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가 지켜가야 할 이 시대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우리의 공동의 집을 돌봄에 관하여>를 2015년 5월 24일 성령강림대축일에 발표하고, 6월 18일에 이탈리아어로 출판하셨다. 이 회칙은 오늘 우리 교회가 인류 사회와 지구 생명 공동체와 함께 직면한 과제를 식별하여 응답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모두 6장, 246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1-2 이 세계에서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3-6 동일한 관심으로 일치하다 7-9 프란치스코 성인10-12 나의 호소13-16 1장 우리의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17-61 오염과 기후 변화 20-26 오염과 쓰레기와 쓰고 버리는 문화 20-22 공공재로서 기후 23-26 2. 물의 문제 27-31 3. 생물 다양성의 상실 32-42 4. 인간 삶의 질의 악화와 사회 붕괴 43-47 5. 지구적 불평등 48-52 6. 약한 응답 53-59 7. 견해의 다양성 60-61 2장 창조계의 복음 62-100 믿음으로 비추어진 빛 63-64 성경 이야기들의 지혜 65-75 3. 우주의 신비 76-83 4. 창조계의 조화 속에서 각 창조물이 갖는 메시지 84-88 5. 우주적 친교89-92 6. 재화의 공동 운명 93-95 7. 예수의 눈길 96-100 3장 생태적 위기의 인간적 근원들 101-136 과학기술: 창조성과 권력 102-105 기술지배 패러다임의 지구화 106-114 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136 실천적 상대주의 122-123 고용을 보호할 필요성 124-129 새로운 생명공학 130-136 4장 통합적 생태 137-162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생태 138-142 문화 생태 143-146 3. 일상 생활의 생태 147-155 공동선의 원리 156-158 세대 간 정의 159-162 5장 접근과 행동 방식 163-201 국제 공동체에서 환경에 대한 대화 164-175 국가와 지방 단위의 새로운 정책들을 위한 대화 176-181 의사 결정에서 대화와 투명성 182-188 인간 성취를 위한 대화에서 정치와 경제 189-198 과학과 대화에서 종교들 199-201 6장 생태적 교육과 영성 202-246 1. 새로운 생활방식을 향하여 203-208 2.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을 위한 교육 209-215 3. 생태적 회심 216-221 4. 기쁨과 평화 222-227 5. 시민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 228-232 6. 성사적 표지들과 쉼의 경축 233-237 7. 삼위일체와 창조물들 사이의 관계 238-240 8. 온 창조계의 여왕 241-242 9. 태양을 넘어서 243-246 우리의 지구를 위해 드리는 기도 창조계와 일치하여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회칙의 의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규모 회복과 통합 생태 비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번에 발표한 회칙은 “환경 회칙”으로 일반적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자연 환경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이 회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태를 “integral”한 것으로 말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회칙의 메시지를 펼쳐 가십니다. “integral”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라틴어 in-tangere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말에 대가 되는 말은 누군가가 손을 대서 혹은 나뉘어져서 부분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partial”입니다. 이를테면, integral은 부분적인 것에 대가 되는, 온전한, 통의, 전일(全一)한, 혹은 통전적(統全的)인, 이런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표현하는 “통합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입니다. 교황님에게 integral한 것은 하느님의 살림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창조계의 어떤 것도 온전히 integral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integral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교황님이 integral ecology를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생태(oikos: 이 말의 어원은 집을 뜻합니다)가 통의 것, 부분적이지 않은 것이고, 그분의 생태살이가 분절적으로 혹은 파편화된 형태로 접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근원적으로 설득하려는 데 있습니다. 교황님이 생태를 말하면서, 베네딕도 16세 선임 교황님이 요한 바오로 2세의 “인간 생태” 비전을 계승하면서 2007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와 2009년 6월 29일에 발표한 회칙 진리 안의 사랑, 그리고 2010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 등에서 사용한 자연 생태 인간 생태 사회 생태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삼생태 차원을 기본틀로 설정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열려 있으면, 그분의 살림에 열려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살림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열려 있으면 열려 있을수록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가깝고,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에 참여하는 일관성이 커집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을 식별하는 규모가 작고 그분의 살림과 복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이 작을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살림과 복음,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존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살림을 부분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규모가 작아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황님은 생태 회칙에서 오늘 21세기 우리 교회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을 하느님의 살림에 부합한 형태로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integral하게, 온전하게 통합해서 제시하고 살아가게 하려는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신다기보다 하느님의 통살림, 하느님의 원생태에 부합한 형태로 오늘 우리 교회의 신학과 영성과 사목을 회복시켜 가신다고 하겠습니다. 