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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신앙과 이성의 조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 23,13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뼈 있는 농담으로 가끔은 이 말을 현대의 성서학자들에게 적용시킵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아서,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하늘나라의 문도 잠가버리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성경을 읽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고(루카 24,27),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라고 말합니다(루카 24,32).
여기서 ‘풀이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펼치다’이고, 다른 언어들에서는 ‘열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열어’ 주는 것, 이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들으려면
성경을 설명하려는 이성적 노력을 배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신앙과 이성의 조화”(36항)입니다.
오늘날 때로는 지나치게 신앙에서 멀어지고 신학적 차원을 잃어버린 성경 연구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특히 역사비평적인) 연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예만 든다면, 유다교에서 모세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바룩 스피노자는 회당에서 쫓겨났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유다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처음부터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1920년대까지 가톨릭교회는, 이성적으로 성경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의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1940년대에 비오 12세의 회칙 “성령의 영감” 이후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1940년대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는, 교회가 그전에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경계했던 것을 보완하며 적절한 이성적 접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깊게 연구해야 한다”(계시헌장, 12항).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고자 육화하신 말씀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적인 차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요.
역사비판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을 조화시켜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날이 갈수록 발전해 가는 성서학이 그야말로 성경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황님은 성경 주석에서 역사비판적 차원과 신학적인 차원이 단절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35항).
첫째는, 성경을 과거의 책으로 머물게 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냉동실에 넣어 보존하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박제라고 하면 더 좋을까요? 그렇게 성경을 보존하면서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록되었다고 연구하는 데에만 머문다면, “살아 있고 힘이 있는”(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둘째는, 이러한 성경 해석 안에는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실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만 설명하고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 안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성찬례 제정에 대해서까지 역사성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신앙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이성으로 하느님께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이성의 지평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36항).
이성을 더욱 넓혀가야
초등학교 1학년 때에 0보다 작은 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제 이성의 한계는, 숫자는 0, 1, 2, 3, 그렇게 간다는 것이었지요. 0보다 작은 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때에 가지고 있던 수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는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세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지요.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와 유사합니다. 한번 깨어난 인간 이성을 다시 잠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을 더욱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안에서 모든 것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개입을 인정할 필요가 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또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입니다.
형들의 손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이 생각납니다. 형들과 화해를 하고 나서,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다음 혹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19-20). 요셉은 자신이 겪었던 그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만큼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는 성경 해석 작업에 대해, “가톨릭 주석가들은 해석 작업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공동 임무는 그들이 사료를 판별하고 양식을 정의하거나 편찬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서 본문의 의미를 오늘을 위한 하느님 말씀으로 설명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맡은 과업의 참다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
여기에서 성경 주석과 신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계시헌장에서는 성경 연구가 신학의 영혼이라고 말했고, 지금 교황님은 그 말을 정확하게 풀이해 주십니다. “주석이 신학이 아닐 때에 성경은 신학의 영혼이 될 수 없으며, 역으로 신학이 본질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이 아닐 때 그 신학은 기초가 없게 될 것입니다”(35항).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해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자연을 바라보면서, 또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경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신학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또한 성경을 읽는 모든 이는, 그 말씀에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역으로,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이들은 다른 무엇보다 앞서 성경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의 노력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성경을 열어주는 것”이 되는 길입니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당신 가르침의 기적을 제가 바라보오리다”(시편 119,18).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단 하나의 책인 성경
함께 사는 저희 집 수녀님들이 가끔 저를 놀립니다. 신문을 읽을 때 기사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라 주로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을 힐끗힐끗 읽다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주워듣고 오기는 하는데 정확히 아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고, 누가 죽었다는 것은 아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고, 이런 식입니다. 집에 와서 무슨 해설위원 같은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합니다. 신문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더라면 이러지 않았겠지요.
추리소설을 생각하시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범인을 알려면 책을 구석구석 잘 읽어야 합니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그 결과를 염두에 두고서 쓰는 것이지요.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 한마디를 알아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올바로 알아들으려면 성경 전체를 그 맥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의 내재적 단일성’이라는 원칙입니다(39항).
