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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Barcelona)를 찾아서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호텔에 도착해 짐을 미처 다 풀기도 전에 서둘러 성 가족 성당(Catedral sagrada familia barcelona)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고 한다. 벌써 건축을 시작한지 140여년이 지난났건만, 지금도 여전히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 중인 성당은, 옥수수처럼 뾰족뾰족한 독특한 외관으로 해서 바르셀로나의 명물이자 랜드 마크가 된지 이미 오래고, 아울러 누가 뭐라고 해도 가우디 건축의 하이라이트라고 하겠다. 혹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기도 한다. ‘죽은 가우디가 지금도 여전히 무덤 속에서 성 가족 성당을 짓고 있다’고 말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 건축은 1882년 빌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의 설계로 첫 삽을 떴지만, 빌라르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듬해인 1883년 그의 제자인 가우디(Antoni Gaudí)에게 바통이 이어졌다. 경험이 미천했던 31살의 젊은 건축가에게 수석 건축가의 자리를 맡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미 성당건축 공사는 미친 프로젝트였던가, 아니면 기적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쨌거나 가우디는 이후로 192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순간까지 43년의 시간을 여기 이 성 가족 성당 건축에 매달렸던 것이다. 젊어서는 카사 밀라나 카사 바트요 같은 건물을 건축하면서 여러 현장과 성당을 오가면서 작업을 했으나, 노년에 접어들면서는 오로지 성당 건축에만 매달리면서 아예 작업과 숙식을 모두 성당 지하실에 마련한 허름한 창고에서 해결하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Catedral sagrada familia) 공사는 가우디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한 건축가의 위대한 불멸의 명작으로 남게 되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 위원회와 바르셀로나 자치 정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우디의 사망 100 주기가 되는 2026년에는 기필코 성 가족 성당을 완공 시키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하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있다고 해야 하겠다.
오로지 성금에 의지해 시작된 성 가족 성당 건축이었는지라 중간에 이미 여러 차례 고비와 난항을 겪어왔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지금의 재정상태 또한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고 있다. 이런 결과를 예측했음일까? 가우디는 이미 살아생전에 성당의 완공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공사 자체가 너무나 초대형 공사였고 그 예측 불허의 소요경비를 걱정하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미 재정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 자연히 공사의 진척은 지지부진 하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어느 천 년에나 성당이 완공될 수 있을까’하는 걱정과 조롱이 섞인 비아냥을 틀어놓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런 민심을 대변하는 한 신문기자가 가우디에게 성당의 완공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가우디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 의뢰인께서는 전혀 재촉하시지를 않으시는걸요. 여기 이 성당이 언제 어떻게 완공이 되느냐는 오로지 제 의뢰인 한 분만 알고 계십니다. 저는 그저 그분의 의뢰에 따라 꾸준히 공사를 계속할 뿐입니다.’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가우디가 지정한 의뢰인은 ‘지극히 높은 곳에 앉아계시는 존엄하신 그 분’을 가리킨다. 그분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교회에 나가보시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짐작하시는 바로 그 분이다. 그런 연유에서 과연 성 가족 성당의 완공이 2026년에 이루어지느냐 아니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 의뢰인께서 결정하실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140년이나 걸렸어도 아직도 해결이 나지않는 이런 초현실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냥 완공을 목전에 두고있는 해괴망측하게 생긴 성당 건물을 그저 바라보면서 '저게 가우디 건축의 백미래. 놀랍지 않아?' 하면서 마냥 탄성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공사가 시작된지 140년이나 지났고 가우디가 사망한지도 100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아직도 한창 공사중인 저 건물이 과연 가우디 건물이 맞는거야? 가우디는 제대로 변변한 설계도면조차 남기지 않고 죽었다면서? 그럼 저게 도대체 누구 건물이야? 누구 설계가 진짜로 맞느냐고? 등등의 제법 깊이를 두고 살펴보면 적지않게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인것은 맞다.
가우디가 직접 시공한 부분이 25% 정도라고 하지만, 그가 가장 신경을 섰던 <탄생의 파사드> 까지도 마지막 조각상을 제작하여 올려 맞춘것이 2.000년 전후인 것을 감안하면, 성 가족 성당의 대략 20% 정도의 설계와 공정이 직접 가우디가 담당했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천재 건축가인 가우디는 건물의 전체적인 구상이나 도면을 거의 남기지 않고, 일을 진행해 나가면서 그때그때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도안을 떠올리고 즉시즉시 그것을 설계와 시공으로 옮겨가는 아주 특별한 건축가였다.
‘세 개의 출입문(파사드)이 있는 아주 커다란 성당을 지을 것이며, 그 위로 12 사도를 기리는 12개의 뾰족탑이 병풍처럼 둘러설 것이다. 12개의 뾰족 탑 위로 신약성서의 4복음서 저자를 기리는 공간을 만들고, 그 위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고 기리는 두 개의 거대한 탑을 더 올려 세워서 서로 연결하도록 만들 것이다.’라는 것이 가우디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최종 설계안이었다. 그러면서 가우디가 살아서 시공한 <탄생의 파사드> 부분을 공사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생각해내고 맞추고 또 응용을 가하거나 변화를 주면서 부분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 부분들이 모여서 최종적으로 거대한 완성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0% 정도의 공정을 직접 시공하는 도중에 가우디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치밀하게 사전 계산된 완성된 설계도면으로 25% 정도까지는 가우디의 의중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계획은 도면조차 남겨진 것이 없었고, 스케치나, 조각상 습작이나, 메모 정도만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가우디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과연 공사 재개가 될 수 있을지 불분명했다. 20% 공정에 수석 책임자는 사망했고, 나머지 공사 설계도는 일절 남겨있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공사라면..... 허물고 새로 지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쯤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한 마디로 기적 그 자체라고 밖에 달리 표현 할 방법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사 현장에서 한 파트를 맡았던 사람이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견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다.
‘우선 가우디를 되살려 냅시다. 그러고 나서 가우디로 하여금 성 가족 성당의 공사를 모두 그의 손으로 직접 끝을 내도록 만듭시다.’라고 말이다. 모여든 사람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속된말로 ‘지금 저게 미쳤나’ 하는 분노의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죽은 가우디를 어떻게 되살려? 네가 조물주냐?’하는 조롱이 빗발쳤다.
그런데 말이다. 어쨌거나 기적처럼....... ‘가우디가 되살아났다.’그 결과로 그때부터 바르셀로나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 죽은 가우디가 되살아나 성당의 어딘가에서 낮이고 밤이고 공사를 계속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
‘죽은 가우디가 어떻게 되살아나?’
‘정말로 그들이 되살려 냈다니까?’
‘가우디가 무슨 나사로야? 예수께서 성당 건축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시어 잠깐 내려오셔서 가우디야 어서 일어나서 다시 일해라 하셨단 말이야?’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만 좋을까?
지금 이 순간의 21세기라면 나는 아주 쉽게 설명 입증할 수가 있겠는데, 이게 100년 전의 일이라면....... 많이 난감해 질 수 밖에........
나는 이 년쯤 전에 현대 미술 이야기를 하면서 (씨물레이션)과 (원본이 없는 복사본)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꺼낸 적이 있었다. 언제고 훗날 조각미술의 역사를 거론하면서 꼭 다시 짚고 넘어가겠노라고 약속한 기억이 있다.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다.
가우디와 현장에서 일했거나, 가우디와 술친구를 했거나, 가우디가 자주가던 음식점 웨이터거나, 이발소 주인이거나, 목욕탕 주인까지..... 가우디와 인연이 있고 친분이 있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성당 건축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지만, 이제 새롭게 ‘가우디 인물탐구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거기에 속기사, 화가, 조각가, 도면 그리는 전문가 등등이 더하여 참석했다.
가우디가 생전에 직접 그린 커다란 창문 스케치에 위쪽으로 그리다 만 조각상이 형체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칠판에 걸어놓고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두 가우디의 입장과 생각과 시선으로 그 스케치에 대해서 살피고 토론을 벌였다.
‘내가 얼핏 가우디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어느 날 머리 깎다가 말고 불쑥 나한테 이렇게 물어보더라고, 집안 부엌 옆에 식탁에서 주로 밥을 먹는데 좀 어두워서 식탁위로 창문을 하나 낸다고 치면, 그 창문 위쪽에 천사 조각상을 놓겠어요? 아니면 꽃 장식을 놓겠어요? 그것도 아니면 그냥 울퉁불퉁 예쁘게 다듬기만 할까요? 갑자기 나온 질문인지라 경황이 없었지만...... 밥투정하는 우리 꼬마들을 붙잡아 놓으려면 귀여운 동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했더니만...... 가우디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만 그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하더라고. 딱 그때 생각이 나는구먼. 저 스케치를 보고 있으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현장에서 여러 조형물을 석고로 본을 뜨던 사람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였나 봐요. 하루는 저에게 개구리랑 도마뱀이랑 달팽이 같은 동물을 아이들이 좋아하게끔 무섭지 않게 만들어 보라고 요청을 하셨드랬어요.’
이런 방식으로 해가 바뀌고 나서 그들은 마침내 가우디를 되살려내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씨물레이션)이었고, 원본이야 죽은 가우디 머릿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원본이 없는 가우디의 성 가족 성당 나머지 설계도면이 복사본)으로 꾸준히 계속 만들어졌던 것이다.
