앞뒤를 연달아 오고 가고 하는데 이 때 대중들의 즐거움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라에 태어나는 모든 보살 등이 법을 설할 때에는 언제나 바른 진리만을 말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수순(隨順)하여 그릇됨이 없고 모자람도 없느니라. 그리고 그 불국토에 있는 모든 물건에 대하여 내 것이라는 욕심이 없으니 그것들에 집착하는 마음도 없고 가고 오고 머무는 데에 있어서 정에 의하여 이끌리는 것도 없나니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자재로와 좋고 싫어함이 없으며 너와 나의 차별심도 없고 시비걸고 서로 싸우는 것도 없나니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가지고 이익되게 하고자 할 뿐이니라. 그 마음은 강한 마음을 눌러 부드러우며 분한 마음이 없느니라. 장애를 떠난 깨끗한 마음으로 게으른 마음이 없느니라. 평등한 마음, 최승의 마음, 자비가 깊고 깊은 마음, 삼매가 움직이지 않는 마음, 법을 아끼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마음, 모든 번뇌를 없애고 악취에서 떠난 마음이니라.
그리고 일체의 보살행을 닦아서 무량한 공덕을 구족하고 성취하나니 깊은 선정과 모든 신통과 밝은 지혜를 얻어 뜻을 칠각지(七覺支)에서 노닐게 하여 마음으로 불법을 닦느니라.
형상을 보는 육안(肉眼)은 맑고 밝아서 모든 사물을 분명히 알아보지 못함이 없고, 천안(天眼)을 통달하여 시방세계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등 무한한 시간, 공간을 꿰뚫어 보는데 걸림이 없으며, 법안(法眼)을 통달하여 일체 만유의 차별상을 관찰하고 모든 가르침을 밝히며, 혜안(慧眼)을 통달하여 심오한 진리를 깨달아 능히 피안에 이르며, 또한 위에 말한 네 가지 지혜의 안목을 원만히 갖춘 불안(佛眼)을 구족하여 일체 만법의 근본 실상을 깨우쳐 알았느니라. 걸림없는 지혜로써 중생을 위하여 불법을 연설하며,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三계가 본래 공(空)하여 집착하고 취할 바가 없음을 관찰하여 오로지 불법만을 받들어 행하고, 모든 변재를 갖추어 중생의 번뇌병을 없애느니라.
진여(眞如)로부터 와서 태어나 모든 법이 진여와 같이 생멸이 없는 여여(如如)임을 깨달았으며, 선을 닦고 악을 멸하는 가르침의 방편을 설법하는 길을 잘 알았으며 세속의 속된 말을 좋아 하지 않고 항상 정법의 진리만을 즐겨 말하는니라. 모든 선근(善根)을 닦고 그 뜻은 항시 불도를 숭상하며, 일체 만법의 본질이 생멸을 여윈 적멸(寂滅)임을 깨달아 생사(生死)와 번뇌를 다 여의었느니라. 그래서 심오한 불법을 들어도 마음은 추호도 의혹과 두려움이 없이 한결같이 올바르게 수행하느니라. 그 대자대비는 실로 깊고도 깊으며 미묘하여 모든 것을 다 감싸고 거두지 않음이 없으며, 마침내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일승법(乘法)을 밝히고 일체 중생을 피안에 인도하느니라. 이렇듯 이미 의혹의 그물을 끊었으니 지혜는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갖추었느니라.
또한 지혜는 큰 바다와 같고 삼매(三昧)는 수미산과 같으며, 해와 달보다도 더 밝은 지혜광명은 청정하고 결백한 불법을 원만히 갖추었느니라. 모든 공덕을 비추는 것은 평등하고 깨끗한 까닭에 마치 설산(雪山)과 같고 깨끗하고 더럽고 좋고 싫어하는 차별심이 없는 까닭에 마치 대지와 같으며 번뇌와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는 까닭에 마치 깨끗한 물과 같으며 일체의 번뇌를 다 태워 없애는 까닭에 마치 큰 불과 같으며 모든 세계에 있어서 걸림이 없는 까닭에 큰 바람과 같으며 일체에 있어서 집착함이 없는 까닭에 허공과 같으며 모든 세간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이 없는 까닭에 마치 연꽃과 같으며 중생을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운반하여 나오게 하는 까닭에 마치 큰 탈 것과 같으며 우렁찬 불법의 번개로 중생들을 깨우치는 까닭에 마치 짙은 구름과 같고 감로수 같은 법문으로 중생을 윤택하게 적시는 까닭에 마치 큰 비와 같고 모든 삿된 견해들을 물리쳐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까닭에 금강산과 같고 모든 착한 법에 있어서 최상인 까닭에 범천왕과 같고 일체를 다 덮어버리는 까닭에 니구류나무와 같고 진기하여 만나기 어려운 까닭에 우담바라꽃과 같고 삿된 견해를 위협하여 항복받는 까닭에 금시조와 같고 욕심이 없어서 저장하거나 쌓아두지 않는 까닭에 무리지어 노니는 새와 같고 능히 번뇌를 이기는 까닭에 황소와 같고 삿된 무리들을 항복 받음이 코끼리와 같고 두려움이 없는 까닭에 사자와 같고 대자대비가 평등한 까닭에 저 넓은 허공과 같으니라.
