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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 ·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현재)
1851년 7월 28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아내가 줄리언과 나를 붉은 농장에 남겨 두고 처형 엘리자베스와 첫째 우나, 막내 로즈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 애늙은이가 하는 말.
‘아빠, 애기가 가니까 좋지 않아?’
내가 동조할 거라고 믿는 줄리언의 자신감에 좀 어이가 없었다.
‘왜 좋은데?’
‘왜냐면 이젠 마음대로 소리를 꽥꽥 지를 수 있으니까!’
줄리언은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는 반시간 동안 고막이 찢어져라 마음껏 소리를 질러댔다.
1851년 7월 29일 화요일
여섯 시에 일어났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부는 아침. 우리 동네의 경계를 짓는 언덕 위로 뭉게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쳤다.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토끼가 자연에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사시나무같이 떨면서 계속 움직인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걸 보면, 귀의 움직임으로 녀석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은 움직이며 자기 우리로 갔다가 잠시 앞을 살펴보더니 풀이며 잡초를 먹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다시 깜짝 놀라고, 재빨리 안심한다.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아주 민첩하게 좀 뛰다가 한바탕 바람이 불면 마른 나뭇잎처럼 날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이 그리 고통스러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먹은 음식마다 피컨드 소스가 가미되어 있듯이, 두려움과 뒤섞여서 사는 것이 녀석의 천성이다. 오히려 우둔하고 굼뜬 토끼를 위험으로부터 살려주는 셈이다. 녀석은 햇빛이 비치고 넓고 탁 트인 곳에 나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 같다. 본능적으로 그늘 속, 말하자면 덤불 숲 그늘, 아니면 줄리언이나 내 그림자를 찾는다. 넓은 마당에 놓인 녀석은 자신이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빠진 저면인사라도 된 양 줄리언의 무릎으로 파고들 기회만 엿보았다.
1851년 7월 30일 수요일
차갑고 음산한 아침에 남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걸로 보아 비가 올 것 같다. 줄리언이 어슬렁거리다가 바닥에 누웠다가 하는 모습이 조금은 날씨 탓 같다.
오후 네 시가 되자 나는 줄리언에게 옷을 입혀서 마을로 나갔다. 줄리언은 염소 새끼처럼 뛰어다녔고 천국의 아이마냥 꽃을 모았다. 꽃은 줄리언의 눈에만 예뻐 보였지 별로 예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줄리언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꽃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7월 31일 목요일
오늘도 구름이 서쪽 언덕의 산마루에 길게 드리워져 마치 젖은 스펀지처럼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어두침침하고 스산한 날이었다. 숲이 우거진 구릉 중턱은 어둡고 움침하고 적막했다. 모뉴먼트 산도 뒤편에 구름을 업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이 산의 능선을 따라 비추어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태양이 산의 능선을 따라 비추어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풍경 가운데에 햇빛이 생기발랄한 심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른 구릉지 숲과는 대조를 이룬 그 숲은 마치 등불을 켜놓은 듯했다. 환하게 밝혀진 궤적은 햇빛을 두 배로 받는 것 같았고, 호밀 밭은 그 아래에서 노란 빛을 발해 풍경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
1951년 8월 1일 금요일
오늘도 차갑고 우중충한 날이었다. ~~~머리 위에서 구름이 잔뜩 모여 비밀스럽게 회합 중이었지만 드문드문 파란 하늘이 보였고 물기를 머금은 햇빛이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첫 콩을 수확했다. 사실 까치밥나무 열매와 상추를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거둔 수확물이다.
1851년 8월 2일 토요일
마치 태곳적부터 시작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듯 한 정말 상쾌한 아침이었다.
1851년 8월 7일 목요일
오후까지 소나기가 이어졌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구름이 계곡을 가로지르며 어리 위에 지붕처럼 낮게 드리워져 언덕 양쪽에 거의 닿을 것 같았다.