다시 예를 들자면, 만약에 방탄소년단(BTS)이 병역문제로 장기 휴면기에 들어섰거나 지쳐서 한동안 그룹이 해체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간의 그들의 음악성과 활동성을 분석하여 , AI로 하여금 진짜 BTS 보다도 더 진짜같은 BTS를 만들어냈고,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음원과 동영상을 만들어 발표했다고 치자. 그것이 공전의 힛트를 친 것이다. 너무나 완벽하게 음악성과 춤과 보컬을 재현해 낸 것이다. 그럼 그런 성공으로 얻어지는 부와 명예는 누구의 것인가? 흔한 말로 AI BTS의 저작권을 누가 가져야 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미래에...... 지금 우리 앞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80% 정도가 진짜 가우디가 아닌 그를 존경하고 따르고 믿고 함께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씨물레이션의 결과였다면, 그 영광을 고스란히 가우디가 차지하는 것이 옳은것일까? 하긴 가우디에겐 일체의 상속권자가 없으니까, 명목상으로만 그렇게 처리하고나면...... 실소득은 고스란히 성당 운영위원회 몫이 되는 것일까? 아님 바르셀로나의 차지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성당을 애초에 의뢰하신 분의 영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 덧붙여 한 가지만 더........ 가우디가 지목한 의뢰인이 정말로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그 분일까? 아니다. 공사비는 성금으로 충당했지만, 애초에 그런 성당 건축을 의뢰한 사람은 분명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에게는 유족들도 있다. 그렇다면 그 진짜 의뢰인의 후손은 과연 몇 퍼센트 정도의 지분을 주장할 수 있을까? 혹 모르겠다. 벌써 가문 전체에서 논란이 될 지분 모두를 높은곳의 의뢰인(?)에게 모두 기증해 버렸는지도 말이다.
가우디는 25% 이상의 성 가족 성당의 건축에 관해 도면은 물론 거의 남겨놓은 것이 없다. 그런데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은 마지막 중앙부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종탑 준공만을 남겨놓고 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성 가족 성당이 가우디의 유작이자 최고의 작품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다. 가우디가 없는 상황에서 가우디의 성 가족 성당 설계도면이 끊임없이 새롭게 그려졌던 것이다. 이제 더는 그려지지 않고 있겠지만 말이다. 최종적인 완성된 도면에는 과연 가우디의 사인이 있을까 없을까?
‘그것은 오직 기적(奇蹟) 이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어쨌거나..... 그 어렵다는 파밀리아 성당의 국제미사(Misa Internacional de la Catedral de la Familia)를 기어코 우리가 해냈지 뭡니까? 우린 지금 미사에 참석하러 성당을 들어갑니다.'
나는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기독교 기성교단에 많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여행 중에 교회를 만나면 거의 어김없이 잠시라도 들려서 기도의 시간을 갖고는 한다. 유럽 여행이니만큼 대부분이 가톨릭 성당이지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이던지 간에..... 그것이 사찰이 되었건, 이슬람 사원이 되었건, 아니면 힌두교 사원일지라도 늘 그곳의 사원이나 사찰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한없는 존경을 다해 예를 갖춤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해왔다. 모든 종교는 다 그만한 이유와 정당성으로 그런 최선의 예를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다 나은 종교적 우월성이나 정당성은 내가 아는 한 어디에도 없다.
내가 가진 종교가 정당성과 신성함으로 무한한 존경을 받아야만 한다면, 이 세상 그 누구가 어떤 종교를 가졌던 간에, 그 모든 종교들도 당연히 정당성과 신성함을 가졌음을 인정받아야 하고 당연히 무한한 존경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최선의 종교나 최고의 종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해당 종교를 무지로 이끄는 소수가 저지르는 억지와 거짓이 그렇게 만들기를 사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나는 최선의 경건함을 가지고 엄숙한 성 가족 성당의 예배당에 들어왔다.
미사는 로마 가톨릭 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큰 기도이자 거룩한 봉헌행위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가톨릭만의 예배 의식과 절차가 따로 있으며 성수와 성찬 등의 개신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가톨릭만의 예배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것들 또한 엄숙하고 경견한 마음으로 지켜볼 뿐이다.
개신교 신자인 나에게는 그런 것들만도 충분히 낯설 처지인데, 성 가족 성당의 국제 미사는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되니 낯선 것을 넘어 충분히 당혹스러울 만큼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좋은 말씀들일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은 있다.
할.렐,루.야.아.멘.아.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국제미사는 바르셀로나를 여행 중에 주일을 맞이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임이 분명해 보인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은연중에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면....... 주일 국제 미사에 참섯자 중에서 모르긴 몰라도 가톨릭 신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비싼 입장료를 내지 않고 공짜로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절대절호의 기회로 들어 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부터 말이다.
단순한 입장료에 기부금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킨 파밀리아 성당의 입장료는 유럽 전체를 통 털어서도 결코 싼 금액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름 그 비싼 돈을 들여서 가며 성당에서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어디에도 다신 없을 아주아주 독특한 가우디를 대표하는 건축의 백미가 성당의 내부에 펼쳐져 있다고들 하니까, 아주 잠시라도 들어와서 그냥 쓰윽 한번 스쳐지나가듯 둘러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열에 아홉의 사람들이 그런 바램을 가지고 일요일 아침에 이곳을 찾아 온 것이다. 나부터도 그랬으니 말이다.
그런 속사정을 교회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정당하게 비강요성 기부금을 입장권에 포함시켜 판매하는 이듯이 훨씬 짭짤한 마당에 그럴듯한 명분이 되고 있는 국제 미사를 멈출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부러 억한 감정에서 국제 미사를 폄하하려는 불손한 의도가 결코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직접 하신 우려를 우회적으로 내가 돌려 표현했을 뿐이다.
교황께선 파밀리아 성당의 지위를 대성당으로 격상시켜 주셨다.
대도시에 주교좌가 있는 대성당은 하나인데, 바르셀로나의 대성당에 이미 주교좌가 있음에도 이례적으로 같은 구역에 또 하나의 주교좌를 신설해 파밀리아 성당을 대성당으로 지위를 승급시켜 주신 것이다. 로마에만 특별하게 여러 개의 대성당이 있었을 뿐인데, 오늘날에는 바르셀로나처럼 특별히 복수의 주교좌를 임명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대성당에 주교좌가 분명히 있는데, 인근의 몬레알레 대성당에 주교좌를 신설하면서 부득불 구역을 분리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지금은 분명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올바른 이름인 것이다.
성당을 대성당으로 격상시키는 자리에서 교황께서는 성 가족 대성당을 향해 다급하게 일침을 놓으셨다. 아니 유럽 전역의 이름난 성당 모두를 향해서 힐책을 하신 것이다.
‘지금 성당이 박물관의 아류로 전락하고 있다. 이는 아주 심각한 잘못이다. 교회는 언제나 깨어있어서 경건함으로 기도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성스러운 공간이어야만 한다. 그런 성당을 하루 종일 관광객들에게 개방시켜 성당이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정작 해당 구역의 신자들은 지하 예배당에 모이게 만들어 놓고 절차를 위해 대충 기도를 드리는 듯 작금의 성당이 벌이이고 있는 처사들을 심각한 우려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성당 본유의 기능과 책무를 다시금 깨닫고 되찾아야만 한다’며 질책을 하신 것이다.
성당에 왔으니 성당 이야기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성당도 성당 나름이지, 대상이 이미 세계적인 핫 플레이스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Catedral sagrada familia) 이고 보면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야기도 없는 게 사실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7개의 작품을 등재 시킨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가우디의 대표작품인데 다가, 2026년 완공 예정이라는 사실과 일요 미사가 공짜라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이미 SNS나 여행잡지들을 통해 넘쳐나도록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자칫 새롭다고 늘어놓는 이야기가 더 너저분하게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당 건축에 관한 이야기나 세 개의 파사드에 관한 이야기도 나름으로 여행 좀 했다는 사람들이나 혹은 건축 분야에 종사를하거나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세세한 고급 정보까지 사방에 나돌고 있는 현실이 아니던가?
아직 성당을 둘러볼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그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어쩌겠는가? 이쯤 되었으면 내 방식대로 내가 아는 이야기와 생각을 또 털어놓을 수 밖에...... 다분히 거북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나의 생각과 견해가 항상 모두 진실인지는 나로서도 자신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비난을 하기 위하여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진실을 왜곡하려는 의도는 애초부터 일절 가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오늘도 변함없이 또 분명하게 전제를 밝혀야만 하겠다. 보기에 따라 혹은 듣기에 따라 상당히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이다.
가우디는 파밀리아 대성당의 의뢰인이 ‘지극히 높은곳에 앉아계시는 존엄하고 절대적인 분’이라고 말했지만..... 이를 꼭 거짓말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하게 맞는 말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파밀리아 대성당의 건축을 의뢰한 장본인을 실제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은 성 가족 성당 방문은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대신 성 가족 성당이 건축을 시작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종교나 종파들은 각각 자기들만의 다양한 방식으로 성지순례(peregrinación)를 해오고 있다.
‘일생에 한 번 이상은 성지를 방문해 참배함으로써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성스러운 신앙에 대한 고취를 목적으로 아주 긴 여정의 길을 떠나는 여행’을 가리켜 그렇게 부른다. 이들을 가리켜 순례자라 부르고,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순례 여행길이‘산티아고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산티아고 가는 길’의 대상이 되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3대 성지는 (예루살렘 대성전) (로마 바티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 이다. 그런가하면 이슬람교의 3대 성지는 (메카) (예루살렘) (메디나) 이다. 오래전에는 이슬람교 또한 예루살렘을 최고의 성지로 떠받들었으나, 비잔틴 시대를 통해 기독교와 끊임없는 마찰이 생기면서 메카로 절대 성지를 옮겨버렸다. 이슬람의 모든 사원에는 성지를 가리키는 건축적 표식으로 미나렛을 만들어 기도해야 하는 방향을 찾게 되는데, 초기 이슬람 사원의 경우는 미나렛이 예루살렘 방향으로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모두 메카 방향으로 바뀌어 설치되었다.
