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7월 7일 월요일 <제자도의 실제(3)>
[김용호] [오전 12:57] 굿모닝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도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열심히 구합시다~!!!
[김용호] [오전 7:05] 지웅 형제 오늘 면접 화이팅!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효율적인 활동 영역과 현실적인 삶의 기반을 제공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정진호] [오전 11:01] 어제 저녁은 일산에 가서 오 년 만에 신의주 순대국을 먹었는데 그 집이 일산 든든한 교회의 헌금액수 2위를
차지하는 집일만큼 장사가 너무 잘되는 집인데 그 이유를 어제 발견했어요. 그건 그 주인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항상 변함없는 맛 때문이라는 거. 5년 만에 갔는데 맛이 1%의 변화도 없다는 거. 반찬도 그렇고.
우리 애가 주인이 아주 양심적인 사람인가보다 하길래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건 없는 거라고 말해주려다 참았어요. ㅋㅋ 그것은 상술이지 양심이 아닌 거지요. 물론 주인은 신앙 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오늘 아침에 TV보며 무슨 말 하다가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건 없다고 말해는 주었지요.
크리스찬들이 헷갈려 하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신앙 양심과 상술
편안과 평안
재미와 기쁨 등등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과거에 김동호 목사님한테 들었던 내용인데,
“난 고스톱 치는 게 기뻐.”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거지요.
“난 고스톱 치는 게 재미있어.”
이게 말이 된다는 거지요.
투명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신앙 양심이라고 착각했던 시기가 나도 있었지요. 그게 내가 골치 아픈 세금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테크닉이었다는 것을 알기 까지 십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지요.
[김용호] [오전 11:37]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 실제로 소속되지 않으면(얼마나 성숙한 공동체인가는 차치하고라도) 사실 성경이 올
바로 해석될 방법이 없습니다.
[정진호] [오전 11:43] 사고가 정체되었었다는 표면이 맞을 거 같아요. 전문용어로 떡이 졌다 이제야 사고가 제 기능을 하는 느낌이
랄까요.
[김용호] [오전 11:44] ^^
[한금옥] [오후 4:38] 며칠 전에 말씀하신. 벼랑에서 떨어져 봐야... 했던 거요. 그 벼랑에서 떨어져야겠다는 결심을 우리가 할 수 있
나요? 아님 코너에 몰리다 몰리다 떠밀리듯 떨어지는 것이 맞을까요?
[김용호] [오후 4:38] 결심할 수 있습니다.
[한금옥] [오후 4:39] 그럼 그게 인간의 의지가 개입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요?
[김용호] [오후 4:39] 사실은 떠밀려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티든가 돌아버리든가 하게 되지
요.
[한금옥] [오후 4:40] 왜 그때 말씀하셨던 중에... 제가 돈 많이 벌어 많이 쓰고 싶다니깐, 경제 활동을 안 하는 것도 벼랑에서 떨어지
는 한 방법이라 하셨잖아요. 지금 제가 놀면서 느끼는 건 아무것도 안 하고 미미한 성취감도 없이 이렇게 지내다가는 정말 사람 우울해지겠다 하는 거거든요. 물론 우울한 이유야 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 해도 차라리 분주하면 아무 생각 없이 잘 살 텐데... 하는 생각이....
사명감 없이 살고 있는 시간이지만, (모 미래에 사명감을 갖고 살겠지만..) 분주하게 살 때는 잊고 살만하던 것들이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숨이 조금씩 갑갑해지려 하는 듯해서... 다시 바쁘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김용호] [오후 4:47] 앗~ 그건 개구멍을 찾는 건데~~~
[한금옥] [오후 4:47] 병원에서 제 출국 일정이 늦어지는 거 알게 되서 저한테 알바라도 해달라는 제의를 계속 해오니...
[김용호] [오후 4:48] 알바 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김용호] [오후 4:49]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초조함과 답답함이 있느냐 없느냐니까요.
[한금옥] [오후 4:49] 이 알바가 그 개구멍이 되지 않나 싶어서요.ㅋ
[김용호] [오후 4:49] 말하고 보니 표현이 좀 그렇네요. 죄송^^
[한금옥] [오후 4:50] ㅋㅋㅋ 아뇨. 개구멍이 딱 정확한 표현(?) 같아요.ㅋ
[김용호] [오후 4:50]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돈을 벌든 안 벌든 회피하게 되지요.
