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마의 교훈
딤후 4:9-11
오늘 우리가 살펴볼 데마라는 사람은 성경에 몇 번 안 나오는, 잘 안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 우리가 끌려들어가기 쉬운 시험의 다른 측면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데마라는 이름 자체의 뜻은 ‘인기가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짐작되며, 바울의 전도를 받아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바울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몬 1:24)
동역자라는 말은 생명까지 같이 나누며 주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어떻게 보면 피를 나눈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를 가진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정도의 관계입니다.
아무에게나 ‘동역자’라는 말을 쓰는 게 아닙니다. 형편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동역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빌레몬서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데마에 대해 미래가 기대되는 사역자로, 또 평생 신뢰하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곳에서 데마에 대해 나옵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 4:14)
이 골로새서 말씀과 조금 전의 빌레몬서 말씀을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먼저, 빌레몬서에서는 네 명(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모두 “나의 동역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붙이고 있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누가에 대해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특별한 묘사를 하는 것에 비해 데마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이름만 나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대충 적어놓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는 모두 골로새의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입니다.
연대는 빌레몬서가 1-2년 앞서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와 데마는 원래 영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동역자였는데, 그 1-2년 사이에 누가는 영적으로 계속 발전했고 데마는 퇴보했거나 정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누가보다 데마가 먼저 나오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데마의 이름이 뒤로 가고 누가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름을 순서대로 쓰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인물을 뒤에 쓰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위치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책임의 정도에 따라 이름의 순서가 정해집니다.
첫째 ; 세상을 사랑하는 데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0절)
흔히들 우리 존재의 내면에는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느끼는 내적 공허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아무리 사교성이 뛰어나고 사람들과 잘 지내더라도, 거듭난 우리 영혼에는 하나님만이 채우셔야 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사람을 통해 채워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람만을 통해 채워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내 영혼에 채우시는 특정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채워지는 내 영혼의 만족감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함께하는 동역자를 통해 같은 비전을 공유하며 하나 됨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제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할지라도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결코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영역입니다.
바울은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년은 홀로 감옥에 갇혀서 언제 사형을 당할지 풀려날 수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아주 불안하고 고독한 처지였습니다.
바울이 감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많은 성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와 물질로 협력을 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날짜가 점점 길어지니까 한 사람, 두 사람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에게 바로 그러한 공허함이 찾아온 것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바울이 느꼈을 인간적인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처음에는 바울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하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섭섭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 믿음을 떠난 데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1-12절)
여하튼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함께 일하다가 어느 날 그렇게 가버리면 참으로 외로울 것 같습니다.
11절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는 사도의 말을 곰곰이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누가 말고는 이제 아무도 자기 옆에 없다고 외로움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야말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입니다. 영화 바울의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힌 누가가 바울을 쳐다보며 했던 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 가족을 두고 당신을 따라온 겁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서신을 받을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b). 여기에 나오는 마가(요한)가 누구입니까?
1차 선교 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를 저버리고 떠난 인물입니다(행13:13). 그 후에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울은 바나바와 싸우기도 했습니다(행15:36-41).
바울의 복음 사역에 한때 불화를 일으켰던 인물인데도, 이제는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데마와는 달리 마가는 그 후에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또다시 충성했고, 더욱이 사도 베드로의 동역자로서 그의 진술을 토대로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여하튼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계속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순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특별히 디모데와 마가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궁극적인 위로자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간적인 외로움과 섭섭함이 엄습해 오지만, 모든 악한 일에서 자신을 건져내시는 주님을 굳건히 붙들고 있습니다(18절).
두기고는 자기가 에베소로 어떤 목적이 있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데마에 대해서는 분명히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분명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을 계속해서 전파하기 위한 목적 아래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마만큼은 그 목적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등지고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마는 분명히 신앙에 있어 실패한 사람입니다. 중간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셋째 : 세상 미혹에 빠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데마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 배교자가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는 데마가 실패한 원인에 대해 그의 믿음이 복음의 양지만을 찾아서 따라다닌 믿음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복음의 양지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면 얻게 되는 세상의 여러 좋은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얻는 것들이 참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얻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죄의 본능에서 해방되고, 기쁨과 감사가 따라오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음의 양지이며 유익인데, 데마는 거기에만 집착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데마는 처음에 바울이 감옥에 갔을 때도 따라갔을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데마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해 좋은 것이 올 때에만 그렇게 열심히 따랐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힘들어질 때는 그 자리를 회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가진 믿음의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데마가 왜 예수 믿어서 좋은 것만 추구하고 예수 믿어서 안 좋은 것이 오면 도망갔습니까? 기본적으로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겁니다. 대체로 주님을 잘 따르던 신자가 믿음의 길에서 뒤로 물러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에 대한 사랑입니다.
돈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딤전 6:10, 새)
돈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하게도 만들고 비굴하게도 만듭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