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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강연시리즈] 오늘을 성찰하는 고전 읽기>한국현대문화/문학 김동인·이태준·김유정·김동리 단편소설 ☞ 강연자: 이남호 고려대 교수
이남호 교수는 “오늘의 관점에서 이 작품들이 읽을 만한 가치와 흥미가 있는 것인지 다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한국 현대 작가인 김동인과 이태준, 김유정과 김동리의 단편 소설 세계를 들여다본다. 즉 그들의 “소설이 지닌 보편성”을 검토해보겠다는 뜻으로 “당대에만 있었던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삶의 모습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그 기준을 따라 각기 문학 세계의 독특한 에너지가 거친 완성도로 빛이 바랜 김동인과 김유정, 그리고 소설 장르의 핵심이라 할 아이러니가 부족한 아쉬움을 남긴 김동리에 비해 이태준의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시대를 정직하게 다루면서도 보편성을 착실하게 확보해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감상문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열린연단 강연 (고전 49강) –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이남호 : 우리는 김동인, 김유정, 김동리, 이태준의 단편 소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의 대상으로 만날 수도 있고 미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만날 수도 있고 당대의 현실에 대한 참조로 만날 수도 있고 문학사적 의의를 따지는 관점에서 만날 수도 있고 또 형이상학적 탐구의 소재로서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만나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이고 중요한 방식은 문화 향수, 교양 체험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문학 작품이 문화 향수와 교양 체험의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문학 작품은 현재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성은 고전의 조건이면서 권장 도서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김동인, 김유정, 김동리, 이태준의 단편들을 오늘날의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문화 향수와 교양 체험의 대상으로 만나보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들의 현재성을 재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강연은, 저의 강연은 심각한 문학 연구가 아니라 소박한 교양 독서 감상문에 불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감상이 네 작가의 단편들을 도서관 서고에 유물처럼 보관해둘 것인가 아니면 우리 책상 가까이 두고 가까이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 참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열린연단 토론 (고전 49강) – 우찬제 서강대학교 교수 김우창(사회) : 박경리 선생 단편에, 어떤 여자가 자기 좋아하는 남자하고 가는데 그 남자가 서리를 해서 남의 집 채소밭에서 채소를 거둬가자 그 후로 인연을 끊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도둑질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그 나라 사람이, 아까 이남호 선생이 얘기한 것처럼 섬세한 문제에 대해서 품위를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게 있다는 얘기죠. (…) 그러니까 (문학에서) 윤리적인 얘기를 많이 하라는 게 아니고 윤리적인 문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얘기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찬제 :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 한국 문학의 상징적 자산이 더욱 넉넉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몇몇 생각들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문학 유산의 현재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말일 터인데 과연 그 현재성을 가늠하는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기왕의 논의에서 시간적 항구성, 공간적 보편성 등을 얘기하기도 하고 가치의 측면에서 거론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준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선생님께서는 어떤 문학 작품이 문화 향수와 교양 체험의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문학 작품을 현재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향수와 체험의 주체인 독자는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독자에게는 좋은 체험이 되는데 어떤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상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 개별성과 상대성을 넘어서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는 현재성, 그 현재성의 기준에 대해서, 그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연자 소개
토론자 우찬제 / 서강대학교 교수 강의록 전문 보기 김동인, 김유정, 김동리, 이태준 단편 소설의 현재성1. 과거의 문학, 현재의 독자 향가 이래 1300여 년에 걸친 한국문학사는 적지 않은 문학적 유산을 남기고 있으며, 특히 20세기 이후 한국 현대 문학의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 다양한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특히 문학적 유산의 비중이 크고 그 수준도 높은 편이라 하겠습니다. 이만한 문학적 유산을 지니고 있는 나라나 민족도 그리 많지 않을 듯하고, 이에 대하여 문화적 긍지를 지닐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사가 남긴 수많은 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현재성을 지닌 작품은 무엇이며, 또 얼마나 되는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은 어떤 문학 작품이 한국 문학의 고전인가라는 물음으로 변주될 수도 있고, 또 어떤 문학 작품이 요즘의 독자들이 찾아서 읽는 독서의 대상인가라는 물음으로 변주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전의 한국 문학 작품 속에서 그런 작품이 있을까요? 