[한금옥] [오후 4:50] 그런가요 ?
[김용호] [오후 4:51]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 가능한 일이지요. 그
렇게 느끼게 되면 돈을 버느냐 안 버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손으로는 주사를 놓으면서 심리적으로는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지요.^^
[한금옥] [오후 4:54] 제가 또 문자 그대로만 받아 들어 먹었네요. ㅋㅋ
[김용호] [오후 4:55] 좀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심리적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런 겁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도무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하지를 않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엉거주춤한 상태고 그 상태가 고통스러운 거지요.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답답한데 변화가 도무지 안 되고 이젠 못 견디겠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리고는 속으로 펑펑 우는 겁니다. 손으로는 주사를 놓으면서요. 계속 우는 거예요. 계속 하염없이 우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한 내 모습을 확인할 때까지요(그래서 이론, 즉 정확한 조직신학이 중요한 거지요). 내가 이론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사사 기드온의 경우가 좋은 사례입니다.
“큰 용사여. 미디안을 물리쳐라.”
“아이고, 제가 무슨 큰 용사입니까. 저는 큰 용사도 아니고 못 합니다.”
“해라.”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큰 자라는 것을 나에게 증거를 보여주세요. 이 양털뭉치만 빼고 온 땅이 이슬에 젖게 해보세요.”
“이번엔 이 양털뭉치만 이슬에 젖게 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자 기드온이 자신이 큰 용사로 만들어졌고 미디안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제자도 아니면서 이만하면 제자도 훈련과정을 마쳤다고 신나서 뛰어나가는 사람이 우리 중에 없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 자신이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검증이 안 되면 숨이 막히는 거지요. 그때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거지요. 하염없이 울면 됩니다. 하염없이 우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만약 하나님께 떼쓰는 모드가 나오면 중단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 떼를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바벨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일종의 투자 내지는 배팅인 것이지요. 멋지고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엄청난 파세마, 즉 몸부림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 잠잠히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염없이 울면서 기다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개구멍 찾기를 중단하는 것과 같은 의미지요.
그래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났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은 중간에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까요. 그리고 중간에 포기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살만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안 되어도 살아갈 방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직 내 손에 히든카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중간에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거지요.
히든카드가 남아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든카드가 없는 사람은 그냥 하염없이 울면서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날 때까지요.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히든카드를 모두 잃은 심령이 있고,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히든카드를 감추고 있는 강퍅한 심령이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타입이지요.
[임지웅] [오후 5:42] 제가 요즘 취하고 있는 자세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취업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면접 기
회는 오네요... 예전 같았으면 “거봐. 기도하니까 길을 열어주시잖아.” 이랬을 텐데요. 그렇다고 손 놓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열심히 이력서도 내고 남들 대충대충 하는 연수과제도 열심히 써내고 있습니다 - 요건 좀 자존심을 못 버려 그런 것 같습니다만 -. 오늘 면접의 결과가 어찌되든 언젠가 제가 앉아 일할 책상을 주시겠지요.^^
[김용호] [오후 5:45] 그럼~ 중요한 포인트는 취업을 놓고 하나님과 흥정을 하느냐, 아니면 하염없이 울면서 취업을 위해 뛰어다니
느냐 하는 것이지.
어느 기도원이든 가보면 하나님과 흥정하는 소리로 요란합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다 마찬가지지요. 일터의 종류들만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어느 정도 시간을 울어야 할까요? 답은 “검증될 때까지 하염없이”입니다.
쌓아놓은 돈이 없으면 돈을 벌면서 울어야겠지요. 밥을 먹고 힘을 내야 울 수 있으니까요. 일단 울다가 돈이 떨어지면 울면서 돈을 벌러 가도 되구요. 윤주 자매님 경우는 울면서 시험 공부하세요~^^
히든카드를 아직 한 장 쥐고 있는 분이 계시면 버리기보다는 그냥 그 카드를 써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꽝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거든요. 안 그러면 버린 카드를 다시 주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니는 날이 올지도 모르거든요.^^
[한금옥] [오후 5:57] 돈은 벌지만. 쇼핑은 그럼 금물인가요? ㅋ
[김용호] [오후 5:57] ㅎㅎㅎ 쌀과 반찬만이 일용할 양식이 아닌 분도 있다고 봅니다. 애매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금욕
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거든요.^^
[한금옥] [오후 5:59] 예전에는 사치하는 것에 대해 좀 금욕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김용호] [오후 5:59] 자매님은 지금 굳이 돈을 벌어야 할 상황도 아니잖아요.
