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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왕비재테크 원문보기 글쓴이: 양맘
환갑을 앞둔 엄마의 모습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엄마는 분명 건강했지만, 많이 아파했다. 짧은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어 엄마의 손을 덥석 잡고 길 위에 섰다. 엄마가 하루 딱 세 번만 웃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예순의 엄마와 서른의 아들은 세계여행을 떠났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겨울에 시작된 여행은 어느덧 여름까지 이어졌고, 그사이 모자에서 완벽한 여행파트너로 변신한 우리는 내전의 상흔으로 신음하던 땅 발칸반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고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말이다.
세기말에 찾아온 비참한 전쟁
유럽 지도에서 동유럽의 관광대국 헝가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헝가리를 가리킨 손가락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나타나고 그다음엔 생소한 이름을 가진 여러 나라들이 나타난다. 그곳이 바로 발칸반도다.
발칸반도 서쪽에 촘촘히 박힌 여러 나라들은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나라였다. 그 나라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유고슬라비아는 무려 일곱 개의 나라로 갈라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갈라진 일곱 개의 나라는 각각 크로아티아Croatia, 슬로베니아Slovenia, 마케도니아Macedonia,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세르비아Serbia, 몬테네그로Montenegro, 코소보Kosovo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나의 국가가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는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세계대전 이후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재된 지역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할 때부터 내전은 예고된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선언으로 촉발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보스니아 분쟁과 코소보 사태 등으로 이어지며 ‘인종청소’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만들어 냈고,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 불타올랐다. 이해관계가 얽힌 강대국들까지 내전에 개입하며 희생자 수는 수십만 명으로 늘어났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말 그대로 피로 피를 씻는 날들이 계속된 것이다. 그리고 2008년, 마침내 코소보가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끝이 안 보이던 내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전히 곳곳에서 간헐적인 분쟁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이제는 ‘꽃누나’들이 열광하는 여행지를 배출할 만큼 발칸반도는 평화로워졌다.
아시아 지역에서 여행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 시작을 위해 유럽의 첫 관문인 발칸반도에 들어서는 우리의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새로운 대륙에 들어서기에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 시나브로 지쳐가고 있기도 했다. 아무튼, 무언가 전환의 계기가 필요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여행의 설렘을 되찾아준 요정들의 숲
계절이 두 번 바뀌고 2월이 8월로 바뀐 시점. 엄마와 내겐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여행 초반,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잔뜩 긴장하던 엄마의 모습과 혹시라도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질까 노심초사하며 우왕좌왕하던 나의 모습은 지난 6개월간 동남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많은 장기여행자들이 그렇듯 여행의 설렘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따위의 자극적인 수식어는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못했고 단체관광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카메라에 담는 장면 앞에서도 시큰둥했다.
우리는 그리 긴 시간을 여행한 것도 아닌데 베테랑 여행자처럼 굴며 여행의 설렘을 스스로 잊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하향곡선을 그리던 우리의 컨디션은 발칸반도에서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미 내전의 후유증을 겪어 본 적 있는 엄마는 전쟁의 상흔을 지워내고 새롭게 도약하는 발칸반도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나 역시 이전에 여행해본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 발칸의 풍경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뭔가 조금씩 부족했다.
그즈음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바로 ‘요정들이 뛰노는 숲’이라는 별칭을 가진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이었다. 그곳에 다녀온 선배는 자신이 생각했던 낙원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곳이 바로 플리트비체라고 했다. 그렇게 기대를 안고 찾아간 플리트비체에서 감탄사를 내뱉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정체현상이 벌어졌고 우리의 시야를 가린 그들은 순차적으로 호들갑을 떨며 흥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코웃음을 치던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플리트비체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지점이었는데 바닥이 훤히 보이는, 비현실적으로 맑은 호수가 파노라마로 펼쳐졌고 그 호수를 울창한 숲과 수많은 폭포가 감싸고 있었다. 호수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모습이 요정처럼 보였다. 숲 속에서 요정들이 뛰어 나와 피리를 불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을 풍경이었기에 그건 무리가 아니었다. 호수 가까이 내려가자 놀라움은 더 커졌다. 물고기들이 공중에 떠 있기 때문이었는데 물이 너무 투명해 나타난 착시현상이었다.