73권의 책들이 하나
이 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5월호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해석한다고 할 때,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내면 쉽게 본래의 뜻을 벗어나게 되고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을 하려면 그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 그 단락이 들어있는 책, 구약 또는 신약이라는 맥락,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구약과 신약 전체의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이 구약의 책들 46권과 신약의 책들 27권 모두가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39권만 받아들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하나의 책을 이룹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73권의 책들이 ‘하나’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의 한 부분을 읽을 때에는 그 73권을 그 문맥으로 간주하며 그 구절을 해석하게 됩니다.
가톨릭의 성경 해석
이러한 원칙은 특별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행한 문헌인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우리말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2010년에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그 문헌의 제1부에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예를 들어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등(마태 1,23 참조) 예수님의 생애에서 어떤 일들이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밖에도 많은 곳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어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봅시다. 신약성경을 경전으로 여기지 않는 유다교인들에게,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의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짧은 글에 이런 설명을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가톨릭 성경 해석이 다른 성경 해석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드리려는 생각에서입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는 처음 저자가 생각했던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처음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던 글은 다른 맥락 안에 자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자체 안에서도 이루어진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언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변모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과정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함께 하나의 책을 이루게 됨으로써 일단락지어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본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의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유다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유다교의 구약 해석은 신약은 고려하지 않고 그 대신 유다교 전통의 고유한 부분인 미쉬나, 탈무드 등의 전승 안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합니다. 개신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거기에 ‘성전’을,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을 함께 고려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한 부분을 해석하려고 할 때에 고려해야 하는 ‘문맥’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씀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가르치시던 어떤 신부님께서 예언의 해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임마누엘 예언에 대해, 그 예언이 예수님께 적용될 것인지는 “이사야도 몰랐고 마태오도 몰랐고 천주 성령만 아셨다.”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41항)에 있습니다.
계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늘 인용되곤 하는 히브 1,1-2의 말씀대로, 같은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 아드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보여주셨다고, 곧 그 아드님이 계시의 절정이시라고(계시헌장, 2항)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성경은 신약의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을 보게 했습니다. 구약이 감추어진 방식으로 예고하는 것을, 신약은 온전히 현존하는 것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대한 최고의 주해는 신약입니다”(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
교회 안에서의 성경 해석에 관한 다른 부분들은 생략하고, 3부로 된 “주님의 말씀”의 제1부 ‘하느님의 말씀’을 마치면서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삶은 성경의 말씀들을 삶 자체로 살아냄으로써 그 말씀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성인의 예를 하나만 든다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도 은도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읽고는 곧 그것을 그대로 살기를 갈망하여 가난한 수도자의 삶을 시작했고, 그 자신의 삶으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 안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성인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2부 ‘교회 안의 말씀’과 제3부 ‘세상을 위한 말씀’에 가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삶으로 성경 말씀을 오늘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것,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도 성모님처럼 말씀의 육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교회,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집니다. 누가 넘겨드렸는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초점은 두루마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 두루마리를 펴시고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을 보내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그러고는 두루마리를 말아 다시 돌려주시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후에 두루마리는 말린 채로 다시 보관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 펼쳐질 것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기쁜 소식은 이미 이루어진 말씀으로 다시 선포될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계시의 충만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말씀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 제2부를 읽기 시작합니다.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는 거기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며 말을 걸어오시는지, 그 말씀에 인간은 어떻게 응답하고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제2부의 제목은 “교회 안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고, 그 말씀이 머무시는 집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되었습니다(요한 복음 서문). 이들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이들이고 다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 갑니다. 그들의 모습 안에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회의 참 얼굴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사이에 천막을 치러 오신(요한 1,14 참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수용으로 규정되는 실재”(50항)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있듯이, 주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교회는 그 말씀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이제는 교회가 그 말씀을 살아내야 하고 말씀의 현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유다교에서 크게 중시하는 ‘셔키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데(50항), ‘셔키나’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머물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에 머무시는 그 현존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천막 성소 또는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탈출기에서는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천막 성소를 지었다는 것이 나오고, 그 마지막에 주님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웠으며 이스라엘 자손들은 구름으로 신비롭게 표현되는 그 영광, 주님의 현존에 따라 나아가고 멈춰서고 했다고 말합니다. 백성이 있는 그곳에 주님께서 머무르십니다. 