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심하게 욕을 했다 치자. '너 같은 녀석은 그냥 죽는 게 낫다. 죽어 버려라' 이 구업은 분명히 업력을 남기게 되고, 다음 생에 나는 내가 욕한 그 사람에게 똑같이 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구업의 결과를 받을 때, 내가 쌓은 선업과 내 수행력의 차이에 따라 똑같은 악한 구업의 과보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업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욕을 얻어 먹을지라도, 선한 인연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수행력이 서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욕설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괴로운 상황에서도 복력과 수행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경계에 크게 동요되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첫째, 선업을 짓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 수행을 통해 수행력을 증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구라도 악업을 짓지 않고 산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 그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가 지은 업은 분명히 과보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 받을지 모를 과보를 괴롭게 받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선업을 짓는 것이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선업을 많이 지으면 선업의 기운이 나라는 존재를 맑고 청정하게 바꾸어 주기 때문에 많은 물에서는 한 움큼의 소금이 짜지 않듯 많은 선행과 선업을 지은 사람에게 악의 과보나 죄의 과보도 그리 괴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행을 통해 수행력을 키우면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나 과보쯤은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중심이 잡히고, 자기 안에 주인공의 뿌리가 내리게 되기 때문에, 과보를 받더라도 그것이 나를 괴롭힐 수 없는 것이다.
선업을 짓는다는 것은 '복'을 키운다는 의미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키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우리가 귀의하는 이유가 부처님은 지혜와 복력 두 가지가 완전하신 '양족존'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다. 과보를 받는 순간이 '지금 여기'라는 현재라면,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잘 다스린다면 과보를 받더라도 크게 휘둘리지 않으며 여여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즉 현재를 잘 다스리는 '지금 여기'의 수행과 선행 속에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말인 것이다.
사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다. 업장이 받지도 않고 수행만 하면 그냥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행, 마음공부를 통해 업장을 받더라도 받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수행자의 두 가지 할 일은 선업을 지음으로써 '복'을 증진시키는 일과 수행을 쌓음으로써 '지혜'를 증진시키는 일인 것이며, 그 두 가지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 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다스리면 과거와 미래까지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들 또한 여기에 동의한다. 과거나 미래가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괴로워하지도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여 고민하지도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선행과 수행으로써 잘 다스리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를 일깨우는 최상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업을 두려워하지 말라. 불교의 업사상은 업에 빠지고 집착하여 선악의 업장에 노예가 되라고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선악을 초월하고 업을 초월하여 더 많은 선업을 짓고,(諸惡幕作 衆善奉行)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수행하도록 이끎으로써(自淨其意)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是諸佛敎)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諸惡幕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