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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책읽기 11회] 브레네 브라운 '나는 왜 내편이 아닌가'
http://blog.naver.com/wmskr2000/60212511032 나는 왜 내편이 아닌가 브레네 브라운 | 북하이브
당신만 홀로 외롭고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완벽주의 신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TED 위대한 강의 Top 10’의 주인공 브레네 브라운 박사가 12년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 하면서, ‘내 안의 마음감옥’의 정체가 바로 ‘수치심’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빨라지고, 숨고 싶고, 달아나고 싶고, 화나게 하고 심지어 파괴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이 감정의 정체를 하나하나 파헤치며, ‘나를 괴롭혀온 그 오랜 해묵은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소개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며, 수치심이 다른 유사한 감정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고,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법,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치는 순간 10분의 대응 기술, 비난과 책임전가를 넘어서, 자비의 힘을 실천하는 법 등을 속속들이 알려준다.
브레네 브라운 저자 : 브레네 브라운 저자 브레네 브라운(Brene Brown)은 교육자이자 작가, 미국 최고의 강연가로 꼽힌다. 휴스턴대학교 사회복지학 연구원으로, 수치심, 취약성, 공감을 연구하고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소속감을 느끼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한 다양한 연구 활동에 매진해왔다. 우리에겐 TED 강의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으며, 휴스턴에서의 ‘연약하다는 것의 힘’ 강연과 TED 연례대회에서의 특강 '수치심 - 나만 그런 게 아니야' 강연 통합 700만 회 조회라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TED 역사상 역대 10위에 해당하며, 심리학 관련 강연으로는 최고에 해당한다. 저자 스스로 완벽주의와 자기비하의 수렁에서 큰 정신적 붕괴를 겪었다고 말하는 브레네 브라운은 객관적이고 차가운 시선의 학자라기보다, 그 자신과 주변,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을 돌아보는 편안한 친구처럼 글을 풀어간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자신이 ‘수치심’이라는 이 평생에 걸친 연구 과제를 선택하게 된 일로, 아동보호소에서 근무한 경험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그는 ‘수치심을 일으키거나 그걸 자극하는 방법으로는 절대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화두를 얻는다. 그리고 전 세계 최초로 수백 명에 이르는 내담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포커스그룹을 구성해 토론을 벌이는 동안,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수치심의 실체에 누구보다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역자 : 서현정 역자 서현정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번역작가 양성과정 수료 후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20대 인생에 관한 26가지 거짓말》, 《블랙의 법칙》, 《똑똑하게 사랑하라》, 《여자는 차마 말 못하고 남자는 전혀 모르는 것들》 등이 있다.
프롤로그 _ 관망하고 질책하며 비난하는 내 안의 평론가, 수치심 왜 나의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일까? 우리는 왜 수치심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할까? 수치심은 현대사회의 소리 없는 유행병이다 끊임없이 수치심을 가르치는 문화 1장. ‘마음의 수렁, 관계의 비수’, 나를 갉아먹는 감정 이해하기 나를 괴롭히는 이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수치심은 다른 유사한 감정들과 어떻게 다른가? 온갖 사회적 기대로 얽혀 있는 수치심 거미줄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이중 잣대 나의 파워를 수치심이라는 감정에게 내어주게 되면 나와 다른 이들 사이의 끈을 끊어버리는 수치심의 위력 2장. 혼자만의 외로운 사투를 멈추고, 공감의 손길을 내밀라 공감은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다 공감, 충분히 대접 받고 있지 못한 그 위대한 힘 공감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용기 있는 입과 자비 담긴 귀가 공감을 빚어낸다 공감을 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다면, 공감을 선물하라 공감으로 연결되려는 순간,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수치심 따위는 없다 수치심으로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은 어떻게 길러갈 수 있는가? 3장. 감정의 폭풍이 몰아닥치는 순간, 10분의 대응 기술 수치심을 자극하는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 찾아내기 나의 무의식에 스며든 암시, ‘원치 않는 정체성’ 취약하다는 것은 창조성과 변화의 원천이다 나만의 수치심 촉발제를 찾기 위한 ‘탐구의 여정’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숨겨버리는 기제, 수치심 연막 4장. 리얼리티 체크, 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큰 그림 보기, 비판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 토대 세상과 내가 만들어낸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 개별화했던 문제를 큰 그림으로 보고 ‘맥락 이해’로 전환하라 맥락 이해가 ‘책임전가’ ‘회피’ 기제와 다른 까닭 당신은, 나는, 우리는 무슨 몹쓸 병에 걸린 게 아니다 모른다고 말할 자유, 자격과 권위에 주눅 들지 않을 자유 5장. 소리 죽여 고통스러워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라 수치심은 고립의 산물, 연결만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 주변으로 손을 뻗어 모두를 위한 ‘변화 만들기’를 시도하라 분리와 벽 쌓기, 손 내밀기를 가로막는 장애물 연결 네트워크,
책 | [감상기] 나는 왜 내편이 아닌가 by 브레네브라운
본문
책 역시 아마존에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고 하길래 무척 내용이 궁금했습니다.