이런 연유에서 기인하여 초기의 기독교 교회(성당)들도 종탑의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만들었다가, 교황청이 있는 로마 바티칸 방향으로 틀었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정말로 모든 교회가 하나의 통일된 방향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나로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서 보자면 예루살렘이 동쪽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보자면 거의 서쪽 방향이 된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에 띄는 교회의 종탑들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 아닌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금 여기 성지 순례를 떠나려는 사람이 하나 있다.(1602년 당시)
그의 이름은 에르메테 카발레티(Ermete Cavalletti)로 로마에서는 제법 성공한 부유한 법률가였다. 그의 직책이 로마 교황청(바티칸) 재정 법률 자문위원이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의 직장 사무실이 기독교의 절대 성지였다는 말이다. 그는 수시로 교황을 알현하였고 가끔 교황을 비롯한 최고위 성직자 그룹인 추기경단과 만찬 자리를 가졌다. 그런 그에게서 어느 날 암이 발견되었다. 이미 회복 불가능의 상태였다. 교황게서 그를 찾아와 쾌유를 비는 축원 기도를 올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남들은 성지순례를 통해 안정을 얻고 죽을병을 치료받았다는데..... 성지중의 성지인 교황청에서 거의 먹고 자고 했을 정도인 그의 병세는 전혀 나아지지를 않았다. 교황의 독대와 기도의 은총을 여러 번 받았음에도 전혀 효험이 없었다. 카발레티는 더 늦기 전에 성지순례를 떠나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이쯤에서 한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카발레티는 어떤 성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할까? 최고 성지가 그의 직장이고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로마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을 아침저녁으로 뵐 수 있는 교황청(바티칸)을 벗어나서 말이다.
아무튼 카발레티는 성지를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 과연 어디였을까?
여기 또 한명의 순례자가 지금 성지를 찾아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1861년 당시)
그는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서점가로 성공해 큰 부와 명예를 이룩한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 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력에 붙어있는 서점가라는 것은 단순히 그가 책방을 운영했다는 표현보다는 출판업자였다는 해설이 맞겠다. 그는 커다란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책을 출간했고 그것을 자신의 대형 서점을 통해 판매했다. 19세기 중엽으로 치자면 타임이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대형 신문사가 등장하기 직전의 토탈 엔터테인먼트 사업가였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사람의 인생 여정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본 이유는 그의 이름이 바로 우리가 흔히 부르는 식으로 하자면 요셉(Josep) 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음에 붙는 마리아는 어머니의 성씨이고 보카베야는 아버지의 성씨에서 따온 것이다.
스페인 사람인 보카베야는 성지 중에 하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이미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랬음에도 그는 정신적 종교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치유하기 위하여 로마 여행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가 인쇄해서 출간하는 책들을 통해서 이미 바티칸 대성당의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가치와 위용과 소장되어있는 훌륭한 미술품들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수도없이 바티칸을 드나들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영혼이 그곳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진정한 예술혼의 숨소리와 향기를 그곳에서 맘껏 누리고 취하도록 즐겼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맞짱싸움을 구경도 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공허함과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떠나 되돌아오던 발걸음에서 느꼈던 그 막연함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보카베야는 우연히 로마의 산타고스티노( Sant'Agostino ) 성당의 카발레티 예배당( Cavalletti Chapel )에 걸려있는 카라바조 (Caravaggio )의 그림<로레토의 성모(Madonna di Loreto)>를 보게 되었다. 사실 보카베야는 카라바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카라바조의 미술 세계가 그리 탐탁하지도 않았다. 다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강렬한 어떤 느낌이 그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인 카발레티 채플에서 확 풍겨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 그림을 의뢰한 사람이 에르메테 카발레티였고, 교황청에 근무하던 법률가였으며, 암을 선고받고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순례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당시 그도 나와 똑같은 의문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지 중에 성지인 바티칸에서 교황과 함께 생활하던 카발레티가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면서 찾아가고자 했던 성지는 과연 어디일까 하고 말이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보다도 좋거나, 아니면 최소한 바티칸보다 못하지는 않은 그런 성지(聖地)가 어딘가 반듯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 가정하에서 따져본다면 그 성지가 결코 예루살렘이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아니라는 결론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보카베야는 카발레티의 마지막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카발레티가 마지막으로 여행 한 곳은 바로 로레토(Loreto)였다. 로마에서 똑바로 동쪽 방향을 향해 달려가면 아드리아해의 코발트 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주 작은 도시가 나타난다. 지중해 연안이나 일부 동유럽 지역에서 성지순례를 떠나 로마나 산티아고로 향하다 보면 거치게 되는 순례자의 길 연장선상에 놓인 작고 예쁜 소도시가 바로 로레타였다.
로레타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을 정도지만, 엄연히 그곳은 주교좌를 가지고 있는 대성당(Basilica della Santa Casa)을 가진 중요한 성지였던 것이다. 대성당 안에는 성모 마리아와 연관된 ‘성스러운 집(Basilica of the Holy House)’이 들어서 있다.
보카베야는 로레타의 ‘성스러운 마리아의 집’에 대해서 전혀 알고있지 못했다. 다만, 성공한 똑똑한 법률가 카발레티가 마지막에 택했을 정도의 성지였다면, 반듯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성지순례의 결과가 이렇게 카발레티 채플과 카라바조의 그림으로 남았을 정도로 말이다.
보카베야는 카발레티의 발자취를 따라 로레타로 향했다.
보카베야는 로레타에 체류하는 동안에 하나의 아주 원대한 꿈을 잉태하게 되었다.
‘성당을 하나 지어야겠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런 성당을 말이야. 성당에는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성 가족 성당)이 될 거야. 요셉이 반듯하게 살아 돌아와 한 가정의 가장으로 행복한 가족을 꾸려나가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교회를 말이야.’
보카베야의 그런 꿈이 담긴 것이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그러니까 ‘성 가족 성당(Catedral sagrada familia barcelona)이 되는 것이다. 그런 보카베야의 꿈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요셉(Josep)이었다. 왜 그는 유독 요셉을 강조했던 것일까?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Josep Maria Bocabella)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건축을 최초 의뢰한 장본인이다.
성지순레에서 돌아 온 보카베야는 성 가족 성당의 건축 추진을 위해 모임(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면서 성금 모금에 나섰고 건축가를 찾았다. 이렇게 해서 선출된 최초 성 가족 성당의 최고 건축 책임자가 당시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을 대표하던 건축가 프란시스코 델 빌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였다. 그는 가우디를 대학에서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빌라르는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을 계획했다. 흡사 로레타의 대성당(Basilica della Santa Casa)을 빼어 닮은 이탈리아에서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의 건물이었다. 이 부분에서 여러 사람과 마찰이 생겨 떨어져 나가고, 그 과정에서 제자였던 가우디가 성당 건축에 참여하게 되었다. 빌라르의 네오 고딕양식 성당 건축은 불과 1년 정도만 진행되고 말았다. 건축 의뢰인인 보카베야의 생각과도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일 년이라는 기간동안 건축 의뢰인과 건축가는 수도 없이 다툼을 벌였고, 가우디는 그 다툼의 현장에 늘 있었기에 그들의 논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문제의 핵심이 어느정도 였기에 결국 건축 총책임자를 해고하기에 이르렀을까? 불과 일 년을 맡기면서 이곳이 앞으로 140년 이상이나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모르겠다.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럼 그 다음의 진행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어디에서도...... 거기에 대한 속내막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지만....... 내가 짐작하건데는....... 바로 요셉(Josep)이 문제였다. 요셉에 대한 존재감의 차이가 결국 총책임자의 해고를 불러왔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거기에는 적지않게 로마 가톨릭의 교리까지는 아니겠지만........ 분명한 실수가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도대체 요섭이 뭘?
요셉이 어쨌다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의 요셉 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래도 초대교회 역사의 좀 거북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코 성스럽지 못한 이 거북스러운 이야기들을 하자면 그 내용이 자못 방대할뿐더러 수없이 많은 인물과 사건들을 불러와야만 하기에..... 이번 이야기에서는 뚜렷한 기준에 의하지 않고 선뜻 먼저 떠오르는 몇몇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간추린 이야기들로만 추려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약간만 다루어보기로 하겠다.(지극히 주관적인 필자의 의견임을 전제로 하면서 말이다)
가장 먼저는 초대교회(初代敎會)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초대교회(Early Church)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A.D.30년에서 4세기까지 존재하고 활동했던 교회를 일컫는 말’이라는 해설이 따라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구도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고 공생의 길을 시작하면서부터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역사를 거쳐서, 극심했던 로마의 탄압을 이겨내고 AD 312년에 이르러 로마에 의해서 정식 종교로 기독교가 공인받기까지의 약 300년의 시간을 초대교회라고 한다. 사전에 덧붙여있기를 ‘로마로부터 무수한 박해를 입었지만 오히려 진리를 지키며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던 교회역사에 있어서 참 신앙의 귀한 모범을 보여주던 시기’라는 부연 설명이 뒤따른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가르침을 몸소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하나님을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그런 믿음의 생활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하고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이 곧 ‘교회’라고 가르치셨다.
