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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8. 영혼이 떠나시다
2021. 4. 11. 김치현 목사
(마태복음 27장 45~54절)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고 있다."
48. 그러자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하여 주나 두고 보자"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51. 그런데 보아라,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53.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54.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지진과 여러 가지 일어난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였다.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우리처럼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 본 적도 없고,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21세기 문제들을 직면해 본 적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우리 인생에 대답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으심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 포함한 죽으심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에 대답이 되는 사건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통해 오늘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오늘의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의 죽으심에서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방법만 찾는다. 예수의 죽으심이 세상의 교훈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죽어야지.’라고 생각한다든지 남을 향해서 ‘저 사람은 아직 덜 죽었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이다. 죽으려고 해서 죽어지는 것이면 자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안 죽었어.’라고 판단하는 나는 누군가? 생각해 보면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죽었니 안 죽었니 하며 판단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에서 잃었던 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생에게서 무엇을 추수하시는지 보게 된다. 인생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열매가 무엇인가? 모세가 시편에서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우리의 날을 계산해서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며 어디로 가는가? 이것을 알게 되면 인생을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인생에서 추수를 할 수 있게 된다. 무엇을 추수할지 알아야 건질 것이 있다. 산에 가면 약초도 많고 그 중에는 산삼도 있을 텐데 나 같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길 옆에 좋은 약초가 널려 있어도 그냥 지나가게 된다. 그런데 심마니는 무엇을 캐야 되는지 안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를 다룬 다큐를 보니까 심마니들에게는 산에 가서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가 있는 모양이다. 한 사람이 갑자기 놀라서 와다닥 하니까 옆에서 “말하면 안된다고 했잖아.”라며 호통을 쳤다. 그것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이” 하면서 호통을 쳤다. 소리를 지른다고 그 중에 말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진짜로 산삼을 캤다. 산삼을 캐러 다니면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도 누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다른 사람이 “저 사람 말하는 것 봐라.”라고 하기 쉽다.
죽음의 문제도 그러하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죽으심을 보고 내 인생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무엇을 추수하시는지를 발견하는 것이지 ‘내가 죽어야지’도 아니고 ‘네가 죽어야지’도 아니다. 그런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의 죽으심이 내 인생에 빛이 되고 내 길이 여기 있다고 알면 거기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잠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복음인 것은, 하나님이 누구며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생의 끝이 어디인가 보여주셨다, 그것을 알면 내가 가는 길이 보이고 그 안에서 내 인생을 온전히 해석하고 추수할 수 있게 된다.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
십자가에 달린 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군병들,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조롱 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말이 예수님에게만 지나가는 조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이래로 육체를 가진 모든 인간에게 하는 사탄의 조롱이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는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모든 육체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육체가 조롱받는 것은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이 조롱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사명은 어찌하든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다. 사람은 몸 때문에 시험에 들고 고통을 받는다. 몸만 없으면 인생 대부분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런데 바로 그 몸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열매를 맺으실 수 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귀한 일이다.
예수님은 조롱받는 육체를 가지고 인류 역사상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다. 만민에게 미칠 복음이 그의 찢긴 육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지게 된 것이다. 부끄러움을 짊어지고 가셨는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 육체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필요로 하신다.
우리는 이 육체를 부끄러워하고 늘 무화과 잎으로 가렸는데 예수님은 찢겨진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왜 사람을 지으셨고 왜 사람을 이토록 존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장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는데 창세기 6장에는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심히 후회하시며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셨다. 이렇게 부끄러운 육체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할만큼 영광스러운 육체가 되셨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다 부끄러운 육체를 가지고 살았다. 사람 속에 있는 육체의 욕구를 자기 이마에 적어놓는다면 이마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말씀이 육체가 되어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지면 인생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쓰게 된다. “내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십니까!”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육체 때문에 부끄러워질 수도 있고 육체 때문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쓸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우리와 동일한 자리에서 존귀와 영화로 관을 쓰셨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지막에 예수님은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류를 십자가에서 끝내시고 새 인류를 시작하셔야 했다. 창세기 6장에서는 육체를 다른 방법으로 끝내셨다. 지면에 있는 숨쉬는 모든 것을 멸하시겠다고 하시고 두 쌍씩, 일곱 쌍씩 놔두고 다 멸하셨다. 그것이 타락이었기 때문에 육체가 되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를 개역개정에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번역했는데 공동번역에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고귀한 목적,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6일째 지어졌다. 시간차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6일에 지어졌다는 것은 한 부류라는 것이다. 동물도 사람과 교감이 되면 사람 이상으로 정이 들고 사람보다 더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하나님의 입김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고귀한 뜻과 목적이 없으면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타락한 육체, 선악과로 오염된 육체를 되돌리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홍수라는 방법으로 멸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한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그 사람 안에서 선악과를 먹은 온 인류를 처리하신 것이다.