저자는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직장을 얻어 아이를 출산하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여러번 멘붕을 겪게 됩니다.
가끔씩 주위의 싸늘한 시선에 외톨이가 되는 경험과수치심을 경험하고 나서인지 저자는 수치심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수백명을 대상으로 토론과 인터뷰를 통해 수치심이라는 덕목이
얼마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에 대해 연구하고 이를 끊어내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합니다.
책의 핵심 역시 수치심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책의 큰 줄기는,
수치심과 죄책감은 어떻게 다른가? 수치심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형화는 어떻게 나쁜가? 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수치심과 죄책감의 차이입니다. 수치심은 그 인간 자체를 '쓸모 없는 것'으로 규정짓는 반면,
죄책감은 행위에 대해서만 평가합니다. 이런 차이가 결국 큰 차이를 도출해냅니다.
범죄자의 교화에도 관련되는 부분일 수도 있는데, 저자는 절대 수치심으로는 인간을 교화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설득의 심리학,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도 주장하는 바이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비난과 비판으로는 설득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주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육아에 관해서도 수치심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 좋은 수치심,
나쁜 수치심은 없으며 저자의 연구결과 어떤 수치심도 긍정적인 영향을 개인에게 미치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수치심이 개인을 무너뜨리는 마약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죄책감은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구나,
고쳐야 겠구나라는 피드백을 통해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자는 가장 큰 수치심 유발제로 12가지를 언급합니다.
특히 매스미디어에서 은연중에 광고하는 것들이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커서
(이쁜 모델, 탤런트 그리고 성공한 자들의 삶) 개인들에게 끊임없이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내적갈등과수치심을 경험하며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한채 피폐해진다고 합니다.
정형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경계합니다. 정형화란 한 개인을 특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중국인은 말이 많다. 혹은 여자들은 이기주의자들이다. 택시 운전사는운전을 난폭하게 한다.등이
정형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정형화는 개인에게 큰 수치심을 심어주고 악영향을 미쳐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한
공감 형성에 결국 큰 장애물이 됩니다.
저자는 공감이야말로 수치심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자신의 수치심 유발인자를 찾아내어 그에 대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상대편에게 수치심을 심어주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때 공감을 통해 교류하라고 합니다.
공감(empathy)이란 단순한 동정(sympathy)이 아니며, 내가 그들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워 상대편이 도움을 청할 때 회피하고 맙니다.
.라고 정형화 해버리고 만나면 측은한 눈빛으로 괜찮냐고 동정을 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자체가 상대편에게는
그 사건으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고 상대방은 수치심에갇혀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지나갔지만 그 여파는 계속 남아 그 여성을 괴롭히는 거죠.
그런 여성을 이전과 같은 경우처럼 대해주며 성폭행 사건에 대해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이
진정한 공감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듯 정말 힘든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힘든점을 누구도 쉽사리
상대방에게 털어놓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나에게 그런 무거운 무게의 사건을 들이민다면 내 일처럼 공감하고 상대방을 배려해 줄 이가 얼마나 될까요?
결론은 단순한 내용이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이러한 것들을 모르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수치심을 상대편에게 알게 모르게 심어줬나 반성해 봅니다.