이 300년의 시간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벗하며 더불어 먹고 마시고 잠자던 모습이랑, 그분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나 300년 동안 거의 변한 것이 없었다. 늘 탄압을 받았고 숨어 지내며 신앙을 유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312년 로마제국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는 순간부터 약 100년 동안 기독교는 초대교회 30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변화했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2 사도의 전승에 따랐던 초대교회와는 다르게, 로마제국의 심장부를 거점으로 한 로마기독교 최고지도자들 중심의 새로운(전혀 다른) 교회로 변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로마가톨릭이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었고 12사도에게 전승되었던 기독교적 정통성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사도 베드로를 로마가톨릭의 시작으로 삼았고, ‘내가 너의 반석 위에 교회를 지으리라’(신약 성경 구절은 분명하나, 그 진위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분명하게 의견이 갈리고 있는 문제)는 명분을 내세워 교황청(바티칸)을 지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목한 후계자가 베드로이고, 그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았으며, 그것이 현재의 교황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 기독교적 정통성의 핵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이며 하나님의 대리인’이므로 절대 신성한 존재이며, 무오류성에 입각해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엄한 신분의 존재라 앞장세운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언젠가 타임머신이 발견되면 그 진위가 모두 드러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적인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있었다. 비록 12 사도를 배출하진 못했으나 그들은 예수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며 부족을 이루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셨고, 로마제국은 예루살렘 성지를 완전 파괴시켜 초토화로 만들어 버렸다.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처형하였다. 12 사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기독교는 지하(카타콤)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이들 믿음의 초대교회 부족도 예루살렘을 벗어나 도망쳤다. 로마의 탄압을 피해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의 깊고 깊은 골짜기로 도망쳤고, 숨어서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천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동방의 잔혹한 저승사자인 몽고가 유럽 정벌을 감행하면서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들이닥쳤다. 몽고의 무자비한 침략을 피하려 도망치던 사람들이 1천년 만에 처음으로 초대교회 사람들의 은둔처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1천년이 지난 세상 밖의 소식을 접했고, 세상(유럽)이 기독교 세상(로마가톨릭의 세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마의 박해도 사라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런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기나긴 몽골와 유럽의 전쟁이 끝나고 안정기를 되찾자, 아나톨리아 평원의 초대교회부족은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하던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기독교 세상으로 나가기로 했다. 기독교 신앙의 자유만 허락된다면 그들은 못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교향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은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1천년이나 숨어 지냈던 아나톨리아 평원은 바로 이슬람 세력권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기독교 지역으로 유랑을 떠나야만 했다. 초대교회 부족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통해서 기독교 세상으로 이동하고자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그들을 카타리파(Cathari)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청정파’라는 의미이며,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순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며 자신들이 오랜 유목생활을 위주로 살아 온 만큼, 땅 개간해서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기르며 살 수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을 찾다가 마침내 프랑스 남부 세테(sete)에 도착했다. 내륙으로 이동해 알바 지역에 부족마을을 일구고 정착생활에 들어갔다. 이 지역은 봉건 영주인 툴루즈 백작의 지배지역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영주는 카타리파의 정착을 허락했다. 카타리파는 무력을 철저히 배제하였으며, 공동생산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코이노니아 공동체 생활’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주변사람들과 어울리고 더불어 살고자 노력했다. 그들 신앙에는 ‘전도’나 ‘종교적 강요’ 같은 것은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하지만 평소 성실하고 나누고 남을 돕기에 주저하지 않는 카타리파의 독특한 신앙생활 모습이 모범이 되어 사방으로 마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알바지역 대부분이 카타리파 방식의 기독교 신앙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일부가 이탈리아 중부 오르비에토(교황의 별장이 있는 소도시)까지 옮겨가 카타리파식 공동체를 실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자 로마가톨릭의 교황청이 이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로마 교황청의 세금징수원이 들이닥쳐 이들에게 ‘종교세’를 강제로 징수하려는 사태가 벌어졌다. 카타리파는 거세게 저항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함께했던 초대교회 어디에도 종교세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유대 성전의 부패와 비리에 대해 분노하시면서 ‘성전을 허물라’고 명령까지 하셨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를 포함해 열두 사도는 물론 기독교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한 존재였으며, 계급이나 서열도 없었으며, 기독교를 하나의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모두가 봉사였고 헌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세를 걷어서 교회와 교황이 귀족처럼 왕처럼 행세하면 사는 세상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수는 낮은 곳에서 쫓겨 다니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비천한 사람들의 이웃이고 형제이며 가족이었다면, 지금의 교회와 교황은 왕처럼 행세하고 로마제국의 황제 같은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카타리파는 세상을 향해 외쳤다.
‘초대교회에는 어떤 계급도 어떤 세금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교황과 교회가 나서서 종교세를 거두고 헌금을 강요하고 면죄부를 파는 것은 모두 사악한 위선과 거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똑같이 사랑하는 아들딸로 부르시며 구원을 약속하셨음이지, 교황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후계자를 세워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고 면죄부를 팔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교황청이 발칵 뒤집혔다.
교황도 교회도 모두 가짜라는 말이 아닌가? 바야흐로 카타리파의 저항은 로마가톨릭의 존폐가 걸린 중대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교황은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프랑스 군대를 중심으로 유럽의 최정예 7만 명의 알비 삽자군 원정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쳐들어갔다. 알비 지역을 철저하게 에워싸고 약 2만 오천 명의 양민을 무차별 집단 학살했다.(역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대략학살) 실질적인 카타리파 인원은 수 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카타리파와 교류했고 카타리파에 우호적이었으며, 카타리파 교리나 신앙생활을 목격한 사람들까지 몰살시켰다. 일반인은 물론, 카타리파에 우호적인 로마가톨릭 신자에서 유대인은 물론 정교회 교인까지 모조리 몰살 시켰다. 교황은 이 세상에 카타리파라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카타리파가 지적한 교회(교황)의 부당성이 치명적이었던 때문이다.
교황은 개나 고양이 한 마리까지도 모두 몰살시킨 알비 언덕에 군대 주둔지를 짓고, 그 후로 20년 동안이나 십자군 원정대를 주둔시키며 카타리파 잔재를 추적했다. 교황(교회)가 카타리파를 얼마나 두려워했고 씨를 말리려 했는지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도대체 무엇이 왜 이단인가?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죄목은 이단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마가톨릭)은 이단이었다. 정교회와 로마가톨릭은 서로를 이단이라 지목하며 파문시켜 버렸다. 그러더니 어느날 슬그머니 서로를 복권시켜 주었고, 여전히 세속의 왕 행세를 나누어 가졌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로마가톨릭에 의해서 이단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개신교는 지금 수많은 소수 기독교 종파들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있다.
과연 무엇이 이단인가?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판단하는가? 그 이단을 누가 어떤 기준과 자격으로 정통 종교에 합류시키는가? 현재의 이단은 어떻게 하면 정통 기독교 종파가 될 수 있는가? 누가 나서서 답해보라. 이제 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이땅에 내려오신다해도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난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의 종파를 정통으로 결정내리는 순간, 다른 모든 종파들이 합심하여 결정을 내린 신(神)을 진짜가 아닌 사이비로 규정해 버리는 세상이 도래해 버리고 만 것이다.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신은 언제 누구라도 사이비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단 문제는 신(神)도 풀 수가 없다. 그럼 누가 풀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답은 하나다. 이단 문제는 AI(인공지능)으로 풀 수가 있다.
AI에게 (참 기독교)라는 명제를 주고, 거기에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 초대교회가 후세에 남겨준 종교적 순수성과 참 신앙인의 자세 등을 입력한다. 세상의 모든 정통 기독교라고 자부하는 종파들의 대의명분과 합리성을 공인 받을 수 있는 교리 등을 입력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양심속에 존재하는 올바른 기독교인의 태도, 신앙생활, 수행해야 할 의무조항을 비롯한 '기독교 적이다' '기독교라면 이래야 한다' 등등의 조항들을 세세하게 인공지능에 입력 완료 시킨다. 그리고 나서...... 심사 대상 란에 (로마가톨릭)이라 적고 그동안 벌어졌던 가톨릭의 역사를 파일로 작성해 올린다. 그리고 나서 '심사 요청' 버튼을 클릭한다. 정통 기독교인지 이단인지를 가름하는 판단이 아주 간단 명료하고 정확하게 금방 결정된다. (그리스 정교회)를 적고 정교회의 역사를 파일로 올리면 금방 결론이 난다. (개신교 감리회 합동파)의 이름을 적고 그간의 행적을 올리면 또한 금방 판단이 내려진다. (여호와의 증인)도 (신천지)도 마찬가지다. 이 결정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처음 인공지능에 '정통 기독교교 기준'란에 제시한 현재 기독교 기득권자들의 종교적 개념이나 신념이 너저분해서이거나, 그동안의 행적이나 저지른 사건들이 너무나 부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의 기독교 종파가 오랜 세월동안 가면을 쓰고 부정과 부패와 타락을 일삼았기에 올바른 기준을 솔직하게 적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神)의 눈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인공지능)의 예리하고 확실한 판단은 속일 수가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세 명의 야고보(라틴표기 lacobus, 영어 표기 james)가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여기에서의 야고보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야곱과도 같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야고보 = 야곱 = 제임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거북한 문제꺼리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문제를 만든 장본인은 교황(로마가톨릭)이 되겠다.
신약성서에는 세 명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예수의 형제 의인 야고보’다.
그중에서 문제의 핵심은 바로 마태복음(13:55) 마가복음(6:3)에 등장하는 신약성경의 외경인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하겠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야고보가 유대인 폭동(AD 62년)에 순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런 와중에 꼭 강조하고픈 아주 중요한 내용이 하나 있다면, 예루살렘과 바티칸에 이어 기독교 3대 성지로 불리는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에 모셔진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인 의인 야고보가 아니라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라는 사실이다. 같은 열두 사도인 것은 맞으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역할과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모셔진 스페인의 수호성인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다. 그러면서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인 ‘의인 야고보’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비교적 침묵으로 일관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후에 예루살렘교회(초대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초대 주교(갈라디아서 1:19)였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승에 내려오셔서 구도자의 길을 걸으시면서 본인이 손수 만드신 기독교 공동체였으며, 기독교 역사의 시작이 되는 뿌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정통성은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되었어야 하며, 당연히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초대 교황이 되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로마제국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교회 로마 지부에 파견되어 있던 성직자들이 제국과의 협상테이블에 먼저 앉게 되면서 모든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총대교구. 안디옥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등의 제국의 억압 속에서 기독교를 이끌어 온 실질적 지도부를 모두 배제시키고 로마제국과 기독교 세력의 협상테이블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정통성까지 훼손시키는 과정에서 베드로를 꺼내들었고, ‘너의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달랑 한 문장을 앞세워 로마교구(바티칸)을 기독교 중심에 옮겨놓았고 교황직을 만들어 스스로 ‘신의 대리자’를 자청하면서 암흑의 1천 년 역사를 장엄하게 써내려간 것이다.
베드로를 추켜세운 로마의 종교지도자들이 장차 야고보를 어떻게 대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베드로를 번듯하게 받들어 세워야 자신들의 앞날이 찬란하게 보장 될 터이니 말이다.