백성이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셔키나는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천막을 치심”(요한 1,14)으로써, 그리고 그 말씀이교회 안에 머물러 계심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인용하신 구절은 아니지만 에제 37,27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으나, 당신 말씀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머무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인 교회에게는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하고 물으며 온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을 재촉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이러한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교회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계시헌장 첫머리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히 듣고 신실하게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주님의 성령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지속하는 것으로서 모두 소중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정확히 말해서 말씀 안에서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 모든 선포와 증거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알지 못할뿐더러 그것을 행할 동기나 힘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어가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그 말씀을 지니고 세상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례,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장소
교회가 자신의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 첫번째 장소가 전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히려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성체 현존 역시 인간의 말로 형언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주님의 말씀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은 쉽게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교황님께서 인용하신 예로니모 성인의 말대로(56항), 우리는 성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하고 - 그리고 물론, 절대로 버려지지 않게 하고 - 그 한 조각이라도 소중히 여기는데, 전례 때에 성경을 읽는다 해도 그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경우는 흔합니다.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돌아가셨지만 성체성사를 통해서 지금도 그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말씀이 전례 안에서 선포될 때에 그것은 단순히 과거에 한 번 하신 말씀을 다시 인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구절은 이사야서,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원전 5세기의 제3이사야에게 속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2천 년 전 나자렛의 회당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그 시대에만 의미가 있는 일회적인 말씀으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전례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의 성사적 성격을 보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짐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읽고 풀이해 주신 방식을 충실히 따르는”(52항)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성취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성경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의 한 시대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오늘”의 말씀으로 선포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해석을 다룰 때에 계속 강조해 온 바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과거 한 순간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그 말씀을 죽이는 행위, 살아있는 말씀을 냉동시키고 박제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성경을 읽으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례 때에 선포되는 말씀이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말씀하시는 바를 이루시는 말씀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다음 달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현존을 만나는 여러 길들을 따라가 볼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을 만나는 자리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했습니다. 체험한 일이 있으신지요? 그걸 체험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요?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자리
말씀께서 머무시는 집인 교회 안에서, 말씀을 만나는 첫 번째 자리는 전례입니다. 지난달에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전례 때의 말씀은 2천 년, 3천 년 전의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선포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미사 때의 독서와 강론, 화해의 성사와 병자 도유, 시간전례와 축복예식 등의 여러 순간들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의 현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독서와 복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미사 때에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나서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읽은 그 말씀이 독서자의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신 분을 향하여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라고 환호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에 독서자를 보면 독서 전후에 읽을 말씀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특별한 미사 때에는 복음서에 분향을 하는 것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독서대 위의 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독서자의 목소리에도 현존하십니다. 그러니 독서자의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얼마나 정성껏 그 말씀을 읽어야 하는지 명백하지요. 그러기에 독서자는 성경과 전례를 공부하고 기술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58항). 하느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듣는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강론입니다. 교황님은 강론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59항), 사실 그것은 신자들이 더 잘 압니다. 살아있는 말씀인지 냉동되고 박제된 말씀인지, 듣는 이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강론자 안에 살아있는 것이고 그는 말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배우들이 수녀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 제가 보면 - 너무나 어색하지요. 꼭 수도복을 잘못 만들어서만은 아닙니다. 진짜가 아니고, 자신이 그 신분에 동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 강론은 강론 ‘흉내’이고 ‘연기’입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강론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임이 신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미사 이외의 전례
미사 이외의 다른 전례들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화해성사의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성사를 준비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윤리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판 서기관이 요시야 임금 앞에서 율법서를 읽을 때에 임금은 옷을 찢었고(2열왕 22장), 에즈라가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읽어주었을 때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습니다”(느헤 8장). 자신들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복음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복음의 요구는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자신이 범한 죄 앞에서 좌절하여 무너지지 않고 하느님께 그 죄를 고백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루카 15장).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화해를 바라시는 분이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말씀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에 그 말씀이 사람을 회개시키는 힘을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교황님보다 말이 더 많아서, ‘주님의 말씀’을 읽으신 분들은 “이런 얘기 없었는데….”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많이 말씀하시는데 해설에서는 그런 부분은 생략하고 기본 바탕을 더 깔고 있는 것인데, 교황님은 이걸 다 전제하고 쓰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맞지요, 교황님?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간전례(성무일도)입니다. 시간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또한 시편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무일도를 바칠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찬미의 제사를 바친다. … 이 기도는 참으로 신랑에게 이야기하는 신부의 목소리이며, 또한 자기 몸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이다”(성무일도 총지침).