아래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교황님이 삼생태를 명시적으로 통합해 가시는 구체적인 사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삼생태는 자연 생태, 인간 생태, 사회 생태를 가리키는데, 이 개념은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2007년 세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평화 생태학”을 진술하면서 명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에서 “자연 생태”라는 개념을 직접 사용하시지는 않습니다. 이 개념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환경 생태(environmental ecology)”라는 개념을 4장 1절 제목에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황님은 이 문헌 전체에서 창조계(creation) 가운데 자연적 구성체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이 이 문헌에서 말하는 “natural environment” 혹은 “natural world”는 자연 생태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인간 생태(human ecology)” 혹은 “ecology of man”라는 개념을 사용하시는 것은 찬미받으소서, 5, 148, 152, 155, 156항에서 볼 수 있습니다. 4.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 중에서 “통합 생태”에 대해 진술하는 4장 1절 제목에서 “social ecology”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이 문헌 142에서는 “사회 생태(social ecology)” 개념을 명시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진술합니다. 5.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실제로 찬미받으소서 모든 장에서 하느님의 통살림, 하느님의 통생태의 관점에서 이 세 생태를 통합적으로 조명해 가십니다. 교황님은 무엇보다도 도입부에서 이미 “integral ecology”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살림을 부분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극복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청합니다. 이런 틀 위에서 1장에서는 “우리의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주제 아래 자연 생태가 겪고 있는 고통을 직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 삶의 질의 악화와 사회 붕괴”라는 제목으로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를 통합해서 다루십니다. 교황님은 여기서 우리가 “쓰고 버리는” 문화 행태를 통해서 지구 생명 공동체에 어떤 파국적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 보도록 다리를 놓으십니다. 또한 “공공재로서 기후”에 관하여 다루면서, 자연 생태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와 갖는 근원적 상관성을 통찰할 수 있게 하십니다.
2장에서는 “창조계의 복음”이라는 제목 아래 자연 생태가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갖는 존재성과 인간 각자와 인간 모두 곧 인류 사회에게 창조물이 매개하는 하느님의 메시지 차원을 제시하십니다. 이와 함께 “우주적 친교”와 “재화의 공동 운명”에 대해서 다루면서, 자연 생태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와 갖는 상관성을 제시하십니다. 특히 이 장 결론부에서 교황은 “예수의 눈길”이라는 항을 통해서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신, 인간을 포함한 온 창조계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확인해 주십니다.
3장에서는 “생태적 위기의 인간적 근원들”이라는 주제로 인간이 문명이라고 하는 사회 생태를 통하여 우리가 자연 생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진술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이 문명이라는 자신의 존재 행위들로 단순히 자연 생태에만이 아니라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 전반에 역시 미치는 영향을 통으로 식별할 수 있게 하십니다.
4장에서는 서론부에서 말한 “통합 생태”를 주제로 다루면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하느님의 통살림 안에서 이루어야 할 조화의 지평을 제시하면서, “세대 간 정의”를 통합 생태를 살아가는 정도로 제시하십니다. 교황님은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언어를 빌려서 이것이 “세대 간 연대(intergenerational solidarity)”로 나타난다는 것과 이것은 필연적으로 “(동일) 세대 내 연대(intragenerational solidarity)”를 요청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베네딕도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세대 간 연대”는 세대와 세대, 지금 현존 세대와 아직 오지 않은 세대 사이의 연대, 곧 “시간 안에서의 연대”(solidarity in time)를 뜻합니다. “세대 내 연대”는 같은 세대로서 한 지구 규모에서, 혹은 한 대륙, 한 나라, 한 지역 규모에서 다른 공간에 사는 존재들, 단적으로 부국이나 부유한 계층이 사는 공간과 빈국이나 가난한 이들이 사는 “공간 안에서의 연대”(solidarity in space)로 나타납니다.
