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임지은 (애기똥풀 청년독서모임)
어린시절 읽었던 노인과 바다에서 나는 산티아고
노인을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바다와 상어라는 시련에 맞서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항구로 끌고 온
노련한 어부가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승리자로 결론지어놓고 있었다. 그 때는 서사적 즐거움만으로
책을 읽었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을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팔십오 일
번째 날, 노인은 먼바다로 나가고 노인의 미끼에는 거대한 청새치가 걸려든다. 배보다 큰 청새치에 하루 낮 하루 밤을 끌려다니며 씨름한다. 그리고
마침내 배에 실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고기를 낚아 올린다. 그러나 피 냄새를 맡은 상어떼들이 항구로
향하는 노인의 배에 매인 청새치를 향해 달려든다. 작살과 몽둥이로 달려드는 상어떼들을 하나하나 죽이며
또 하루를 꼬박 사투하며 항구로 돌아오지만 상어들이 한입씩 먹어치운청새치는 뼈만 남아있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며 사자꿈을 꾼다.
지금 이 순간, 15년 전 내가 마음으로 그렸던 승리자의 후광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은 사라지고 팔십사 일 동안 배를 끌고 홀로 바다에 나갔으나 한 마리의 수확도 건지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등불도 없는 허름한 침대 한 칸에서 죽은 듯 잠이 들고는 하는 외롭고 초라한 노인이다. 성공을
가늠하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승리자이기는 커녕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가장 약한 사회구성원이
바로 산티아고 노인일 것이다. 그러나 항해하는 그의 모습에서 읽히는 것은 결코 패배하지 않은 삶의 태도이다.
노인은 아무것도 낚지 못하고 허송한 팔십
오일째 날에 더욱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 거대한 청새치와의 싸움에서 물 한모금 자유롭게
못마시고 손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청새치보다 먼저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있다. 상어 떼들이 몰려와 힘겹게
낚은 청새치를 뭉텅뭉텅 뜯어먹더라도 이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에도
자신에게 시련을 주는 존재인 바다를 여전히 선한 존재로 인식하며 자기가 죽인 청새치에게 존경과 미안함의 마음을 잃지 않는 영혼적 성숙함도 갖추고
있다. 노인은 사흘간의 사투가 무색하게 값나가는 살점을 가지고 귀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무엇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었던 자기 자신과의 분투에서 다시 한번 승리했다.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둘러싼
현실이다. 우리 하나하나는 조각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산티아고라고 볼 수 있다. 풍랑이 이는 순간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힘든 시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노인 같은 원숙한 어부는 아니지만 내게 그와 같은 자신감과 의지가 있는가? 헤밍웨이는(노인은)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삶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파멸당하느니패배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이 보여주는 삶과 바다에 대한 태도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갓 대학을 졸업한 지금 내 주위에서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오랜 시간동안 별 성과 없이 취업문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친구들과 선배들을 본다. 단기계약직으로 운 좋게 취직하여 잠시 미루어두긴 했지만 곧 다시 나의
고민이 될 것이다. 요즘 구직활동이라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외롭게 긴 싸움을 하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득 노인과 바다가 다시 읽고 싶어졌던 것이고 노인이
대어와 싸우다 상어에게 모든 살점을 빼앗긴채 돌아온다는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플롯을 나의 이야기인듯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어떤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상황이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이 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궁금하다. 상어떼와 마주했을 때 다시 꺼내보고 싶다. 고난을
돌파할 팁을 주진 않겠지만 용기와 위로를 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