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빴던 1박 2일 (수술)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해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수술실 문은 한 점 아쉬움 없이 닫혔다. 나는 자동문과 달리 자꾸만 깨금발로 그 너머를 궁금해했다.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보호자대기실로 가십시오. 그쪽에 가시면 시시각각 환자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서른두 개의 의자는 만원이다. 마치 호위무사들처럼 둘러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도 느긋하게 앉아있지 않았다. 차라리 서 있는 편이 좋았을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한 눈동자들은 예외 없이 두 개의 모니터에 꼽혔다. 상황판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뜨고 진다. 그 때문에 앉았거나 둘러선 사람들은 현황에 따라서 수시로 동공이 변한다.
10시에 들어갔지만, 아직 이름이 뜨지 않았다. 갑자기 요의(尿意)를 느꼈다. 불안과 초조가 겹칠 때면 으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니터 3개 중 2개는 수술환자의 현 상태를 알린다. 나머지는 하나는, 목울대를 조여 놓은 텔레비전이다.(뉴스 채널) 3대 모두 말은 없다. 그냥 그림과 자막을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로만 보면, 모여 있는 보호자들 또한 농아나 진배없다. 그 때문일까? 실내는 엄숙한 듯 고요하고 진지하다.
드디어 모니터에 아내의 이름이 떴다. 마치 국가고시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쁘고 반가웠다. 이름 곁에는 ‘수술 시작’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안내되었다. 푸른 바탕에 하얀 글씨가 희망적이다. 의사의 말이 참이라면, 최소한 5시간은 기다릴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의사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13년 전의 경험도 작용했지만, 우린 바로 앞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대기실에는 희비의 색깔이 선명하게 갈린다. 모니터에서 특정인의 이름 곁에 ‘회복실’이란 명사가 붙으면 “오, 하나님!” 하는 감탄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신을 찾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방증하는 것이다.
‘수술 중’이라던 글자는 오후 6시가 되어도 바뀌지 않았다. 의사가 말했던 5시간은 이미 넘었다.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했고 화장실 횟수는 정비례하였다. 그렇다고 오줌발이 시원하지도 않았다. 마음은 수술실에 있기 때문이다. 얼른 달려와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눈알이 침침하고 무엇보다 목이 뻐근하더니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장시간 올려다보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꾹! 참았다. 수술대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니터에는 새로운 이름들로 교체되었다. 이제 같은 시간대에 수술을 시작한 환자는 아내 포함 셋이다. 오후 9시 55분 드디어 아내의 이름이 모니터에 떴다. 장장 9시간이다. 그것도 회복실이 아닌 중환자실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곁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개두술 환자는 으레 중환자실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응급에 대비한답니다. 잠시 후 방송을 통하여 아내의 상황을 알렸다. “이효순 씨는 현재 중환자실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거나 회복이 되면 문자로 알려주겠습니다. 멀리 가시지 말고, 대기실에서 기다리십시오.” 어감은 정중했지만, 길게 늘어트린 어투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나는 진동에서 소리로 바꿀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동상태를 유지하면서 볼륨만 최대치로 올렸다. 위치 또한 바지 주머니에서 심장 쪽 안주머니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혹여 졸더라도 전화기는 심장을 두드려댈 것이다.
밤은 속절없이 깊어만 갔다. 모니터는 계속 살아 있고, 보호자 대여섯 명은 딱딱한 의자에서 졸고 있다. 나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한국인이 가장 잘 사용하는 말을 따라 했다.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지…….”
배낭에서 시집을 꺼냈다. 47년 전부터 지니고 다니는 ‘칼리 지브란’의 시집이다. 길거나 짧은 출장길은 물론 혼자 길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동행한다. 특히, 오늘처럼 삶이 답답하고 절박할 때 좋아하는 시구를 가슴속으로 음률하기 위해서다. “삶은 고독의 바다 속에 있는 섬, 그 섬의 바위들은 희망이고, 나무들은 꿈이며, 꽃들은 쓸쓸함이며, 시냇물은 목마름이다.”
선잠을 깬 것은 또 다른 보호자가 털어낸 빗방울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웬 놈의 비가 저토록 억수일까?” 나는 통유리로 갈라놓은 자연을 내다보았다. 굵은 빗방울은 유리창을 긁으며 넓게 번지고 있었다. 저 정도의 빗방울이라면 분명 확실한 멜로디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속으로 우는 내 마음과 같았다. 이처럼 병원은 자연과의 유대감마저 단절시키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빗물을 들여다보며 감췄던 퍼즐 보따리를 풀었다. 젊은 날부터 아내와 함께 쓰는 미완의 악보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머지 날들일랑 더욱더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야겠다.
드르륵, 드륵! 손전화가 심장을 친다. “보호자께서는 오전 11시 30분까지 중환자실 앞에서 기다리십시오.” 꼬박 26시간을 대기실에서 보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또 다른 불안이 엄습했다. 환자 대부분은 중환자실에서 빠르면 하루, 아니면 이틀이 기본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곁에서 말했다. 3시간 30분 만에 회복이라면 엄청 빠른 겁니다.
