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우덜 안태고향이 진도 도호부(珍島 都護府)였든 야기
진도가 고향이고 진도인덜임시로도
이전에 진도가 비록 짤뢌든 8년 간이었제만 진도도호부로 부사가 주재해가꼬
영광·함평·영암·해남 등의 네 고을의 군수와 금갑·남도·임자·이진·어란 ·목포·지도·다경·마량 등의 9진 만호들을 통솔했던 역사하고
고려 말기 공도정책(空島政策)이로 87년 간 영암하고 해남 땅에 나갔다가 본섬이로 둘온 뒤로도 진도군의 외지(外地) 면이로 470년 간 유지되았든 기존 영암 땅 명산면(命山面), 해남 땅 삼촌면(三寸面)에다가 진도부였던 그때 당시는 또 더해서 화원면(花原面) 외에 무안(務安) 땅에 도초·안창·기좌 등 모두 17개면을 두고 있었단 역사적 사실을 잘 몰루넌 진도인덜이 많애가꼬 역다가 한번 더 올레봅니다.
쩝때 진도문화원에서 진도 선조님덜에 기록문화럴 디지털 자료로 모태가꼬 정리한다고 했든 사업에 올려진 안산 박경구 향우님이 소장했든 선조님 기록물덜이 여럿 있었어람짜.
그 가운데 보자므넌
1888년 고종 때 그 선조님 효자덜 두 분얼 예조에서 표창함시로 효자비럴 정부에서 셔준 내용이란데라.
전라관찰사 계하 문서에가 진도부사(珍島府使)가 쓰고 도장 찍고 수결까장 한 부분이 있었어가꼬 그케 짜룹디 짤룬 진도부사 시절에도 요케 확실하게 남운 진도부사에 태죽이고 근거다 봉께 방갑고 감회가 새롭등구만이라.
지가 에릴찍에 보므는 이전부텀 진도 사람덜이 목포 사람도 우숩게 보고 해남 사람을 ‘해남물감자’, ‘해남풋보리’라고 함시로 깜봤고 완도넌 내나 그 축에도 못 끼게 시피봤었어람짜.
그랑께 지 생각에 ‘진도 사람덜언 뭣이 그케 잘났다고 어째? 그래 쌍고?’ 생각했드니
우덜 진도넌 일치가니 백제, 신라 때부텀도 군(郡)이로 진도군(珍島郡, 因珍島郡)이었지람짜.
그란데 한펜이로 보자먼
◎목포도 군사 목적에 목포진(木浦鎭. 목포진을 진도부사가 관할한 적이 있음)이로 무안군(務安郡) 관내에 그닥챤한 진(鎭)이었다가 목포항이 개항하든 1897년에사라 일반 백성덜이 많썩덜 모태가꼬 사넌 그란 고을이 되았지라.
그랑께 고런 목포진(木浦鎭)같은 만호진(萬戶鎭)이사라 우리 진도 안에도 남도진(南桃鎭)에 남도만호(南桃萬戶), 금갑진(金甲鎭)에 금갑만호(金甲萬戶)도 있어가꼬 진도에도 둘이나 있잉께 대수롭쟌했등 것이사라 당연했었겄지람짜.
◎해남은 이전에 마한(馬韓) 때 신미국(新彌國)이었다고 이전 고릿적 야기넌 하겄제만, 그 호랭이가 담부피든 그 역사 이래 해남현(海南縣)이로 계속되다가 진도군하고 합쳐졌든 해진군(海珍郡) 시절에나 거가 군이었등 것이 28년 만인 1437년(세종 19)에 인자 분리된 진도군(珍島郡)이 본섬이로 둘옴시로는
내나 다시 현감(縣監)을 두는 해남현(海南縣)이로 남었다가 조선 말기 때인 1895년(고종 32)에사라 해남현이 해남군(海南郡)이로 승격이 되았지람짜.
◎완도군(莞島郡)은 또 비록 신라 때 청해진(淸海鎭)이었다고넌 하고 조선시대에도 가리포(加里浦)로 첨사(僉使)가 주재한 군사적 요충지이긴 했었제만 완도란 그 이름도 없이 내나 영암 · 강진 · 해남 · 장흥에 딸린 섬덜로 내내 있다가 1896년(고종 33) 때에사라 인자 완도군(莞島郡)이란 새 이름이로 군(郡)이 창설되았잉께라.
그 시 반데가 모도 그야말로 130년 역사덜배께 안 됭께 그케 유구한 진도군에 군(郡) 역사에다 진도부 사람덜이 시피보고 깜보고 그랬었겄지람짜.
그라고 불과 8년 기간배끼 아녔긴 했어도 내나 진도 도호부(珍島 都護府) 때 진도부사(珍島府使)는 영광·함평·영암·해남 등 니(四) 고을에 군수(郡守)랑 금갑·남도·임자·이진·어란 ·목포·지도·다경·마량 등의 9진(九鎭) 만호(萬戶)들을 지휘하는 병권(兵權)을 가지게 되았었지람짜? 안? 그라지람짜? 안?
ㅋㅋ 그란데 인자 목포넌 큰 도시고 진도 인구가 해남 절반도 못 되고... ㅠㅠ
※2024년 기준 인근 지역 인구 수
목포시: 215,040명, 해남군: 65,234명, 완도군: 47,153명, 진도군: 29,222명
어쨌든 그케 짤룬 기간이었어도
그 진도도호부 당시 진도부사(珍島府使)가 그 직함을 쓰고 적은 글이다 봉께 내나 우덜 고향 진도에 기록물로써 찰로 중요한 자료다고 봐징구만이라.
그람 삐비가 맛나고 까시동(찔구순)도 달다분한 존 계절에
우리 향우님덜
모도모도 건강덜 하시십쇼~!
2025년 4월 21일 -진도 사투리사전 저자 조병현 올림-
첫댓글 소전 할아버지께서 "옥전"께서 지금 해남 (삼촌면)삼산면과 교류한 흔적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로써는 어떻게 진도에서 교류했을까 생각했죠.
오늘로써 궁금증이 풀립니다.
또 "사정리 한문으로 옛날에는 나무이름 사(楒)를 썼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기록으로는 이렇게 존재하니 재미있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보면 "부사께서 사인한 초서는 使자 "이며
부사가 아래에 이렇게 썼습니다
"聞甚嘉爲孝幸如是"
이와 같은 효행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쁘게 여겼다
감사합니다.
금메 거가 사정리(楒亭里)가 아닌 사정리(楒亭里)로 나옹구만이라.
여그 잔 더 너룹게 나온 지도럴 보므는 욕실도 욕당(浴堂)이로 나온데라만.
거그 남산리럴 이전부텀 ‘욕실’이라 함시로 ‘당앞'이라고도 불렀잉께
내나 욕당(浴堂)이 이전 이름 맞능갑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