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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이토 히로부미 가나자와 별저(旧伊藤博文金沢別邸)
구 이토 히로부미 가나자와 별저(旧伊藤博文金沢別邸)는, 초대 내각 총리 대신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1898년에 경치 좋은 가나자와에 지은 초가 지붕의 시골풍 해변 별장 건축이며, 다이쇼 일왕(大正天皇, 1879-1926)이나 조선 황태자 등도 방문한 적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제3차 이토내각을 발족시킨 1898년에 조영하였는데, 도쿄만(東京湾)에 면한 노지마(野島)는 에도시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1797-1858)이 묘사한 가나자와팔경(金沢八景) 중에서도 노지마노세키쇼(野島夕照)로 묘사하고 있는 경승지로, 공원 내 전망대에서는 후지산(富士山), 보소반도(房総半島)를 조망할 수 있다. 정원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응접실 및 거실은 메이지(明治) 시대 지어진 것이고, 그 외 현관이 있는 부엌, 욕실 등은 복원한 것이다.
하야마(葉山), 가마쿠라(鎌倉), 오오이소(大磯), 오다와라(小田原) 등지가 별장지로 각광받기 전에, 토미오카 등의 도쿄 근교 요코하마(横浜)・가나자와(金沢)는, 메이지 연간 해변 별장지로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제4·6대 내각 총리 대신의 마츠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1835-1924)나 대장 대신·외무 대신 등을 맡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1836-1915), 일본화가 카와이 교쿠도(川合 玉堂, 1873-1957) 등이 여기에 별장을 마련했다. 구 이토 히로부미 가나자와 별저는 당시 건립되었던 별장건물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귀중한 건축 유구이다. 현재 노지마 공원(野島公園) 내에 있는 저택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자료와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이토의 사후에는 아들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1870-1931),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1885-1951)의 소유가 되었고, 이후 닛산(日産) 휴양소가 되었다가, 종전 후 요코하마시(横浜市) 소유가 되어 2006년, 요코하마 지정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건물이 노후하여, 2007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2009년 일반공개되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0-1909)는, 죠슈번사(長州藩士) 출신의 정치가로, 아명은 리스케(利助), 후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으로부터 학문과 재능이 뛰어남을 뜻하는 슌에이(俊英)에서 '슌(俊)'을 따와 슌스케(俊輔)로 바꾸었다가, 다시 슌스케(春輔)로 개명하였다. 호(号)는 슌뽀(春畝)이며, 슌뽀 공(春畝公)으로 쓰기도 한다. 또 오다와라(小田原)에 있는 별장, 소로카쿠(滄浪閣)에서 소로카쿠슈진(滄浪閣主人)이라 불리기도 한다.
스오노쿠니(周防国) 출신으로, 죠슈번(長州藩)의 사숙(私塾),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학문을 배우고, 막부 말기의 존왕양이(尊王攘夷)와 도막운동(倒幕運動)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1868년 유신(維新) 이후에는 삿쵸(薩長, (사츠마번과 죠슈번)의 번벌정권(藩閥政権)내에서 힘을 키워,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 부사(副使), 참의(参議) 겸 공부경(工部卿), 초대 효고현 지사(兵庫県知事)를 역임하였고,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国憲法)'을 기안(起案)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대 · 제5대 · 제7대 · 제10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 및 초대 추밀원(枢密院) 의장, 초대 귀족원(貴族院) 의장, 초대 한국통감(韓国統監), 원로(元老)를 역임하였다. 내정(内政)에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를 결성하여 초대 총재(総裁) 역임, 외교(外交)에서는 청일전쟁 승리에 따른 청일강화조약 기안 · 조인(調印)하였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조선 민족주의 활동가(朝鮮民族主義活動家)인 조선인 안중근(安重根)에게 암살되었다.