교회의 삶
이제는 전례만이 아니라 교회의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만나는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물론 첫째는 각자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인 계시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없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교회의 사목활동도 성경으로 감도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목 형태들과 병립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목 전체를 감도하게 하는 ‘성경사목’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말은 “성경사목”보다 “성서적인 사목, 성경에 기초한 사목”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았겠네요.(번역자인 제 탓입니다.)
성서학과 신학이 따로 있고 신학 중에 성서신학도 있지만 성경 연구가 “신학 연구의 영혼”(계시헌장, 24항)이고 모든 신학의 원천이 되듯이, 교회의 사목활동이 교회가 하느님을 만나고 복음적 가치를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리교육에서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 주요 구절들에 친숙해지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말씀에 대한 체험
글 첫머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라는 것을 체험해 보셨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학생으로 처음 구약 입문을 배울 때 첫 시간에 신부님께서 시편 34편의 앞부분을 읽어주시며,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9절, 최민순 신부님 번역)에서 멈추시고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보고 맛들이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제가 구약 입문 강의를 시작할 때에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말씀도 다시 학생 분들에게 전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사목에서, 개인적으로, 교리교육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모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강론자, 사목자, 교리교육자, 성서사도직에 종사하는 이들 안에 말씀의 생명력을 만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 안에서 그 말씀이 용처럼 살아서 꿈틀거리고 다니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백이면 백, 그것은 먼저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말씀이 저를 뒤집어 놓는 체험이 있었을 때입니다.
또한 이와 함께, 말씀이 살아있는 것은 우리 삶 안에서이기에, 말씀을 듣는 이들과 삶의 체험을 공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이 참 어렵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준비가 될 때에 듣는 이들도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께서 살아계시기를 바랍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저희 수도회가 우리나라에서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모든 수녀님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또 대부분의 수녀님들은 한 번은 같이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늘 엇갈리게 서로 다른 집에 살았던 수녀님들을 새로 만나 함께 살게 되면서, 정말 뜻밖이다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또 제가 예상하는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만남이, 그 사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생활 신분으로 살아가든 신앙인의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바탕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계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인간과 사귀시는 것이 바로 그 말씀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젖어야
이 기본 원칙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삶 안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문헌은 먼저 주교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매우 인상적인 것은 문헌에서 인용하고 있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교는 마치 어머니의 태와 같은 말씀 ‘안에서’ 살고 말씀의 보호를 받으며 말씀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앞 문맥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사실 이것은 주교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교회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주교들을 포함한 사제들에게 이 점이 강조되는 것은 교회의 교도권 행사에서 그들이 맡고 있는 역할 때문일 것입니다. 교도권, 곧 가르치는 직무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 말씀을 듣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야 한다는 것과 성서학자가 학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꼭 동일한 것은 아니지요. 물론 그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성서학자가 목자들을 대체하지는 않습니다. 성서학자의 역할은 목자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신부님들을 도와드릴 것 같지요?) 성서학자가 목자보다 숫자가 훨씬 적지요. 성서학자들이 신자들 모두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목자들은 성서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것도 공부해야합니다. (역전! 이제 제가 신부님들께 압력을 넣는 것이지요.)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공부가 없다면 계시를 전달해야 할 교도권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가르침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제가 강론을 들을 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근본적인 문제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강론이 학문적인 주석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저것은 정말 하느님의 말씀은 한 가닥 구실로 내세울 뿐 자기 상상을 말하고 있다고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본뜻을 너무 멀리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 상황에 따라서는 강론 중에 질문을 하시면 빗나가기 전에 일부러 얼른 대답을 하는데, 잘 안 들리시는 모양입니다 ….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신학생 양성에 관련하여 문헌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공부는 기도와 함께 가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오늘도 또 제가 교황님보다 말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신학생들에 대한 경험을 하나 들려드릴까요? 어느 날 1교시에 히브리어 수업을 하는데,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들어온 학생들이 모두 졸았습니다. 이건 히브리어 문법을 연계형이 어떻고 절대형이 어떻고 설명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을 때 제가 말을 멈추고, “예레미야서를 읽어줄까요, 아가를 읽어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웬일인지 모두들 한 목소리로 “아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약간은 뜻밖이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아가를 읽고 나서 썼던 편지 두 개를, 아가가 제 삶을 뒤집어놓았던 경험에 대한 남김 없는 고백을 학생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졸던 학생들이 처음에는 ‘저 수녀가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듯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무엇엔가 놀라고 있는 것이 보였고, 빨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읽기를 마쳤을 때 학생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내가 제정신이었나 싶었습니다(경향잡지가 공적인 출판물이라 표현을 좀 삼가려고 했지만, 사실은 글자 그대로 내가 미쳤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너무 과감하게 제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아가, 사랑, 여성성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그것도 신학교에서. 제대로들 알아들었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이것이 바로 제가해야 할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것, 말씀이 얼마나 강력하게 한 사람 안에서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맛보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빚어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배워가기 바랍니다.