로마의 종교지도자들은 기독교 역사를 짜깁기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처지와 입맛에 맞게끔 말이다. 구전으로만 전해 오거나 사방에 무수하게 흩어져 있던 성경의 내용을 가져다가 추리기 시작했다. 남의 것을 베껴다 끼워 넣기도 했고, 심지어는 필요하면 억지로 꾸며서 새로 써넣기도 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오자 ‘성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거룩한 것이다’라고 무오류성에 입각한 신성불가침의 갑옷까지 입혀 버렸다. 그런 작업을 귀신같이 해치운 토마스 아퀴나스는 결과로 성인에 추대되었다.
‘성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고스란히 기록한 원본이 아니다. 교황청이 각색한 3류 시나리오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나는 절대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모든 것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허구다’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초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이 필요에 의해서 새로 각색하고 새로 꾸며 넣은 이야기들이 가짜라는 말이다. 이 또한 신(神)께서는 아실 것이다. 심판의 날에 나와 초대 교황청의 성직자들과 함께 신의 재판정에 출두하라면 나는 당당하게 나설 수 있다. 영원한 불의 심판을 각오하고서라도 말이다. 나는 미련하고 아둔한 일개 필부일 뿐이겠지만, 그들은 악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꾸며낸 허구와 해악으로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기독교 역사에서 밀려나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이들을 왜곡시켜 몰아 낸 이유는 오로지‘초대교황 베드로’와 ‘성모 마리아’에게 기독교 역사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더욱 성스럽고 거룩한 반열에 올려놓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진실이고..... 이제 짧게 그 설명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그런 모든 시작을 나는 11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성모 마리아 경배운동’에서 부터였다고 알고 이해하고 있다. 온갖 죄악과 모순으로 가득 찬 십자군 전쟁(crusades)이 발단이었던 것이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는 ‘이교도들이 점령한 성지 예루살렘 회복’을 내세우며 유럽 전역의 군사력을 모집했다. 그러나 유럽 전역의 봉건영주(왕)들은 이것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음흉한 교황의 꼼수에서 나온 음모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느 누구도 그 모집에 선 듯 응하지 않았다. 이미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 사건을 통해 교권(교황)과 황권(봉건영주)의 대립과 마찰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사사건건 교회의 권위에 저항을 넘어 도전을 해오는 세속의 절대 권력인 황권(봉건영주들의 군사력)을 떨어트리거나 제거할 야심을 늘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던 것이다.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그럴싸하고 거룩한 명분을 내세우면 모든 봉건영주들이 휘하의 군사력을 모두 모아서 멀고 먼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몰살을 당해 죽어버리거나 전쟁에서 패배로 치명적인 상처투성이로 겨우 돌아오게 된다면, 원정기간 동안의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유럽의 드넓은 영토와 패잔병으로 겨우 목숨만 붙어 돌아온 봉건영주들을 대상으로 우대한 교황의 세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꿈도 야무진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원정대의 피와 땀으로 얻어지는 영토와 약탈물이 모두 교황의 것이라고 사전에 계약서에 써 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유럽 전체를 통 털어서 단 한 명의 봉건영주도 십자군 1차원정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황의 꼼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속셈이 들통 난 교황은 방방 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미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거룩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데도 아무도 순순히 선뜻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화딱지가 날대로 난 교황은 봉건영주들을 싸그리 로마가톨릭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 내리면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봉건영주들에게 허락하신 지위와 영토를 모두 회수하기로 하셨으니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봉건영주들을 거역하라고 선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이면 세속의 왕들과 교황의 군대 간에 한바탕 전쟁이라고 불사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사적 충돌이면 아무리 하나님의 대리인이라 해도 교황측이 불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미 얼마 전에 프랑크 왕의 부하인 장군이 로마에 쳐들어와서 대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교황을 칼을 빼들고 제단까지 올라가서...... 교황의 뺨을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머리채를 끌고 예배당 밖으로 끌어내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었던 것이다. 교황의 근위대도, 마사에 참석한 추기경이나 주교들이나 수많은 신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어떤 하나님의 제지나 징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교황은 교회 밖으로 강제로 끌려 나갔고 교황청(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시칠리아로 쫓겨가서 한 달 뒤에 홧병으로 선종했다. 교황을 쫓아낸 황제가 새로운 교황을 뽑았고(콘클라베 없이), 교황청을 아예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가게 만들었다. 세속의 황제 명령으로 말이다. 이후로 교권(교황)은 늘 황권(봉건영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봉건영주들의 막강한 군사력이 늘 두려웠던 것이다. 봉건영주들의 군사력을 빼앗거나 갈기갈기 찢어서 지리멸렬하게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땐 제대로 교황의 세상이 될 터인데 말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교황은 봉건영주들과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슬달래고 타협을 해야만 이제까지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서로에게 유익한 선에서 윈윈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교황은 마지막 히든 카드로 십자군 원정대에 참가하면 인간이 탄생하면서부터 지게 된 원죄를 사함 받게 되는 (면죄부)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거룩한 사기질(?)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1차 십자군 원정대엔 끝내 단 한 명의 봉건영주도 참여하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무도 교황을 밎지 않았던 것이다. 십자군의 영웅담에 곧잘 등장하는 (보두앵) (보에몽) (고두푸루아) (레몽) 등은 중세의 봉건영주 신분이 아니라, 봉건 영주를 모시던 기사들이었다. 봉건영주들이 한 명도 나서지 않자 결국 교황은 이들 기사 집단을 원정대의 지휘자들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교황의 생각과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이들 기사단이 이끄는 원정대가 얼떨결에 그만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만 것이다. 교황의 바램은 이들 원정대가 쫄딱 망하거나 모두 죽어 나자빠지기를 바랬음에도 말이다. 어쨌거나 이겨서 빼앗았다니 노획물과 성지 예루살렘을 모두 교황의 몫이 되었어야만 하는데, 이들 원정대 지휘부의 기사단들도 교황의 속셈과 노림을 현지에서 그만 눈치 채고 말았던 것이다. 분노에 사무친 기사단은 교황의 속셈에 태클을 걸기로 담합했다. 빼앗은 성지에 자신들의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리더였던 보두앵을 왕으로 옹립해 버린 것이다. 모든 노획물과 빼앗은 영토가 예루살렘 왕국 차지가 되었다. 지휘부였던 기사들은 스스로 지위를 높여 봉건영주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교황은 한 마디로 ‘닭 쫒던 DOG’가 되고 말았다.
분노한 교황은 1차 십자군 원정대 모두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고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는 이교도들이 차지한 거룩한 성지를 빼앗아 지배하고 있는 1차 십자군 원정대를 정벌하겠다고 서둘러 2차 십자군 원정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젠 이교도가 아닌 기독교가 차지한 예루살렘을 또 다시 빼앗기 위하여 새로운 군대를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태가 하나님 보시기엔 그렇게 썩 내키시지 않는 코미디 같았는지..... 하나님으로 부터는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저주를 쏟아내시는 교황님의 거룩한 악다구만이 교회를 시끄럽게 했을 뿐이다.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몹쓸 1차 원정대는 그 후로 1백년 가까이를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왕좌가 보두앵 4세에 이르기까지 아주 행복하게들 살았다고 전해진다. 진노하신 교황 성하의 새로운 십자군대의 정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슬람의 새로운 지도자 살라딘에 의해서 예루살렘을 빼앗겨 멸망할 때까지 말이다. 이후로 8차 원정대까지 끝내 거룩한 교황님의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만다. 혹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거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서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원하신다.(Deus vult)’
온 세상을 참혹한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교황 우루바노 2세가 전면에 대대적으로 내세운 명분이 바로 (God will [it]) 이었다. 물론 이것은 후대 교황들에 의해서 스스로 위대한 사기극이었으며 거대한 죄악이었다고 밝혀졌고 사죄가 이어졌다.
‘신(神)은 무한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영원히 침묵을 고수 할망정 전쟁을 부추기거나 죄악을 사주하지는 않는 분이시다’ 라는 것이 기독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가치관이자 양심이라고 하겠다. 중세 천년동안 벌어진 죄악의 시대는 선한 양의 탈을 쓴 사악한 교황들과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으로 도용하여 벌인 온갖 추잡한 보이스 피싱 사기극이라고 해야겠다. 그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Expeditio Sacra)이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 우루바노 2세의 속셈은 사사건건 교황의 권위에 맞서거나 도전해 오는 유럽의 봉건영주들을 ‘성지탈환’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아래 멀고 먼 소아시아지역으로 내몰아 그들이 전쟁을 통해 모조리 죽어나자빠지거나 쫄딱 망해서 군사력을 모두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돌아오게 만들면 온 세상은 고스란히 교회의 차지가 되고 감히 봉건영주들이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속내였다. 거기다가 전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영토와 물자까지 모두 차지한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교황의 이런 꼼수를 눈치 챈 유럽의 봉건영주 어느 누구도 1차 원정대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을 통해 출세를 해보겠다는 봉건영주들의 부하인 기사들이 대신 원정대를 통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은 누가 로마 교황청에 들어앉아 강요만 일삼는 교황이 틀림이 없다.
반면 소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세계는 수많은 부족 간의 마찰과 종파(시아파. 수니파)의 갈등으로 지리멸렬한 상태로 특별한 지배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미처 교황과 유럽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최고 정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실상부하게 유럽 기독교 연합군대인 십자군 1차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면서 그 과정에서 뿔뿔히 흩어져 있던 이슬람 부족들을 하나하나씩 격파해 나갔고, 예상과 전혀 다르게...... 비교적 아주 쉽게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황의 예상과 바램이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성지를 탈환했으니 주변의 영토와 전쟁 승리로 얻어지는 약탈물자와 붙잡은 노예 등으로 만족을 해야 하겠는데...... 이런 교황의 속셈을 눈치 챈 십자군 지휘부(기사)가 전쟁 노획물과 영토를 차지하고는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지역을 차지하고는 저마나 왕국을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앉아 버렸다. 에데사 백국을 만들어 보두앵 1세가 차지해 버렸고, 레몽 백작이 트리폴리를 자신의 나라로 만들어 차지해 버렸다. 그러자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만들어 차지했고, 고드푸루아의 부용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는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사들이 저마다 나라를 하나씩 만들어 가지고는 스스로 봉건영주로 신분상승을 한 것이다. 교황의 야무진 꿈과 야망이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만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묘한 시기에 사건이 하나 벌이진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얼떨결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지 일주일 후에 교황 우루바노 2세가 사망한 것이다. 성지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그는 전쟁 승리의 소식도 접하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 엄청난 세기적 전쟁을 벌여만 놓고 말이다.
