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한 점 식의 흐름에서 자유로워라” 김성철 교수, 봉축세미나서 불교와 뇌과학으로 자아와 무아 조명 불교와 뇌과학으로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를 조명한 논문이 발표됐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성철 교수는 불기 2559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지난 5월 30일 동국대·중앙승가대가 공동 주최한 봉축국제학술대회에서 ‘불교와 뇌과학으로 조명한 자아와 무아’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딱딱한 학술행사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신선하고 흥미로운 주제로 논문을 발표해와 열성 팬까지 형성하고 있는 김 교수의 발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이날 조계종 국제회의장도 빼곡히 들어찼다. 무아 문제는 불교 학술계에서는 영원한 화두와 같은 주제. 그런데 그 무아를 뇌과학의 연구성과를 통해 입증해보이겠다는 김 교수의 의욕에 동료 학자들은 물론 청중의 사부대중들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뇌과학,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으로 발제를 시작한 김성철 교수의 특유의 빠르고 단정적인 발제를 놓치지 않으려 대중들은 한껏 귀를 쫑긋 세웠다.
■ “데자뷔(déjà vu)인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인도에서 수천 년 동안 모든 학파로부터 비방을 당하던 순세파가 다시 부활한 것일까?”라고 탄식한 김 교수는 오늘의 뇌과학자들의 원형을 고대 인도 갠다. 고대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짜르와까(Cārvāka)라는 유물론자들로 ‘세속(loka)을 지향한다(āyata)’는 의미에서 순세파(順世派, Lokāyata)들을 불러냈다. “순세파에 의하면 세상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요소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요소들이 적절히 결합하여 육체의 모습을 띄게 되면 마음이 발생하며, 죽어서 육신이 소멸하면 마음도 사라진다. 요새말로 다시 표현하면 “세상에는 수소, 산소, 탄소, 질소 등 103가지 원자만 존재하는데 이런 원자들이 모여서 몸이 형성되면 거기서 마음이 새롭게 나타나지만, 육체가 사라지면 그런 마음도 사라진다.” 김 교수는 순세파의 주장에 따르면, 천국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다. 사성(四姓)계급 속에서 직분을 다해도 그 어떤 효력도 생하지 않는다고 소개했다. 이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게 하고 빚을 내서라도 버터를 먹게 하라. 일단 몸뚱이가 재가 되면,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만일 몸을 떠난 영혼이 있어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라면, 친지가 그리운 그가 돌아오지 않을 리 있겠는가? 따라서 제사장들이 만든 규범은 그들의 생계를 위한 것일 뿐, 망자를 위해 그 어떤 제사를 지내도 어디서도 결실은 생하지 않는다”고 부연했다. 순세파의 주장은 오늘날 뇌과학자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순세파가 새롭게 태어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눈에 우리 몸은 단백질, 지방, 칼슘 등 갖가지 분자들의 모임일 뿐이다. 사람이 죽어서 그 시체를 화장하면 그 몸을 이루던 분자들은 모두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그 사람 역시 사라진다. 따라서 죽음 후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영혼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거나 축원을 하는 일은 모두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사실 이런 순세파의 유물론은 ‘사상’이나 ‘철학’일 것도 없다”고 비판한다. 누구든 감각된 것과 경험한 것에만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게 되며 순세파의 이 같은 유물론은 고대 인도에서 다른 모든 학파들로부터 가장 혹독하게 비판받고 경멸을 당했던 사상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 그러나 유물론은 여전히 강하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1년 5월 시사전문지 <가디언>과의 대담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물론적 세계관을 토로한 바 있다. “나는 지난 49년 동안을 계속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죽으려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나는 뇌가 부속품이 망가지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고 생각한다. 