아쉽게도 춘향전도 구운몽도 향가도 가사도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작품을 찾아서 읽는 자발적 독자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시조나 한시 몇 편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는 독자들이 좀 있을지 모르겠으나 있다 해도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 오늘날 다수의 독자가 있다면, 그 독자의 대부분은 강요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서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자발적 독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부나 연구나 참조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 이야기하게 될 김동인, 김유정, 김동리, 이태준은 20세기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입니다. 이들의 단편 소설은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후 많은 연구가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자발적 독자가 있건 없건 우리 사회에서 또 교육계에서 권장 도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단편 소설이 현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있다면 그 현재적 의의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2. 김동인의 단편들: 인간의 어리석음과 모순성 김동인은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던 1919년, 《창조》라는 동인지를 발간하고 거기에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작가가 되었습니다.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현대 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감자」는 그나마 짜임새가 좀 나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양갓집 딸로 태어난 복녀라는 순박한 여인이 가난 속에서 타락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복녀의 몰락과 타락 과정은 충격적입니다. 환경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 하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호소력과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가 제대로 다루어지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소략합니다. 복녀의 파란 많은 인생을 담기에는 너무 짧은 소설입니다. 마치 장편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 놓은 듯합니다. 인생 변전의 과정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고비 고비마다 복녀가 처한 외면적 내면적 상황이 섬세하게 드러나고 거기서 인생의 진실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기대를 충족해 주지 못합니다. 가령 복녀가 왕 서방의 결혼식 날 밤에 그의 집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사건은 너무나 대충 서술되어 버리고 말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감자」는 복녀라는 기구한 여인의 삶을 보여 주긴 하지만, 그녀의 진실과 아픔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염 소나타」와 「광화사」는 황당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미주의, 예술가 소설 등의 말이 있습니다만, 이런 것이 과연 유미주의, 예술가 소설과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동인의 다른 소설들을 두고 자연주의라고들 하지만 「감자」 같은 소설이 왜 자연주의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광화사」의 화공과 소경 처녀의 이야기는 정말 황당합니다.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이라 작가도 이야기를 꾸며 내는 화자의 액자를 만들어 둔 것 같습니다. 이런 비교를 해도 될는지 주저되지만, 황당한 옛이야기를 쓰더라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자춘」 같은 작품은 인생에 대해 깊은 통찰이 담겨 있으나 「광화사」에는 그런 점이 아예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김동인의 단편 가운데서 「태형」과 「곰네」가 그래도 괜찮은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형」은 김동인의 초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안정된 문체와 구성을 보여 줍니다. 묘사도 구체적이고 실감 납니다.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가 3•1운동 격문을 써 준 일로 겪게 된 석 달간의 감옥 체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구체성과 실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태형」은 이러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마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편안만을 취하려 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무리 없이 드러냅니다. 한편, 김동인 소설이 보여 주는 많은 허술함과 무리와 억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이 일관되게 전달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매우 어리석고 모순된 존재라는 메시지입니다. 김동인의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동 인물들은 이기적 탐욕과 무모하고 충동적인 감정에 굴복하는 어리석고 모순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도 파괴하고 스스로도 파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김동인 소설은 세상이 지옥이고 인간이 악마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거기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외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하고 긍정적인 가치의 주장 뒤에 숨어 있는 많은 거짓들에 쉽사리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배우게 되고 또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많은 배반에 견디는 힘을 배우게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메시지들이 보다 진지하고 실감 나게 탐구되지 못하고 있음은 다시 한 번 지적해 둘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3. 