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우리말 어학 사전에서 자유(自由)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성경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자유”를 ἐλευθερία(엘류데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노예로 매여 있던 상태에서 자유롭게 놓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영어 성경에서는 “자유”를 freedom(프리덤)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구속 받지 않은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많은 국가나 개인은 자유를 선호하고 자유를 추구합니다. 특히 미국을 건국하는 일에 온 열정으로 헌신했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영국의 억압적 식민지배 정책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뜻으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하는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선택의 자유, 등과 같은 모든 자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본능입니다. 이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다 더 낳은 삶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학문과 경험적 지식을 습득합니다. 또는 돈에 해당하는 물질적 넉넉함을 소유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구가 충족이 될 때 자기가 삶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육신에 근거한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온갖 불법하고 타락한 방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한 여성 영화배우로 잘 알려진 메간폭스(Megan Fox)는 자기의 마음과 육신적 본능의 자유를 즐기기 위하여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참 영혼의 자유가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죄책감을 비롯한 아픔과, 상처와, 쇠사슬의 올가미에 걸려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는 이미 타락하고 망가진 양심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히미하게나마 하나님이 하락하신 양심의 재판관이 심판하는 심판의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병들고 타락한 영혼이 추구하는 세속적 자유는 항상 변화무쌍한 불안전한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자유가 내일의 쇠사슬에 매이는 멍에로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이 타락한 영혼의 세속적 논리로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허울뿐인 거짓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에 속아선 안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말씀하는 진리(眞理)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진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입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진리의 뜻은 “참되고 진실한 것, 또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같은 의미의 뜻으로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진리라는 명사를 ἀλήθεια(알레데이아)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의미의 진리는 자연만상에도 있고, 과학, 수학, 철학, 인문학, 윤리학, 등에도 있습니다. 예컨대 지나간 한 때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연계의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그 흔한 수학적 진리에는 “하나에서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흔한 인문학에는 “육신을 입고 한번 태어난 인간은 반드시 한번 죽는다”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런 진리는 수천 년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진리를 통해서 한번 받은 영생하는 구원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수 진리는 이 세상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일반적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속한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영적 진리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하나님은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진리를 알지니”라는 말씀은 세상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숨겨지고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아 아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이 절대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절대 불변하는 예수 진리의 진실을 진정으로 깨달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그 영혼의 자유함은 한결같습니다. 원죄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참 진리이신 예수주의 신앙으로 살고 예수 성령으로 사는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영적 자유인의 만족을 넉넉히 누립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예수 진리를 거절하는 불신앙들은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속한 사람이든 교회 밖에 속한 사람이든 예수 무영접 불신앙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의 진리 뿐 아니라 그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예수 구주를 영접한 믿음으로 믿어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은 필연코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주는 자유를 풍성하게 누립니다.
성경 구절 참조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론 및 총론
바람은 바람이기 때문에 나뭇가지에 걸리지 아니하고 물은 물이기 때문에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 성령은 하나님 영이기 때문에 그 어떤 물리적 상황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의 심령은 예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이기에 결국은 예수 성령의 영과 한 영체(靈體)로 거듭난 영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영원한 사망을 불러오는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는 자유함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과 영혼(심령)이 분리된 영적 상태에서 그 어떤 삶의 장애물에 걸려 실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매 때마다 순간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사신 것을 아느니라"(엡 3:17)는 말씀을 이룹니다.
결국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척박한 가난의 밑바닥에 내몰리고 때로는 고통스런 육신의 중병에 시달려도 그 모든 불행을 초월하는 영혼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 어떤 극한의 시련으로 애통하는 슬픔이 쌓이고 낙심으로 절망하는 난제들이 파도처럼 덥쳐와도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이 없이 주님의 선한 뜻으로 고스란히 수용합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악의 순간을 맞이해도 저 천성(天成)을 향한 영혼의 자유는 잔잔한 평안의 소망을 완성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과 한 영체로 살기 때문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
이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필연코 영적인 심령의 자유를 찌르고 그 자유를 빼앗아가는 흉기와 같은 한 점의 죄악을 칼끝처럼 거절하고 이렇게 거절한 직심(直心)을 끝까지 지킵니다.
이 뿐 아니라 한 번 회개한 죄악은 결단코 고의로 재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번 반복되는 회개의 실패는 보다 더 강력한 일곱 귀신을 불러오는 것이고 그만큼 더 악화된 영적 장애와 어둠의 감옥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한 예수 영접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기라는 자아(自我)의 주체(主體)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자기 안에 계시고 사시는 예수 성령이 주체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과 사정이 어떻하든 끝까지 불법하고 타락한 세상의 육신적 탐욕과 계산법을 초월합니다. 그러면서 온갖 사탄에게 연루된 거짓되고 위선된 허세의 형식을 믿음의 법으로 타파합니다.
그 뿐 아니라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하는 신령한 영적 자유인(自由人)으로 삽니다.
이런 이해의 말씀으로 기독교의 구원과 그 구원의 진리가 주는 자유의 의미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