5장과 6장에서는 이렇게 통합 생태 비전을 살아가는 데 요청되는 인류 가족의 생태적 실천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5장에서는 국제 공동체와 국가 단위와 지역 단위에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의 건강한 살림을 위해서 필요한 “접근과 행동 방식”을 제시하십니다. 교황님은 여기서 국제 공동체와 국가와 지방 단위의 사회 생태 주체들이 자연 생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대화를 통하여 설정해 가도록 요청하고, 인간 생태와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의 접점으로서 정치와 경제와 과학 영역에서 생태적 대화를 열어 가도록 매개하십니다.
6장에서는 하느님의 통생태에 참여할 역량을 기르는 데 필요한 교육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영성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이 회칙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1절에서 다룬 교황은 3절에서는 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생태적 회심”에 관하여 다루십니다. 2절에서는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를 동시에 포용하는 인류와 자연 생태 사이의 건강한 계약을 위해 요청되는 생태적 교육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교황은 “찬미받으소서”로 시작한 회칙 마지막 절을 “태양을 넘어서,” 곧 태양 아래 살림의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태양과 함께 향할 태양 너머 존재에 대한 신뢰와 위탁으로 채워 넣으십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지구 시민으로서 “우리의 지구를 위해 드리는 기도”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창조계와 일치하여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함께 드리도록 초대하면서 회칙을 맺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의 생애 중에 증거한 합치 규모를 이렇게 진술하십니다. harmony with God with others with nature and with oneself(찬미받으소서, 10). 우리는 여기서 21세기를 통합하여 이 네 차원의 합치, 일치, 조화 관계를 이렇게 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느님과 인간의 조화: 여기에서는 하느님과 자신, 하느님과 이웃 인간, 하느님 앞에 선 존재인 자기와 자기의 조화가 함께 추구됩니다. 하느님과 조화는 자신과 조화를 가능하게 하고 완성하며, 자신과 조화는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신 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매개합니다. 여기에서 교황님이 베네딕도 16세의 언어를 빌려서 이 회칙에서 설명하는 인간 생태 차원이 드러납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것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룰 “제1의 매개”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그리스도교의 미래와 지구의 운명, 바오로딸, 2011, 46-53).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의 뜻에 따라 살기 시작한 것이 이 차원과 맞물려 있는데, 이것이 인간 생태 차원을 설명해 줍니다. 2. 사람과 사람의 조화: 여기에는 세대간 조화와 빈부간 조화가 포용되어 있습니다. 1. 세대간: 오늘 세대와 올 세대 2. 빈부간: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조화가 사람과 사람, 다른 존재들과 이룰 조화와 연대에서 핵심 관심사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교황이 이 회칙에서 제시하는 사회 생태 차원을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 영역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매개로 표현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한 삶을 기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가 평화를 이루도록 매개하며 산 것이 이 차원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는데, 이것이 사회 생태와 이어져 있습니다. 3. 자연과 인간 사회 문명의 조화: 여기에는 창조계와 관계를 맺는 인간의 노동과 그 결과로서 현대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자연을, 하느님의 창조계를 만나서 동반하는 방식이 관건을 이룹니다. 여기에서 교황님이 이 회칙에서 말하는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의 상호성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토마스 베리는 이 영역을 “제3의 매개”로 일컬으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인류 사회가 직면한 과제를 설명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새와 벌레들, 온 식물과 짐승들, 온 생명들, 온 우주 만물들과 형제적 친교를 이루어 간 것이 이 차원과 맞물려 있는데, 이것이 자연 생태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상통합니다. 4. 