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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8
레위지파가 얻은 성읍 / 김덕복 목사
사람이 배가 부를 때는 자기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데 상당히 여유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면 다른 사람의 생각은 항상 뒷전이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 28연대에서 훈련병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인간이 배고픈 상황에서 얼마나 비참해지고 얼마나 치사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을 했습니다. 야간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면 취침 전에 건빵이 한 봉지씩 배급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한 소대에 건빵이 두 세 봉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빵을 한 봉지씩 나누어준 후에 모자라 배급받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철모를 거꾸로 뒤집어서 나누어준 건빵에서 한 알, 두 알씩 다시 또 거두는 겁니다. 그래서 건빵을 배급받지 못한 사람에게 그 건빵을 나누어서 먹게 하는 그런 일들이 아주 자주 연출이 되었습니다. 훈련병들이 훈련을 나간 다음에 조교들이 건빵을 훔쳐먹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다시 건빵을 이렇게 몇 알씩 거두는 겁니다. 그런데 그 건빵 한 알, 두 알 다시 거두는 것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막 훈련병들이 다 욕을 합니다.“어느 도둑놈이 건빵을 훔쳐먹고 내 몫을 이렇게 내어놓아야 하느냐?” 얼마나 비참한 광경입니까? 사지가 멀쩡한 청년들이 사회에서는 건빵을 먹으라고 해도 잘 먹지 않던 건빵 한 두 알이 아까워서 그것을 부둥켜안고 말입니다. 또 어떤 훈련병들은 제것은 빨리 먹고 치우고 다른 사람에게 좀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바삭 바삭 씹어 먹으면 옆에서 달라고 할까봐서 그것을 침으로 녹여먹는 치사하고 비참한 모습을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는 것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여호수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다 분배받았습니다.
이제는 땅 배가 끝났습니다. 땅 분배가 다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사람들을 다 소집해서 물론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어느 어느 지파는 무슨 무슨 성읍을 레위 지파 사람들의 게르손 자손에게 주고, 어느 지파의 어느 성읍은 고압자손에게 주고, 어느 지파의 어느 성읍은 므라리 자손에게 주고, 어느 지파의 어느 성읍은 아론 자손에게 주라,”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서 레위 지파에게 주도록 한 그 성읍들이 몇 개였는가 하면 그 성읍은 48개 성읍이었습니다. 보통 이스라엘의 세 지파당 레위 지파에 한 자손씩을 감당했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이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아론 자손을 새로 분류를 했기 때문에 네 족속으로 분류를 해서 네 족속에게 성읍을 이렇게 골고루 분배를 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서 13장 14절과 33절을 보시면 아주 특이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그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했고 33절에서는“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그랬습니다. 여호수아도 레위 지파에게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고 모세도 레위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레위 지파의 기업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되기 때문이라.”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부 열두 지파인데 열두 지파가운데 레위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으면 나머지 열한 지파인데 그 중에서 요셉 지파가 두 몫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땅을 분배 할 때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하면 레위 지파는 항상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외되어졌던 레위 지파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제비를 뽑아 그 분깃을 나누어주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이미 나누어주었던 성읍들을 지적해서“거기에는 너희들이 살지 말고 레위 지파를 위해서 그 성읍들을 양보해라.”이렇게 명령을 하게 되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건빵이 모자라서 다시 조금씩 거두어 들여서 그것을 건빵을 배급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처럼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의 억울함과 원통함과 아까움이 전부 배여있는 그 성읍들을 이렇게 구분해서 레위 지파를 살게 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 성읍을 하나님께 내어놓았고 그 성읍에 이스라엘의 레위 지파 자손들이 살았던 그런 아름다운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 지파 사람들 가운데 인간적인 탐욕이 있다든지“야 이거 우리 땅인데 왜 레위 지파에게 우리 성읍을 주어야 되느냐”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도 아마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인가?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레위 지파는 어떤 지파이고 레위 지파가 분깃으로 받은 성읍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영적인 은혜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레위라는 사람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시므온 지파에 대해서 은혜를 나눌 때 함께 생각했던 것처럼 바로 시므온의 아래 동생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명이 있었는데 그 네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레위는 첫 번째 아내였던 레아에게서 낳은 세 번째 아들이었고, 전체 열두 명의 아들가운데 서열 3에 속한 아들이 바로 이 레위라는 아들이었습니다.