르네상스의 한 인문학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백년도 못 사는 것들이,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나대기만 한다.’고 말이다.
새로운 교황으로 파스칼 2세가 즉위하였는데, 이 분의 야심과 어긋난 심성 또한 전임 교황을 뛰어넘으면 넘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럼 결과는?????
교황은 십자군 원정대 전원의 호적을 기독교에서 파내 버렸다. 모조리 파문을 시킨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은 영원한 죄인의 몸이 되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죄 사함을 내렸고 구원을 약속받은 몸이었지만, 로마가톨릭이 탄생하는 순간에 구원은 사라졌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바탕으로 생겨난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원죄에서 시작하여 다시 인간을 탄압하는 구약시대의 종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성지를 탈환하는 위대한 전쟁에 참여하면 모든 원죄를 하나님께서 모두 사하여 주시기로 약속했다’고 군대를 모집해 놓고는, 성지를 탈환해 기독교 세계로 만들었음에도 파문을 시켜 다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원죄와 구원이 교황의 마음먹기에 따라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교황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조석으로 계집년 심뽀 부리듯이 툭하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기사에게 뺨 맞고 머리채로 예배당에서 질질 끌려 나간 것이 아니겠는가?
모조리 뒈져버렸어도 시원찮을 1차 십자군 원정대가 교황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영토와 재물을 몽땅 차지하고 들어앉아있었으니..... 파문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날뛰고는...... ‘십자군을 정벌하기 위하여 다시 새로운 십자군을 보내야 한다.’는 미친 개소리를 한 것이다. 물론 그 개소리 뒤에도 당연하게‘하나님께서 전쟁을 원하신다.(Deus vult)’고 보이스 피싱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자신들이 휘하에 데리고 있던 기사들이 전쟁에 나가 승리하고는 나라 하나씩을 만들어 차지하고는 스스로들 봉건영주 지위에 올랐다. 제 꾀에 넘어간 교황의 쪽팔림(?)을 바라보면서 유럽의 봉건영주들은 축배의 잔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음에도 교황이 다시 그 새롭게 봉건영주가 된 기사들을 몰살시키기 위하여 진짜 영주들에게 군대를 모아서 전쟁에 차여하라고 등을 떠민다면....... 순순히 따라나설 봉건영주가 있을까? 세상은 부하의 출세에 눈이 먼 기사자격도 없는 영주라고 놀려댈 것이다. 거기에다 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활한 교황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도 나서는 봉건영주가 없었다.
교황 파스칼 2세도 길길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또다시 파문이라는 카드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불쌍한 것은 그냥 전쟁터에 끌려간 평범한 군인들뿐이 아니겠는가?
교황이 교회에서 아무리 파문을 시켜도 영주와 가사와 상인들은 눈도 꿈뻑하지 않았다. 땅이며 권력이며 돈을 잔뜩 쌓아놓았는데 그깟 내세의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똥구덩이에 나뒹굴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났다고 했는데, 조석으로 맴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교황의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장 여기가 가나안인데 말이다.
하지만 돈도 빽도 없어서 오로지 면죄부 하나만 보고 이역만리 전쟁터까지 끌려나오다시피 한 군인들의 사정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덜끼리의 싸움(교황과 봉건영주의 대립)으로 축하면 파문이니, 어쩌다 사면 복권이니, 다시 또 파문을 수없이 반복하면..... 그야말로 죽었다 살아나고 다시 죽
는 것은 돈도 빽도 없는 부류들뿐이 아니겠는가?
이때부터 십자군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니체까지 나서서 이런 십자군을 ‘손에 십자가를 들고 거룩한 옷을 입은 해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성지탈환 전쟁에 나서는 군대에게 ‘교황의 면죄부 약속’이라는 라이센스가 하나씩 주어졌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는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거기다가 진짜라고 해도 거기엔 유효기간이 필요하다면서도 어디에도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기는 성스럽기 그지없이 화려한데, 속 알맹이가 영 거시기해진 것이다. 반품 내지는 교환의 규정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거 교황이 사기 친 거 아니야?’ 하고 싶었지만 라이센스에 대문짝만하게 선명하게 찍혀있는 것이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문구였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런 상황을 후세 사람들은 ‘대략난감’이라고 한다.
한 십자군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면죄부를 살 돈을 마련해 보자고. 집에 돌아 간 군인에게도 교황께서 주교를 통해 파문 통보를 보내신다니....... 어쩌겠는가? 이젠 지휘부 눈치나 교회 눈치 보지 말고 돈 되는 것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와 높은 양반들이 그동안 하는 짓을 우리가 다 지켜보지 않았던가? 이젠 우리 몫을 스스로 챙기자고. 영주의 몫이나 교회의 몫이라도 훔쳐내야 하지 않겠어? 고향에 가서 마을 주교에게 돈을 주고서라도 면죄부를 사야할 것 아니야? 이대로 파문당하면 억울하지 않겠어? 이제부턴 우리도 훔치고 빼앗고 약탈하기를 주저하면 안 될 것이야.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와 면죄부 살 돈을 여기에서 만들어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 전쟁 통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 가서 면죄부 살 돈을 구할 수 있겠어. 이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자고. 이교도든지 기독교도든지 성이나 도시가 나타나면 기를 쓰고 먼저 넘어가 점령해 버리자고. 교황이나 영주나 기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모아 면죄를 받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야. 알겠나? 면죄부를 준다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면죄부를 다시 빼앗아 간다면....... 우리도 저들의 돈을 훔쳐서 고향에 돌아가 면죄부를 다시 사면되는 거야. 안 그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과 재물을 모으게. 그리고 은밀하게 고향으로 보내거나 안전한 장소에 모아 보관시키는 거야. 그게 이제부터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되는 것이야. 알겠지?’
이런 파문은 소리 없이 퍼져나갔고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성스러운 전쟁이 점차 양상이 바뀌어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힐들 정도의 약탈전쟁으로 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시작된 약탈전쟁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비로소 이슬람 세계가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성지와 순례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의 전쟁이 아니라 이슬람의 씨를 말리겠다는 전쟁이 아닌가? 더는 같은 하늘 아래 기독교와 더불어 공존할 수가 없다.’는 분노와 명분을 온 이슬람 세계에 심어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슬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나타나 이슬람 부족들을 설득하여 군대를 모으고 기독교와의 전면전을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이라는 걸출한 술탄이 나타나 이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면서 비로소 세상을 기독교 전선과 이슬람 전전의 대충돌 상황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때부터를 진정한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면전’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현명한 군주였던 누루 앗 딘은 이 전쟁의 판이 더없이 커질 것이며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고, 이를 위해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풍부한 물자 확보가 꼭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자신 위하의 최고 용맹한 장군 형제를 파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연이어 사고가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누우 앗 딘 왕조가 멸망하고, 용맹한 장군의 아들이 새로운 이집트 왕조를 탄생시키고 모든 이슬람을 하나로 통일 시키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슬람 불세출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다.
살라딘은 기어코 예루살렘 왕국을 몰락시키고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해 버린다. 분노한 교황은 이어서 또 이어서 새로운 십자군 원정대를 거듭 파견하지만, 모든 전쟁에서 기독교는 이슬람을 이기지 못하고 전쟁은 끝난다. 여덟 차례의 전쟁에서 단 한 차례, 얼떨결에 무주공산을 차지한 1차 십자군만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크레 공방전 이후로 십자군은 거칠어 졌고 약탈을 시작했다. 아울러 그러면 그럴수록 이슬람의 반격과 사후 처리도 잔인해져 갔다. 성스러운 전쟁은 애초부터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참혹한 살육전만이 거듭 반복되었을 뿐이다.(영화 <킹덤 오브 해븐>을 보면 심자군 전쟁의 내막과 참상을 충분하게 엿볼 수 있다)
열악할 대로 열악해진 보급으로 인해 아침이라고 먹은 것이 거의 없는 상태로 다시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무기를 들고 종군 대주교의 막사 앞에 십자군이 모여들었다. 누적된 극심한 피로와 갖은 부상으로 인해서 하나같이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랬음에도 십자군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아침기도회를 거를 수가 없는 것이다.
‘교황 성하께서 전쟁의 승리를 독촉하는 서신을 또 보내오셨습니다. 야만인과도 같은 변방의 이교도 정벌에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고 화를 내시고 계십니다. 이교도들의 피로 대지를 적셔서라도 하루빨리 다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아 모든 순례자들이 안심하고 성지순례를 오갈 수 있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다시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스러운 전쟁을 주관하시고 계심에도 그 이행이 이리도 더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한 여러분의 충성심이 부족함 때문이라도 비통해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수고와 헌신은 고스란히 모두 기록되었다가 에덴동산에서 반듯이 넘치도록 충분하게 보상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담대한 마음과 빛나는 충성심으로 오늘도 모든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고 돌아오시라고 교황 성하께서 축원을 보내오셨습니다. 이 은혜에 반듯이 승리로써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기도를 모두 마쳤지만 하나같이 모두의 풀 죽은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아침이면 똑같이 이런 축복의 기도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주변은 온통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와 공포가 넘쳐나고 있을 뿐이다. 그제는 적들의 야습으로 47명이 죽었다. 어제는 그 보복으로 공성전을 전개했는데 적들의 반격이 거세어 오히려 다 많은 사상자를 내서 일백 명 이상이 사망했다. 숫자는 어디까지나 사망한 사람의 숫자이고 부상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거기다가 밤이 새도록 복귀하지 못한 행방불명된 사람들도 여럿이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시간이 지나 한적한 외곽이나 해자에 파묻힌 채 발견되기가 다반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은 언덕을 넘어 많이 떨어진 곳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임무가 떨어졌다. 보급로라는 것은 적들이 스스로 비교적 안전하다싶은 통로를 택하기 마련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적들의 영영인 셈이고, 자칫하면 아군의 지원과 단절되기 쉬운 약점을 가지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위험한 임무이며, 이중에서 누가 내일아침 기도회에 참석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쉽게 내키지 않는 파견 작전인 셈이다. 그러니 모두가 하나같이 죽을상일 수밖에.......