자신과 몸의 조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몸성(bodiliness)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 만물과 조화를 이루어도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한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께서 “내 집을 고쳐다오” 하셨을 때, 바로 “네” 하고 따르면서, 먼저 성당이 그분의 집인 줄 알고 고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미아노 성당과 포르치웅쿨라 성당, 피에트로 성당 같은 낡은 성당들을 고치면서 하느님의 집을 고치는 일에 투신해 갔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외면한 채 복음을 등지고 사는 것을 보고 설교를 시작하여 교회를 하느님의 집으로 식별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슬람 세계와 싸우는 것을 보면서 하느님에게서 온 한 형제 사이에 평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서구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모두 하느님의 집으로 품어안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시 새들에게 설교하면서 태양과 달과 온 땅과 땅에서 나는 하느님의 온 창조물, 하느님의 온 우주를 하느님의 집안으로 포용하면서 우주를 하느님의 집으로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위에서 말한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와 자연 생태를 하느님의 통살림에 통합해 가는 여정과 합치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직 하느님의 집의 규모 가운데 한 영역인 자신의 몸을 잘 돌볼 줄 몰랐습니다. 고행과 극기, 깊은 기도, 헌신적 설교 여행 등으로 그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귀천하기 직전에는 위장도 거의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고 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치료 받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혹시 너무 몸에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런 상황을 한 제자에게 말했을 때, 그가 성인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데 몸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 성인이 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충실하게 헌신적으로 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제자가 성인에게 말합니다. 몸이 그렇게 따랐는데, 지금 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요. 그러자 성인이 제자에게 이렇게 현명하게 자기를 일깨워 주니 복받으시오 하면서 치료를 충실하게 받겠다 합니다. 마침내 자기 몸을 바로 보고 그 몸이 하느님의 집인 것을 머리로만이 아니고 마음으로만이 아니고 온 몸으로 온 존재로 살게 됩니다. 자기 몸을 모르면, 창조물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기 쉽습니다. 마침내 자기 몸과 화해한 성인은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빈몸으로 땅에 안겨서 그 땅을 통해서 자신을 있게 하신 그분에게 안깁니다. 온 집들의 집이신 그분께요! 교황님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강하지 못한 이원론이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상흔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일그러지게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을 직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 전통을 모체로 형성된 서구 문명권에서 자연 생태에 대해서는 물론 비인격화하여 대상화시킨 다른 존재들, 다른 성, 다른 인종, 다른 종교인들에 대해서 폭력적인 인간중심주의와 배타주의와 식민주의의 한 원천을 형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생태 이해를 위해서는 건강한 인간 이해가 필요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황님은 우리의 몸에 대한 태도와 창조계에 대한 태도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 전체를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에게서 온 선물이자 우리의 공동의 집으로 기쁘게 맞고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받아들이고 그 몸을 돌보며 몸의 충만한 의미를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인간 생태의 본질적 요소”로서, 이때 비로소 “우리의 몸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구가한다는 사고”로 “우리가 창조계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구가한다는 사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몸의 인간 생태 차원이 몸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 생태와 몸과 몸의 관계로 형성되는 사회 생태 모두와 필연적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어떤 경우에도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찬미받으소서는 삼생태, 자연 생태 인간 생태 사회 생태가 통합된 형태로 진술되는 “(통합)생태 회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회칙을 이제 “환경 회칙”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우리의 존재장 우리의 사회 안에서 “환경”과 “생태”를 신학적으로나 영성적으로나 사목적으로 보다 더 명시적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면서,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규모에 보다 더 충실한 복음 실천과 신앙 살이를 설계하고 실현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삼생태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살림을 통으로 바라보고 그런 토대 위에서 이 세계를 식별하며 복음적으로 동반할 때, 그때 발생할 수 있는 축복의 깊이가 얼마나 혁명적으로 달라지는지 우리 교회가 앞으로 실감하게 되리라 믿으면서, 가슴이 설렙니다.
