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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 느헤미야 6: 1-9
조상호 목사
작년 9월28일 경상북도 영덕에서 일가족 3명이 숨진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경찰에서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 시신을 부검한 결과, 독버섯을 잘못 먹고 숨졌다고 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20일이 채 되지 않아 미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출신 이민자 5명이 공원에서 버섯을 따서 먹은 후 1시간 만에 식중독현상이 나타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피해자들은 공원에서 발견한 버섯을 모국에서 먹었던 식용버섯인줄로 착각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버섯은 독버섯으로서 겉으로는 식용 버섯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마니타 펜터리나스(Amanita Pantherinas)라는 아주 유독성이 강한 버섯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에서나 해외에서나 버섯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종종 일어납니다. 버섯을 따러 산속에 들어갔다가 뱀에 물리고 벌에 쏘여서 죽기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독버섯을 일반 식용버섯인 줄 먹고 먹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 해에 독버섯을 잘못 먹어 사망하는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특별히 최근에 매스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송이버섯을 극찬하고 송이버섯으로 만든 음식물을 소개하며, 남자들에게 매우 좋으며, 암에도 좋고 비만도 치료되며 허약 체질이나 아토피도 치료되는 등 만병통치라고 떠들다보니, 버섯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무분별하게 따먹었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버섯은 균사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는 버섯세포도 하나의 균입니다. 다만 이 균들이 어느 것은 사람에게 이롭게 작용하지만, 대부분의 버섯균들은 인간에게 해롭게 작용하기 때문에 버섯을 채취하거나 먹는 데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르면 아예 먹지 말고, 가능하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력'은 우리의 삶의 전반에 필요합니다.
분별을 잘하느냐 잘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 잘하는 비결은 많습니다.
아이큐나 집안 환경, 학교 분위기 등에 따라 성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과 함께 어떤 것이 중요한지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 어떤 것이 시험에 나올 것인지 시험에 나오지 않을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별력의 차이에 따라 성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사업수완이 뛰어난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사업을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사업에 거의 실수를 잘 하지 않습니다.
분별력은 공부를 할 때나 사업을 할 때나 주택구입을 할 때, 등 우리의 삶의 전반에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이 분별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식용버섯인지 독버섯인지를 잘 분별해야만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처럼, 분별을 잘 해야 신앙생활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강해설교 10번째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따라서 하시겠습니다.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절반은 창을 들고 경비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무기를 들고 일하게 함으로, 산발랏 일당들의 방해를 극복하며 외부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만 급급했던 귀인과 민장들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원망하는 등 예상치 못한 내부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들을 꾸짖은 다음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을 아무런 조건 없이 되돌려주고 반성하는 의미로 그 동안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의 100분의 1를 이자로 쳐서 되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귀인과 민장들은 느헤미야의 요구를 따라 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가 깨끗하고 정직함으로 모범을 보였고, 백성들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느헤미야는 모범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
더 나아가 느헤미야는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일반적으로 문짝은 건축공사를 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답니다.
1절 하반절에서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몇 개의 성문 문짝만 달면 모든 공사는 끝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 대적들은 느헤미야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산발랏 일당들은 성문 문짝들을 달고 나면 유다 백성들을 공격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벽 문짝을 설치하기 전에 느헤미야에게 오노 평지의 어느 외딴 시골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이 이러한 제안을 하려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일당들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그러한 제안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책에서 <아내의 말의 실제 뜻>이란 제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의 말에는 숨어있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아내가 “우리 얘기 좀 해요”라고 말하면, 아내가 마음속에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차에 먼지가 많던데”라는 말은 빨리 나가서 세차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아내가 “자기, 나 사랑해?”라고 하면, 그 말은 “나 사고 싶은 게 생겼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맘대로 해요”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아시는 분? 이 말에는 “맘대로 하기만 해봐”라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맘대로 하라고 했다고 맘대로 했다가는 반찬 없는 밥을 먹든지 집안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또한 “쓰레기 봉지가 꽉 찼어요.”라는 아내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아시는 분? “쓰레기 좀 버리고 와”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에는 크고 작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대화를 잘 하려면 그 숨어있는 뜻을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아내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면, 평화로운 가정을 원하면 아내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를 빨리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보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 만난 노처녀 자매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민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말 다 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 다 표현하니까 형제들이 그 자매에게 관심을 쏟기는커녕 무서워서 다 도망을 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 친구가 없는 형제들을 보면, 눈치가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형제들일수록 자매가 던지는 말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매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결혼생활, 이성교제, 직장생활, 군대생활, 등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상대방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를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곳곳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동원해서 알았는지, 아니면 산발랏 일당들 틈에 은밀하게 자기 사람을 숨겨놓아서 알았는지 어떻게 해서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산발랏 일당들이 자기를 오노 평지로 불러낸 이유를 알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산발랏 일당들이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고 제안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느헤미야와 같은 분별력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전략을 알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산발랏 일당들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오노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만큼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세운 목표에 집중한 사람
또한 그는 목표에 집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뛰어난 분별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뛰어난 집중력을 가졌습니다.
그가 무엇에 집중했습니까?
성벽재건공사입니다.
그는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고, 성문은 다 불타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꿈에도 소원은 성벽재건공사였습니다.
그래서 산발랏 일당들이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라고 제안을 했을 때도 일언지하에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오노 평지는 예루살렘 성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산발랏 일당들은 네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 그리로 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느헤미야는 똑같이 대답을 하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네 번씩이나 똑같이 대답한 말이 무엇일까요?