폭풍우의 중앙에 드리운 먹구름 아래에서 우리는 저 멀리 화창한 날씨를 즐기고 있을 맞은편의 밝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너무 낮게 깔리어 우리는 마치 텐트 아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고, 성큼 다가온 텐트 입구를 통해 화창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1851년 8월 8일 금요일
열한 시에서 열두 시 사이에 허먼 멜빌이 듀이킹크 씨네 사람 둘을 말 두 필이 끄는 사 인승 포장마차에 태워 찾아왔다.
우리는 나무 아래에서 시가를 피운 다음 문학 이야기와 다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4.5킬로미터 떨어진 핸콕에 있는 셰이커교도 마을을 방문했다.
편리하게 설계된 벽돌집은 바닥과 벽이 광택 나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회반죽은 대리석처럼 부드러웠다. 모든 것이 너무나 깔끔해서 똑바로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암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쓴 흔적이 없는 타구가 입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길게 놓여 있었다. 성별에 따라 숙소 입구가 나뉘어 있었는데, 각 방에는 한 명도 자기 힘들어 보이는 침대가 두 줄씩 놓여 있었다. 노인은 침대 하나에 두 명씩 잤다고 말했다. 방에는 세면하거나 목욕하는 시설이 구비되지 않았고, 대신 입구에 세면대와 세숫대야가 있는 걸로 보아 그곳에서 모든 위생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 같았다. 그들이 청결하고 깔끔한 척하는 이면에 얇디얇은 천박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셰이커교도는 추잡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사생활이라고는 철저하게 없다. 남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나(두 남자가 태연히 한 침대에서 자기도 한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감시하는 이런 행동은 생각하기도 싫고 구역질이 난다. 이런 곳은 일찌감치 사라져버리는 편이 낫다. 정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어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 대단한 집에서 우리는 살집이 잡혀 둥글둥글하고 땅딸막한 노부인과 아홉 살에서 열두 살 사이로 보이는 두 소녀를 보았다. 이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음흉하게 우리를 곁눈질했다. 다른 방의 문가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일하는 여인들이 보였다. 평안함이 느껴졌지만 끔찍한 중노동으로 농락당하는 것일 뿐이었다. 여자들은 창백해 보였고 남자들은 아무도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 문명화된 세상에서 분명 가장 기괴하고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종파와 체계가 사리지고 나면, 셰이커교의 역사는 가장 궁금증을 일으키는 기록이 될 것이다. ~~~다섯 시 즈음에 우리는 그 마을을 떠났다.
몰려드는 피곤이 즐거웠던 기억을 모두 잠식해버렸다. 줄리언은 침대에 누워 그지없는 만족감과 평안함을 느꼈고, 내가 계단을 밟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열한 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충만하고 풍부한 달빛이 드리운 아름다운 밤, 잠자리에 들지 말고 차라리 10킬로미터를 달려 피츠필드로 가야만 할 것 같다.
1851년 8월 9일 토요일
산등성이 전체에서 연무가 피어올라 모뉴먼트 산이 마치 포화로 뒤덮인 전쟁터 같았다.
1851년 8월 10일 일요일
오늘 엄청난 수의 엉겅퀴를 때려눕히고는 줄리언이 말했다. “온 세상이 거대한 바늘 밭이야.”
1851년 8월 11일 월요일
한 남자가 사륜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곧 그 뒤를 이어 두 여인과 구레나룻이 난 신사가 사 인승 사륜 쌍두마차를 타고 숲 속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며 지나갔다. 반대쪽에서는 한 소년이 짐마차를 몰고 왔는데, 그 아이의 엄마와 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가 안에 있었다. 그 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다가와 길 잃은 닭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오늘 아침 이 길을 지나다가 닭 몇 마리가 마차에서 빠져나갔는데 이제 찾는 중 인 것 같았다. 정말 찾고 싶은 마음이라면, 나무에 있는 새라도 불러 모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도 그들은 닭을 찾고 있었는데, 소년이 꼬꼬야, 꼬꼬야, 꼬꼬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묻어있었다. 그 아이가 닭을 불러 찾아도, 닭들은 이미 숲으로 흩어져 자고새와 짝짓기를 해서 야생 종자를 만들어낼지 모를 일이다.