전환: 3차 바티칸 공의회와 같은 새로운 신앙 이해와 실천의 역동적 원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복음의 기쁨에 이어서 발표하신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서 이 21세기에 때의 표지를 읽고 복음적으로 응답해 가는 데 필요한 별빛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말들을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 두 문헌은 참으로 3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할 교회의 신앙 실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보입니다. 앞으로 교황님은 교회 내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더 복음적으로 뒷받침해 줄 비전을 제시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운영과 신앙 실천의 복음적 투명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구조 개혁과 방안들이 포함되리라 예측해 봅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를 참으로 하느님의 백성답게 할 바탕으로서 각 지역 교회의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공동체가 로마 교회와의 복음적 친교 속에서 서로 연대하여 임기제와 종신 직분으로 나누어 주교들을 선출할 수 있게 하고, 여자 수도자들 가운데서 추기경을, 그리고 평신도들 가운데서 추기경을 선임하는 조치들을 하실 것으로 내다봅니다. 이 영역은 희망으로 남겨 두고, 이 회칙을 어떻게 3차 바티칸 공의회에 비교할 수 있는지 좀더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같습니다. 이 회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동안 인류 사회가 도달한 문명과 인류의 존재 상태를 통합해서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비전을 보다 더 철저하게 복음적으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그리고 살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 이 회칙은 몇 가지 전환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전환! 문제에서 신비로(from problem to mystery)!(찬미받으소서, 12. 69항도 참조) 교황님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오늘의 세계 현실을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신비로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에 대한 근원적 신뢰 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태 영성과 생태 살이를 하느님의 살림에 대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실현해 가는 “기쁨”의 육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수도원의 정원 가운데 일부는 경작하지 않은 야생 상태로 그대로 놔 둘 것을 요청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자연 그대로 자라는 것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지닌 이를테면 천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것들을 있게 하신 하느님을, 곧 그것들의 창조자를 관상할 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이 맥락에서 특히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인간의 몸성(bodiliness, 찬미받으소서, 235)에 대한 교황님의 인식입니다. 이것은 몸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하느님의 창조 안에서 소통하고 생명을 낳고 기르며 동반하는 과정에 참여해서 수행할 역할을 하느님이 직접 마련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영성적 사목적 깨달음에 근거합니다. 인간의 몸성에 대한 신학적으로 건강한 인식이야말로 자연과 세계에 대한 혁명적 태도 전환에서 빠져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한 전환을 이룬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생태적 형제애(ecological fraternity)로 전환! 인간적 형제애에서 우주적 형제애(universal fraternity)로! (찬미받으소서, 11, 70, 92, 221, 228) 이것은 그동안 생명 존중은 불교, 사회 정의는 그리스도교 하는 식으로 나누어서 보았던 옛 종교 패러다임을 넘어서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사회 정의를 기초로 하는 사회 생태와 온 창조계와 신비적 공명을 기초로 하는 자연 생태의 통합을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해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가톨릭 신학의 기본 틀이 보다 더 하느님의 창조와 온 창조계에 대한 신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재구조화되어 갈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생태적 감수성(ecological sensitivity) 혹은 생태적 센서(ecological sensor)가 보다 더 따뜻하게 포용되는 날들을 맞게 되겠습니다. 이런 전망 속에서 앞으로 아시아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자연 친화적인 아시아 정체성을, 우리의 경우 동아시아의 우주 친화적 정체성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우주적 형제애와 통합하여 보다 더 역동적으로 고유한 신학과 영성과 사목 비전을 육화시켜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례로 무위당 장일순 요한의 천지여아동근 만물여아일체(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 인식에 담긴 생태적 동근 일체 비전이 교육과 협동조합과 복지 차원에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 현장에서 갖는 의의가 한국 가톨릭 신학계를 통하여 세계 가톨릭 교회에서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셋째, 신학과 영성과 사목의 규모의 전환! 