부셔진 컴퓨터에게 천국이나 내생은 없다. 그것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꾸며낸 얘기다.” 한 마디로 “죽음으로 인해 뇌가 작동을 멈추면 그 부산물인 마음 또는 정신 또는 의식 역시 사라진다. 내생도 없고 전생도 없고 윤회도 없다”는 것이 고대 인도의 유물론자들과 현대의 뇌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김 교수가 이들의 주장을 그냥 넘길 리는 만무. 유물론자들의 허구를 짚어내는 그의 ‘화려한’ 논증이 시작된다. “두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장치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우리의 마음에서 절대로 객관화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철학자들이 ‘감각질(感覺質, Qualia)’이라고 부르는 주관적 체험이다. 내가 맛 본 소금의 짠맛을 남이 전혀 알 수 없고, 내가 느낀 치통을 남이 결코 체험할 수 없다. 미각이나 촉각뿐만이 아니다. 내 눈에 비친 붉은 색의 느낌을 남이 전혀 알 수 없다. 모든 사적(私的) 체험이 다 그렇다. 모든 사적 체험만 그런 게 아니다. 뇌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에 비추어 보면 인간은 물론이고 생명체의 모든 체험이 다 그럴 것이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이 우리들 각자 하나씩 갖고서 혼자만 보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와 같다. 모든 것이 나의 주관적 체험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주관(主觀)은 내가 보는 관점이고, 객관(客觀)은 남과 공유하는 관점이다. ‘주관적’이란 ‘내가 보는 관점에 근거한’이라고 풀이되고, ‘객관적’이란 ‘남과 공유하는 관점에 근거한’이라고 풀이된다는 것이다. ■ 주관!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실재하는데, 체험되는 것은 나의 주관뿐이다. 남의 주관은 그 존재를 추측할 수는 있어도 체험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 또는 의식은 주관에서만 작동한다. 이런 주관, 마음, 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일미진중함시방’에서 ‘일미진(한 점의 티끌)’과 ‘함시방(온 우주가 담김)’을 구분할 때, ‘한 점 티끌 크기의 어느 한 지점(一微塵)’에도 ‘온 우주의 모든 정보(十方)’가 담겨있다(含).여기서 바로 그 ‘한 점’이 바로 객관이라면, 그 안에 ‘담긴 온 우주’는 그 ‘한 점’의 주관적 측면이다.
자동차에 비유해 보자. 같은 하나의 자동차인데도 밖에서 본 모습과 안에서 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밖에서 본 자동차는 ‘일미진’과 같이 국소적이지만, 안에서 본 자동차는 ‘함시방’과 같이 전체적이다. 밖에서 본 자동차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지만, 안에서 본 자동차는 세상 전체다. 전자는 객관이고, 후자는 주관이다. 두 모습이 전혀 다르지만 같은 자동차의 양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우주의 그 어떤 지점을 잡아도 그 지점은 객관과 주관의 양 측면을 갖는다. ‘일미진’의 측면과 ‘함시방’의 양 측면을 갖는다. 그래서 의상 스님의 법성게에서는 ‘낱낱의 미진에도 역시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고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어느 한 지점을 잡아도 그 점 속에는 시방의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3차원 우주상의 그 어떤 좌표점도 ‘한 점’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함시방’이라는 주관적 측면이 함께한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가 공동 주최한 불교와 뇌과학 주제제의 봉축세미나 모습. 김 교수는 우리 인간의 ‘주관성’[心]은 진화과정에서 창발한(Emergent) 것이 아니고 생명체[衆生]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물리적인 공간[佛]의 모든 지점에 ‘주관성’이 잠재하고, 우리가 사는 3차원 우주의 본질이자 우주 그 자체인 비로자나부처님[佛]의 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다르지 않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설한다는 것이다.