이 레위라는 아들은 굉장히 성격이 과격했고 포악했습니다. 인간적인 질투심도 물론강했습니다. 어쩌면 야곱의 가정의 분위기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네명의 아내에게서 열두명의 자식을 낳아서 물론 딸들까지 포함하면 그 인원수가 훨씬 많습니다만 그 많은 자녀들이 자라나면서 서로 배다른 형제끼리 인간적인 갈등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야곱이라는 사람이 이 시므온과 레위의 어머니인 레아를 사랑하기보다는 라헬이라는 다른 어머니를 더 사랑했고 그 배에서 낳은 요셉과 베냐민을 더 사랑했지 때문에 그 집안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말미암아서 자식들 사이에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시므온과 레위는 형과 아우가 똘똘 뭉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결국은 끔찍한 복수극을 저지르기도 했고 그로 말미암아서 아버지가 곤란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고 그 아버지로부터 나중에는 저주를 받는 그런 아들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시면“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했습니다.
레위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벌써 세 아들이 이었습니다. 이 세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야곱을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자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137세에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이 레위의 자손들은 시므온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그들의 삶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자손들은 점점 인원수가 많아져서 이 레위의 아들 게르손과 고핫. 므라리 지파가 별도로 형성될 정도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요셉인 것입니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많은 지파의 인원수가 늘어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지파로 등장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똑같이 저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므온 지파도 레위지파도 바로 그 조상인 야곱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점점 문제 속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해서 역사속에서 사라져 가는 지파였다면
레위 지파는 자기가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의 삶을 더욱더 복되게 꾸려 나갔던 그런 지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이 세 사람이 이제 바로 레위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레위 지파를 구분하여 세우고 하나님의 성막을 관리하고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에 가기까지 법궤를 짊어지고 가는 제사장들과 또 그 성막을 관리하고 움직이는 그 중요한 성직을 감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농사도 짓지 않고, 길삼도 하지 않고, 목축도 하지 않고 생업에 전혀 종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일들, 성막과 성전을 돌보는 일들만 감당하도록 역사속에서 하나님께서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과정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머물러 서있는 자리에 그들도 머무르고, 진치고, 그들도 성막을 짓고 또 구름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그들은 그 성막을 거두어서 옮기는데 그들에겐 역할 분담이 아주 분명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라도 므라리 게르손 오핫 이 세 지파가 담당해야 될 일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나이 삼십에서 나이 오십되는 장정들을 뽑아서 이 성막을 돌보게 하고 어떤 지파에게는 성막안에 중요한 기구들을 운반하는 일, 어떤 지파에게는 성막의 모든 휘장과 덮게와 그 줄들을 운반하는 일 또 므라리 자손 같은 경우에는 성전에 기둥과 받침과 말뚝 이런 것을 운반하는 일 이렇게 역할 분담이 되어있었고 또 그 중에서 고핫 자손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에게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이렇게 정확하게 그들의 역할을 분담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할에 대해서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도 거기에 그대로 다 순종하고 감당했던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점을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이 직업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가?”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 가운데 한국 직장인들만큼 자기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낮은 직장인들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 여러 가지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과 또 사회적인 이런 요인들이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서양의 기독교 국가의 사람들은“나의 직업은 내가 선택했지만 이 직업을 나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셔서 나에게 이 직업을 맡기셨다.”
그래서 자기 직업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고 자기 직업에 대해서 만족하고, 그 직업을 통해서 자기 자아를 실현하고, 그 직업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그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직업에 귀천이 없었습 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직업에 대해서 떳떳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직업에 대해서 말할 때 쭈삣쭈삣 좀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안 할 수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우고 전업을 하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동남아 국가 특별히 불교국가나 또 중동에 이슬람국가들은 사람들은 자기 직업은“바로 알라신의 뜻이다.”이렇게 생각하면서 직업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또 동남아에 많은 불교 국가에서는“직업은 나의 운명이다.”이렇게 생각하면서 숙명적으로 자기업에 대해서 체념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직업에 대해서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와 또 전통적인 도교 문화등 잡다한 그 문화 속에 본보기가 되어 살면서 상대적인 잘못된 가치관으로 말미암아서 직업에 대해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보다는 항상 다른 사람의 역할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역할이 무엇이라는 걸 바로 알고 이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누가 나보다도 크고, 누가 나보다도 드러나고 누가 나보다 더 잘 이름을 날리는 역할을 분담하고 있느냐”여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악순환을 되풀이 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직업은 영어로 Vocation이라는 단어로 쓰여지지만 Calling이란 말도 있습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직업관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틴 루터는 Beruf라는 독일어 단어를 사용하므로 둘다 직업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으로 인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 특별히 장로교 교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직업의식이 투철합니다. Calling이란 말이나 Beruf라는 말은“하나님 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에게 이 직분을 맡기셨다.”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아서 내가 이 일을 감당하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레위지파 사람들이“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부름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구별되어졌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맡기셨다.”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이 일을 성실하게 잘 감당해 나갔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절대 월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간섭하지 않았고 자기 영역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레위라는 사람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이 세아들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그 중에서 이 고핫이라는 아들의 후손들이 이 레위 지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론이 태어났고 이 아론과 그 후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 나갔던 기록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2. 레위지파가 받은 성읍들의 의미
우리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레위 지파가 받은 성읍들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 봅시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처럼 일정한 지역의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열두 지파가 사는 그 넓은 땅덩어리 속에 각각 흩어져서 48개의 성읍 가운데 살아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도, 이스라엘의 남쪽에도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도 이렇게 각각 흩어져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꾸려 나가게 되어졌습니다.