환경에서 통합 생태(integral ecology)로! (찬미받으소서, 10, 11, 62, 124, 137, 159, 225, 230) 자연 중심 생태 인식에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가 하느님의 통살림에서 조화를 이루는 통합 생태로 전환하게 하십니다(교황님은 이 문헌에서 “통합적 발전(integral development)”을 “통합 생태”와 긴밀하게 연결지어 놓습니다. 찬미받으소서, 62, 141, 147 등 참조). 이것은 위의 생태적 형제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요, 이제는 생태를 더 이상 좁은 의미에서 인간중심적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중심으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를 통합해서 이해하고 동반하는 새로운 시대를 보다 더 역동적으로 열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자연 중심으로 사고하였던 단일 생태 패러다임에서 삼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생태의 규모(ecological scale)가 달라지게 된 것인데요, 이러한 전환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제는 성경을 읽으면서, 구체적으로 복음서 가운데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을 때, 단순히 사마리아인처럼 선행을 베푸는 개인 윤리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연 생태를 통합해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존재 만물, 곧 노새를 비롯해서 기름과 포도주, 싸맨 천과 길, 바람과 날씨 등을 함께 통합해서 그 의미를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생태까지도 통합해서 이전에는 강도들을 악인들로 젖혀 놓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강도들이 나타난 상황에 대해서는 물론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 생태의 구조까지 함께 성찰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넷째, 사랑의 형태와 질과 구조의 전환! 개인적 사랑에서 “사회적 사랑(social love)”-“정치적 사랑(political love)”으로! (찬미받으소서, 6장 5절 제목: “Civic and Political Love”과 231) 교황님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압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사랑할 줄 모르면, 개인적인 사랑이 무력화되고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님은 개인적 사랑을 넘어서 “사회적 사랑”을 요청하고, 이런 사회적 사랑의 구체적 형태로서 “정치적 사랑”의 실천을 “우리의 영성의 일부”로 명기합니다(찬미받으소서, 231).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적 사랑에서 사회적 사랑으로 복음 살이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더는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정치 생활에 대한 참여”는 모든 그리스도인 시민들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태적 비전에서는 사회 정의는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단적으로 여기서는 사회 정의가 사랑에 통합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태적 사회 정의는 생태적 사랑(ecological love)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좁은 의미에서 정의 혹은 사회 정의가 균형을 이루는 데 초점을 두면서 균형을 파괴하는 불의의 주체들에 대해서 대립하기 쉬운 면모를 보입니다. 이에 비해서 생태적 사회 정의는 불의한 주체들의 행위는 사회 생태적으로 철저하게 극복하면서, 그 주체들은, 해와 비가 이들에게도 떠올라 빛을 비추어 주고 몸을 적셔 주는 한, 어떤 경우에도 원수로 내몰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생태적 수행을 통한 생태적 행동을 요청하는데, 여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끝없는 자기 개방의 중요성이 부각된다고 하겠습니다.
다섯째, 사회적 지배에서 생태적 공명(ecological consonance)으로 전환! 자연 지배에서 생태적 회심(ecological conversion, 찬미받으소서, 5, 217-20)과 연대(ecological solidarity, 162)와 행동(ecological actions, 230, 64)으로! 자연은 단순히 인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은 자연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없이도 존재하였고 존재할 수 있으나, 인간은 자연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연은 하나하나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고유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자연이 우리 각자와 우리 모두, 인간 각 존재와 온 인류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 준 것에 대한 신학적 깨달음이 요청되고, 이런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생태적 회심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과 회심을 새게 하지 않고, 이것을 사회-문화적으로, 경제-정치-언론-학예-종교 영역에서 구조화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창조계, 하느님이 바라시는 국제 공동체, 민족 사회, 지역 살림 공동체를 실현해 갈 대안이 있는 연대와 행동이 요청됩니다.