질투심을 모조리 끊어버려 남을 이기려고 하거나 시새워하지 않으며 오로지 불법만을 즐겨 구하고 마음에는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며 항상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설법함을 좋아하는데 그 뜻이 피로하거나 게으르지 않느니라. 진리의 북을 치고, 진리의 깃발을 세우고, 지혜의 광명을 비추어 중생의 어두운 어리석음을 없애며, 육화경(六和敬)을 닦아서 언제나 진리를 베품에 있어서 뜻을 용맹하게 정진시키니 마음이 약해져 물러나는 일이 없느니라.
세상의 등불이 되어 최승의 복전(福田)이 되고 항상 중생을 평등하게 인도하는 도사가 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이 없으며, 오직 바른 진리만을 즐기고 다른 기쁨과 시름이 없느니라. 모든 탐욕의 가시를 뽑아내어 중생을 편안하게 하는 등 그 공덕은 수승하여 참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세가지의 더러운 장애를 멸하고 온갖 신통에 자재하니라. 인력(因力), 연력(緣力), 의력(意力), 원력(願力), 방편력(方便力) 등 또 상력(常力), 선력(善力), 정력(定力), 혜력(彗力), 다문력(多聞力) 등 또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힘 등 또 정염(正念), 정관(正觀) 삼명육통(三明六通)의 힘 등 또 진리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항복받는 힘 등 이와 같은 힘을 모두 구족하였느니라.
신색(身色), 상호(相好), 변재(辯才)를 원만히 장엄하여 갖추어 비할자가 없으며 무량한 모든 부처님들을 공경하고 공양하여 항상 모든 부처님들이 함께 칭찬하느니라. 그리고 보살들은 성불하는 모든 바라밀(波羅蜜)을 끝까지 밝히고, 공(空), 무상(無相), 무원삼매(無願三昧)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모든 삼매문을 닦아서 성문과 연각 등 소승의 경계를 멀리 여의었느니라.
아난아. 저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였느니라.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하여 그 대강만을 간략히 말했을 뿐이며, 만약 그 공덕을 자세히 말한다면 백천만겁의 오랜 세월을 두고도 다할 수 없느니라."
첫댓글 보살들은 성불하는 모든 바라밀(波羅蜜)을 끝까지 밝히고, 공(空), 무상(無相), 무원삼매(無願三昧)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모든 삼매문을 닦아서 성문과 연각 등 소승의 경계를 멀리 여의었느니라
나무아미타불.. 무량수경은 설명할것이 그리 많지 않아요. 핵심을 고수란히 말하고 있으니요. 가장 직설적인 경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질투심을 모조리 끊어버려 남을 이기려고 하거나 시새워하지 않으며 오로지 불법만을 즐겨 구하고 마음에는 만족하여 싫어함이 없으며 항상 중생을 위하여 널리 설법함을 좋아하는데 그 뜻이 피로하거나 게으르지 않느니라. 진리의 북을 치고, 진리의 깃발을 세우고, 지혜의 광명을 비추어 중생의 어두운 어리석음을 없애며, 육화경(六和敬)을 닦아서 언제나 진리를 베품에 있어서 뜻을 용맹하게 정진시키니 마음이 약해져 물러나는 일이 없느니라.
불법만을 즐겨 구하는 마음..
걸림없는 지혜로써 중생을 위하여 불법을 연설하며,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三계가 본래 공(空)하여 집착하고 취할 바가 없음을 관찰하여 오로지 불법만을 받들어 행하고, 모든 변재를 갖추어 중생의 번뇌병을 없애느니라.