삶 전체로 말씀을 구현해야
다음으로 수도자들에 대한 교황님의 말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결하시고 가난하시고 순종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은 하느님 말씀의 살아있는 주석이 됩니다.”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하여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그 말씀을 구현하는 것, 이것이 수도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수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수도자는 그것에 삶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평신도들의 삶 역시, 신자라는 신분을 살아내는 것은 여러 가지 가치관들 가운데에서 하느님 말씀에 따른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기초를 둔 삶을 엮어가기 위한 방법들을 열거하시면서 교황님은 특별히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만나기 위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대해서 설명하시는데, 그 단계들을 보면 우리의 삶이 말씀에 의해 변모되는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성경 본문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이 없다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막고 혼자서 말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인 묵상에서는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죽은 글자로서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의 현재 안에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단계인 기도에서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무엇을 말씀드리는가?”를 묻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는 분명 우리에게도 무엇인가 말씀드릴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인 관상에서는 “주님은 우리에게서 정신과 마음과 삶의 어떤 회개를 요구하시는가?”를 묻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인간적인 눈으로, 인간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각이 우리의 생각과 식별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독서는 행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이라는 책을 알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알고, 그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빛을 내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세상을 위한 말씀
이사야서 55장 10-11절의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 말씀을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주님의 말씀」의 제1부와 제2부,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제3부와 비교해 본다면,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 당신 말씀을 보내시는 것을 뜻하니까 제1부인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 비가 땅을 적시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듣는 것, 곧 제2부인 “교회 안의 말씀”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 다음이 제3부 “세상을 위한 말씀”입니다.
제3부의 라틴어 제목인 ‘Verbum mundo’는 ‘세상을 위한 말씀’ 또는 ‘세상을 향한 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 서문에서 말하듯이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 가운데에, 교회에 머무르시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일이 없는데 외아드님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요한 1,18 참조). 강생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들어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명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께서 오실 때에 그 말씀의 수신자인 동시에 선포자가 되어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 바로 교회이기에, 제3부는 교회의 사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2008년에 있었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주제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 하느님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었지요. 1월호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의 말씀」은 그 회의의 후속 문서였습니다. 이 문헌에서, 대략 말해서 “교회 안의 말씀”이라는 제목의 제2부가 “교회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의 위치를 다루었다면 이제 “세상을 위한 말씀”이라는 제목의 제3부는 교회의 사명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위치에 관련된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말씀을 선포하고 투신하는 교회
「주님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교회의 사명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 첫째는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에는 먼저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하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는 선교 사명에서 교회의 모범이 됩니다.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다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다른 누구보다도 열렬한 복음의 전파자,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에게 하느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그 말씀 안에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여 하느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고 의로움에 이르며 구원을 얻으려 했던 그는, 그가 애써 찾던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었음을 발견하고는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겨 내버렸습니다(필리 3,7-9 참조). 그 말씀이 바로 그에게 구원의 원천,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온 세상을 다니며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함께 사막을 건너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물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살 수 있도록 그 물을 나누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물이 생명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내가 안다면 나는 그 물을 나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말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것이 바로 그분이고 그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말씀과 교회의 관계를 놓고 볼 때에, 말씀을 받아들인 교회는 선교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로부터 파견된 말씀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교회의 사명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일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모든 신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성사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는 데에서 유래하는 책임”(94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교리책에 나오는 정의를 말하자면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지”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일곱 가지 성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는데 외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요한 1,18 참조).