1841년 스오노쿠니(周防国) 쿠마게군(熊毛郡) 츠카리손아자(束荷村字) 노지리(野尻), 현 야마구치현(山口県) 히카리시(光市) 츠카리아자(束荷字) 노지리(野尻)의 하야시 쥬조(林十蔵, 1816-1896, 후에 하야시 쥬조(林重蔵)로 개명)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아키야마 쵸자에몬(秋山長左衛門)의 장녀인 아키야마 코토코(秋山琴子, 1819-1903)이다. 1846년에 파산한 아버지가 홀로 하기(萩)로 부임하면서 히로부미는 모친과 함께 외가에 맡겨졌다가, 1849년 부친의 요청으로 하기(萩)로 이주하였다. 하기(萩)에서는 번사(藩士)였던 쿠보 고로자에몬(久保五郎左衛門, 1804-1861)의 주쿠(塾)에 다녔다.
1857년, 에도만(江戸湾) 경비를 위해 사가미(相模)로 파견되었을 때, 상사(上司)로서 부임해 온 쿠루하라 료조(来原良蔵, 1829-1862)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그의 소개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문하였다. 이토(伊藤)는 친구인 요시다 토시마로(吉田 稔麿, 1841-1864)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신분이 낮아 주쿠(塾)의 문턱을 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문 밖에서 선 채로 청강(聴講)했는데, 그마저도 오래 다닐 수 없었다.
1858년, 쇼인(松陰)의 추천으로 죠슈번(長州藩)의 교토(京都) 파견 일행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후 번(藩)에 돌아온 뒤에는 쿠루하라료조(来原良蔵)를 따라 1859년까지 나가사키(長崎)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쿠루하라의 소개로 쿠루하라의 의형(義兄),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1833-1877, 후일의 키도 타카요시(木戸孝允))의 종자(従者)가 되어 죠슈번(長州藩)의 에도야시키(江戸屋敷)에 거주하였다. 이 무렵 시지 분타(志道聞多, 1836-1915, 후일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만나 친교를 맺었다.
그 해, 쇼인(松陰)이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 1858-1859), 막부의 타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 1815-1860) 등이 100명이 넘는 존왕양이파와 히토츠바시파(一橋派)의 다이묘 · 쿠교(公卿) · 지사 등을 탄압한 사건)로 참수되었을 때, 당시 카츠라(桂)의 가신으로 에도에 머무르고 있던 이토(伊藤)는, 스승의 유해를 거두었다. 이후, 카츠라를 비롯하여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 1840-1864) ·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1839-1867) ·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등과 같이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여차하면 도항(渡航)할 생각에, 1861년에 쿠루하라(来原)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유학을 보내줄 것을 청원하였다.
1862년에는 막번체제를 옹호하고 강화하고자 하는 공무합체론(公武合体論)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타(長井雅楽, 1819-1863)의 암살 시도, 8월에 자살한 쿠루하라(来原)의 장례식 참가, 12월에는 시나가와고텐야마(品川御殿山)의 영국 공사관 방화 공격,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837-1917)와 함께 하나와 타다토미(塙忠宝, 1808-1863) · 카토 코지로(加藤甲次郎) 암살 등, 존왕양이(尊王攘夷) 지사(志士)로 활동하였다.
1863년,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추천으로 해외도항(海外渡航)을 결의하여, 5월 12일, 이노우에 카오루 · 엔도 킨스케(遠藤謹助, 1836-1893) ·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837-1917) · 노무라 야키치(野村弥吉, 1843-1910, 후일의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등과 함께 죠슈 5걸(長州五傑)로 영국으로 도항(渡航)하였다. 이토(伊藤)의 짐은 '영화대역수진사서(英和対訳袖珍辞書)' 1권과 잠옷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상하이(上海)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면서, 수병(水兵)과 마찬가지로 업신여김을 당하는 고충을 겪기도 했다. 9월 23일, 런던 도착 후, 휴 매터슨(Hugh Matheson, 1821-1898)의 소개로 화학자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 Williamson, 1824-1904)의 저택에 머무르면서, 영어와 예의범절에 대한 지도를 받았고, 동시에 박물관 · 미술관에 다녔으며, 해군 시설, 공장 등을 견학하여 견문을 넓혔다. 유학 중에 영국과 일본과의, 너무나도 압도적인 국력의 차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개국론(開国論)으로 전향하였다.
