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정', 험로를 선택,
직업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문학을 선택해 두 길을 걷게 된 연유는 첫째, 내 취향 탓도 있지만 몇 가지 분명한 사유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탐독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둘째, 당시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 사건 사고, 일부 일본군대 출신 상관들의 터무니 없는 월권 전횡 등을 기록, 뒷날 교훈으로 남겨 개선책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 때문이었다. 특히 육사 4년제 졸업 출신의 후배장교가 1955년도에 임관하면서 육사생도2기 출신의 입지가 좁아져 극심한 차별로 진급 때마다 또는 보직 때 마다 차별을 겪게 돼 앞길에 어려움이 닥쳐올 것이라는 압박감도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육사 기별조종시 의도적으로 압력을 가해 육사생도2기를 육사의 기수에서 빼버린 작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으로 인한 학년 졸업 등 불이익은 원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훈령을 내린 바 있었는데 그 훈령을 무시한 작태와 차별적 조치는 육사생도2기생 모두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생도2기생 모두는 학위 임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야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인원이 무려 70%를 넘었으며 박사 학위 취득자 또한 네명이 있었다. 한편 경쟁이 극심한 미국 육군의 각 병과학교 장교기본과정에 유학, 미국 장교와 동등한 자격까지 구비한 상태였다. 더구나 전원 전투경험까지 추가하면 오히려 이른바 육사11기생보다 더 한층 높은 수준의 자격을 구비하고 있었다.
육사 기수 조종 시 생도2기생은 거의 모두 중령이었고 전두환을 비롯한 4년제 졸업생들은 소령이었는데 나를 비롯한 동기생 몇 명이 당시 기별 조종 책임을 맡고 있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관리처장 유학성 준장에게 탄원을 해 거의 11기생으로 승인 단계에 있었다. 그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전두환 소령을 비롯한 하나회 핵심자들이 유학성 준장에게 압력을 넣어 11기를 차지하는 바람에 육사생도2기는 기수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육사생도2기와 같은 해 1950년도 입교한 해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육사생도2기생보다 교육기관이 짧았는데도 각각 사관학교 정식 기수를 부여 받았다. 더구나 생도2기생은 6.25전쟁에서 거의 반수 이상이 전사했는데 해사 공사 생도들은 사고사를 제외하고 전사자는 없었다. 이런 부당한 처사를 당한 생도2기생은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두환과 유학성은 생도2기생의 육사 입교 사실조차 인정할 수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 여파로 육사의 약사에는 생도2기에 대한 입교 사실을 비롯해 6'25 첫날 포천전투에 투입했던 사실조차 기술하지 않았다.
훗날,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자 그때의 은공 대가로 유학성을 대장으로 별 넷을 달아주었다. 나는 이 사태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작품을 통해 이 억울함을 세상에 밝히고 명예를 회복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작가의 험한 길을 고수할 것을 맹세했다.
1981년 7월 31일, 육군준장을 끝으로 전역한 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자료를 수집해 집필에 들어갔다. 마침내 2000년 10월 16일 홍익출판사 발행으로 '육사생도2기'가 출간되었다. 이 책이 출판되자 많은 언론이 일제히 보도하면서 육사생도2기생의 억울한 실태가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박경석 장편실록소설 '육사생도2기'는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힘을 얻으면서 육사생도2기생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결전에 나섰다. 이러는 가운데 더 놀라운 사실을 확인 했다. 6.25전쟁 초전에 전사한 86명의 생도2기생이 그대로 생도 신분 전사자로 방치돼 있었다. 당국의 엄청난 직무유기의 결과임을 확인하면서 생도2기생 86명 전사자의 추서 임관을 추진하는 결전 또한 나의 임무로 추가하였다. 이어서 국군사를 탐색하면서 더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일본군 출신 일부 장군들의 범죄 사실이 너무나 엄청났다. 특히 백선엽 장군은 국방장관을 회유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부임,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6.25전쟁사를 개작하고 있었다. 정부와 국방부 육군본부에 의해 한국전쟁4대영웅이 확정 발포된 사실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무시하고 백선엽 자신으로 둥갑되는 놀라운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백선엽 추종자들은 백선엽 명에원수 추대 움직임과 함께 정부 주관 백선엽상 제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전투보다 더 힘겨운 '군사 바로잡기' 임무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흘연히 그 험로를 선택, 사즉생(死卽生)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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