여섯째, 성사 생활의 전환! 인간 중심 전례에서 생태적 전례(ecological liturgy)로! (찬미받으소서, 235) 교황님은 찬미받으소서 235항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 다른 여러 단계에 있는 이 세계를 품어안도록 초대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기름, 불과 색들이, 이것들이 갖고 있는 상징적 힘과 함께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축복하는 손은 하느님의 사랑의 도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축복하는 손은 삶의 여정에서 우리를 동반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가까우심을 드러내주는 한 실체이기도 하다고 강조하시면서 진술하십니다. “세례 때 어린이의 몸에 부어진 물은 새로운 생명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을 만남은 이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나 자연을 등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은 육화한 말씀 안에서 참된 의미를 갖는다고 압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물질적 세계의 일부를 자신의 위격 안에 받아들여서 합치시키셔서, 그 안에 결정적인 변모의 씨앗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물질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몸성(bodiliness)은 전례 행위 안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간의 몸은 전례 행위를 통하여 몸의 내적 본성에서 성령의 성전으로 드러나게 되고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취하신 주 예수님과 함께 하나로 결합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교황님의 이같은 생태적 성사 비전을 이번 회칙을 통해서 보다 더 정교하게 밝혀 주신 통합 생태에 따라 인간 생태만이 아니라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와 연결하여 깨달은 것을 우리의 존재장에서 개인적 사랑과 사회적 사랑, 정치적 사랑과 통합하여 육화시켜 가게 될 것입니다. 일례로, 세례와 성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바탕으로 물과 식사가 자연 생태와 사회 생태와 갖는 생태-성사적 의미를 우리의 삶의 관계 속에 육화시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성사와 일상, 자연 생태와 사회적 투신, 생태적 성사와 생태적 정치 행위가, 과거에서처럼 대립되는 형태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통살림 안에서 복음적으로 상호 질문과 상호 보완을 도모해 가는 새로운 때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 관상의 전환! 개인 관상에서 통합 생태 관상(integral ecological contemplation)으로! (찬미받으소서, 12, 85-6, 97, 100, 112, 214, 222, 223, 225-6, 233, 238, 239)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 154항에서 사람들 관상, 자매 관상, 형제 관상을 소개하여 “관상의 혁명”(revolution of contemplation)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관상하려고 했어도, 함께 사는 형제와 자매는, 이웃은, 좀더 사회 생태적으로 말하자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들은 관상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원래 하느님 관상이 깊은 그만큼 자매 형제 관상과 창조물 관상이 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관상은 간절하게 바라면서 시도하면서도 그 시간만 끝나면 자매와 형제와 이웃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고는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느님 관상을 위해 헌신한다고, 혹은 하느님 관상의 깊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황님의 자매 형제 관상 비전을 통해서 자매 관상, 형제 관상이 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은 그 자체로 흠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졌습니다. 우리는 교황님의 사람들 관상을 통해서 특히 사회 생태를 관상의 영역으로 통합해 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번 생태 회칙에서는 교황님은 관상을 사랑과 통합하여 이 차원을 보다 더 사회화해서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지평을 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자매 형제 관상의 계열을 따라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 관상, 공동체 관상, 교회 관상, 사회 관상, 나라 관상, 세계 관상을 사회 생태적 관상에 포함하여 복음적으로 열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생태 회칙에서는 우주 관상, 지구 관상, 하느님의 창조물 관상을 제시하십니다. 우주 관상을 교황님은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창조물에 대한 이같은 관상은 각 사물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시는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에게 창조물을 관상하는 것은 메시지를 듣고 역설적인 목소리와 침묵 속에 전해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에 계시가 내포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이글거림과 밤의 도래에도 역시 하느님의 현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계를 표현하면서 나 자신을 표현합니다. 