모든 보살들은 모두 모여서 한없이 기뻐하며 허공 중에 있으면서 함께 하늘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데 그 미묘한 소리는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 노래이어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무량한 환희심을 내느니라. 이렇듯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서 보살들은 미처 밥 한끼 먹는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홀연히 가볍게 날아서 극락세계에 돌아오느니라."
타력행자 무량한 환희심 석존의 극락정토에서도 일어난다. 불법안에 있으면 사바세계 석존의 극락정토다.
부탁이 있는데요
타방편이나 등등 .. 과격한 비방은 가급적 하지 말아주세요.
분답습니다.
오히려 '타력본원'이 왜곡됩니다.
보시는 분들이 용수님의 본뜻을 혜량하기가 쉽지 않으니 불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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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들 하라.. 이말을 되새기면서.. 이제는 절대 안끼여든다.. 경계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석존 앵무새로 화현하여서 미물이라고 중생들이 헛소리해도 달라진것은 없다.
설마 화나신 것은 아니지요?
용수님께서 '대긍정'으로 가시겠다고 했잖아요.
타력으로 갈려면은 굉장히 좁은길로 가야하는데 길은 사방으로 깔려있죠. 이게 헷갈린거예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그게 아니거든요. 불법도 좁은길인데 그 좁은길에서 더 좁은길로 갈려니 뭐가 뭔지 모르지요. 그래서 악센트가 필요하죠. 모든 방편을 가짜라는것을 아는게 쉬운일이 아니거든요. 언어로 표현하는것은 더어려운 일이구.. 그래서 어느정도 수준이 되어야 그런갑다하고 생각이 드는거죠. 제마음은 대긍정인데 대긍정대로 얘기하면 타력의 좁은길을 알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것이 좋은것인지 아직 판단은 안서요.
이렇게라도 설명이 되는 기회를 가지니 좋지요.
신란님의 정토진종의 부정의 논리를 다시 뜯어 고쳐야하는데 그게 아직 확립이 안되어 있는 것도 있구요. 그종파를 대해부해서 논리를 다시 정립시킨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거든요. 하여튼 다른글에다가 댓글은 안달게요.
일향전념무량수불을 위해서는 다른것은 다 죽어야되요. 왜 죽어야하는지도 알아야하는데 그것을 알려면은 부정의 논리뿐이 없다고 판단되요. 신심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는 다 죽는거죠. 같은 타력인 보살까지는 살려주더라도 자력인 소승과 선불교는 가차없이 죽어야되요. 그리고 그 죽음이 당연한걸로 알아지는 거죠. 꿈속에서 아라한을 쳐죽였다는 그분 무지 빠른거예요. 오히려 불법의 방편의 틀이 하나도 없는데서 쉽게 나올수 있는 부분이긴 하죠. 방편들을 애초에 모르면 부정할 이유조차 없어요. 알면 부정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생기죠.
자기가 알고 있는 방편의 논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일이예요. 방편이 나쁘냐 또 그렇지는 않거든요. 문제는 방편속에 악취가 나오는 거예요. 그 악취를 제거해야하는데 악취를 제거할려면은 방편을 부정해야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하죠.
사성제를 깨달으면 성문이 되고 12연기를 깨달으면 연각이 되구 부처를 보면 극락에 가는 것이죠.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의 문제이기는 합니다.
방편도 진리이나 낮은깨달음이죠 자신만 구제되는 깨달음이구요 모든중생이 구제되는 깨달음은 부처님의 본원력이죠
철저한 부정이 있어야, 대긍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런가? 그것은 아닐테지만...철저한 부정을 거치지 않은 대긍정은, 표면적일 뿐일 경우가 많아요. 깊이가 없는 거죠... 매가리가 없다고 하나? 그렇죠...
용수님과 제가 처음 나눴던 이야기가, 여타 방편의 부정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고보니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요... 정토진종의 방편이 확립할 때까지는, 여타 종파의 부정이 필요한 측면이 있을 테구요... 정토진종의 방편이 확립된 다음에는, 정토진종의 방편을 더욱 선명하게 하는 과정이 있을 듯 합니다.
수행에서 필요하다면, 효과적이라면...저는 무자게 관대한 편이라서요... 아놔...그래서 끝내 "아수라"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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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그렇지만... 언어순화가 필요하긴 해요. 좀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수파가 소수파인 것은 까닭이 있는 거지... 그런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