1864년, 미국 ·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에 의한 죠슈번(長州藩)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함께 서둘러 귀국, 6월 10일에 요코하마(横浜)에 상륙한 후 죠슈번으로 돌아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하였고, 영국 공사 올콕(Sir Rutherford Alcock, 1809-1897) · 통역관 어니스트 사토우(Sir Ernest Mason Satow, 1843-1929)와도 면담했지만, 결국, 8월 5일에 4개국 연합함대의 포격에 의해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이 발발하여, 죠슈(長州)의 포대(砲台)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전후(戦後), 이토는 시시도 교마(宍戸刑馬,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통역으로, 유리알러스(Euryalus)호 선상에서 함장인 쿠퍼(Augustus Leopold Kuper, 1809-1885)와의 화평교섭(和平交渉)에 임했다. 번세자(藩世子)인 모리 모토노리(毛利元徳, 1839-1896)에게 교섭 경과를 보고했을 때, 교섭에 반대하는 양이파(攘夷派)의 암살계획을 알고, 타카스기(高杉)와 함께 잠적하였다. 이후, 화평교섭(和平交渉) 중, 일왕과 쇼군이 죠슈번(長州藩) 앞으로 내린 (양이 실시의 명령서(攘夷実施の命令書)) 사본을 사토우가 입수함에 따라, 각국은 배상금을 에도 막부(江戸幕府)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교섭에서 이토(伊藤)는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함께 죠슈번(長州藩)의 외국응접계(外国応接係)를 맡았었는데, 시모노세키 전쟁(下関戦争)과 '금문의 변(禁門の変)'에서 큰 손해를 입었던 번(藩) 중심으로 막부에 대한 순종을 주장하는 속론파(俗論派)가 대두하게 되면서, 양이파(攘夷派) 성향인 정의파(正義派) 혹은 혁신파(革新派)와의 정쟁이 시작되었고, 이토는 양이(攘夷)에도 속론(俗論)에도 모두 반대하였기 때문에 어느 쪽의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았지만, 9월에 이노우에(井上)가 속론파(俗論派)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자 잠적하였다.
11월, 죠슈번(長州藩)이 '제1차 쵸슈정벌(第一次長州征伐)'에서 막부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자, 12월에 타카스기(高杉) 등과 함께 스모꾼으로 이루어진 역사대(力士隊)를 이끌고 거병(挙兵)하였다 (코잔지 거병[功山寺挙兵]). 이때, 타카스기에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이 이토(伊藤)였다. 그 후, 죠슈번(長州藩) 기병대(奇兵隊)도 합세하는 등 각지에서 세가 커지면서 결국 속론파(俗論派)를 타도하였고, 정의파(正義派)가 번정(藩政)을 장악하였다. 나중에 이토는, 이때의 일을 술회하며, '내 인생에서,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그 날, 가장 먼저 타카스기씨(高杉さん)에게 달려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후, 1865년, 번(藩)의 실권을 쥔 카츠라(桂)의 요청으로 사츠마번(薩摩藩) · 외국 상인과의 무기 구입 및 교섭 말고는 별다른 활동은 없었고, '제2차 쵸슈정벌(第二次長州征伐)'에도 보신전쟁(戊辰戦争)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8년, 외국사무총재(外国事務総裁) 히가시쿠제 미치토미(東久世通禧, 1834-1912)에게 발탁되어 당시, 고베 산노미야 신사(三宮神社) 앞에서 비젠번(備前藩, 현재의 오카야마현) 병사가 대열을 가로질러 간 프랑스군 수병(水兵)들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힌 것이 총격전으로 발전하여, 하필 그 때 거류지 예정지를 답사 중이었던 미국 · 유럽의 각국 공사들에게 수평사격(水平射撃)을 가한 사건, 이른바 고베 사건(神戸事件)과, 이즈미국(和泉国) 사카이마치(堺町)에서, 토사번(土佐藩) 사무라이가 프랑스군 수병(水兵)을 죽이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 이른바 '사카이 사건(堺事件)' 의 해결에 분주히 노력한 것이 훗날, 출세의 발판이 되었다.