오리 몇 마리가 다가와 물에 잔영이 일고 나서야 마법이 풀렸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수평의 호수와 수직의 폭포가 시원스레 몸을 섞으며 시각적 황홀함의 절정을 선물했다. 아무리 봐도 물빛이 너무 맑아 온몸을 담그면 지금껏 지은 죄가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숲에선 노란 새가 꽁지를 흔들며 지저귀고 있었고 가끔씩 보이는 다람쥐들은 나무 위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우리를 내려다봤다. 선배가 말했던 낙원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낙원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뭔가 허전해 뒤를 돌아보니 엄마는 콧노래를 흥얼대며 호수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락없는 열아홉 소녀의 모습이었다. 엄마랑 여행한다고 해서 낭만이 없을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여행 중, 감당이 되지 않는 아찔한 장면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전율하곤 했다. 물가에 앉아있는 엄마를 뒤로하고 옥빛 호수 사이를 느리게 걸었다. 순간 어깨가 살짝 젖을 정도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방 안에 우산이 있었지만 펼치고 싶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은 싱그러운 향기를 선물해 주었고 빗소리에서도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졌다.
화장이 번져도 사랑스러운 그대
버스 창밖의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우리의 마음에도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아드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곳이 아니던가. 발칸반도를 둘러봤다던 배낭여행 동지들이 치켜든 엄지손가락 위엔 항상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마다 발음은 달랐지만, 그들이 말한 곳은 분명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이었다.
여행에서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날씨는 여행을 풍성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여행을 완전히 망치기도 한다. 반드시 맑을 필요는 없다. 어떤 곳은 안개가 살짝 가미되어야 압도적인 풍광을 드러내고, 또 어떤 곳은 눈이 펑펑 쏟아져야 숨겨진 비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90% 이상의 도시는 쨍한 태양이 자비를 베풀어야 더욱 빛이 난다. 안타깝게도 두브로브니크는 예외 10%에 들지 않는 도시다. 내가 봐오던 이곳의 이미지는 강렬한 태양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그 곁에서 파도와 함께 넘실대는 수천 개의 붉은 지붕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보긴 봐야지.” 며칠째 비가 오고 있었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두브로브니크 성에 오를 때가 되자 비는 잦아들었다. 하늘은 마치 흑백사진처럼 어두웠지만, 우산으로 시야를 가릴 일은 없어졌다. 열 계단 만에 숨을 헉헉대는 엄마의 팔을 끌고 성벽으로 올랐다. 성곽을 따라 걷는 건 이곳의 하이라이트다. 천 년의 세월을 견딘 요새 위를 산책하며 왼편으론 낭만적인 구시가지를, 오른편으론 청량한 아드리아 해를 눈에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날이 흐린 탓에 이곳의 진면목을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푸른빛도, 붉은빛도 그 명도가 너무 낮아 아날로그 TV를 보는 것 같았다. 점점 입장료 본전 생각이 날 때쯤, 기어이 살금살금 반전이 시작되었다. 아드리아 해 쪽으로 치우친 성벽 쪽에 다다르자 오늘 같은 날씨에만 볼 수 있는 아드리아 해의 색다른 모습이 펼쳐진 것이다. 거친 바람이 만들어낸 높은 파도가 있는 힘을 다해 성벽으로 돌진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높이 20미터가 넘는 성벽 위까지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이름 때문에 여성스럽게만 느껴졌던 아드리아 해가 거침없는 야성미를 뽐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반전매력. 성벽이 무너질까 무섭다 말하는 엄마도, 성벽 난간에 딱 붙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관광객들도 성난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거대한 파도가 포효하며 성벽에 부딪힌 뒤 공중에서 물보라로 분해되는 장면은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성벽 아래쪽으로 난 레스토랑의 직원들은 급히 테이블을 안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이런 일은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파도의 춤을 만끽하며 구시가지 방향에 있는 성벽으로 들어서자 다시 한 번 흥분지수가 급격히 상승했다. 옹기종기 몸을 부대낀 붉은 지붕 위로 파도가 만들어낸 옅은 농도의 물안개가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구시가지 전체가 몽환적 분위기에 휩싸였다. 뽀얀 물안개가 거친 바람을 따라 빠르게 흩어지는 모습은 꼭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물안개가 바람에 흩어지고 구시가지의 빛깔이 좀 더 진해진 뒤에 이번엔 달달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드리아 해를 잔뜩 머금은 수백 개의 붉은 진주들이 오롯이 색을 발하며 들썩였다. 운항이 금지된 멋진 관광 보트들은 부둣가에 묶인 채 군무를 추어댔다.