다같이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산발랏 일당들이 4번이나 사람을 보내 계속해서 만나자고 간청을 했을 때, 느헤미야가 그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한 가지 목표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라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추장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 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세 아들 다 총명했고, 세 아들 다 원대한 비전과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추장은 세 아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들판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추장이
첫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큰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큰 나무가 보입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큰 아들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예, 큰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셋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는가?”
“예, 큰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의 펄떡펄떡 거리는 심장이 보입니다.”
그러자 추장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아라.”
여러분, 어떤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을까요?
셋째 아들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셋째 아들에게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재능을 타고났지만, 좋은 환경이 주어졌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뛰어넘어 집중하는 결단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무슨 결과를 얻어도 얻습니다.
신년 첫 주일에 소개한 것처럼 사도 바울도 느헤미야처럼 집중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거룩한 푯대’라고 지칭한 아주 선명하고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느헤미야와 사도바울처럼 뛰어난 집중력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집중하고, 예배에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초점을 흐리게 합니다.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게 자꾸만 주위에 신경을 쓰게 만들고, 쓸모없는 것들을 위해 낭비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좌고우면하지 말고 느헤미야와 사도바울처럼 목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유행과 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남들과 비교하지도 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중요한 것을 덜 중요한 것과 바꾸지 말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헛소문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
또한 그는 헛소문에도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암살 작전도 무섭지만, 헛소문 작전은 더 무섭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헛소문은 헛소문의 주인공과 헛소문을 들은 사람이 모두 피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문은 멀리 퍼지고, 나쁜 소문은 더 멀리 퍼진다."
"소문은 소경이다. 하지만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말처럼, 헛소문은 굉장한 힘을 발휘합니다.
1923년 9월1일 일본 도쿄에 대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 화재까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일본인들을 몰살시키려고 우물에 독을 풀어 넣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 악성소문으로 인해,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6,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 1946년 여름, 기근이 돌 것이라고 하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당시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을 듣고 놀란 소작농 2만여 명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 결과 농사는 망치게 되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소문대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결국 사실이 되고 만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가수나 탤랜트나 배우, 스포츠 스타, 정치인등 유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헛소문은 엄청난 여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악성루머를 견디다 못해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심하면 자살까지 합니다. 이것이 소문의 힘입니다.
헛소문 때문에 멀쩡한 기업이 자금난에 시달려 문을 닫기도 합니다.
헛소문 때문에 건강한 가정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헛소문 때문에 사랑의 공동체가 분열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헛소문은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3장 1절에 보면,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헛소문을 만들어내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소문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을 가졌다고 합니다.
첫째, 이것이 사실인가?
둘째, 본인에게 확인했는가?
셋째, 만일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 하나님과 교회에 영광이 되고, 형제들과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항상 점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뜨리는 말 대신에 하나 되게 하는 말을 하고, 죽이는 말 대신에 살리는 말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피눈물 나게 하는 말 대신에 위로하고 격려하며 오직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말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산발랏 일당들은 말의 힘, 소문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번이나 시도했던 느헤미야 암살작전이 실패하자, 또 다른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 작전이 바로 ‘헛소문 작전’이었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산발랏은 한 메신저를 통해 5번째로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주라는 편지는 unsealed letter 즉 봉하지 않는 편지였습니다.
여러분, 산발랏이 왜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냈을까요?
그 이유는 누구나 그 내용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산발랏이 보낸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실렸을까요?
다같이 6절과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여기 ‘가스무’란 본문 1절에 등장하는 게셈과 같은 인물로서, 아바라비아식 이름입니다.
산발랏 일당들은 자기들의 계략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느헤미야가 바사제국의 황제를 배반하고 유다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산발랏이 세운 이 헛소문 작전은 앞서서 시도한 암살 작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같이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는 헛소문 작전을 펼치고 있는 산발랏 일당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왜 그렇게 말을 하느냐, 없는 말을 꾸며내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할 만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대 왕정시대 때 가장 무서운 죄는 반역죄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역사를 보면,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아닥사스다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느헤미야라 할지라도, 왕이 오해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일당들에게 ‘없는 말을 꾸며내지 말라’고 경고한 다음,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 자칫 잘못하면 산발랏 일당들의 헛소문 작전에 누명을 쓰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공사를 멈추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며 나갔습니다.
이처럼 어렵고 낙심되는 일을 만날 때,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변명하기보다 느헤미야처럼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신비한 힘과 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푸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내가 받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어느 유머집에서 읽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양 한 마리가 늑대에게 쫓겨 어느 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성당 밖에서 늑대가 양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그곳이 어디라고 들어갔어? 빨리 그곳에서 나와! 성당에서는 양을 잡아 불에 태워 희생 제물로 드린단 말야!”
그러나 양은 비아냥거리면서 늑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늑대의 입에 들어가는 희생양보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영광스러운 희생양이 되는 쪽을 택할거야.”
주위에 보면 늑대처럼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한 현상입니다.
말세가 되면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등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깁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어떤 것이 가짜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말세 때는 늑대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거짓말에 속아 마귀에게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에게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분별을 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비에 새기고, 영적으로 깨어서 미혹하는 사람들을 잘 분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좌고우면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목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낙심되는 일을 만날 때, 느헤미야처럼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