김유정의 단편: 거칠고 무지한 삶과 해학적 문체 김유정은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하였습니다. 매우 가난하고 병들고 거칠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약 5년에 걸친 창작 기간 동안 30여 편의 소설을 남겼습니다.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시인 작가의 삶이 그러했지만, 특히 김유정의 삶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웠습니다. 안정된 공간에 머물며 조용히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신중하게 퇴고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그의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바, 애석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거칠고 허술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며 또한 소품입니다. 그러면서도 김유정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설 공간을 창조해 내었고, 해학적 문체와 에너지 넘치는 필력 그리고 탈속한 만무방의 눈으로 엉터리 세상을 개성적으로 그려 내었습니다. 「노다지」와 「금 따는 콩밭」, 「금」은 금점(金店)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가난을 벗어날 길 없는 등장인물들에게 금은 마지막 희망이요 수단입니다. 이들은 마치 불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맹목적입니다. 윤리도 없고 이성도 없습니다. 동무와 은인도 배신하고, 무모하게 삶의 마지막 남은 것까지 던지고, 자해도 서슴지 않습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거친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의 행동과 선택은 너무나 무모하고 너무나 비윤리적이고 파멸이 뻔히 보이는 것입니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슬픈 코미디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삶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고 유머러스하게 펼치는 작가 김유정은 바보 같기도 하고 동시에 천재 같기도 합니다. 김유정의 개성적인 문체와 작품 세계의 문학적 가치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고전으로서의 자질이나 현재성의 관점에서 김유정의 이런 작품들은 매우 난처한 위치에 있습니다. 내용은 너무 거칠고 황당합니다. 형식도 거칠고 허술합니다. 저는 김유정의 이런 작품들이 오늘의 일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는지 의문을 던져 보게 됩니다. 과연 일반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하고 더 나아가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에게 권장 도서로 제시할 만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굳이 판단한다면 조금 부정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봄봄」, 「동백꽃」, 「산골」이 김유정의 다른 거친 주제의 작품들보다 더 낫다고 말씀드리기도 주저됩니다. 앞서 언급한 「만무방」 등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강렬한 주제 의식을 「동백꽃」 등의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존재와 윤리를 모두 던져 엉터리 세상에 대결하는 무모한 힘이 없습니다. 「동백꽃」 등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하지만 「만무방」 등과 같은 거친 힘을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만무방」 등의 경우, 김유정 작품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질서 밖에 있는 듯이 보입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김유정의 소설들은 문학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 같습니다. 작품으로서는 「동백꽃」이 우수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김유정의 문학적 성격은 「만무방」 등에서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생각은 앞서 김동인의 경우에도 언급했습니다만, 김유정의 경우 더욱 강하게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래저래 김유정은 혼란스러운 작가이고, 안타까운 작가이고, 알 수 없는 작가입니다. 4. 김동리의 단편: 사연의 과잉과 아이러니의 부족
밀도와 짜임새의 면에서 「무녀도」보다 좀 못하지만 「황토기」와 「바위」도 「무녀도」 못지않게 주목되는 작품입니다. 무당이라는 소재가 큰 역할을 하는 「무녀도」와 마찬가지로, 황토골의 전설과 바위 신앙이라는 소재가 이들 작품의 성격을 강하게 지정합니다. 그러면서 「황토기」는 어떤 특정 능력을 지닌 인간의 기구한 삶을 흥미롭게 그려 냅니다. 민간 신앙적 소재가 김동리 소설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김동리의 여러 소설은 민간 신앙을 믿는 인물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황토기」와 「바위」도 그러합니다. 「황토기」는 황토골 전설을 바탕으로 힘이 아주 센 사람은 어떻게든 그 힘을 쓸 곳이 있어야 한다는 삶의 간단한 이치를 개성적인 서사에 담고 있습니다. 「바위」도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하되, 기구한 거지 여인이 지닌 자식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보여 줍니다. 이 두 작품은 기구한 사연과 민간 신앙적 소재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지만 이에 더하여 「황토기」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불행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고 「바위」는 거지 여인의 보편적 자식 사랑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낯설게 해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승새」에서 만허 스님과 저승새의 연관 뒤에도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기구한 사연이 깔려 있습니다. 원래 만허 스님은 경술이라는 이름의 머슴이었는데 주인집 남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에 따라 남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거기서 아들을 낳고 죽습니다. 경술은 견딜 수 없는 삶을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됩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찾아오는 저승새를 남이의 영혼이라고 믿고 매년 기다립니다. 