김성철 교수는 이어 무아에 대한 통찰, 즉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자아는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나라고 착각하는 아(我)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식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는 현량(現量, Pratyakṣa)과 비량(比量, Anumāṇa)의 두 가지가 있다. 현량은 지각(Perception), 비량은 추리(Inference)에 해당하는데, 현량은 다시 ①감각지(indriyajñāna), ②의식(manovijñāna), ③자증지(自證知, ātmasaṃvedana), ④현관지(現觀知, yogijñāna)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①감각지는 문자 그대로 눈, 귀, 코와 같은 감관에 의한 지각이고, ②의식은 의근에 의한 지각, ③자증지는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에 대한 지각, ④현관지는 불교수행의 견도(見道)에서 일어나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직관이다. <니야야빈두>에서는 이 가운데 ②의식(意識, manovijñāna)에 대해 ‘자기의 대상(svaviṣaya)과 인접한 대상(anantaraviṣaya)의 共助(sahakārin)에 의해, 즉 감각지(indriyajñāna)에 의하고 등무간연(等無間緣, samanantarapratyaya)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김성철 교수의 논문은 ‘현란’하다. 각종 도표와 수학공식, 물리학 공식이 ‘난무’한다. 불교를 이렇게 현대적 학문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는 교수가 또 있을까. 문헌학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쩌면 그 분야조차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한국의 불교학계에서 김 교수는 역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학자임에 틀림이 없다.
“실재하는 것은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식(識)의 흐름’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 김 교수는 이를 달리 표현하면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자상(自相)의 흐름’일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 김 교수의 논의는 다시 ‘뇌과학의 무아론(無我論)- 좌뇌 해석기가 만드는 가아(假我)’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뇌는 ‘자아’라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자아’는 우리로 하여금 경험을 갖게 하고, 우리의 생각과 의도와 몸 그리고 우리의 행위들이 마치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위조한다.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는 느낌(sense)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알게 된 것을 이용하여 우리의 행위를 조절하게 한다.” 무언가를 지각하고 회상하고 행동하는 등 갖가지 경험은 있지만 이를 총괄하는 자아는 없다고 김 교수는 단언한다. 우리의 느끼는 자아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 낸 가아(假我)이고, 보다 엄밀히 말하면 실재하는 것은 매 순간 일어나는 체험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뇌과학은 불교의 무아설(無我說)과 만난다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다. “실재 세계에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신기루와 같은 삼라만상은 법칙에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전개된다”고 전제한 김 교수는 “그것이 ‘의존성’이라고 풀이 되는 ‘연기(緣起)의 법칙’”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이처럼 실재하지는 않아도 꿈과 같이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30수의 노래로 풀어낸 세친(世親, Vasubandu)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첫 게송과 그에 대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의 풀이를 소개했다. 게송: 거짓되게 자아와 법을 설하기 때문에 갖가지 모습들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식(識)에 의지하여 변화한 것들인데, 이렇게 변화시키는 작용은 단지 세 종류뿐이다.
김 교수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가아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뇌과학과 불교가 만나지만 내생이나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뇌과학은 불교와 다르다”며 “고대 인도의 유물론 역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무아론이지만, 내생이나 윤회조차 부정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다르다”고 밝혔다. 즉 뇌과학과 순세파의 이론은 ‘무아론적 단멸론(斷滅論)’인데 반해 불교는 ‘무아론적 윤회론’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현대의 뇌과학 연구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유물론으로 기우는 이유는 과거의 일반적인 ‘자아관’이 무너졌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서구전통의 경우 일반적인 자아는 감성(Sensibility)과 오성(Understanding)과 이성(Reason)으로 이루어져서 회상도 하고 상상도 하며, 지각도 하고 추리도 하는 자아였고 그것이 단일한 영혼이고 정신이었으나 마음에 대한 이러한 생각, 즉 서구전통의 일반적인 자아관, 영혼관은 뇌손상 환자들의 증례와 상치되면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고 부연했다. 