“흐려도 멋지네.” 엄마의 짧은 한마디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두브로브니크는 완벽한 미인이었다. 화장이 살짝 번졌지만, 그 아름다움에 흠을 내진 못 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한숨을 쉬며 이곳에 도착했었는데, 성벽을 내려오는 우리의 마음엔 비 한 방울만큼의 아쉬움도 없었다.
귀여운 용이 불을 뿜는 알록달록한 도시
도대체 어떻게 읽는 거지? 이것이 슬로베니아 수도에 대한 첫마디였다. 검색을 해보니 정확한 한국어 표기는 웬만큼 혀를 꼬아서는 발음도 힘든 ‘류블랴나’였다. 물론 엄마에게도 이 도시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엄마는 도시를 떠날 때까지도 ‘누불라나’라고 발음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에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까지는 기차로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두 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가까울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글쎄? 딱히 추천할만한 곳은 아니야. 정 가고 싶으면 반나절만 둘러보고 돌아와.” 자그레브에 머물고 있는 ‘아나’는 류블랴나를 평가절하하며 일찍 퇴근해 저녁을 살 테니 자그레브나 더 둘러보라고 말했다. 허나 두 시간이면 갈 이웃 나라 수도를 안 가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녀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자그레브도 내게는 그리 흥미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류블랴나 역에 붙은 주변지도를 노려보고 있는 엄마를 낚아채 기계적으로 시내 중심 광장으로 향했다. 마침 점심시간 즈음이라 골목마다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방긋 웃으며 우아하게 손짓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나가 직접 만들어준 연어 샌드위치가 배낭 안에서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중앙광장에 있는 핑크빛 교회의 계단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가 든 봉투를 동시에 열었다. “아. 날씨 참 좋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엄마가 살짝 달뜬 억양으로 말했다. 정말 제대로 된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그냥 아나네 집에서 쉬면서 빨래나 할 걸 그랬나?” 지난 며칠간 계속 비가 오거나 흐렸기에 옷이 눅눅했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엄마와 나는 멍하니 광장에 앉아 광합성을 즐겼다. 배도 부르겠다 점점 노곤해지더니 이어 수면 바이러스가 달려들었다. 꽤 오랜 시간 꾸벅꾸벅 열심히 졸고 있는데 자전거 벨 소리와 엄마의 ‘어이쿠’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학생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칠 뻔한 모양이다.
학생은 자전거에서 황급히 내린 뒤 무릎을 굽혀 엄마 뒤에 숨은 아이에게 사탕이 가득한 손바닥을 내보였다.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사탕 하나를 골랐고 학생은 다 가져가도 된다는 시늉을 했다. 아이의 엄마와 학생이 서로를 보며 웃었고,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보던 행인들도 미소를 보였다. 물론 엄마와 나도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냥 광장에 앉아 사람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오후였다.