저 역시 어릴 적 제가 극복할 수 없었던(경제적인) 부분들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
당한 거절과 그로 인해 수치심을 겪었던 기억은 성인이 된 지금도 너무나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런 수치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점이 너무나 놀랍고 새삼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 역시 그런것 때문에 수치심이라는 것에 대해 연구를 매진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중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존중, 그리고 공감...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인신 공격, 비난이 너무나 익숙한 현대 사회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은 실연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소속감에 대해 물으면 소외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말하더군요
소통에 대해 물었을때 사람들은 단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통의 정체는 바로 수치심이였어요.
수치심은 간단히 말하면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가진 '이것'을 알거나 보게 되면 나는 관계 맺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거야 하는 두려움.
수치심은 타인과 공감하거나 연결하는 능력없는 몇몇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아무도 수치심에 대해 꺼내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난 충분히 ~하지 않아'라는 말로 대별되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있습니다.
이 감정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고통스러운 '취약성'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낱낱이 내보여야 합니다. 진짜 모습을요.
이제껏 인터뷰한 사람들은 대략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
한쪽에는 '스스로가 가치가 있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내면 깊이 그게 존재했교.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강한 느낌 말입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그걸 얻기 위해 몸부림 치는 사람들이 있었죠
'나는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고 계속 의심하는 사람들.
강력한 사랑과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늘 갈구하기만 하는 사람들,
그 둘 사이에는 단 하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스스로'사랑받고 소속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것' 입니다.
가치있다고 '믿는 것.'
스스로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게 제겐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인터뷰어 중에서,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들에겐 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Wholehearted.
"전심전력. 온마음을 다해"였습니다.
스스로가 가치 있다는 깊은 믿음 속에서 온맘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용기'였습니다.
용기courage와 용감함bravery이 어떻게 다른지 잠깐 설명할게요.
라틴어로 심장을 뜻하는 'cor'가 어원인 용기는 '내가 누구인지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불완전할 용기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자신에게 강한 연민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친절하게 굴며
그 결과로 다른 이들에게도 온화하고 친절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애로울 때라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다른 이들과 연결돼 있다는 점인데 무엇보다 어려운 부분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온전히 보여준 결과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버리고 솔직하고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연결을 위한 전제조건입니다.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취약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믿습니다. '나를 취약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편안해하지도, 수치심을 쉽게 얘기하지도 못합니다.다만 그러게 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진해서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고 어떤 보장이 없어도 기꺼이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고 유방암 검진을 받은 후에 의사가 전화를 줄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린다는 등의 경험을 얘기해줬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풀릴지 어떨지 모를 관계에 기꺼이 자신을 던집니다. 단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관계가 틀어지면, 그걸 '배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취약성과 함께 살아가려면 컨트롤하고 예측하기를 멈춰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취약성이란 것이 수치심, 두려움, 가치있게 하기위한 사투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쁨, 창조성, 소속감, 사랑 같은 것의 근원도 바로 그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리고 취약성. 즉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발견하면 그걸 인정하고 항복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죠.
A. 저는 그런 유형이 절대 아니고
B. 그런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지도 않습니다.
취약성이 밀고 들어오면 전 후퇴했죠 전 그 전투에선 졌지만, 아마도 그 덕에 인생을 되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연구로 돌아가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온맘을 다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취약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연구했습니다. 우리는 왜 스스로의 취약성과 씨름할까? 과연 나만 이런 걸까?
답은 '아니다'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배운 겁니다. 우리는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릴 때 취약성을 마비시킵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취약성이 뭐라고 생각하고 어떤 때 그걸 느낍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의사의 전화를 기다리고, 정리해고를 당하거나 단행하기도 하고,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취약서의 세상에 살고 있어요. 그에 대처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그걸 마비시켜버리는 겁니다.
증거는 도처에 있습니다. 이것들은 증거인 동시에 무언가의 엄청난 원인이 되지요
.
미국사회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많은 부채를 안고 있고 비만, 중독, 약물남용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가 이 연구를 통해 배운 바, 문제는 특정한 감정을 선택해서 마비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나쁜 감정들이 있어. 취약성, 슬픔, 수치심, 두려움, 실망, 이런 것들이 난 싫어. 그러니까 맥주 마시고
머핀이나 먹으면서 잊어버리자. 이 어려운 감정들을 마비시키려면 다른 감정들까지도 모두 마비시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힘든 감정을 마비시키게 되면 즐거움, 감사의 마음, 행복감까지도 마비시키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비참해지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헤매고 또 다시 취약함을 느껴서 맥주마시고 머핀이나 먹게 되죠.