전두엽의 손상으로 감성에 장애가 생긴 피니어스 게이지의 증례, 측두엽 제거 수술로 해마가 제거되어 장기기억 능력을 상실한 H.M.의 증례, 특이한 인식체계로 살아가는 편측무시증이나 상모실인증 환자들, 파킨슨 질환, 알츠하이머, 우울증, 조현병 등에서 보듯이 감성, 오성, 이성, 기억, 지각, 추리 등이 ‘단일한 영혼’의 속성이나 작용이 아니라 ‘뇌를 구성하는 다양한 신경망이 공조하여 만들어내는 기능’들이며, 따라서 뇌과학자들이 얘기하듯이 ‘자아’란 그런 기능들을 종합하여 뇌가 만들어낸 ‘가아(假我)’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면 자아인 마음은 물질인 뇌에서 창발한 것이고, 육신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가? 육신의 죽음과 함께 그야말로 온 우주가 폭발하는가? 라는 물음이 생겨날 수 있다고 가정한 김 교수는 “우리의 마음이 ‘감성과 이성과 오성을 갖추고 기억하고 지각하고 추리하는 기능을 하는 단일한 영혼’이라면 그럴 것이지만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마음의 본질을 ‘무상하게 명멸하는 한 점 식의 흐름’이라고 규정할 때 뇌 손상 환자들의 여러 증례와도 어긋나지 않으며 윤회와 해탈이라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뇌의 신경망은 ‘마음이 창발하는 곳’이 아니라 역(逆)으로 ‘한 점 식(識)으로서의 마음이 타고 흐르는 궤도’라는 것이 김 교수의 결론이다. 김 교수는 마음의 본질을 ‘주의를 타고 흐르는 한 점의 식’이라고 규정할 때, 그 기능에 대해 통일된 해석이 없는 뇌파(腦波)에 대한 연구도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 교수는 이와 관련된 기기를 직접 발명하여 특허를 내어놓고 있기도 하다. 김 교수는 논문 발표 뒷부분에서 이렇게 묻는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는 없겠으나, 불교학자를 ‘해탈의 길을 인도하는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 그는 이 질문에 대한 ‘지도’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진화과정에 대응하여 뇌는 ‘본능의 뇌’, ‘감성의 뇌’, ‘사고의 뇌’의 삼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대로 ‘파충류의 뇌’, ‘변연계’, ‘신피질’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탐욕, 분노, 우치(愚癡), 교만과 같은 번뇌 가운데 우치는 ‘사고의 뇌’와 관계되고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같은 정서는 ‘감성의 뇌’나 ‘본능의 뇌’와 관계된다. 그런데 불교의 깨달음은 이런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계(戒, 윤리), 정(定, 집중), 혜(慧, 지혜)의 삼학(三學)을 통해 성취된다. 이 가운데 계행은 뇌의 세 층위 가운데 ‘감성의 뇌’와 ‘본능의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수행이다.
십선계(十善戒)를 예로 들면 ‘①살생하지 않고, ②도둑질하지 않으며, ③음행하지 않고, ④거짓말하지 않으며, ⑤욕하지 않고, ⑥이간질하지 않으며, ⑦꾸며서 말하지 않고, ⑧욕심내지 않으며, ⑨분노하지 않고, ⑩삿된 종교관을 갖지 않는’ 계행을 통해 탐욕과 분노와 교만 같은 동물적 감성에서 벗어나고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난다. 계목(戒目)을 바라제목차(Pratimokṣa)라고 부른다. 동물적 본능에서 벗어나게(mokṣa) 해 주는 낱낱의(prati prati) 조항들이라는 뜻이다.” 김 교수는 이어 ‘사고의 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수행이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雙修) 선(禪)수행이라며 선 수행의 가치를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정리한다. “곰곰이(止, samathā) 생각하는(觀, vipassanā) 선수행이다. 나와 세상,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 그 모든 것이 ‘연기(緣起)한 것이라서 공(空)하다.’는 점을 자각하여 고정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사고의 뇌’인 신피질 도처에 형성되어 있는 고정관념의 신경회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렇게 감성의 속박(修惑)과 인지의 속박(見惑) 모두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교적 깨달음이다. 뇌가 어떤 특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뇌에 가득한 ‘감성의 신경망’과 ‘인지의 신경망’의 속박에서 ‘한 점 식의 흐름’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탈한 ‘한 점 식의 흐름’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적멸에 든다. 본능과 감성과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생명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 더 이상 미련이 없기(無願三昧) 때문이다. 아라한의 죽음이다. 완전한 열반이다. 더 이상 내생이 나타나지 않는(不受後有) 대열반이다. 그래서 모든 아라한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다시] 탄생[함]이 파괴된다. 청정한 행을 완수했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나에게] 내세의 삶은 없다고 안다.’ 자신이 깨달았다는 자각(解脫知見)이다.” [출처: 미디어붓다 | 2015.06.09]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