[한금옥] [오후 6:00] 전 돈을 안 쓰면 우울/불안해요.ㅋ 돈 쓰면서 얻는 소소한 기쁨으로 사는 듯. 그렇다고 막 쓴다기보다 소비하는
걸 좋아라 해요. ㅋ
[김용호] [오후 6:01] 쌀 외에는 아무 것도 안 사는 것이 자매님에게는 금식이 될 수 있겠어요^^ 처절한 금식. 하지만 일정 기간만이
니 금욕과는 다르지요.^^
[한금옥] [오후 6:01] ㅠㅠ 그런 말 하시면 숨 막혀요. 차라리 밥을 굶을게요.
[김용호] [오후 6:02]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러다 둘 다 금식하시게 될까봐 은근히 걱정되네요. 밥금식 + 쇼핑금식.
혹 나는 울려고 해도 눈물이 안 나온다는 분이 계시면 억지로 울려고는 마세요. 예수님이 짜증이 나실 수 있어요. ㅋㅋ 그냥 자신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시면서 일상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것이 합당한 자세입니다. 억지로 금식 기도도 하지 마세요. 괜히 배만 고파요.^^ 그런 경우는 금식 기도를 해도 종교적 바벨탑을 위한 기도가 될 뿐이지요.
[한금옥] [오후 6:12] 네. 바벨탑. 조심 또 조심.
[정진호] [오후 6:12] 로마서 설교 때 득의의 두 요소로 은혜와 순종이 있었어요. 인간 쪽에서는 순종을 해야 하고 그때 하나님 쪽에
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구요. 벼랑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내가 진짜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순종하겠다는 것의 표현 아닌가요?
[김용호] [오후 6:12] 예. 집사님. 그렇습니다. 순종의 결단은 인간의 몫이지요.
[정진호] [오후 6:13] 그럼 내가 진짜로 순종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겠지요?
[김용호] [오후 6:14] 그렇지요. 서구 기독교가 이 순종을 행위와 관련된 순종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이 순종은 약속이 이루
어지기를 기다리는 순종이지요.
[정진호] [오후 6:14] 한마디로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 하나님 마음대로 해 주세요”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절벽에서 떨어진다
는 것은 내가 순종의 결단을 하는 건데 그게 지난번 말씀하신 몇 가지 방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 금욕적인 방법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은 아닌 거지요.
[김용호] [오후 6:21] 예. 제가 심리적인 차원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의 차원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구요.
[정진호] [오후 6:23] 금옥자매에게 도움이 되기를....
[한금옥] [오후 6:25] 네.. 버팅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개구멍 찾아 도망가도 답이 아니란 걸 아니... 영적 바벨탑을 위해 기도가 나오
는 때도 아닌 거 알고요. 왜냐면 이미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드는 생각이 '이젠 칼 맞는 구나' 라는 거 본능적(?)으로 알겠으니깐요.
[정진호] [오후 6:27] 너무 힘들 땐 잠시 개구멍에 들어가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다만 너무 오래 개구멍에서 안 나오면 안 되겠지만.
[김용호] [오후 6:29] 맞습니다. 집사님. 결단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몰아붙이면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될 위
험도 있습니다.
[한금옥] [오후 6:29] 그 칼 맞기 싫어 버티는 거에도 한계가 있겠죠?
[김용호] [오후 6:30] 지쳐서 버틸 힘까지 사라지는 때가 오지요.^^ 그 때까지 평강을 구하면서 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금옥] [오후 6:30] 참 어렵네요. 그럼 그때 까지는 개구멍 입구에 앉아서 쉬겠습니다.
[김용호] [오후 6:31] 개구멍 입구~ ㅎㅎㅎ
[한금옥] [오후 6:32] 주님의 교회가 참 몸은 편하게 해주는데 아주 불편함이 이런 거예요. 해야 한다. 근데 억지로 하면 안 되니깐 알
아서 해. ㅋ 그런데 그 알아서가...
[정진호] [오후 6:33] “편하게 있어” 하는데 편치가 않지?
[한금옥] [오후 6:33] 아주요. 모라 표현해야 할지...