위험한 악순환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 자신을 마비시키는가입니다. 중독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또 하는 일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입니다.
믿음과 경외를 위한 종교가 '확실성을 담보해주는 산업'으로 변질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려. 그러니까 닥쳐!"
그렇게 되는 겁니다. 확실한 게 뭐야? 찾아헤매죠. 두렵고 연약하고 취약할수록. 오늘날의 정치가 바로 그렇습니다.
대화와 협의는 사라지고, 비난만 남죠. 비난의 심리학적 정의가 무엇인지 아세요? 고통과 불안을 잊기 위한 기제입니다.
완벽함. 우리는 이런 삶을 꾸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잘되지 않죠.
"너는 불완전하고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할테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소속될 가치가 있어"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척 행동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기업들도 그렇습니다.
금융위기, 리콜....... 그런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만 그런게 아니잖아!" 그냥 진실한 태도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저희가 바로 잡을게요"라고 말하면 안되는건가요? 또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 취약성까지도 아무런 보장이 없더라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닥치는 순간에 조차 기쁨과 감사를 연습하는 것.사랑할 수 있을까, 열정을 갖고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고 닥쳐올 재앙에 대해 걱정만 하는 대신, 감사를 되새기는 일. 취약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비명을 멈추고 비로소 다른 이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고,
그런 후에야 스스로에 대해서도 친절하고 부드러워 질 수 있습니다. 제 얘긴 여기까지 입니다.
취약성은 약점이 아닙니다.
이 TED주간의 강의에서 무대 위의 누군가가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낸 순간, 그걸 '순수한 용기'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저는 취약성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감정적 리스크, 드러내기, 불확실성, 그리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원료입니다. 용기를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잣대이죠.
있는 그대로의 무력함을 느끼고 자기를 드러내고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취약성과 용기의 상관관계를 깨닫게 되면서 제가 두 번째로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대보다 대화를 원하는 간절한 비명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두 말입니다. 인종을 망라해서요.
안그런가요? 그리고 수치심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 대화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인종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차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마비상태가 됩니다
수술 중 환자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을 막는 아주 단순한 해결책에 대해 들었습니다.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만들려면 수치심을 건드려야 합니다.
치료기술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을 봉합하고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강해진 사람들은 더이상 체크리스트가 필요 없어집니다.
미쉬킨 잉가왈레. 그의 강의를 봤습니다.
여기 서서 설명했죠. "별것 아닌 걸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빈혈 진단기술 개발에 얼마나 힘썼는지.
저는 필요를 보았고, 그걸 만들었습니다."
그가 말했을 때 모두가 예스를 외치며 박수를 터뜨렸죠.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2차례나 더 시도해야 했습니다. 그제야 작동하더군요."
왜 이곳이 멋진 줄 아십니까? 여기 사람 중엔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이 무대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실패하지 않은'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저도 매우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여러번이나. 하지만 세상은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테어도어 루스벨트가 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경기장의 전사'라고 부르는 명구죠.
"위대한 사람은 평론가가 아니다. 관중석에 앉아서 선수가 뭘 어찌했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지 지적하는 그들이 아니다. 영광은 먼지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경기장에 뛰고 있는 자의 몫이다. 앞서면 이길 것이요, 뒤지면 질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패배했다 해도 그는 담대하고 위대하게 진 것이다."
경기장 안에서 담대하게 뛰는 것. 경기장 문에 손을 대고
"자, 이제 들어가야지. 한번 해보자!" 하고 결심할 때 수치심이라는 괴물은 당신 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넌 훌륭하지 않아. 네 학교는 형편없고, 애인에게도 버림받았어. 너희 아버지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란 것 다 알아. 난 네가 성장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아. 넌 스스로 못생겼고, 똑똑하지 않고,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다 알아."
수치심은 바로 이런겁니다.