「한내마을의 전설」은 정 진사 댁의 몰락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몰락의 마침표는 머슴 상수와 손녀 명숙의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작가는 이 기구한 운명을 한내마을 앞을 지나가는 강에 얽힌 전설, 즉 “동네 앞 당나무 축대 위에서, 그 강물이 번쩍이며 흐르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마을에 항상 음문(淫聞)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전설과 연결시킵니다. 「달」 역시 정국과 달, 달과 숙희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기본 줄거리입니다. 무당이 달 밝은 밤에 얻은 아들 달은 정국이라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나 세상의 손가락질에 못 이겨 정국은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 뒤로 달은 숙희의 사랑을 뿌리치고 늘 정신 나간 사람이 되어 물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달이 밝은 날 물에 빠져 죽습니다. 이 작품도 못 이룬 사랑의 한과 달의 정기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등신불」이나 「만자동경」이나 「불화」나 「까치소리」 같은 작품도 대개 이러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 신앙적 소재의 작품들이 김동리 소설의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초기부터 김동리 소설은 현실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왔습니다. 여기에는 좋은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산화」가 그러하고, 「팥죽」, 「찔레꽃」, 「동구앞길」, 「혼구」, 「미수」 등이 또한 그러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이 정도로 사실적으로 객관화해 그려 낸 작품도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소위 현실 참여 작가들의 작품보다 오히려 더 현실 참여적 관점에서 돋보이는 작품들이지만 김동리 소설의 이런 측면은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해방 이후 김동리의 정치적 태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작가의 정치성 때문에 작품의 가치가 외면된 사례의 하나라 생각됩니다. 그가 작가로서 당대 사회를 관찰하고 재현했을 때 그의 작가적 시야에 전면으로 부상한 것은 동포들의 가난과 특히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곤경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빈곤과 여성 곤경의 주제는 동시대 단편 소설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구현되었다. (……) 작가 김동리가 어떠한 문학 이론을 내세우든 그의 대표적 초기 단편들은 우리 사회의 현실의 어두운 부분을 선연하게 조명해 주었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가정적 곤경에 대해서 동시대의 누구보다도 생생하고 진실된 문학적 증언을 남겨 주었다. (……) 현실 유리적이며 신비적이라는 김동리 작품 성격은 몇몇 작품의 특징을 확대하여 일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주2) 김동리의 소설은 이처럼 민간 신앙 소재의 작품들과 현실주의적 작품들이 큰 갈래를 이룹니다. 이에 더하여 작가의 전쟁과 피난 체험이 바탕이 된 일련의 작품들이 있고, 또 역사적 소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성격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수준에 있어서도 큰 편차를 보여 줍니다. 민간 신앙 소재의 작품들과 현실주의적 작품들 가운데 비교적 높은 수준의 작품이 많다는 것은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김동리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약점이라고 말해도 될 만한 성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아이러니가 약하거나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아이러니는 소설이 인생을 그려 내는 데 거의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요소라 하겠습니다. 아이러니가 부족한 소설은 그 의미가 평면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동리의 단편 소설은 마치 장편의 한 부분이거나 아니면 장편을 요약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평면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평면적인 사건의 전개라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러니의 부족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보완으로 김동리 소설은 기구한 사연이나 민간 신앙적 소재를 적극 활용합니다. 그 활용이 성공적인 작품들은 아이러니의 부족이 감추어지고 소설이 풍성한 느낌을 얻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김동리 소설은 대개 의미보다는 소재가 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김동리 소설에 관한 논의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따로 두 편 있습니다. 작가가 말년에 쓴 「이별이 있는 풍경」과 「참외」가 그것입니다. 평생 꾸준한 창작 활동을 보여 주었지만 초기작들의 무게가 그 이후의 작품들을 넘어서는 것은 김동리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만, 이 두 작품만은 특별한 관심에 값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5. 이태준의 단편 소설: 시대의 소묘와 시대를 넘어선 호소력 순서대로 하자면 김유정과 김동리보다 이태준을 먼저 언급해야 했습니다. 