옛날에는 병에 걸려도 죽기 살기로 독한 약을 써서 병을 고치려면 몸이 같이 상했다. 중한 병일수록 독한 약을 썼지만 요즘은 표적치료제라는 것이 나와서 병의 원인이 되는 것만을 치료한다고 한다.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 부작용도 많지만 우리 인생이 타락한 근본 원인인 선악과만 처리하고 사람은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인류가 개발한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 될 것이다. 선악과의 독성만 제거하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되살린 것,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사건이다.
마태와 마가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기록하였다. 어쩌면 이 말이 예수의 생애 앞 부분에서 하신 말씀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이 말씀 안에 우리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선악과로 말미암아 생긴 모든 것, 우리의 판단과 옳음, 요구와 원망까지도 다 가져가신 것이다. 이분 앞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신 예수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처리하기 위해서 버리셔야 했다면 우리 안에서 어떤 이유가 가능하겠는가.
전도서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말씀하셨다.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나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였다.
우리는 늘 우리 기준에서 판단이 되어야 사려 깊고 가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의 지식, 선악의 판단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모르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 어떤 일 앞에서도 모르는 사람으로 있게 된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모른다.’는 사람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닥치면 우리의 호불호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 사람은 무슨 의미인가. 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추수하려고 하시는가?’ 이것을 다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를 보고 아멘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구도 다 알았다 할 수 없고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 알 수도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존재다. 내 앞에 있는 일은 모두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사셨으니까 그의 인생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모르셨던 것이 당연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우리 자신으로서는 다 알고 죽을 수 없다.
영을 떠나게 하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다. 새번역에는 “숨을 거두셨다.”라고 되어 있고, 개역개정에는 “영혼이 떠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을 정확히 직역하면, ‘영을 떠나게 하셨다’, ‘영을 포기하셨다’는 말이다. 능동적인 이 말은 ‘영혼이 어디로 갔는가 보다.’라는 여운을 남기는데 영어 성경에는 ‘영혼을 포기하셨다(he gave up his spirit).’라고 되어 있다.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다는 말이다. 영이 다른 곳으로 간 것이 아니라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육신도 포기하고, 자기 생각도 포기하고, 마지막 하나님을 향해 있는 그 영마저 포기했다는 말이다. 영을 포기했다는 것은 완전히 죽어서 자기 것으로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죽을 때는 누구라도 그러하다. 사람은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은 것이 있다. 당장 내가 없다면 내가 처리해야 될 문제, 눈 앞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어느 것도 내려놓지 못한다. 나도 아플 때는 다 내려놓고 쉬어야 한다고 생각해도 당장 앞에 닥칠 일을 염려하고 내려놓지 못했다. 우리는 다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영을 내려놓겠는가. 그러나 마지막에는 우리가 붙잡고 있던 것, ‘이것은 붙잡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예수님도 그분의 죽음이 완전하다는 것을 잠시 시나리오에 따라서 감독이 시키는대로 사흘 동안 죽어 있다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하셨다. 그분은 완전히 죽으셨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이 말은 시나리오가 아니다. 영을 떠나게 하셨다는 말은 그분도 완전히 끝나셨다는 말이다.
“내가 사흘 뒤에 살아난다. 좀 있다 보자.” 이런 것이 아니다. 마태는 그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영을 떠나게 하셨다. 영을 포기하셨다.”고 한 것이다. 그분의 육신도 포기되고 생각도 포기되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영마저 포기하셨다. 영을 포기했다는 말은 완전히 죽어서 내 것이라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의 최후의 보루를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으로, 그것마저도 내려놓은 사건으로 예수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백 세가 되어 끝난 사람이다. 자기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남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증표로 할례를 받게 하셨다. 그의 자랑이 끝났다는 것을 할례로 표시하게 하신 것이다. 백 세가 되었다는 것은 내 가능성이 끝난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이삭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셨다. 이것은 육신적인 문제로는 말이 안되는 것이다. 왜 이 이야기를 써 놓았는가? 왜 레위기에 제사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는가? 왜 냄새 맡기도 싫어졌다고 하실 정도로 제사가 반복되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자리, 우리를 자기의 형상으로 삼아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그 자리는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완전하게 끝난 자리다. 백 세가 되어 끝난 것 같아도 사람에게는 또 무엇이 있다. ‘아, 내가 끝났기 때문에 이것을 얻었구나.’ 하는 순간 또 붙잡는 것이 생긴다. 우리는 영원히 선물보다 선물 주시는 분이 소중해야 한다.