첫째로 야곱으로부터 시므온과 레위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야곱에게서 나눌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게 하리라.”
여러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의 이름이 야곱인 것입니다. 야곱의 본래이름은 야곱이었는데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그 명칭이 생겨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명의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는데 거기서 셋째 아들 레위의 지파가 그 아버지의 저주로 말미암아서 한데 뭉쳐 살지 못하고 각각 흩어져서 삽니다.
그러나 이것을 영적으로 우리가 재해석을 할 때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여기에 숨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의 전역에 흩으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거룩한 삶을 사는 모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도록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그들을 지도하고 그들을 이끌어 나가게 하셨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특별히 선택받은 지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약 시대에는 이 성경을 해석할 때“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제사장들이다.”
그래서 만인제사장론을 이야기합니다.
히브리서나 베드로전서2장 9절을 보면“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의 정신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특별하게 구분되어 레위 지파사람들, 그 가운데에서도 아론의 후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으로서의 역할과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한곳에서 옹기종기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들 믿지 않는 무리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속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각 지파속에 흩어져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레위 지파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십일조를 가지고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그런 정신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유대인들 가운데도 그들에게는 회당 문화가 있습니다. 회당이 있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의 가정은 열 가정만 있으면 학교를 세운답니다. 그 속에 회당이 바로 학교입니다. 그 회당이 그들의 종교적인 중심지요 교육쎈터인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 한 사람을 초청해와서 그 랍비로하여금 자녀들을 교육하도록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배려하는 그런 전통
이 과거에서 지금까지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신명기 12장을 보시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너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너의 우양의 처음 낳은 것과 너의 서원을 갚는 예물과 너의 낙헌 예물과 네 손의 거제물은 너의 각 성에서 먹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서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했습니다.
“레위인이 어떻게 사는지 무관심하지 말고 레위인이 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레위인이 그룹공동체를 유지하는 주체세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너희들이 십일조를 내서 레위인의 생활을 감당해라.”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레위인들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성읍들 가운데 성읍을 차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분깃을 주었는데 그 들의 넓이가 얼마냐 하면 천규빗입니다. 성벽에서 천규빗, 천규빗 이렇게 둥그렇게, 그러니까 성벽에서 456미터의 초지는 레위인들의 들로 관리를 하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주셨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사장 앞에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 십일조를 관리합니다.
그리고 곡식이나 과일이나 채소나 이런 것들은 창고에 들이고 레위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우양이 라고 한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소와 양과 또 다른 짐승들입니다. 이렇게 십일조로 그것들을 가져왔을 때 그 짐승들을 이 들에 놓아서 먹이게 했습니다. 새끼를 치고 목축업을 한 것이 아니고 그 짐승들을 잡아 먹고 그 짐승들을 거기에서 이렇게 보호를 하도록 하는 그런 조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이 십일조의 의무를 당연히 감당하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레위인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도록 했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9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재단을 모시는 이들은 재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이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치사하고 또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같은 경우에는 이 교회에 물질을 관리하는 제도나 또 물질을 관리하는 방식이 사실 원리에서 벗어나 있고 낙후되어있고 그로 말미암아 가장 신성해야될 가장 거룩해야될 교회가 돈 문제 때문에 가장 치사해지고 추해지는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성경적인 것을 좇아서 성경적인 원리에 입각해서 사실은 물질을 관리하고 물질을 사용할 수 있어야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독일 교회같은 경우에는 그 기독교인들이 종교세를 국가에 내면 그 종교세를 국가에서 각 교회에다가 분배를 해 주고 교역자들 국가에 공무원 같은 신분을 가지고 호봉에 따라서 생활을 하도록 생활비를 지급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인들이 낸 헌금을 모아서 거기에서 교역자 사례비를 드리니까 여러 가지문제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과거의 이스라엘 지파들만큼 성숙해 있으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 그 문제 때문에 이런저런 갈등들이 생겨나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때로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같은 역할을 하려는 그런 교인들도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물질 문제로 서로 치사해 지고 서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물론 한국의 개척교회는 교회 헌금을 다 모아서 목사 생활비를 다 대어도 감당하지 못하는 그런 교회들이 엄청나게 많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다수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는데 힘든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헌금을 가지고 선교를 하고 구제나 그 밖의 일을 하기가 힘들고 목회자들 생활비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내가 교역자 먹여 살린다.”라는 생각으로 월권하므로 말미암아 교역자로 하여금 아주 비참하게 만드는, 거지에게 동냥 주듯이 취급하는 그런 아주 불행한 교회들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들이 이 성경을 잘 못 해석해서“십일조는 전부 내꺼다.”이래서 말썽을 일으키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사실 여러 가지 해석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우리가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원리를 찾아 적용을 하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탐욕이 중심이 되서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그런 경우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가 행하려는 그런 의지가 필요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세째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지파입니다.