아내는 여러 기구가 달린 특수침대에 누워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 머리에는 핏물 밴 붕대를 감았고, 눈은 감고 있었다. 충격적인 장면은 머리에도 투명호스가 꽂혀있었다. 튜브에는 뇌 안에 고인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간호사가 말했다. “이분이 누구시죠?” 아내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더니 모깃소리처럼 말했다. “남편이요” “이름이 뭐죠?” “이태호!” 아내는 대답을 마친 다음 나를 향하여 미소 지었다. 꾹, 꾹!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나는 저 여자의 남편이다. 엄청난 수술의 아픔과 후유증을 견디면서도 나를 기억했다. 그동안 나는, 인생에 있어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중환자실을 나온 다음, 나에게 보냈던 미소의 의미가 무엇일까? 나름대로 정의했다. 그렇다. 부부란 세월을 함께하면서 뚜렷한 연대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첫댓글 저도 마음 졸이며 글을 읽었습니다. 이효순 선생님의 미소가 어느 때보다 빛났겠습니다. 참 어려운 시간을 건너오신 두분, 힘들었던 시간들 만큼 몇 배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시길 빕니다. 더 견고하고 기품있는 인생길을 걸어가시리라 믿습니다.
불볕에서 사경을 헤매던 화초들이 모처럼 비를 만났습니다. 소생 불가능한 종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뽑아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단비 소식이 있으니 기다려 볼 것입니다. 오늘은 의료원에가서 수술부위 소독할 예정입니다. 처음 해보는 가위질이라서 마치 쥐가 파먹은 듯 아내의 두상이 보기 흉합니다. 미장원도 들려볼까 합니다. 깨달은 만큼 착하게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生과 死의 갈림길. 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마주한 부부의 심정이 오죽 했겠습니까. 다시 한번 무사 귀환을 축하 드리며 남은 인생여정, 서로 위해가며 알콩살콩 사시라고 힘찬 박수 보내 드립니다. 짝짝짝.........!!!
염려와 격려 덕입니다. 앞으로는 어려운 이웃도 돌아보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강승택 선생님의 힘찬 박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유리창을 긁으며 넓게 번지는 빗물이 마치 속으로 우는 내 마음 같다"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울컥해짐을 느낍니다. 생사의 갈림길을 지켜봐야 했던 이선생님의 속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힘든 시간을 보내신 두분이셨으니 앞으로는 건강과 즐거움만 가득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모쪼록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색깔놀이- 새벽꿈 한폭의 수채화에서 화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상상해보았습니다. 종이에 텃치된 물감의 움직임이 하도 신선하여 한참을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천재를 줄세우라면 미술, 음악, 문학 등으로 순서를 둡니다. 화가는 회화라는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작가는 문장으로 말하지요.
네, 세월이 쌓이면서 제1천성은 자꾸만 녹아들고, 제2천성이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먹먹하여 한 번에 읽지를 못했습니다.
해헌 선생님의 심정, 몇 백 번 알고도 남습니다.
간절함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두 분 손잡고 만리포 해변 걸으실 날을 그리며 힘내시기 바랍니다.
아까는 소낙비가 더럭더럭 울더니 구름을 몰아 낸 하늘이 노오랗습니다. 목필균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누구의 입김이 저리도 뜨거울까" 빠른 회복은 여러분의 기도 덕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끼리의 마음들이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요.
감사합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단숨에 읽었습니다.
1박2일 장시간 대기실에 계셨을 모습이 선연합니다.
앞으로 생은 희망과 감사의 날이 되겠지요.
두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네, 기다림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이처럼 속을 태우는 기다림도 살면서 한번 쯤 찾아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대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태호 선생님의 삶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생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엮고 계십니다. ▲ 첫째는 과거 파월 장병으로서 자신의 삶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무수히 목격하면서 자신도 육신의 피해를 당하여 보훈병원 치료를 받고 계신 처지입니다. ▲ 둘째는 사모님의 병환입니다. 단순히 간호일기 수준으로 읽어낼 수 없는 것은 독자 모두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셋째,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일입니다. 글은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절실하게 쓸 수 있는 마력 같은 힘이 생깁니다. 제가 현직 경찰관 시절, 목불인견의 참상을 몸서리치면서 체험하면서 ‘모름지기 글이란 힘든 상황을 체험하지 않고는 쓰지 마라’라는 것이 소신이었습니다. 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만이 글다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체험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이지요. 차고 넘쳐야 글다운 글이 됩니다. ▲ 이태호 선생님도 보훈병원 다니시며 편치 않은 몸인데, 사모님 간호하시느라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분께 마음의 평화와 오붓한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그 사람만의 고유의 특성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문학을 통하여
동지된 분입니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 우뇌와 좌뇌를 여유롭게 활용하시는 윤승원 작가님을 눈여겨 보아왔습니다.
우리 나이라면 누구라도 참아야했던 .세월들이지요. 윤승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세가지는 제가 이 사회에게 소명이라도 하고 싶었던 사안들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월남전선과 해외 현장, 삶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죽음의 문턱, 그런 것들이 자꾸만 글을 쓰라고 재촉합니다. 이제 또 한고비 넘겼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여전히 위로와 격려, 아끼시지 않는 윤승원 선생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코로나와 불볕, 양수겸장에 승리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모님의 모습이 곁에서 뵙는 듯 떠오르고 눈물이 납니다. 고락과 생사를 함께하는 사랑을 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결혼에 이르렀는데 불쑥 오래 전 기억이 나요. 늘 아름다운 모습이셨지만 나머지 날들 더욱 아름다운 멜로디가 두 분 감싸길 기도드립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런 환경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을 꿈꾸는 것을 저도 지향했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된 것은 없었습니다. 그랬군요. 우린 누구나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또 다시 깨닫습니다. 동안 저는 너무나 까불었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한탄을 수 없이 공감하는 나날입니다. 정말 헛 되더군요. 김지안 작가님, 기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