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엄마를 추모하며…
싯다르타의 고민은 생로병사였다. 생로병사에서 피어나는 삶의 고통이었다. 생로병사는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의문을 풀고자 싯다르타는 출가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일과 일 사이, 세상과 세상 사이에서 고통은 언제나 찾아온다.
어제 호주 멜버른에 살고 있는 지나 엄마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나 엄마는 지난 2년 동안 백혈병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건강했던 보살님이셨는데. 반쪽을 상실한 존의 슬픔은 얼마나 클까?
내가 지나 엄마를 만나게 된 것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10월 24일 나는 아내 정희와 함께 태즈메이니아를 가기 위해 멜버른 공항에 도착했다. 그 당시 정희는 심장병이 극도로 악화하여 이식하지 않으면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심장 주치의에게 호주로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더니 “제주도 정도 가는 비행이면 모르겠는데,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면 심장에 크게 부담이 되어 위험합니다. 이식수술을 받은 다음에 여행을 가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극구 말렸다. 그런데도 아내와 나는 호주여행을 강행했다. 죽어도 좋으니 호주여행을 가겠다는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멜버른 공항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지나 엄마와 존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지나 엄마와 존을 처음 만났다. 존은 서양인 중에서도 키가 유난히 컸다. 그에 비해 지나 엄마는 동양인 중에서도 키가 아주 작은 편이었다. 공항에 마중을 나온 두 분을 처음 보는 순간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면부지로 처음 만난 그들이 어쩐지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친구처럼 다정했다. 어쨌든 우리는 지나 엄마 집에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 태즈메이니아로 건너갔다. 태즈메이니아 여행을 끝내고 다시 멜버른으로 돌아오니 존과 지나 엄마가 공항에 또 픽업을 나와 우리는 지나 엄마 집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멜버른 근교를 여행했다.
지나의 집에는 1층과 복도에 불상을 모셔 놓았고, 존은 날마다 그 불상 앞에서 참선했다. 서양인으로는 너무 진지한 태도였다. 어느 날은 존과 함께 멜버른 근교에 있는 수행센터를 찾아가 함께 명상을 하기도 했다.
지나 엄마와 존은 인도에서 만났다고 했다. 두 사람 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도를 방랑하고 있다가 콜카타 타고르 대학에서 만났다고 했다. 존이 지나 엄마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러게 만난 두 사람은 인도 방랑을 끝내고 호주로 돌아와 결혼했다고 한다.
멜버른에서 우리는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통했다. 심장병으로 잘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던 아내가 그렇게 긴 비행을 하고도 끄떡없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건강상태가 더 좋아졌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여행이 주는 묘약이랄까?
지상 스님의 소개로 그들을 만난 것은 필연이었을까? 우리의 삶과 만남은 우연이 없다고 한다.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은 각각 특별한 존재이다. 누구든 항상 그의 무언가를 남기고, 또 우리는 무언가를 가져간다. 많은 것을 남긴 사람도 적은 것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무엇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누구든 단순한 우연해 의해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연 법으로밖에 풀 수 없다. 우리가 지나 엄마와 존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과거 생부터 지어온 인연에 의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 후, 4년이 지난 2011년 9월 지나 엄마와 존이 지리산을 찾아왔다. 그들이 지리산을 찾아왔을 때 우리는 구례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2008년도에 심장이식을 받고 기적적으로 회생해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2박 3일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조이너스 커피를 마시고, 화엄사와 사성암을 방문했다. 사성암에서 존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다. 사성암 마애불에 참배를 하고 소원바위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소원바위에서 올린 존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나 엄마가 한때 머물며 수행을 했다는 곡성에 있는 수종사도 방문했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인 지나 엄마는 몇 년 동안 수종사에 머물며 공양주 보살로 수행을 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진지하게 깨닫기 위하여 인도로 건너가 타고르 대학에서 수행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존을 만나 결혼을 하고 지나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지나 엄마는 매우 건강하고 성격도 활달했다.
우리는 카톡을 통해서 수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우리들의 대화는 주로 수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번 전화하면 거의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갑자기 백혈병을 앓게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한때는 병이 다 나았다고 기뻐하며 전화가 왔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정말 반가웠다. 그러다가 다시 병이 재발하여 그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거사님 우리 다음 생에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나요.”
지나 엄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 후로는 지상 스님을 통해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제 영면을 했다는 소식을 지상 스님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지상 스님은 오래전 멜버른으로 포교 활동을 하러 갔다가 지나 엄마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지나 엄마는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났으리라고 믿는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던가? 고통의 바다가 바로 우리의 삶이다.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피어난다. 고통을 피하고 살 수는 없다. 스스로 세운 삶의 잣대에서 어긋나는 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통은 찾아온다. 싯다르타는 그걸 깊이 이해했다. 싯다르타는 고통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그는 보드가야 보리수나무 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그 고통의 원인을 깨달을 때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새벽별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슬픈 일을 당하고도 슬프지 않을까?
오래전 싯다르타가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보드가야를 아내와 함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른 새벽 보드가야는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새벽인데도 금강대좌에는 순례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 스리랑카에서 온 순례객, 푸른 눈의 운수납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진언을 외우며 금강좌를 돌거나, 수천 배 절을 하는 하기도 했다. 그들의 태도에서는 모두가 간절함이 묻어났다.
안개 때문에 싯다르타가 보고 깨우쳤다는 새벽별은 볼 수가 없었다. 아름드리 보리수나무가 드리워진 금강대좌에서 합장을 하고 반야심경을 낭독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반야심경을 낭독하던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금강좌에아 나와 보리수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울었느냐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울음이 터졌어요.”
아내의 대답이었다. 과거생의 업장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을까? 삶은 참으로 오묘하다. 죽을 때까지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절대 빠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가 한순간에 녹아내리기도 한다. 그 상처는 씻어내야 할 업장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리고 용기가 생긴다. 수행은 깊어지고 ‘바람에 걸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되어간다.’
지나 엄마는 지금쯤 깨달음을 얻고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슬퍼만 할 일이 아니다. 깊이 슬퍼할 때 우리는 항복에 대해 배운다. 그 깊은 슬픔은 건강하고 지혜로우며 우리를 정화시킨다.
삶과 죽음은 백지장 하나 차이다. 삶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 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지나 엄마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