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시 9집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푸른사상 동인시7). 2018년 12월 20일 간행.
일과시 9집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가 13년 만에 출간되었다. 김해화, 서정홍, 송경동 등 노동 현장에서, 농촌에서, 거리에서, 땀 흘려 일하며 시를 써온 ‘일과시’ 동인들은 “세상이 아프니까,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펑펑 울자고, 마음 독하게 먹고 싸우자”고 한다.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는 아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절박하고도 간절한 열망으로 가득한 시집이다.
■ 시인 소개
조호진
1989년 『노동해방문학』 창간호에 조태진(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린 식구다』 『소년원의 봄』, 에세이집으로 『소년의 눈물』이 있다.
이한주
1992년 윤상원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평화시장』 『비로소 웃다』, 시산문집으로 『너희들 키만큼 내 마음도 자랐을까』가 있다.
오진엽
2005년 제14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내의 시』가 있다.
송경동
1992년 구로노동자문학회 『삶글』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있고, 산문집으로 『꿈꾸는 자, 잡혀간다』가 있다.
손상렬
1991년 노동시선집 『통제구역』에 연작시 「치악산」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자오선을 지나다』 외에 여러 편의 동화, 청소년 경제서가 있다.
서정홍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58년 개띠』 『아내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못난 꿈이 한데 모여』, 청소년시집으로 『감자가 맛있는 까닭』, 동시집으로 『윗몸 일으키기』 『우리 집 밥상』 『닳지 않는 손』 『나는 못난이』 『주인공이 무어, 따로 있나』 『맛있는 잔소리』가 있다.
김해화
1984년 실천문학사의 14인 신인작품집 『시여 무기여』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인부수첩』 『우리들의 사랑가』 『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 『김해화의 꽃편지』가 있다.
김용만
1987년 『실천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명환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인작품집 『시여 무기여』에 시 「봄」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제목의 시집과 산문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가 있다.
■ 작품 세계
<일과시> 시인들의 16개 겹눈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면 어떤 모습일까? 그들이 이겨내고 싶어 하는 현실을 조각보처럼 이어붙인다면 그 작품의 제목은 ‘망할 놈의 세상’이 되겠구나. 또 그들의 바람이 깃든 형상을 조각보로 만든다면 그 작품의 제목은 ‘일과 사랑과 웃음이 있는 세상’이 되겠구나. 그리고 만약 한 사람이 이 16개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장엄한 서정을 가질 수 있겠구나. <일과시> 동인시집은 이런 시선을 꿈꾸게 하는 것만으로 큰일을 하는 것이겠구나. (중략)
이 세상을 온몸으로 사랑했던 자의 이 쓸쓸한 죽음! 하지만 사랑할 줄 아는 자로 거듭나고 있는 중인 송경동 시인은 거기에서도 다시 길을 만들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 모든 불의와 차별과 배제 앞에서도/오늘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우리 모두가/진짜 양심수”(「당신이 양심수」에서)라고 부르고 새롭게 불러냅니다. 제가 만나본 어떤 시인보다 예민했던 송경동 시인의 사랑의 능력은 지금도 커지고 있는 중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송경동 시인의 이야기이기만 하겠습니까. 제가 만났던 <일과시> 동인 모두의 삶과 미학의 구조일 겁니다. 그 구조에 핀 멋진 꽃들이 <일과시>라는 제목을 가진 조각보 작품이길 바랍니다.
―오철수(시인) 발문 중에서
■ 추천의 글
탐욕적인 개인주의와 극단적인 불평등조차 긍정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플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매거나 고공 농성장을 오르거나 좌판을 지키기 위해 울부짖거나 심지어 다른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일자리 하나 구하기가 어렵고 치솟는 집값으로 잠자리가 위협당하고 경쟁에 휘둘려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일과시> 시인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라고 간파하고 투합해 모였다. 세상이 아픈데 아파하지 않는 자들에 맞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펑펑 울자고, 마음 독하게 먹고 싸우자”고 나선 것이다. 시인들의 결연한 의지와 행동은 아픈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픔의 근원과 싸우기 위”(「책머리에」)한 것이기에 주목된다. 변명과 의심과 반성과 회한과 절망과 분노 등으로 시인들의 목소리 결이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절박하고도 간절하다. 그리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아픈 사람들을 갖가지 명분으로 굴복시키고 눈물 흘리게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시인들의 목소리는 구체적이고 믿음직스럽고 그리고 강렬하게 들린다.
―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고공은 따로 있지 않다
송경동
우리 모두는 고공을 산다
오늘로 16일째
네 번째 단식에 들어간 쌍용차 해고자
김득중의 깎여진 볼과 졸아든 위벽이 오르고 있는
홀쭉한 고공도 있고
오늘로 126일째
두 번째 굴뚝 농성에 들어간
스타플렉스 해고자 홍기탁과 박준호가
75m 아래 지상에 내려놓은
밧줄 하나의 가느다란 고공도 있고
오늘로 195일째
전주시청 앞 조명탑 위에서
역시 두 번째 망루 농성 중인 전주택시 털북숭이 유인원
김재주의 닭장 같은, 딸은 알고
어머니는 모르는 고공도 있지만
평지라고 고공 아닌 곳이 없다
고공으로 치솟는 집값 땅값 전셋값 월세
지상에 집 한 칸 갖지 못한 세입자들이 되어
출근할 공장 하나 사무실 하나 갖지 못한 실업의 축 늘어진 걸음이 되어
5년 안에 80%가 거덜나는 위태로운 24시간 풀타임 영세 자영업자가 되어
개 사료 값도 안 되는 쌀값에 아스팔트를 오르내리는 농민이 되어
어려서부터 순위 경쟁에 쫓기며 잔업철야의 학습노동을 해야 하는 청소년의 삶
더 가팔라진 가부장제 성폭력 아래 짓밟혀야 하는 여성들의 삶
요양원에라도 갇히면 다행 고독사가 다반사인 노령의 삶들까지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이들의 자살공화국
나날이 농성 아닌 삶이, 투쟁 아닌 삶이, 저항 아닌 삶이
그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누구도 나를 자르지 않았는데도
이 세계로부터 근원적으로 해고당한 듯한 슬픔의 고공
서로가 서로에게 절벽이 되고 외면이 되고 칼날이 되고 서글픔이 되는 단절의 고공
언제든지 나는 이 세계로부터 계약 종료
계약 해지 당할 수 있다는 절망의 고공
이 고공에서 우리 이제 그만
내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누구의 삶과 영혼도 뿌리 뽑히지 않는
평등 평화의 평지를
다시 일구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