이태준은 김유정과 김동리보다 나이도 많고 문필 활동도 먼저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태준을 오늘 강연의 마지막에 언급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언급한 네 작가 가운데서 이태준이 가장 현재성이 강한 작가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강연을 위해서 네 작가의 단편 소설을 새로이 일독하였습니다만, 온전히 독자로서 감상에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은 주로 이태준의 소설이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경우 특별한 필요가 아니라면 다시 찾아 읽을 만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은 작품도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이태준 소설들은 목적과 필요에 의한 독서가 아니더라도 읽을 만한 것이 많아서, 오늘의 일반 독자들에게 충분히 향유될 만한 매력과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태준 소설에 대한 많은 평가들이 시대와 역사의 외면을 지적하면서 순수 문학이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또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태준의 소설이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는 지적도 최근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순수냐 현실 비판이냐 하는 이분법으로 문학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문학 연구의 한 태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문학 감상의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일반 독자로서의 우리가 19세기 러시아 현실을 알기 위해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인간과 삶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위해 그들의 작품을 읽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반 독자로서의 우리가 이태준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대의 현실을 공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소설이 지닌 보편성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에서는 그 당대에만 있었던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삶의 모습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독자들은 이러한 「봄」이나 「꽃나무는 심어놓고」를 읽으면서 식민지 시대의 하층민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독서의 주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작품이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창한 날과 쉬는 날이 오히려 더 괴로울 수 있다는 보편적 삶의 일면 때문이며 또한 꽃 심어 놓은 고향에서 오히려 쫓겨나고 남편을 위한 아내의 선한 행동이 더욱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편적 삶의 일면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묘사와 같은 작품의 작은 부분들에서 작용하는 보편성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태준의 소설들은 시대를 정직하게 다루면서도 보편성을 착실하게 확보해 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편성의 확보는 시대를 넘어서서 현재성의 확보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영월영감」, 「불우선생」, 「색시」, 「달밤」, 「손거부」, 「아담의 후예」 등등은 흥미로운 인간 탐구를 보여 줍니다. 작가 이태준의 솜씨와 성향이 특히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많은 평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소설을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한다면, 이 작품들은 간략하고 부분적인 채로 그 모범적인 답이 될 만합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도 시대의 암울은 중요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초점은 시대의 탐구가 아니라 인간의 탐구에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간의 일부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이 작품들의 의의와 현재성이 더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해설이 필요 없는, 읽는 것이 곧 이해가 되는, 바람직한 문학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무연」은 낚시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많이 줍니다. 낚시 도구, 방식, 취향, 시속 등이 잘 묘사되어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그러면서 낚시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세상이 천박하고 비인간적으로 변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냥」도 비슷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과거 산골 마을의 사냥 모습이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거기에 죽이고 죽는 사냥에 버금가는 인간사의 냉정함으로 소설적 의미를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너도 그런 소릴 하는구나. 나무가 돌만 하다든? 넌 그 다리서 고기 잡던 생각두 안 나니? 서울루 공부 갈 때 그 다리 건너서 떠나던 생각 안 나니? 시쳇 사람들은 모두 인정이란 게 사람헌테만 쓰는 건 줄 알드라. 내 할아버님 산소에 상돌을 그 다리루 건네다 모셨구, 내가 천잘 끼고 그 다리루 글 읽으러 댕겼다. 네 어미두 그 다리루 가말 타구 내 집에 왔어. 나 죽건 그 다리루 건네다 묻어라……
천금이 쏟아진대두 난 땅은 못 팔겠다. 내 아버지께서 손수 이룩허시는 걸 내 눈으로 본 밭이구, 내 할아버님께서 손수 핏땀을 흘려 모신 돈으루 작만하신 논들이야. 돈 있다구 어디가 느르지논 같은 게 있구, 독시장밭 같은 걸 사? 느르지논둑에 선 느티나문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구 저 사랑마당에 은행나무는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다. 그 나무 밑에를 설 때마다 난 그 어룬들 동상(銅像)이나 다름없이 경건한 마음이 솟아 우러러보군 한다. 땅이란 걸 어떻게 일시 이해를 따저 사구 팔구 허느냐? 땅 없어 봐라, 집이 어딨으며 나라가 어딨는 줄 아니? 땅이란 천지 만물의 근거야. 돈 있다구 땅이 뭔지도 모르구 욕심만 내 문서쪽으로만 사 모기만 하는 사람들, 돈놀이처럼 변리만 생각허구 제 조상들과 그 땅과 어떤 인연이란 건 도시 생각지 않구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 다 내 눈엔 괴이한 사람들루밖엔 뵈지 않드라.(주3) 아버지의 이러한 돌다리에 대한 생각과 태도 그리고 땅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곧 작가 이태준의 문학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다리처럼 시대의 변덕을 넘어 튼튼하게 지켜져야 할 가치로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더욱 필요한 생각과 태도가 아닌가 합니다. 이태준의 많은 작품은 우리 곁에 두고 다시 읽어도 독서의 보람이 있습니다. 그의 소설이 지닌 보편적인 의미와 호소력 있는 문체는 현재성을 담보합니다.
주1 김동인, 「나믄말」, 《창조》 창간호(1919년 2월), 8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