1868년 단행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개명하였는데, 죠슈 파벌(長州閥)의 유력자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높이 평가받아 참여(参与), 외국사무국판사(外国事務局判事), 대장겸민부소보(大蔵兼民部少輔), 초대 효고현 지사(兵庫県知事) (관선[官選]), 초대 공부경(工部卿), 궁내경(宮内卿) 등 메이지 정부의 다양한 요직을 역임하였다. 여기에는 키도(木戸)의 후원이 있었는데,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나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와 함께 개혁을 이끌 촉망받는 인재로 주목받았다.
효고현 지사(兵庫県知事) 시절인 1869년, '국시강목(国是綱目)', 즉 '효고론(兵庫論)'을 조정에 올려, 1. 군주정체(君主政体), 2. 병마(兵馬)의 대권(大権) 조정 반환, 3. 세계 만국(万国)과의 통교, 4. 국민의 상하(上下) 구별을 없애고 '자재자유의 권리(自在自由の権)' 부여, 5. '세계 만국의 학술(学術)' 보급, 6. 국제협조(国際協調) · 양이(攘夷)의 금지 등을 주장했다.
1870년 발족한 공부성(工部省)의 공부경(工部卿)으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추진하였다. 이는, 내무경(内務卿)인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에 의해 내무성(内務省)으로 계승된다. 또한 재정폐제(財政幣制) 조사를 위해,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顕正, 1842-1920) ·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郎, 1841-1906)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내셔널 뱅크(national bank)에 대해서 배웠고, 귀국 후 이토(伊藤)의 건의에 의해, 일본 최초의 화폐법(貨幣法)인 신화조례(新貨条例)가 제정되었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의 부사(副使)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히노마루 연설(日の丸演説)'을 하였고, 1873년에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알현하고 재상인 비스마르크와 회견(会見)을 하였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대장겸민부소보(大蔵兼民部少輔) 당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같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의 일환으로, 철도건설(鉄道建設)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 간의 철도를 건설하였다.
이토(伊藤)가 신정부(新政府)에 제출한 '국시강목(国是綱目)'에서, 당시 신정부 내에서 극비에 추진하던 판적봉환(版籍奉還, 전국의 번(藩) 소유 토지와 인민을 조정으로 반환하고자 하는 정치개혁으로, 1869년 시행)을 언급하면서, 오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1825-1883)의 노여움을 샀고, 대장성(大蔵省)의 권한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오오쿠보(大久保)와 대립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이 미국에서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 개시를 위한 전권위임장(全権委任状)을 받기 위해 오오쿠보와 동반 귀국하여, 위임장 을 받는데 무려 5개월이나 걸리면서 키도(木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하지만, 오오쿠보(大久保) · 이와쿠라(岩倉)와 서유럽 여행을 통해서 친교를 회복하고, 키도(木戸)와도 나중에 화해하여, 1873년에 귀국하여 얽히게 된 정한론(征韓論) 문제에서 오오쿠보 · 이와쿠라 · 키도 등이 주장한 내치우선(内治優先) 노선을 지지하여 오오쿠보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키도(木戸)와 소원해지는 대신, 정권의 중진(重鎮)이 된 오오쿠보(大久保) · 이와쿠라(岩倉)와 연대하여, 맹우(盟友)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와 함께 키도와 오오쿠보의 사이를 중재하였고,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 1837-1919)와도 인연을 맺어 1875년 오사카회의(大阪会議)를 주선하였다. 이 후, 1877년 키도(木戸) 사망,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도 세이난전쟁(西南戦争) 패배 후 사망, 1878년에는 오오쿠보(大久保) 암살로 내무경(内務卿)을 계승하여, 순식간에 유신(維新) 3걸(三傑)이 사라진 메이지 정부의 유력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1879년, '교육의(教育議)'를 상주(上奏)하여, 교육령(教育令)을 이끌어냈다.