‘ 여기봐. 장(Jean). 주교께서 축도 내리시는데 그렇게 실실 웃고 있다가 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해? 또 사막 불침번으로 내쫓기면? 적들의 야습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 그깟 불침번 보내라고 해. 난 두렵지 않아. 그분께서 날 지켜 주실 테니까. 피오(Pio). 난 대주교가 매일 기도하는 신(神)에게 같이 기도하지 않아. 다른 분이 날 지켜주고 계시니까.’
‘말조심해 장. 그건 네 스스로가 이교도라고 자백하는 것과 같은 말이야. 아무리 내가 너와 친한 친구라 감춰주고 싶어도 한 달에 한 번 해야 하는 고해성사에서 네가 배교자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네가 먼저 다음 고해성사 때 주교께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도록 해. 자칫 내가 더 큰 죄인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난 두렵지 않아. 그분께서 날 지켜주실 테니까. 매일아침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대주교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어? 축도를 아무리 받아도 매일 우리 군인들은 하나 둘 죽어 가는데 말이야. 그렇게 밤새 기도하고 아침마다 축도를 받았으면 우리 중에 누군가가 꼭 죽었어야만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대주교의 기도 덕분에 겨우 살아나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거듭거듭 이어져 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이제껏 아무도 없었어. 수백 명의 죽음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는데도 말이야.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기도도 없어.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리게 무섭기 때문인지 아침에 함께 기도하던 전우가 저녁에 죽어나가도 아무도 기억하거나 슬퍼해 주지 않아. 그저 그게 내 죽음이 아니길 바랄뿐이지. 늘 입버릇처럼 교황께서 승리를 독촉한다는 이야기와 기꺼이 자랑스럽게 나가서 죽을 각오로 싸우라는 소리뿐이고, 그런 축도를 받은 우리 모두의 얼굴엔 항상 죽음이 반쯤 내려앉은 표정과 두려운 눈빛이 가득할 뿐이지. 살아야겠다는 희망도 의지도 사라진지 오래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대주교가 말하는 신의 뜻일 뿐이지. 피오. 우리는 그냥 교황 성하의 장난감이자 소모품일 뿐이야. 빠져나가거나 거부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너는 달라졌어. 장. 혹시 너 이교도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그것 때문에 적들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
‘나는 하나님을 배반한 적이 없고, 이교도들의 신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어.’
‘그럼 누구한테 기도하는데? 어떻게 하면 전쟁의 공포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장? 우린 오랜 친구잖아? 나에게도 그 기도를 좀 가르쳐 줄래?’
‘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거야. 내가 간절히 기도를 드리자 그분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 (장. 내손을 꼭 잡고 놓지 말거라. 내가 너를 데리고 가서 너의 어머니께 직접 건네 드릴 테니 말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 고난을 이겨 내거라. 내가 곁에서 늘 지켜주마) 하셨어. 그래서 피오 너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따로 부탁드렸어.’
‘그렇다면 어서 내게도 그분을 소개시켜 줘야지? 도대체 그분이 누구냐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고, 삼위일체이신 그분의 대리인이 교황이라고 하셨어. 오늘 교황께서 진노하셨고 파문을 지시하셨다면, 그것은 곧 오늘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파문을 내리셨다는 뜻이지. 그런데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단 한 순간도 화가 나있지 않고 저주를 내리지 않고 파문을 외치지 않는 교황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화한 표정과 위로의 말씀과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던 모습을 교황에게서는 단 한 순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면 이것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의 지금 심정은 온 세상의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을 손길을 직접 내려주시던 성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고 외치시던 구약시대의 진노하시고 저주하시고 가혹한 형벌 내리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던 무서운 성부님의 표정이 지금 그대로 교황 성하의 표정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말이야. 아무리 기도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교황 성하의 표정에서 인자하신 성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노하신 성부의 표정만이 지금처럼 영원히 계속된다면......... 이제 우리에게 더는 희망이나 구원이 영원히 없어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있어서....... 삼위일체이신 그분 보다 더 높은 분이 있어서 너에게 그런 약속을 하셨다는 말이야? 혹 그분이 사탄이야?’
‘삼위일체이신 그 분보다 높은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어? 다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혹시 그 분이라면 삼위일체이신 분께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시지 않을까? 아무리 교황 성하라 해도 감히 그분에게만은 옳으니 그르니 되니 안 되니 못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날 밤이 새도록 간절하게 그분께 기도를 드렸어. 제가 당신께 감히 기도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살아서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면 이제 저는 영원히 당신의 종이 되어서 당신께만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제가 살아서 저의 어머니 품에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그날이 내가 알레포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채 사막에 홀로 낙오되던 바로 그날 밤이었어. 나는 살아서 아침을 맞았고 베르베르 유목민의 도움으로 무사히 부대로 돌아올 수 있었지. 모두가 내가 이미 죽었다고 여기고 있을 때....... 난 다시 살아났던 것이지. 그분 덕분에 기적처럼....... 난 머지않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것을 믿고 확신하고 있어. 내가 무사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고향마을 어귀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한 쉼터와 우물을 만들고 그 분의 이름으로 봉헌드릴 거야.’
‘그렇다면 어서 나도 그분께 안내해줘. 장. 부탁이야.’
‘피오. 성모님(Maria)께서는 이미 너를 기억하고계서. 우린 함께 집으로 돌아갈 거야.’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의 걸출한 영웅인 살라딘은 뿔뿔이 흩어졌던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통일 규합 시켰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십자군 원정대를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십자군이 주축이 된 기독교 세력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살라딘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천재 통치자 보두앵 4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살라딘과 보두앵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와 패배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을 정도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다만 살라딘의 배후에는 변방에서 모집한 지원군과 물자가 속속 들어오고 있었고, 보두앵의 예루살렘은 교황의 노여움을 사서 고립무원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랬음에도 보두앵은 살라딘을 맞이하여 여전히 백중세를 이루었다. 그런 전쟁천재 보두앵 4세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병환자였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로가 누적되면 될수록 그의 나병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더니 끝내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살라딘 마저도 보두앵 4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례기간동안 전쟁을 중단하고 조문사절단을 보냈을 정도였다.
후세의 역사가 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보두앵 4세가 나병을 견뎌 10년 만 더 살았다면 십자군 전쟁 역사의 결과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어린 보두앵 5세가 즉위식만 겨우 거치더니 죽어버리고, 새롭게 예루살렘 왕국의 수장이 된 뤼지냥 출신의 기는 살라딘을 얕잡아 보고 단숨에 이슬람 전부를 정복해 버리겠다고 총동원령을 내렸다.(이 시기를 배경으로 적나라하게 극적이며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킹덤 오브 해븐>이다)
기는 샤티용의 레날드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까지 끌어들여 십자군 원정대의 전력 전부를 이끌고 사막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보두앵이 없는 십자군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1187년 7월 4일, 사막 한가운데 물이 모두 말라버린 뿔처럼 생긴 하틴 계곡에서 기독교 십자군과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총동원된 3만 명의 십자군과 살라딘이 규합해 이끌고 나온 3만 명의 이슬람 군대가 사활을 걸고 돌격을 감행했다.
총사령관 뤼지냥의 기가 포로로 붙잡혔다. 삼만 명의 십자군 군대에서 살아서 도망친 숫자가 겨우 삼천에 지나지 않았다. 2만 칠천 명의 군대가 참혹하게 시체로 변한 것이다. 메마른 사막 골짜기에 3만의 십자군을 가두어 놓은 살라딘 군대는 거대한 그물처럼 포위망을 구축하고는 한 방향으로 계속 돌아가면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가며 십자군을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고 쓰러트렸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도망친 군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것은 마치‘양파를 한 커플 한 커플 벗겨나가는 것 같았다’으며 ‘벗겨져 난도질 당한 양파처럼 시체더미가 산을 이루었다’고 증언했다.
이 전투로 예루살렘 왕국은 멸망했다.
장과 피오도 여기 하틴의 뿔 전투에 참가했고 부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영화 <킹덤 오브 해븐>에서 보여 주듯이, 위대한 살라딘 술탄은 이블린의 발리앙과의 담판을 통해 포로들을 풀어주고 살아남은 십자군과 기독교인들이 고향인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전쟁에서 죽은 시체들을 수습해 엄숙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전력을 상실해버린 십자군이 귀국길에 혹시나 사막의 마적들이나 집요하게 원수를 갚겠다고 불쑥 나설지도 모르는 무장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군대를 보내 항구까지 무사히 호송하도록 했다. 이들을 태울 선박이 부족하자, 이슬람의 군선을 동원해 대포와 무기를 내리고, 대신 철수하는 십자군과 기독교인들을 태워 시칠리아까지 데려다 주었다.
무사히 고향에 돌아온 장과 피오는 약속대로 마을 어귀에 우물과 쉼터를 만들고 성모님께 헌정했다. 성모 마리아를 프랑스식으로 ‘노틀담 쉼터’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무용담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기 시작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전투와 역경을 헤치고 무사히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들의 기적 같은 무용담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온 동료 군인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을 통해 사방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점차....... 교회가 전면에 내세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새로운 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황의 성난 표정처럼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고향의 어머니 품처럼 어딘지 모르게 다장다감하시고 모든 하소연을 끝까지 들어주시고 위로의 말씀을 내려주시고 보사핌의 손길을 보내주실것 같은 온화하고 자애로우신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혹시나, 성모께서 인간의 하소연을 들으시고 어떤 기적같은 은총이나 축복을 내려주신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이미 벌이신 일들에 대해서 교회나 교황이 이래라 저래가 간섭하거나 거두어 들일수는 없을 것이라는 바램이 다분히 들어간 열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성모께서 나를 궁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셨다면, 교황이 감히 어쩌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머니께서 이미 내리신 약속을 파기하지는 못하실 것이라는 엉뚱한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교회(교황)를 통하지 않고서도 은총(구원)을 얻을 새로운 방법이자 기회가 생긴것이다.