나는 이 세계의 거룩함을 해독해 내려는 나의 노력 속에서 나 자신의 그것을 탐색해 갑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님은 일본 주교회의가 2001년에 21세기를 맞으며 발표한 문헌에서 인용하여 이렇게 진술하십니다. “각 창조물이 자신의 실존으로 찬미하는 것을 감지할수록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쁘게 살게 됩니다.” 여기에서 교황님은 자연 생태 관상이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얼마나 근원적으로 인간 생태, 자기 생태, 자기 몸의 생태에 대한 관상과 통합되어 있는가를 보여주십니다. 단적으로, 교황님의 이번 회칙을 통해서 자연 생태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에 대한 관상을 하느님 관상, 하느님의 살림에 관한 관상과 명시적으로 통합해서 말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덟째, 생태적 수행(ecological discipline)을 통한 따뜻한 동반으로 전환! 거칠고 냉소적인 비판에서 품어안아 세우는 비판으로! (찬미받으소서, 228, 94, 221) 이것은 첫째, 현대 세계가 직면한 자연 생태의 황폐화 앞에서 이 세계를 문제가 아니라 관상해야 할 신비로 보는 태도와 둘째, “우주적 형제애”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있어라 해서 있게 된 모든 것은 하느님과 닿아 있어서 사람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존재와 이어져 있게 되고, 인간 관계에서도 하느님을 “공동의 아버지”(228, 220, 238-9)로, 곧 존재의 “동근”으로 모시고 있으므로 서로 형제 관계에 들어서 있게 됩니다. “우주적 형제애”는 온 창조물과도 온 인류와도 모두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가 어떤 경우에도 사형을 집행할 수 없다고 믿는 이유는 잘못을 한 사람이 받아서 사는 숨이 창조물이나 인간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서로 한 부모 한 집안의 형제라고 믿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자연 생태 현상도 이렇게 재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고통스런 현실을 발생시킨 권력자들과 재력가들 모두 그 아픔과 그들의 과오는 극복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연대하면서, 이 세계와 그 주체들은 사랑으로 동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를 우리의 생명의 길로 수락하는 한,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을 등지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이 길이 어렵기 때문에도 참으로 동근 하느님을 중심으로 우주적 형제애를 살아갈 생태적 수행이 필요하고, 정의를 품는 해와 비가 정의자와 불의자, 선행자와 악행자를 품는 것과 같은 생태적 존재 동반이 요청된다고 하겠습니다.
아홉째, 자연과 문명의 대립에서 통합으로 전환! 이것은 교황님이 한편으로는 지구 온난화와 자연과 인간과 사회 생태에 영향을 미치는 오염, 자연 파괴를 발생시키는 인간과 사회 존재 과정을 비판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능력과 자연과 대화 역량에 대한 신뢰를 지켜 가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교황님의 이번 통합 생태 관련 회칙을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생태 위기에 대한 생태적 동반과 찬양을 향하여! 이런 토대 위에서 우리 교회는 오늘 우리 세계가 직면해 있는 자연 생태가 겪는 파괴와 인간과 사회 생태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고통을 보다 더 충실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연 생태의 파괴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를 위협합니다(찬미받으소서, 70, 119, 155-6). 자연 생태 파괴가 인간 생태와 사회 생태의 파괴와 필연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무엇보다도 자연 세계의 황폐화 현상들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들을 해소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인간중심적으로 구축된 문명 속에서 쓰고 버리는 문화를 통하여 자연 생태가 오염되고 훼손되고 파괴되고 멸절되면서 겪는 고통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프란치스코 성인이 증거한 생태적 신앙 실천 비전을 통해서 드러내 준 “우주적 형제애”에 근거할 때, 우리의 아픔이고 하느님의 생명 살림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 생태의 보존과 하느님의 창조 질서의 보전은 억지로, 혹은 위협 앞에서 할 수 없이, 혹은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살림을 깨달으면, 하느님이 당신의 온 창조계와 우리 인간의 관계 속에 내장시켜 놓으신 우주적 형제애를 깨달으면, 자연 생태를, 인간 생태를, 사회 생태를 하느님의 질서에 맞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대로, 하느님의 나라 살림에 부합한 형태로 동반하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사랑을 복음적으로 조직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원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그만큼, 그 존재에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충실하게 사랑하면, 충실하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것이 순명의 핵심이고, 관상의 정도입니다. 삼생태의 통합, 인간 오성, 지성과 감성과 땅성과 때성과 영성 차원의 통합, 관상과 정치-경제-언론-학예의 통합, 관상적 사랑과 사회적 사랑의 통합, 이를 통한 온 창조계와 더불은 하느님 살림 찬양. 바로 여기에 이번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발표하셔서 온 세계와 공유하시는 깊은 목적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
출처: 저절로 원문보기 글쓴이: 박은경 가타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