[김용호] [오후 6:34] 차라리 진도가 좀 늦어지는 것이 외식에 빠지는 것보다는 낫지요.^^
[한금옥] [오후 6:34] 네. 그런 의미에서. 알바 하는 쪽으로. 그리고 당분간 쇼핑도 하는 걸로. ㅋ
[정진호] [오후 6:35] 좋아. ㅎㅎㅎ
[김용호] [오후 6:35] 붕 띄우거나 몰아붙이거나 하면 개구멍이 아니라 사탄의 구멍을 찾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는~
[한금옥] [오후 6:37] 중심을 살피시는 분 앞에서 속임 없도록 깨어있도록 하는 것도 바쁩니다. ㅋ 그것도 지대로 못하는데요. ㅠ 그
러니 조금은 천천히? ㅋ
[김용호] [오후 6:38] 자연스럽게~^^
[최윤주] [오후 7:15] 울면서.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ㅜㅜ 마음은 힘든데 금요일 저녁부터 공부는 잘되고 있어요. 예전과 달
리 좀 살만해져도 개구멍 찾고 싶은 마음이 없네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본능은 계속 피할 방법을 찾는데 의지가 그걸 거부하는, 그래서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에요.ㅜㅜ 물론 살만한 시간이 길어지면 알 수 없으나.... 감사와 평안 불안 슬픔 기대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어요.ㅜㅜ
[김용호] [오후 7:17] 감사한 일입니다. 자매님.^^
[정진호] [오후 7:17] 윤주 자매의 상태가 딱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세가 나오네요.^^
[한금옥] [오후 7:17] 빨리 죽어야 하는 마음. 그런 마음 갖는 것도 혹시 제가 살고자 해서 드는 마음일 수 있나요?
[김용호] [오후 7:19] 에피뒤미아가 마크로뒤미아로 바뀌는 것이니 소망이 바뀌는 것이지 소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내
려놓음, 비움의 영성 같은 말들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소지가 많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은 프쉬케를 부인함으로써 조에를 얻는 것이지 부인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크로뒤미아, 거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과정은 결국 긍정의 과정인 것이지요. 조에,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탐욕이야말로 귀한 탐욕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주제는 얻는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프쉬케(이 땅의 생명)를 버리는 자는 조에(영원한 생명)를 얻고자 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망(에피뒤미아)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무엇을 욕망하는가가 문제인 것이지요. 에피뒤미아가 긍정적으로 사용된 두 곳을 예로 들자면~~
1. 내가 너희와 함께 유월절 보내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에피뒤미아를 에피뒤메오했노라.
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으나~ 에피뒤미아를 가졌으나
물론 에피뒤미아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요(로마서의 탐심, 갈라디아서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할 세 가지 중 욕심 등등).
서구 기독교의 경우 프쉬케를 버리는 것은 이해하나 조에를 얻는 것에 대한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교회우상주의로 빠지거나 비움의 영성 등을 주장하게 됩니다. 조에를 얻는다는 것을 내세구원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조에,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생명을 의미하지만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밖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전도와 활용을 하며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새 생명으로 현세에서 새 삶을 사는 것이 그것입니다.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도들의 증언은 현세에서 얻었다는 증언인 것이지요. 새 생명, 즉 조에를 얻은 존재가 바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죄인을 중심 개념으로 가지고 있는 서구 기독교의 구원론에서는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선행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의 선행을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거스틴과 충돌했던 도나투스파가 "교회는 의인들의 공동체"라고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의인도 좀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의인이 새로운 피조물이었다면 그들의 주장은 "교회는 의인으로 변하기 시작한 사람들과 변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당연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저들이 말하는 "의인"이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기준에 따라 의롭게 행동하는 옛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유추하게 됩니다. 그래야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에 새로운 피조물의 개념을 적용하면 인간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다음과 같이 나뉘어질 뿐입니다.
1.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악인
2.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알게 되었으나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악인
3.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악인
4.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소망하는 악인
5.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가 시작된 존재로서 의인과 악인 사이를 오락가락함(이 사람은 앞의 네 사람들보다 자신의 죄성을 더 깊이 보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규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의인들의 공동체"라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옛사람 차원에서의 논리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추앙하는 것도 참 싱거운 짓이지만 누가 현대의 성인 어쩌고저쩌고 하면 그냥 픽~ 하고 웃고 끝내면 됩니다. 필경 바보 멍청이 아니면 사기꾼이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