1851년 8월 12일 화요일
아침 식사 후에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자 목요일에 돌아온다고 알리는 피비의 편지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1851년 8월 15일 금요일
피비가 어제 도착했는지 확인하려고 워드 씨가 다섯 시 반이 지나서 왔다. 이 점이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엘리자베스는 나에게 워드 씨가 피비를 수요일에 데려다 줄 거라고 썼다. 그런데 그는 사정상 그날 오지 못했고, 아내는 미노트 부인과 목요일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피비는 어디에 있는 걸까?
1851년 8월 16일 토요일
지금 시계로 거의 여섯 시가 되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 확실히, 꼭, 반드시, 틀림없이, 오늘 밤에 올 것이다. 위의 글을 쓰고 난 뒤 십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모두 무사히!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언어로 각인한 유년 시절의 초상 - 폴 오스터]
<줄리언>은 문학사에서 이름난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1851년 7월 28일부터 8월 16일까지 매사추세츠 주의 레넉스에서 집필된 이 글은, 거의 읽힌 적이 없는 방대한 분량의 희귀하고 비밀스러운 기록물인 호손의 <아메리칸 노트북>에 오십 쪽 분량의 간략한 별권 형태로 파묻혀 있었다. 이 작품을 쓰기 한 해 전 6월, 호손은 아내와 함께 두 아이, 우나(1844년 출생)와 줄리언(1846s년 출생)을 데리고 버크셔에 자리한 붉은색의 아담한 농가로 이주했다. 이듬해 1851년에 셋째 로즈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소피아 호손은 두 딸과 자신의 언니 엘리자베스 피보니와 함께 레넉스를 떠나 보스턴 외곽 웨스트 뉴턴에 사는 친부모를 방문했다.
아내가 없는 일상을 기록한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호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작가도 해보지 않은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거장의 섬세하면서도 꼼꼼하기 이를 데 없는 육아 일기였다.
1848년 3월 19일 일요일, 세일럼의 세관에서 근무하던 호손은 두 아이의 행동과 장난을 기록하는 데 온종일을 바쳤다. 첫째는 네 살이었고 둘째는 채 두 살이 못되었다. 장장 열한 시간 동안 일어난 온갖 변덕과 기분 변화를 빠짐없이 성실하게 아홉 쪽에 걸쳐 적어 내려갔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은 19세기의 아버지상을 상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도덕적 판단은 물론이고 귀에 거슬리는 참견은 전혀 하지 않았던 아버지 호손은 유년기의 사실적인 초상을 탁월하게 완성했다. 이 뛰어난 문장들이 그 유년 시절의 초상을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간직하게 할 것이다.