그놈 입을 막고 경기장 문을 열어제치고 "그래도 하겠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기 관중석에 앉아서 우릴 가리키며 평가하고 조롱하는 평론가 중 99%는 누구던가요? 우리 자신입니다.
수치심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그게 죄책감과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수치심은 '자신'에게 향해 있고, 죄책감은 '행위'에 맞춰져 있습니다.
수치심은 '나는 나쁘다'입니다. 반면 죄책감은 '나는 뭔가 나쁜 짓을 했어'입니다.
이 둘은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치심이야말로 중독, 우울, 폭력, 공격성, 왕따, 자살, 식이장애 등과 매우 연관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알아두셔야 할 것은 죄책감은 이것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했거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걸 바로잡고 싶어 하는 능력으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죄책감 역시 불편한 감정이긴 합니다만 적응력이 뛰어납니다. 또 하나 수치심의 특징은 성별에 따라 그 배열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없는 이들일 것입니다.
수치심을 느낍니다와 난 반사회적인격장애입니다 중에서 선택하라면 수치심을 선택하겠죠.
여성과 남성이 느끼는 수치심의 느낌은 유사하지만 성별에 따라 그 배열이 달라집니다.
여성의 경우, 빨래를 널고 도시락을 싸고 키스로 봉해 가족에게 주고 출근해 9시부터 5시까지 일을 합니다. 퇴근길에 베이컨을 사서 프라이팬에 굽고 당신이 나의 남자라는 걸 잊지 못하게 하죠.
'힘든 내색도 없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수치심은 '여성은 이러해야 한다'고 만들어진 이 불가능하고 모순되며 경쟁적인 기대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구속복과도 같습니다.
남성의 수치심은 경쟁과 기대로 뒤엉킨 양상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단 하나죠.
"약한 모습을 들키지 말 것." 사실 처음 연구를 시작하고 4년동안은 남자들을 인터뷰하지 않았습니다.
한 남성분이 제 책을 들고와서 사인을 해달라며 묻기 전에는요.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들 얘긴 없죠?" "전 남자들은 연구하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말하더군요. "그것 참 편리하네요."왜냐고 물었더니, 그 분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손을 뻗어 우리 이야기를 하고, 취약함을 드러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 한 말이 오직 제 아내와 세 딸을 위한 거란 말인가요? " 전 그렇다고 했어요.
그분은 "가족들은 내가 낙마하는 걸 보느니 이 백마 위에서 죽어가는 걸 보고 싶어 할겁니다.
우리는 연약해져서 도움을 청하면 진창 얻어맞기만 합니다.
그게 모두 남자들, 아버지나 코치들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제 인생에서 여자들은 누구보다 절 힘들게 했으니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전 남자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배운 건 바로 이겁니다. 자기 곁의 남자가 취약하고 두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면 그 여성은 그야말로 놀라운 업적을 이룬 셈입니다. 당신 곁의 남자가 당신이 이 모든 걸 해낼 수 없어서 뚜껑이 열리기 직전이 됐을 때 그냥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 남성 역시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것입니다.
수치심은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습니다. 그것의 수하에서 벗어나 진정 서로에게 돌아갈 방법. 수치심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가 아이를 기르고 일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보스턴 대학교의 마할릭 교수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죠. 여성들에게 '여성상 표준'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답변을 순서대로 보면 착하고, 날씬하고, 겸손하고, 외모와 관련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것. 남자들에게 남성상 표준에 자기를 맞추기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감정을 제어하고, 일을 우선으로 두며 지위를 추구하고 폭력적일 것. 서로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합니다. 수치심의 해독제는 바로 '공감'이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을 배양접시에 넣고 그걸 기하급수적으로 팽창시키려면 세가지가 필요합니다. 은폐, 침묵, 그리고 비난.
경기장 밖에 남아 있고 싶다는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는 압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했죠. 내가 강철처럼 강해지고 완벽해지면 저기 들어가서 본때를 보옂고 말거야. 그런 유혹이요. 하지만 진실은 뭔지 아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설령 당신이 완벽해지고 강철처럼 강해질 수 있다 치더라도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그런게 아닙니다. 그저 함께 들어가길 원해요. 당신과 함께 있고, 서로 교류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무엇이 주어지든 담대하게 대처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