시므온 지파는 저주를 저주로 마무리 지은 지파라면 레위지파는 저주를 역전시켜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일구어낸 그런 위대한 지파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야곱의 저주대로 시므온지파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서 역사속에서 배반하고 반역하고 그래서 염병이 들어서 삼만 명이 하루에 죽어 나가는 그런 일에 주도적인 반역자 노릇을 했고 역사속에 다른 사람에게 붙어 살아가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 레위지파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자기 형 시므온과 같이 함께 저주를 받았는데 역사를 살아오면서 그 후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했다는 겁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똑같은 처지인데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반응을 해서 인생을 풍성하게 열매맺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좋은 환경에 태어나고 더 좋은 환경에 자라면서도 부정적으로 반응해서 인생의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게됩니다.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이 레위 지파 사람들은 바로 저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살아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축복 받는 지파가 되었고 가장 축복 받는 족속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감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그런 지파가 되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가끔씩 우리는“조상이 안 좋아서, 피가 좋지 못해서 그렇다.”이렇게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때로는 우리 조상들이 나쁜 죄를 저질렀고 때로는 우리 조상들이 사악한 일을 했고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것, 하나님 앞에 세워졌다는 것,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불려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우리가 긍정적인 반응을 한다면 우리 인생은 이 순간 달라질 것입니다.
저와 오랫동안 함께 사역을 했던 Martin Heide라는 독일 목사가 있었습니다. Heide 목사는 자기부모에게 부끄러운 과거가 있음을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삼 형제가 전부 목사가 된 사람이었고 또 독일에서 청년사역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제가 외국인 학생과 유학생들 상대의 사역을 했기 때문에 아주 긴밀하게 협조를 했고 제가 교회를 개척할 때도 교회당을 제공하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던 그런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보통 서양사람들과 다르게 굉장히 감성적이었습니다. 잘 부둥켜안기도 하고 잘 울기도 하고...
한번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아버지는 히틀러의 비밀경찰, 히틀러 친위대의 장교였답니다. 이 마틴 하이드 목사의 아버지였던 하이드 대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대를 나와서 유고지방 비밀경찰의 한 지역 책임자로 일했다고 합니다. 많은 유고 게릴라들을 죽이기도 하고, 또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또 수용소로 보내는 이런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재판을 받고 8년간 형무소 살이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하이드 대위는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자기의 아버지, 그러니까 하이드목사의 할아버지가 가정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분노 때문에 투쟁을 하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었고, 그 피를 물려받은 아들 하이드 대위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나치당에 들어가서 청년 열혈 당원으로써 사회에 대한 보복심리로 수많은 사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형무소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지만 한 평생 속죄하는 모습으로 살았답니다.
그리고 자기 세 아들에게“너희들은 성직자가 되라.”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마틴 하이드 목사의 세 형제는 모두 다 목사가 되었고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저질렀던 죄를 속죄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베를린에 돌아가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귀한 사역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레위 지파 사람들 가운데는 문제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 가운데 고핫 자손들이 가장 주도적이고 가장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만 그 중에는 가장 고질적인 문제아 고라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라라는 사람이 반역을 일으켜서 모세에게 대항하고 사람들을 몰아서“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는 이쪽을 볼 수도 있고 저쪽을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땅만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신세타령을 할 수도 있고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열린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헌신하고 봉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더 놀랍게 받는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됩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선두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헤쳐 나갈 때 가장 어려운 가장 힘들고 가장 포기하고 싶은 그 광야 행군 대열에서 그들은 앞장서서 나갔습니다. 법궤를 짊어지고 앞장 서서 나갔습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두에 섰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기 싫어하고 책임지기 싫어하고 자꾸 뒤로만 뒤로만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나는 좀 능력이 부족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재능은 없지만 나는 열심하나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봉사하겠습니다. 내가 헌신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능력도 지혜도 있고 뛰어나지만 자꾸 뒤로 뒤로 빠지는 그런 잘못된 습관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잘못된 습관들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레위 지파 사람들과 같이 되어지기를 간히 바랍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축복의 자리일수도 있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축복을 저주로 바꾸는 무서운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나님 앞에 어떻게 고백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말씀하심에“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백하는 레위 지파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