얼마 후 우리가 광장 서쪽에 위치한 재래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을때, 평일이라 그런지 유난히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보였다. 손을 붙잡고 함께 장을 보러 나온 노부부가 채소가게에서 껄껄 웃으며 기분 좋게 흥정을 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와 장바구니를 든 할머니들이 더 좋은 물건을 고르기 위해 눈을 부릅뜬 모습도 유쾌하게 느껴졌다. “다 엄마 또래 분들이네.”라는 농에 엄마는 “아니, 죄다 언니, 오빠들인데.”라고 받아쳤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류블랴나 성의 정상에서 바라본 시내는 참 알록달록했다. 도시의 전체적인 색감이 포토샵으로 쨍하게 다듬은 사진처럼 강렬했다. 날씨가 청명해서만은 아니었다. 노란색도 파란색도 빨간색도 다른 도시에 비해 좀 더 진했다.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살짝 아쉬웠던 걸 보니 류블랴나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결국, 그다지 추천할 만한 도시가 아니라고 말하던 아나의 이야기는 선의의 거짓말로 판정되었다. 내일이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우리와 그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겠지. 엄마와 나는 10분 뒤에 출발하는 자그레브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잰걸음을 놓아 역으로 향했다.
부디 아문 상처가 덧나지 않기를
옛 유고연방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했던 두 나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사실 전쟁의 상흔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만큼 빠르게 내전의 상처를 씻어냈고 이제는 두 나라 모두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될 정도로 급격한 성장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독립을 선언한 후 자국 내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끔찍한 내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끔찍한 학살이 이어졌고 이 동족상잔의 참극은 제3국의 중재로 평화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사망한 시민은 20만 명이 넘었고 난민은 무려 230만 명에 달했다. 현재 수도 사라예보sarajero의 인구가 채 50만 명이 안 되는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곳에 들어섰건만 역시나 믿기 힘든 참혹한 장면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360도 어느 곳을 봐도 마을과 산허리 곳곳에 엄청난 규모의 공동묘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묘비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젊은이들이 총탄에 스러진 것이다. 수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가슴 한편이 먹먹해져 엄마와 나는 그저 침묵했다.
제2의 도시 모스타르의 모습은 좀 나아보였다. 물론 시내에 늘어선 거의 모든 건물에 총탄과 폭발의 흔적이 선명했지만 유명한 관광도시답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불리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가 있는 구시가지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데다가, 이렇다 할 내전의 상흔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구시가지에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 초록빛 강위에 위풍당당히 서 있는 아치형 다리가 보였다. 스타리 모스트는 별칭만큼이나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 다리는 고풍스런 돌담 집과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바위산은 붉은 지붕을 가진 작은 집들을 품고 있었다. 총탄자국이 가득한 도시의 다리치고는 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어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다리를 부산스레 오가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리 역시 다리 난간으로 고개를 내민 채 미소를 가득 머금고 순간을 기록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굳건히 제 자리를 지켜준 스타리 모스트에 왠지 모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한 기념품 가게에서 보게 된 다큐멘터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총탄을 피해가며 스타리 모스트 위를 뛰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을 담기 위해 기자 몇 명이 목숨 걸고 군인을 좇고 있었다.
다리를 향해 무자비한 총격이 이어질 때마다 다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총알을 온몸으로 견뎌내던 스타리 모스트의 중앙부에 거대한 포탄이 정통으로 꽂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엄마와 내가 사진을 찍던 그 아름다운 건축물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강 속으로 처박혔다. 아무리 봐도 방금 전 엄마와 내가 건너왔던 바로 그 다리였다.
가게 안엔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나 역시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뒤 다리가 재건되는 영상이 이어졌지만, 재건된 다리 위에선 내전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불과 5분 정도의 짧은 영상에 콧등이 아려왔다. 누군가가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고 엄마의 눈시울 역시 이미 붉어져 있었다.
가게를 빠져나오자 스타리 모스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400년의 세월을 견뎌냈던 견고한 다리는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쟁이란 재앙 앞에서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영상 속의 군인은 물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 역시 전장의 아비규환 속에 스러져 갔을 것이다. 글로만 보았던 내전의 참상을 너무도 생생히 목격한 뒤에야 지금 발칸반도가 아직 상처가 가득한 땅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기에 애써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스타리 모스트가 완공되던 날이었다. 수많은 다이버들은 다시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며 환희에 찬 얼굴로 다리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렸고 그 뒤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절망을 지워버린 그들의 희망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 노래가 귓가에 울리고서야 콩닥거리던 내 가슴이 겨우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새살이 돋고 있는 그들의 상처가 부디 덧나지 않기를. 이 땅의 평화가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