너도나도 성모 마리아를 찾는 새로운 방식의 종교활동이 생겨나 무섭세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 소통하는 종교가 아니다. 둘 사이에 교회(성직자)라는 매개체가 존재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은 모두 이 매개체를 통해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는 시스템이다. 모든 결정이나 뜻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행되지만, 그것들을 실제로 집행하는 당사자(성직자)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전쟁에 나서라고 명령하셨고, 면죄부를 약속하셨지만, 그것들이 수도 없이 교황의 입을 통해 파문과 복권이 반복되는 것을 모두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엄연히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인인 교황을 미더워하지 않거나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능멸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패와 망쪼는 늘 그런 매개체에서 생겨난다.
그런 절대 권력을 부여받은 교황은 언제나 화를 내고 명령하고 저주를 퍼붓고 못마땅하면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끝장을 내버리지 않는가? 하늘나라 천당의 일은 나중이고...... 일단은 교황의 눈에 띄지 않거나 먼 곳에 숨어서 적당히 주일이나 성수하고, 일 년에 한 번은 거짓 고해성사를 하고, 징집 대상에서 벗어나고, 종교세와 재산세의 과도한 징세를 피해가면서 배부른 은둔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밉보이면 언제 어떤 명목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온가족이 화형에 처해지고 전 재산이 몰수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모든 생사여탈권이 교회(성직자)에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교회의 법이 봉건영주의 법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 교회(성직자)의 법은 늘 엄격했고 잔혹했고 늘 들쑥날쑥 이었다. 교회 자체가 언제부터인가 온통 가혹하게 갑질이나 일삼는 절대 (갑)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늘 노예보다 못한 (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성직자)가 벌이는 모든 사악함의 전면에 내걸리는 그럴싸한 대의명분일 뿐이었다. 일천 년에 걸쳐서 교회는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을 앞세우고 지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악행의 극한까지를 자행했던 것이다.
노예보다 못한 (을)로 전락한 인간이 아무리 십자가 앞에 엎드리고 피와 눈물로 하소연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억울함과 간절함 또한 매개체(성직자)를 통해야만 하늘에 전달될 수 있다는데 말이다. 매개체가 자기의 죄상이 그대로 드러날 하소연을 고스란히 하늘에 올려보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즉각 신성 모독 내지는 사탄에 놀아났다거나, 마귀가 들었다는 죄목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게 뻔한 상황이니 말이다.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알랑방구를 꾸고 돈과 패물을 싸다가 바치고 땅을 헌납하고 해야 그나마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후로도 약 1백년 더 계속되어 8차까지 이어진다.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다시는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은 매번 전쟁에서 패해 쫓겨나왔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무수한 생명이 죽어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처음에는 ‘면죄부’에 혹해서 자원자들이 넘쳐났으나, 점차 패배가 거듭되면서 나갔다 하면 뻔히 죽어나오는 전쟁에 누가 자원을 하겠는가? 전쟁을 통해 신분 급상승을 노리는 기사나, 죽음의 전쟁을 통해 온갖 수단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자와 죄를 짓고 도망친 자와 같은 부랑자들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는 당연하게 엄청나게 심각한 역사적 부작용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만, 이제는 기사에서 상인을 거쳐 노예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일부의 최고 지도자들만이 전쟁터에 동행하는 대주교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성모 마리아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모 마리아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린 사람들에게 실로 놀라운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성모님. 제 기도를 들어주시면 고향에 저도 우물과 쉼터를 만들겠습니다.’
‘성모님. 이 거래를 성공으로 마치게 해주시면 고향 기도원에 겨울을 날 식량을 죽는 날까지 바치겠습니다.’
‘성모님. 이번 전투에 이겨서 이교도의 도시를 점령하게 해주시면 귀국해서 고향에 교회를 지어서 성모님께 헌정하겠습니다.’
‘성모님. 무사히 귀국하게 해주시면 우리 마을 교회를 거대하게 증축하고 성모님께 헌정하겠습니다.’
‘성모님. 이 포위망을 벗어나 살아 돌아간다면 고향 대성당 앞의 강에 튼튼한 다리를 놓고 성모님께 찬양을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것이....... 어찌된 영문인지...... 그런 가지가지 간절한 기도의 상당부분이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한마디로...... 사방에서 기적적인 일들이 여기저기서 빈번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 모든 기적적인 사건들의 공통점은 (성모 마리아)였다.
십자군 전쟁의 기간에 특히나 프랑스 전역에서 이런 일들이 무수히 벌어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 퍼져있는 아주 오래된 ‘노틀담 성당’의 상당수가 바로 십자군 전쟁기간 이후로 생겨난 것이다.
그야말로 ‘성모 마리아 신앙’이 하나의 새로운 신드롬으로 유럽 전역을 강타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화하고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황금빛을 발하고 있는 교황의 절대 권력을 추월하는 사태를 낳고만 것이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성모 마리아 신앙)과 (연옥) 문제가 로마가톨릭의 존폐가 걸릴 만큼 위중한 사태로 등장했던 것이다. (연옥 문제는 여러 번 다룬 적이 있어서 여기서는 생략)
인간이 성모 마리아에게 직접 하소연함으로써 은총이 생겨나고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매개체(성직자) 역할을 담당하던 자칭 ‘하나님의 대리인’은 더 이상 존재할 명분과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 신앙)이 열풍처럼 퍼져나가면 나갈수록 로마가톨릭(교황)은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매개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성모 마리아 신앙)을 정죄하거나 이단으로 핍박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삼위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것이다. 사실은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문제만큼이나 삼위일체의 울타리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란이 이었어왔다. 하지만 어디가지나 성모 마리아 문제는 최고 종교회의 안에서만 최고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다루어져 내려온 하나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성모 마리아 문제가 온 세상의 대중들 입에서 오르내리게 된다면..... 어떻게든 교회는 이제 성모 마리아 문제를 매듭지어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또다시 영지주의 문제를 로마가톨릭이 다루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따르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삼위일체설)
여기에 성모 마리아가 더해진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처럼 성모 마리아는 성자(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수태에 관한 생리학적인 문제가 뒤따르지만, 어쨌거나 열 달을 자궁에서 키워서 출산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시킨 어머니인 것이다.
그럼 성모 마리아와 성부(하나님)은 부부인가?
그럼 성모 마리아와 결혼한 요셉은 과연 어떤 존재란 말인가?
더불어 마태복음(13:55) 마가복음(6:3)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제 의인 야고보’는 또 누구인가? 야고보의 부모는 예수의 부모와는 당연이 다를 수밖에 없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야고보의 부모는 누구인가?
이런 문제는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이미 심각하게 여러 차례 논의가 있어왔다.
다만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에 매듭을 짓지 못하고 밀려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성모 마리아 신앙)이 새로운 사조처럼 온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으므로 로마가톨릭 입장에서는 다급한대로 서둘러 성모 마리아 문제를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매듭을 지을 때가 되었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 신앙)을 인정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자니, 이는 당연하게 로마가톨릭의 권위와 그동안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대의명분(정통성)이 심하게 훼손될 것이 자명해 보이고, (성모 마리아 신앙)을 제재하고 내치자니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결과가 될 것이 뻔 하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나 신으로서나 완벽한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새롭게 부각된 (성모 마리아 신앙)에 대해서 로마가톨릭은 결국 선택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모 마리아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어머니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성스러운 구세주의 어머니로 신격화를 할 것인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 하는 것에도 많은 문제점이 생겨나고, 그냥 세속의 인간적인 어머니로 남겨 두어도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성에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로마가톨릭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서 공인된 이후로 벌어진 수많은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설) (영지주의 복음) (성모 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늘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투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로마가톨릭 주도로 기독교적 정체성과 교리 체계를 확립했다고는 하겠으나, 근원적인 문제점들은 엄연히 그대로 잔재했었고, 다만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교도인 이슬람과의 오랜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교리에 대한 비교와 논쟁을 통해서 수면아래 잠자고 있던 근본적 문제들이 (성모 마리아 신앙)과 (연옥) 문제 등으로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무엇이 왜 이단인가' '영지주의 복음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카타리파가 왜 반듯이 척격해야만 하는 기독교의 공적인가' '삼위일체설은 정말로 정당한 것인가' '성모 마리아는 신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교황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인가' 등의 문제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단과 이적행위와 신성모독 등의 죄목과 잔혹한 처형으로 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과 문제점들을 회피하고 덮을 수 있을 것인가를 로마가톨릭은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로마가톨릭은 선택을 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의 기독교로 전환 성립되면서 부터 이미 저질러진 수많은 질곡의 역사를 되집어 바로잡기 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처지와 명분과 지상에서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격화 하기로 최종 선택'을 했던 것이다. 가장 실리적이며 쉬운 선택을 일단 저질러버리기로 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로마가톨릭 수장들(교황 포함)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무리한 선택이었는지를 말이다.
나는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신격화 시켜서 어떻게 재정적인 이득을 좀 보셨습니까?'
'기독교의 거룩한 신성함에 보탬이 좀 되셨습니까?'
'어떻게 성경에 적혀있지도 않는 그 많은 일들을 저지르고도 뻔뻔스럽게 십자가를 올려다 보고들 계십니까? 특별히 따로 사면을 받으셨습니까?
--- 성모 마리아의 신격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부득이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꺼낸 이야기였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까 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장문의 부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안재.
(알림) 요즘 직업적으로 너무나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대할 시간조차 부족하네요. 얼핏 살펴보니 지금의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거의 두 달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방금 확인했습니다. 1회차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끌다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최대한 짬을 내서 서둘러 다음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거듭 거듭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