「우나가 줄리언에게 손가락을 내밀자 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귀여운 남자아이는 다 큰 어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낸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3월 23일 목요일에 호손은 똑같은 기록을 남겼으며 1849년에 여섯 차례 더 기록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노트북>의 백 주년 기념 판에 삼십 쪽 분량으로 그 내용이 소개된다. ~~~다음은 1849년 1월 28일에 쓴 글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전광석화 같아서 덧없고, 불확실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때 빛난다. 하지만 그 존재를 확신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같은 해 7월 30일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는 나를 겁에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요정인지 천사인지, 아니면 초자연적 존재인지 알 수가 없다. 무엇이든 대답하게 정곡을 찌르다가도,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움츠러들기도 하는 그녀는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있었다. 무감각한 것 같다가도 때로는 사물의 면면을 모두 알고 있다. 딱딱하기 그지없다가도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가도 그렇게 슬기로울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출몰하는, 선악이 한데 뒤섞인 유령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반면 남자아이는 늘 한결같았으며, 나와의 관계에 변함이 없었다.」
1851년 여름이 되자, 호손은 유아 관찰자, 숙련된 육아 도우미가 되었다. 그는 마흔 일곱이었고 이제 결혼 십 년 차가 다 되어갔다. 그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 번 들은 이야기>(1837, 1842), <낡은 목사관의 이끼>(1846), <눈의 이미지와 또 다른 두 번 들은 이야기>(집필은 끝난 상태로 1851년 후반에 출간될 계획이었다)가 이미 집필되어 있었다. 단편소설 작가로서 그가 슨 작품집 전부였다. 장편소설 두 작품은 1850년과 1851년에 출간되었다. <주홍글자>는 미국 작가 중 가장 난해한 작가였던 그를 사랑과 존경을 가장 많이 작가로 변모시켰다. <일곱 박공의 집>을 통해 평단으로부터 미국이 건국된 이래 가장 훌륭한 작가로 평가받았고 명성은 공고해졌다. 여러 해 동안 고독하게 작업한 끝에 호손은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이십 년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글쓰기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성공은 계속되었다. 그해 봄과 초여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필했고, 소피아가 웨스트 뉴턴으로 떠나기 두 주 전인 7월 15일에 그 작품의 서문을 완성했다. 차기작인 <블라이스데일 로맨스>의 구상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로부터 십삼 년 뒤, 예순 번째 생일이 다가오기 몇 주 전에 세상을 떠난 호손의 작가로서의 발자취를 떠올려보건대, 레넉스에서 지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으며, 절묘하면서도 균형 잡힌 성취를 이룬 순간이었다.
호손은 1849년에 세일럼에서 악몽 같은 경험을 겪은 뒤에 레넉스로 이주했다. 친구인 허레이쇼 브릿지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처럼, “길거리를 걷는 것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증오할 정도로 그 도시를 싫어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완벽하게 타인이었다.” 호손은 제임스 포크가 이끄는 민주당이 집권하던 1846년에 세일럼의 세관에서 감독관으로 일하며 삼 년 동안 작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1848년 선거에서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 후보자가 당선되고 1849년 3월에 새 내각이 들어서자 호손은 해고되었다. 호손은 자신을 방어하려는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정치 현실에 대한 대중적 논란을 미국 사회에 일으켰다. ~~~바로 그해 7월 말에 집필하기 시작한 <아메리칸 노트북>은 호손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비통하며 간성적인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루이자는 침대 곁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나를 알아봤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여동생을 잘 보살피라는 염려뿐이었다. 다이크 부인이 방에서 나간 다음에야 내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알아차렸다. 닦아내려고 했지만 천천히 눈 안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흐느낌에 흔들려 눈물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진실로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때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열흘 뒤, 호손은 직장에 다닐 의욕을 상실했다. 사직한지 며칠(가족들의 증언이 맞는다면 사직한 그날)이 지나 <주홍글자>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여섯 달 만에 완성했다. 티크노앤드필즈 출판사가 소설 출간을 계획하면서 그동안 받은 경제적인 압박은 순식간에 기대하지 않은 반전을 맞았다. 미국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적 천재성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사랑한 개인 독자, 익명의 구독자, 친구들(헨리 워즈워즈 롱펠로와 제임스 러셀 로웰도 있었다)을 비롯해서 후원자들이 호손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오백 달러를 모았다. 이 뜻밖의 횡재는 고향인 세일럼을 떠나고 싶은 호손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 했으며, 급기야 호손을 딴 세상 시민으로 만들었다.