이삭이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내놓으라.” 하면 내놓은 사람이다. 아버지가 자기를 끌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묶고 번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 때까지도 별 말이 없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은 것밖에 없다. 블레셋이 우물을 내놓으라면 내놓고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늘 내놓는 사람이다. 그래서 순탄하게 일생을 갔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아브라함도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 같고 이삭도 타고난 성품이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야곱을 보면 좀더 우리와 가까이 느끼게 된다. 야곱이 정말 지키고 싶었던 것은 라헬이었다. 라헬과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토끼 같은 새끼들을 낳고 살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없어도 좋을 다른 아들들은 힘이 넘쳐서 팔팔한데 평생 같이 살고 싶었던 아내가 제일 먼저 죽고 가장 사랑하던 아들마저 잃었다. 마지막에 베냐민마저 잃게 되어 험악한 인생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는 사람으로 바꾸셨다.
끝난 이 자리, 하나님이 우리를 끝내시는 이 자리, 이것은 사탄이 흉내낼 수도 없고 바리새인들이 외식으로 모방하거나 침해할 수 없는 자리다. 아무리 이 자리에 축복을 해도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복,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그 사람 안에 두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영혼을 떠나게 하셨다. 그렇게 하기까지 십자가에 두셔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귀의 일을 끝내신 것을 보게 된다. 아무리 해도 마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고 영까지 포기하신 데서 인생의 영화와 존귀를 회복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도 예수 앞에서 마귀는 떠나고 천사가 수종들었다는 말씀이 있지만 완전하게 모든 사람 앞에서 마귀가 떠나가고 천사가 수종을 들게 된 것이다. 인생의 영화와 존귀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의 죽으심 안에서 내 인생이 발견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지금 어떤 일을 당해서 ‘내가 죽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올 때 예수의 죽음이 내 인생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보좌 우편에 가게 하시는구나.’라고 하나님의 손길로서 이해하게 되면, 우리 인생이 그렇게 해석된다면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복을 누리고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분은 그분이 사신 결과를 못보고 돌아가셨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그의 죽으심이 우리가 살아서 누리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영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무엇인가 붙잡기 원한다. 무덤에 이를 때까지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 예수님 역시 마지막까지 자기 영을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것을 놓게 하셨다.
우리에게 여지가 있으면 그것은 사탄에게도 여지가 된다. 그런데 영까지 포기된 이 자리에서는 사탄이 발붙일 수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휘장이 찢어짐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렸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님이 죽은 이후의 사건이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못보셨다. 예수께서 큰소리를 지르시고 영을 포기하셨는데 거기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제자들이 그 사건을 동시에 보았을 리가 없으니 우리가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죽으심의 의미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큰소리를 지르시고 영을 포기하셨듯이 우리에게 다른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을 때, 휘장이 열리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휘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이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에덴동산의 화염검이 철거된 것이다. 누구라도 동산으로 돌아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게 되었다(갈4:9). 서로를 알면 다른 무엇을 가지고 나를 알릴 필요가 없다.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다. 자기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
무덤이 열림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는 많은 성도가 살아났다고 하였다. 땅, 바위, 무덤, 이것은 모두 사망 권세의 상징이다.
땅은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심기 위해서 지으신 것인데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림으로 유린당한 땅이 되었다. 인간의 육체도 사탄에게 유린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덤에 있는 것처럼 사망을 겪으면서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을 절망 가운데로 몰아 넣어서 사탄의 종이 되게 한 것, 그것이 사망 권세다.
그 사망 권세가 흔들렸다는 것이다. 깨어지고 흔들리고 열리고……, 그래서 매여 있던 사람들이 살아났다. 히브리서 기자는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던 사람들이 놓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고 마태는 무덤이 열리고 잠자는 성도들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같은 말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더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람으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성경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다시는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하였다. 이제는 “누구나 와서 생명수의 물을 마시라.” 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구약에서는 생명나무에게로 가자면 화염검이라는 값을 치러야 했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서 누구나 값없이 그 물을 마시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모든 문제들, 우리가 판단하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의 죽음 안에서 가져 갔기 때문이다.