그렇다면 육화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성사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사도들이, 교회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 사명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 수도자들, 평신도들 모두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 사명이라는 것을 너무 제한된 의미로 받아들일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하느님에 대해 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하느님의 말씀을 아직까지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니면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신앙이 식어버렸거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는”(히브 4,12) 말씀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셨는지를 기억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문장들을 들려주시거나 하늘에서 책 한 권을 내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우리 가운데 사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려주셨습니다”(요한 1,18).
이제 교회가 그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 동시에, 교회의 삶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말씀의 힘을 드러내야
이 단락의 앞부분에서 교황님께서 언급하신 한 구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를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세상은 희망을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닌 희망은 우리 마음 안에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나와야 하고, 그 희망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공연한 무신론자였던 니체는, “성경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이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 쓰여있다면 왜 그 책의 권위를 믿어야 하는지 그렇게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신앙을 지닌 사람의 삶이 말씀의 힘을 드러내 보일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희망과 기쁨이 우리 삶 안에서 넘쳐흐를 때 사람들은 우리가 지닌 “말씀”에 대해 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의 질문들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답을, 주님의 말씀이라는 답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생명이 넘쳐 흐르기를 바란다면 말입니다.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하느님 말씀과 세상에 대한 투신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다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우리가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을 봅니다. 실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스스로도 때로는 교회의 어떤 모습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투신의 근거이다
이런 판단을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하여도, 많은 경우 그것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우리 자신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이 세상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요청을 받는 교회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에 대한 투신이라는 것은 꼭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정의감에서, 또는 인도주의적인 정신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 투신하는 데에는 다른 어떤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살고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던 일을 역사 안에서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해 작은 행위 하나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드린 것이며 그 작은 손짓 하나가 세상 끝 날까지 가치를 보존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투신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이 세상을 조금 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곳으로 완성하려고 기울이는 우리의 겨자씨 같은 노력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감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일례로 생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보호’는 수십 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지요. 그것은 이미 인류의 생존을 위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환경 보호를 주장할 때 그 동기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기에,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이 살아가는 인간의 교만”(108항)이기에 교회는 “신앙의 복종에 근거를 두고” 창조의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와 평화를, 화해를 추구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약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우리 자신은 이 세상에게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민감하게 알아냅니다. 그 감각은 아주 정확해서, 우리에게는 위선이나 변명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질문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대답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더욱 고유한 의미에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행해야 할 몫입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세상에 대한 교회의 투신은 양식과 물을 주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목마름에 응답하는 것, 세상이 찾고 있는 그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고 또한 세상이 교회에게서 바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회제도가 아니라 신앙의 유산을 전수받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투신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갑니다. 예를 들어 삶의 방향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이 말씀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리스도교 국가로 옮겨오는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적 배려를 베푸는 것 등은 말씀의 선포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지닌 책임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온갖 종류의 고통 속에서 심각하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들에게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대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이유’(1베드 3,15)를 보여주어야 하고,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형제애로써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눈에 보이게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살아가면 안 될까요?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할까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할까 좀 망설였습니다. 인간적인 약함과 한계들이 그 말씀을 거의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하면,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표현을 선택합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인간의 죄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사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말씀이 현존하십니다. 그 말씀을 세상으로 들고 가는 것이, 말씀 안에서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역할입니다.
“말씀”과 “교회”
계속해서 말씀과 세상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하느님 말씀과 문화의 대화(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 그리고 하느님 말씀과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를 거쳐 이제는 문헌 전체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어온 문헌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때, 주님의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느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말씀”과 “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한 세대를 돌아보는 「주님의 말씀」은,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여러 방향에서 커져가는 성경에 대한 관심들을 그 말씀의 수신자이며 선포자인 교회를 중심 축으로 하여 한데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헌은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태어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간다.”(3항)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결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묵시록의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 하고 말하여라”(22,17). 묵시록에서 말하는 신부는 교회입니다.
신부인 교회는 성령과 함께 묵시록 21-22장에서 그려 보이는 새 예루살렘이 완성될 날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불완전한 지금의 모습이지만, 완성의 그날을 열망하며 자신의 사명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날의 삶은 교회에게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사귀시고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세상도 우리와 함께 그 친교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1요한 1,1-4 참조).
그 기쁨이 완성될 날을 고대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삶의 모든 날에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사시고 말씀하시도록, 말씀을 듣고 묵상하기 위하여 침묵합시다”(124항).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이 교회의 삶과 사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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