뉴햄프셔 주 맨체스타에 있는 농장과 메인 주 키터리에 있는 주택 등 많은 후보지 중에서 호손 부부는 레넉스에 있는 붉은 농장에 정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소피아의 친구이기도 한 태편 부인이 호손 가족에게 그곳을 무상 임대하겠다고 제안했다. ~~~호손은 부담스러워하며,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지만 사 년 동안 지내는 임대비용으로 75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네 명 가족에게는 빠듯했고, 다섯 명이면 살기 어려운 집이었다. 집뿐만 아니라 주변 풍경도 호손을 불쾌하게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호손이 알았든 알지 못했든 그 시절은 그에게 최고의 시기였다. 지적이며 헌신적인 여성과 성공적인 결혼을 한 작가로 창작 열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호손은 채소를 기르고 닭 모이를 주며 오후에는 아이들을 돌보았다. 수줍음을 많이 타 아는 사람들과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며 늘 숨어 지내던 은둔자 호손은 버크셔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대체로 혼자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손 가족은 이삿짐을 쌌고, 11월 21일에 그 집을 떠났다. 바로 일주일 전인 11월 14일, <모디빅>의 초판본을 받고 은 멜빌은 그날 마차를 몰아 붉은 농장으로 향했다. 호손은 레넉스에 있는 커티스 호텔에서 멜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그 책을 받았다.
<줄리언>에 멜빌이 몇 차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소품의 주인공은 줄리언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일상과 시골에서 보내는 소소한 시간이 중심이다. 극적인 요소는 찾아보기 힘든 단조로운 일상이어서 이보다 재미없고 지루한 내용도 없을 r서이다. 호손은 소피아에게 보여주려고 이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두 사람이 아이들에 관해 적어둔 별도의 공책에 담겨 있었다. 이 공책은 아이들도 볼 수 있었고, 간혹 그림을 그려놓고나 낙서를 하기도 했다. 부모가 써놓은 글자 위에 그대로 베껴 쓴 흔적도 있다. 호손은 이 기록을 아내가 웨스트 뉴턴에서 돌아왔을 때 보여줄 작정이었는데,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읽었던 것 같다. 소피아는 레넉스에 돌아온 지 사흘 뒤 모친에게 보내는 편지 (1851년 8월 19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묘사했다.
「우나가 어찌나 피곤해하던지, 대니얼 웸스퍼의 눈처럼 움푹 파여 보였는데 붉은 농장을 보자마자 기뻐서 손뼉을 치고 소리쳤어요. 함박웃음을 눈에 머금은 호손이 달러왔고, 도저히 안을 수 없을 만큼 줄리언은 깡충깡충 뛰어올랐죠.(....) 우리가 떠난 날부터 호손이 줄리언과 지낸 모든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기록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1864년 호손이 세상을 떠난 다음 호손의 출판인이자<애틀란틱 먼슬리>의 편집자인 제임스 필즈는 소피아에게 호손의 기록에서 일부를 선별하여 잡지에 싣자고 제안했다. 1866년에 열 두 차례 연속으로 게재되었다. <줄리언>을 포함한 글을 발표할 차례가 될 즈음에 소피아는 줄리언의 의견을 먼저 물어봐야 한다며 주저했다. 물론 줄리안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소피아는 꺼려했다. 소피아는 좀 더 생각해본 뒤 호손은 개인적인 가정사를 대중에 공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텐데 저 스스로도 그걸 출간할 생각을 했다는 데 놀랐어요. 라고 펄즈에게 해명하며 출간을 반대했다.
