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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받는 보상(마 10:40-42)
예수님의 가르침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 본 것처럼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결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칼로 싸워서 승리해야 얻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세상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자아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앞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헌신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대가도 치르지만 하늘로부터 포상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고생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고난과 고생은 보람과 보상이 있을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 있습니다. 고난이 불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얼마나 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의미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의미가 있다면 직장에서 쫓겨나도 괜찮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의미가 있다면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므로 고생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은 내가 겪는 고난에 아무런 보람과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환경에 메이고 사람에게 메여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도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들고 어렵지만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12:2절에 보면 "그는 그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그 앞에 있는 영원한 부활의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그 '의미'라는 것은 땅의 보상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보상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받게 될 보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는 가장 큰 특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동일한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큰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낸 분을 영접하는 것과 꼭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높여 주시는 그런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파송"이라는 것입니다. 보내는 일이 없다면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신앙이란 떠나는 것이요, 보내는 것입니다. 어둠과 부패가 있는 곳에 빛과 소금을 파송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역할이 없다면 우리가 세상속에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과 전쟁이 있는 곳에 의과 생명과 사랑을 파송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편안하기를 원합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떠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지상 천국을 이루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 이 악한 세상에 네가 뛰어 들어가서 그것을 변화시키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영접'입니다. 영접이 바로 축복입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똑같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16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아주 엄청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실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2:1-3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특권과 축복을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부와 성자와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긴밀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도 절대적인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고 축복하셨는데 여기에는 마치 한 국가와 국민을 대표해서 파견한 대사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대사가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 국가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그 국민을 거역한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사의 자격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 4:14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간증합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는 사도 바울이 위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모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세상에서 대가를 치르는 동시에 받게 될 영광스러운 복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을 맡은 목사나 전도사가 교사가 여러분보다 낫고 위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뽑아 주셔서 복음의 일군으로 삼아 주시고 교회의 사역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나이가 어려도 부족한 점이 많아도 주님의 일군으로 인정해주고 주님을 대하는 것처럼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를 들어서 이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1. 선지자의 예(14절).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선지자란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란 그 본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9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선지자의 이름으로"라는 뜻은 "선지자인 까닭에" 또는 "선지자란 이름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지자와 같이 예언하고 설교하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받는 상은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선지자를 영접하고 선지자를 돕는 것이 곧 선지자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한 예가 열왕기상 17장에 나타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때 삼 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그때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서 살게 하셨고 까마귀들을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비가 계속 오지 않으므로 시내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를 만나 대접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사르밧에 가서 한 과부를 만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게 한 과부는 놀랍게도 몹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엘리야는 그녀를 만나 떡과 물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녀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는 떡이 없고 다만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약간이 남아 있는데 이것으로 마지막으로 떡을 해서 아들과 내가 먹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당신을 대접할 것이 없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두려워 말라. 그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먼저 나에게 주고 다음에 너와 너의 아들이 먹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기꺼이 선지자를 대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는 그 가난한 과부에게 이렇게 축복하였습니다.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 통에는 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병에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 통과 병에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채워져서 가뭄 속에서도 이 가난한 과부는 풍성하게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를 대접한 사람에게 선지자의 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예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언자란 언제나 외롭고, 고독하고,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란 미래를 예언하는 점장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시의 현실의 부정과 부패, 불신앙과 죄악에 대해서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죄악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미리 예언해 주는 사람이 바로 예언자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란 현실 개혁가였고 현실 참여자였습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계속 죄악가운데 살면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예언하였던 사람들이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지도자들이나 기득권을 가진 종교 지도자들이 몹시 싫어하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좋은 환경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쫓겨 다니고 핍박을 받고 미움을 받는 대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목사를 통해서 아니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문제점들을 깨우쳐 줄 때 겸손한 자세로 교훈과 책망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야기이든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한번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주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내게 말씀을 주셨다는 신앙적 자세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잠언서를 묵상하면서 가장 큰 깨달음 중에 하나는 지혜자는 책망을 잘 듣고 수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잠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 1:25-26)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예수님에게도 이런 선지자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선지자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의인의 예(41절)
41절,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창세기 18:3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1에는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예루살렘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의인이 큰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의인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누구이겠습니까? 의인이라는 어원적 의미는 죄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죄를 안짓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용서받은 죄인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래서 칭의라는 말은 법적인 용어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의인인 까닭에" "의인이라는 이름때문에" 의인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사람에게는 의인이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씌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상급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제자의 예(42절).
사실 앞에서 말한 선지자나 의인의 예는 세 번째 예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경우입니다.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선지자나 의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이런 특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에 또는 또는 제자란 이름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주의 종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대접하면 하나님은 결단코 그것을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그것을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종말의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 보면 양의 편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 때 저들은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반대 편에 선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그때에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인 까닭에, 제자라는 이름 때문에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나 지극히 작은 성도에게 대접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과 지극히 작은 그리스도인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한 구두 수선공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 전날 밤 노인의 끔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일 크리스마스날 할아버지를 방문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인은 크리스마스 때만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 놓고 구둣방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청소부 외에는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 건너편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좀 녹이고 커피라도 들어요" 청소부는 빗자루를 던져두고 들어와서 언 몸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점심때가 되도록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아이를 싸들고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노인은 측은히 여겨 여인을 가게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무심코 아기의 발을 보니 빨갛다 못해 파랗게 얼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신발이 필요할텐데, 쯧쯧!" 하면서 어젯밤에 보았던 조그마한 신발을 찾아 신겨 주었습니다.
이미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준비를 위해 올려 둔 스프와 빵이 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떼의 거지들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먹을 스프와 빵을 주었습니다. 거지들은 모처럼 성탄절에 행복했고 파파파노도 기뻤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결국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의자에 털석 주저앉으며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꿈이었던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혹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내가 놓쳐 버렸나?"
이 때 갑자기 어디선가 꿈 속에서 들렸던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파파파노씨! 나를 보셨지요? 나는 오늘, 당신의 가게에 세번이나 방문하였지요. 청소부로, 아이를 안은 누추한 여인으로, 거지로 말이에요 나에게 베푸신 따스한 사랑,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높은 하늘 보좌로부터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것도 구유에 나시기까지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따스한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의인의 이름으로" 그리고 "제자의 이름으로"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하였으면 우리가 좀 더 편할텐데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든지 다른 형제를 대접하고 섬기는 것을 결단코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 누구를 도와준다 할지라도 그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였을 때 주님께 행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도와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와주기를 주저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 사람의 이름으로 도와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도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정신은 요한일서 4:20의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어떤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라거나 "인류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거지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거지가 바로 인류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형식과 외식에 빠지지 말라. 눈에 보이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선지자를 배척하지 말라, 의인을 배척하지 말라, 전도자를 배척하지 말라. 오히려 선지자의 이름으로, 의인의 이름으로, 복음 증거자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섬기라"하는 뜻이 이 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보내어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어둠을 몰아내고 썩어가는 곳에 소금이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직접 나갈 수 없다면 보내어진 선교사들을 돕는 것입니다. 내가 꼭 그 일을 해야만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도울 때 그 사람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사역하는 이를 돕거나 그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가난한 소자에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기억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도움이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최선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의 이름으로 이 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