우리도 실제로 ‘나는 무엇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알고 살면 다른 사람에게 격이 없는 사람이 되고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분은 그렇게 가셨지만 이제 우리에게서는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곳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결과가 어찌될지 우리는 모른다. 콩을 심었으면 그 자리에 콩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산 결과가 이런 열매를 맺었구나.’라고 볼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결과를 모른다. 우리는 어떤 발자취를 가지고 지나갈 뿐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만 남을 뿐인데 이것이 누구에겐가는 의미가 되고, 누구에겐가는 살리는 것이 되고, 어디 가서는 열매를 맺어서 자라는 일이 된다.
휘장이 찢어진 것,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휘장이 찢어졌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으면 휘장이 찢어진 사람이 되어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알게 된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지금까지 살았으니까 우리는 서로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이들이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신다고 하였다. “이런 일을 했습니다.”라는 것으로 무화과 잎처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다 벗겨진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아시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아시게 되었다. 우리도 이 한 사람을 알고 나면 누가 가리고 있어도 그가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초창기에 “사람이면 된다.”는 말씀이 굉장히 은혜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다른 사람을 보면서 무슨 교파인가도 중요했고 무슨 종교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목사님이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다 외모다. 그 사람 속을 들여다 본다고 해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외모일 뿐이다. 그 사람의 지식이나 깊은 생각까지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외모일 뿐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지 그것만이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나에게서 많은 껍질들이 벗겨나갔다.
사람들은 속을 보고 싶어서, 사람의 속을 알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애쓴다. 그래서 툭 쳐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외모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 내려놓았다. 그 전에 교리주의자일 때는 통일교 재단에서 나오는 드링크 한 병도 마시기를 꺼려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드링크는 드링크일 뿐이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고 외모일 뿐이라고 알고 나서 얼마나 자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휘장이 열렸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휘장이 열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휘장이 열렸다. 이제 누구를 경계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편에는 다윗이 처한 상황 가운데 그의 고백들이 절절이 표현되어 나온다. 사울은 하나님이 왕권을 주셔서 왕이 되었는데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잊고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면서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자기 신하라도, 제사장이라도 죽여야 했다. 사울이 군사 삼천을 데리고 다윗을 잡으려고 쥐잡듯이 뒤지고 있는데 다윗은 굴에 숨어서 코앞까지 온 사울을 보고서도 거기서 시편 27편 같은 시가 나왔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사울의 군대가 코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이런 시가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내 평생 한 가지 소원은 여호와의 집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소원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한 말이 “내가 숨어 지내는 광야 굴이 하나님의 은밀한 장막이고 여호와의 초막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초막에 숨기시고 당신의 은밀한 장막에 두셨습니다.”이었다. 굴 속에 숨어서 벼룩 같은 신세로 있었지만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은밀한 장막에 자기를 숨기셨다고 한 것이다. 거기서 나온 유명한 고백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고백이다(시27:10). 선악과를 먹고 원망과 판단과 불행에 대한 토로만 나올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여기서 찬송이 나온 것이다. 삼천의 군사가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굴에 숨어서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초막에 숨기셨습니다.” 이런 찬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에서도 이런 찬송이 나온다면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내 인생에 많은 업적을 쌓고 많은 일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 곤고한 날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신 은혜를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이보다 복된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휘장이 열리는 것이고 우리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고 우리의 무덤이 열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영까지 포기하셨는데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을 알고 우리 인생을 들여다 보면 우리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골짜기마다 찬송할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에 내 발자국밖에 남지 않고, 발자국조차 없는 미미한 인생일지라도 우리 인생에 동행하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우리도 “무덤이 열렸다. 바위가 터졌다. 땅이 진동한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사망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지만 생명은 너희 가운데서 역사한다 하였다. 예수님은 영까지 포기하시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조롱까지 받으셨지만 생명은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우리 안에서 무덤이 열리는 일이 된 것이다. 찬송 못할 일이 없고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게 우리의 원망을 다 가져가 버리셨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내 원망을 가져가셨고,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불평……,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만 남은 사람으로 우리를 조성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고 그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우리의 모든 판단과 모든 선악의 지식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단지 생명과를 먹고 그분을 누리면 주를 누리고 주와 함께 인생에 베푸신 축복을 찬송하며 살뿐인 인생으로 지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인생, 길지 않은 짧은 인생을 감사만 있는 인생으로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도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경험이 우리의 매일의 간증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