1884년 줄리언이 <너새니얼 호손과 그의 아내>라는 책을 펴내면서 <줄리언>의 몇 편을 소개했다. 줄리언은 아버지와 보낸 삼 주를 언급하면서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평온한 날의 연속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때때로, 힘든 노동이었음에 틀림없다”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줄리언은 그 일기 전체를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독창적이며 진기한 기록”이라고 했지만, 1932년 랜덜 스튜어트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노트북>을 학술적으로 집대성하기 전에는 <줄리언>이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줄리언이 제안한대로) 그 기록은 분리된 책이 아니라 팔백 쪽에 이르는 1835년부터 1853년까지를 포괄하는 통합본의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쓰인지 백오십 년이 지난, 거창하기는커녕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깃거리를 담은 산문을 왜 주목하는가? 내가 감히 작품을 대신하여 그 탁월함을 설득력 있게 대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히려 소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 위대하며 나아가 독자를 즐겁게 하는 위대한 문장력을 보여준다. <줄리언>은 치명적일일 정도로 우울한 작가가 쓴 명랑 쾌활한 작품이며, 어린아이와 시간을 보낸 사람이면 누구라도 호손의 표현이 정확하고 진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나와 줄리언은 특이한 방식으로 양육되었다. 레넉스에 살면서 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엄마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고 두 아이를 모두 집에서 가르쳤다. 결혼한 다음 콩코드에 살면서 에덴같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던 두 사람의 노력은 부모가 되어서도 이어졌다. 소피아는 멀리 떨어진 모친에게 편지를 쓰면서 웅변조로 자신의 양육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 사랑 대신 가혹함과 엄격함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이여! 마치 신처럼, 아니면 솔로몬처럼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정말로 잘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이 얼마나 소심한지 아는지. 무한대의 인내심, 끝없는 부드러움, 한없는 아량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지 않으리. 할 수 있는 만큼 베풀어야 하리라. 무엇보다도 권위에 대한 자존심은 부모에게 아무 데도 쓸모없다…….」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나무 타기 선수예요. 그리고 마술사 흉내 내기를 정말 좋아했어요. 조금 전까지 이끼를 깔고 앉아 우리 곁에 있다가도, 눈 감아! 하고 아버지가 외치고 난 뒤 이것 봐라! 하고 소리치면서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오른 다음 도토리를 나무 아래로 뿌려줬어요.」
서간문과 일기에서 소피아는 자주 두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호손의 모습을 묘사했다. “태양 아래 나무 그늘에 호손이 누워 있으면 우나와 줄리언은 긴 풀잎으로 호손의 탁과 가슴을 털처럼 꾸며서 천하장사 피터 팬으로 만들었지요.”라고 말한다.
우나가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난 1904년에 토마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유명 잡지인<아웃룩>에서 우나를 추도했다. 히긴슨은 우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아버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마치 소년 같았죠.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같은 친구는 더 없을 거예요.」
<줄리언> 속에 이 모든 영혼이 담겨 있다. 호손 가족은 진정으로 진보적이었고, 부부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현재의 미국 일반 중산층과 대부분 일치한다.
다섯 살짜리 아이 줄리언을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한 채 대했다.
아이와 함께하면서 호손은 종종 아이의 참뜻을 알아챘으며 평생 마음속에 간직한 말을 찾았다. 한 세기하고도 반이 지난 지금 우리도 그 과정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는 것보다 언어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손은 자신만의 겸허하고 진지한 방식으로 여느 부모가 바라는 바대로 아이들을 무럭무럭 잘 키우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롤 오스터. 2002년 7월
[옮긴이의 말]
-베일에 가려 있던 거장의 참모습
미국 브라운 대학의 랜덜 스튜어트 교수가 쓴 <너새니얼 호손 전기>(1948)에 따르면, 폴 오스터의 노력은 너새니얼 호손이 고상하고 위대한 작가로 남아 있기를 원했던 호손의 부인 소피아와 직접적인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폴 오스터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줄리언>이 포함된 호손의 일기는 호손의 유언에 따라 뉴욕 피어몬트 모건 도서관에 보관되었는데, 스튜어트 교수는 그 일기들이 누군가에 의해 변조되었다는 사실을 연구 중에 발견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변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피아였다.
다행스럽게도 적외선램프 덕에 지워진 부분과 변조된 부분은 무사히 복원되었다. 그러면 왜 소피아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피아는 너새니얼 호손의 진솔한 모습을 외부에 노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소피아는 너새니얼 호손이 독실한 청교도로 보이기를 원했다.
소피아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호손이 독실한 청교도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독실한 청교도는 너새니얼 호손이 아니라 소피아 자신이었다. 그 변조의 단적인 예로, 허먼 멜빌이 호손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실에서 시가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복원되기 전 잉크로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소피아는 거실에서 비젓이 시가를 꼬나물고 있었을 호손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이다. 아내가 없는 틈을 타 거실에서 친우와 함께 시가를 물고 있었을 너새니얼 호손을 상상해 보라.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만일 스튜어트 교수의 집요함과 폴 오스터의 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너새니얼 호손을 아직도 진정한 너새니얼 호손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일은 과학의 힘을 빌려 거장의 참모습을 찾았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본은 스튜어트 교수의 복원판이니 안심하기 바란다.
1851년 이 일기가 쓰인지 십삼 년이 지난 후 너새니얼 호손은 미국 뉴햄프셔에서 생애를 마쳤고, 호손이 사망한 후 소피아는 우나, 줄리언, 로즈를 데리고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지 육 년 만에 소피아도 생을 마쳤다. 안타깝게도 너새니얼 호손은 미국에, 소피아와 우나는 영국에 따로 묻혀 백삼십여 년을 보냈다. 다행히 지난 2006년 소피아와 우나는 이장되어 예순 명의 후손이 보는 앞에서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 잠들어 있는 너새니얼 호손의 품으로 영원히 돌아왔다. 줄리언은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하지는 않고 아버지 호손과 친분이 있던 제임스 러셀 로웰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다. 토목 기사로 일하며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와 글을 쓰며 아버지가 미완으로 남긴 작품을 정리해서 발표하고 <너새니얼 호손과 그의 아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든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Review]
미국이 건국된 이래 가장 훌륭한 작가로 평가받는 ‘너새니얼 호손(1804∼1864)’은 1842년에 ‘소피아 피보디’와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다. 이 책 <줄리언>은 1851년 7월 28일부터 8월 16일까지 아내가 첫째와 막내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보스턴 외곽 웨스트 뉴턴)을 방문하기 위해 집을 비운 동안 둘째인 줄리언과 단둘이 보내며 기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에 호손 가족은 매사추세츠 주의 레넉스에 있는 농장(일명 붉은 농장)에 살고 있었고 아내와의 결혼 생활은 십 년 차가 되는 해였다. 호손은 그때 <두 번 들은 이야기>(1837, 1842), <낡은 목사관의 이끼>(1846) 과 장편 <주홍 글자 The Scarlet Letter>(1950년)와 <일곱 박공의 집. The House of Seven Gables>(1851년 4월)을 발표하며, 문단에서 명성을 얻고 가정생활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고 있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 일기 형식의 이 글은 우울한 성격에 미국 작가 중 가장 난해한 작가라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가장으로서 가정을 사랑하는 진솔한 면이 잘 드러나 있다. 다섯 살이었던 철부지 아들 ‘줄리언’을 “애늙은이”라고 호칭하며 친구처럼 이해하고 대하는 모습에서 인자한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돈독한 관계는 훗날 자녀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유쾌한 사람이었어요. 마치 소년 같았죠.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같은 친구는 더 없을 거예요.”
독자는 한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일상의 기록이 호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특별하게 간직하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적은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있다. 아내가 떠난 첫날의 일기에서 ‘호손‘ 은 이렇게 적고 있다.
「1851년 7월 28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아내가 줄리언과 나를 붉은 농장에 남겨 두고 처형 엘리자베스와 첫째 우나, 막내 로즈버드와 함께 집을 떠났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 애늙은이가 하는 말.
‘아빠, 애기가 가니까 좋지 않아?’
내가 동조할 거라고 믿는 줄리언의 자신감에 좀 어이가 없었다.
‘왜 좋은데?’
‘왜냐면 이젠 마음대로 소리를 꽥꽥 지를 수 있으니까!’
줄리언은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는 반시간 동안 고막이 찢어져라 마음껏 소리를 질러댔다.」
이러한 감정은 이 책에 함께 실린 ‘폴 오스터‘ 의 글에서 ’호손‘ 과 아내 ’소피아’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엄격한 청교도 집안에서 자란 환경으로 매사에 규율 적인데 비해 호손은 그렇지 못했다. 이러한 억압된 감정은 다섯 살짜리 ‘줄리언’이 엄마가 집에 없는 것을 알고 반 시간 동안 고막이 찢어져라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으로 ‘호손’은 적었다.
‘호손‘의 숨겨진 마음은 1851년 8월 8일 금요일 일기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문학적 친구이자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허먼 멜빌‘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거실에서 함께 시가를 태웠다고 적었고(아내가 집에 있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 또, 그와 함께 4.5킬로미터 떨어진 핸콕에 있는 셰이커 교도를 방문했을 때 감정을 이렇게 적었다.
「편리하게 설계된 벽돌집은 바닥과 벽이 광택 나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회반죽은 대리석처럼 부드러웠다. 모든 것이 너무나 깔끔해서 똑바로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사실을 암시하지 않았다.」
1864년 호손이 세상을 떠난 후 가족들은 ‘호손’의 글들을 정리하면서 이 일기를 출판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고 한다. 아들 ‘줄리언’은 부담 없이 승낙했지만 아내인 ‘소피아‘ 는 조금은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라는 변명으로 대신했지만 ’소피아’의 마음에는 일기 내용에서 자존심이 걸린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오스터’는 말하고 있다. 실재로 8월 8일 자 이 일기에서 ‘셰이커 교도들을 비난한 대목의 원본이 후에 아내 ’소피아‘에 의해 일부분 훼손되었음이 발견되었고 다시 복원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기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고 130여 년이 지난 2002년 에 ‘폴 오스터’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 속에는 ‘호손‘의 일기와 함께 ' 폴 오스터’가 쓴 호손과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짧은 글이지만 문학사의 거장으로서 섬세한 내면을 기록한 가족의 이야기와 함께 자연의 묘사에서 독자는 잠시 오래전 옛날 그가 살았던 목가적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착각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본문>
“어두침침하고 스산한 날이었다. 숲이 우거진 구릉 중턱은 어둡고 움침하고 적막했다. 모뉴먼트 산도 뒤편에 구름을 업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이 산의 능선을 따라 비추어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태양이 산의 능선을 따라 비추어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풍경 가운데에 햇빛이 생기발랄한 심장처럼 빛나고 있었다. 다른 구릉지 숲과는 대조를 이룬 그 숲은 마치 등불을 켜놓은 듯했다. 환하게 밝혀진 궤적은 햇빛을 두 배로 받는 것 같았고, 호밀 밭은 그 아래에서 노란 빛을 발해 풍경 전체를 환하게 비추었다.”(7월 31일)
“폭풍우의 중앙에 드리운 먹구름 아래에서 우리는 저 멀리 화창한 날씨를 즐기고 있을 맞은편의 밝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너무 낮게 깔리어 우리는 마치 텐트 아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고, 성큼 다가온 텐트 입구를 통해 화창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8월 7일)
“산등성이 전체에서 연무가 피어올라 모뉴먼트 산이 마치 포화로 뒤덮인 전쟁터 같았다.” (8월 9일)
“오늘 엄청난 수의 엉겅퀴를 때려눕히고는 줄리언이 말했다. “온 세상이 거대한 바늘 밭이야.”(8월 10일)
“한 남자가 사륜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곧 그 뒤를 이어 두 여인과 구레나룻이 난 신사가 사 인승 사륜 쌍두마차를 타고 숲 속에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며 지나갔다. 반대쪽에서는 한 소년이 짐마차를 몰고 왔는데, 그 아이의 엄마와 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가 안에 있었다. 그 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나에게 다가와 길 잃은 닭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오늘 아침 이 길을 지나다가 닭 몇 마리가 마차에서 빠져나갔는데 이제 찾는 중 인 것 같았다. 정말 찾고 싶은 마음이라면, 나무에 있는 새라도 불러 모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도 그들은 닭을 찾고 있었는데, 소년이 꼬꼬야, 꼬꼬야, 꼬꼬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애처로움이 묻어있었다. 그 아이가 닭을 불러 찾아도, 닭들은 이미 숲으로 흩어져 자고새와 짝짓기를 해서 야생 종자를 만들어낼지 모를 일이다.”(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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