1881년, 일본의 입헌체제(立憲体制)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아타미(熱海)에서 회담을 하던 중, 오오쿠마(大隈)가 급진적인 구상을 은밀하게 정부에 제출하여 독주(独走)하게 되자, 모의 끝에 정계에서 쫓아내버리고, 1890년에 국회(国会)를 개설하는 등의 이토(伊藤)의 점진적인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 1840-1900) · 사이고 쥬도(西郷従道, 1843-1902) 등 사츠마파(薩摩派)와도 연대하여 이른바 이토 체제가 완성되었다.
1882년, 메이지 일왕(明治天皇) 의 명으로 유럽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카와시마 아츠시(河島醇, 1847-1911) · 히라타 토오스케(平田東助, 1849-1925) · 요시다 마사하루(吉田正春, 1852-1921) · 야마사키 나오타네(山崎直胤, 1852-1918) · 미요시 타이조(三好退蔵, 1845-1908) · 이와쿠라 토모사다(岩倉具定, 1852-1910) · 히로하시 마사미츠(広橋賢光, 1855-1910) · 사이온지 킨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 ·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1857-1934) 등 수행원들과 유럽으로 출발하였다. 베를린 대학의 공법학자(公法学者)인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 1816-1895), 알버트 모쎄(Albert Mosse, 1846-1925)로부터 프로이센 헌법에 대한 축조적(逐条的) 강의를 받았다. 또한, 빈 대학의 국가학(国家学) 교수이자 헌법학자인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1815-1890)에게 사사(師事)받아, 역사법학(歴史法学)과 행정에 대해서 배웠다. 이때의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귀국 후, 근대적인 내각 제도(内閣制度)를 창설하고,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国憲法)'을 기안하고 제정하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자임하였다. 한편, 1885년, 갑신정변(甲申政変)의 사후처리를 위해 청으로 파견되어, 리훙장(李鴻章, 1823-1901)과 톈진조약(天津条約)에 조인(調印)하였다.
1885년, 내각 제도(内閣制度)를 실시하면서, 초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 선출 관련하여 두 사람이 주목받았다. 즉,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명목상 최고위직이었던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 1837-1891)와, 오오쿠보(大久保) 사후 사실상의 재상(宰相)으로서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를 주도하여 내각제도를 이끌어낸 이토(伊藤)였는데, 산죠(三条)의 경우, 이미 공작(公爵) 신분이었으며,신분도 후지와라홋케(藤原北家) 칸인류(閑院流)의 종가(宗家)인 세이가케(清華家) 중 하나인 산죠케(三条家) 출신이었다. 반면, 이토는, 빈농(貧農) 출신으로 유신(維新) 직전에야 가까스로 무사(武士) 신분이 되었으며, 백작(伯爵)이긴 했지만, 신분상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차 태정대신(太政大臣)을 대신하게 될 초대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을 결정하기 위한 궁중(宮中) 회의에서, 모든 사람이 침묵하는 와중에, 이토(伊藤)의 맹우(盟友)였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앞으로의 총리(総理)는 적전보(赤電報, 외국 전보)를 못 읽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라고 말을 꺼냈고, 이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그렇다면 이토군(伊藤君)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 라고 응수하며 찬성하였는데, 아무도 여기에 대꾸하지 못했다. 이렇게 영어 구사 능력에서 상대조차 되지 못하는 산죠(三条)대신 이토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이후, 4번에 걸쳐서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44세에 2개월 간의 총리대신(総理大臣)역임은, 일본의 역대 총리대신 중에서 최연소 기록이다. 제1차 이토 내각(第1次伊藤内閣)에서는 헌법 반포 전 사전준비인 기관 창설(機関創設)에 분주히 노력하여, 1886년 각 성(省)의 관제(官制) 제정, 관료 육성을 위한 제국대학(帝国大学, 현재의 도쿄대학(東京大学)) 창설, 1887년 국가학회(国家学会) 창설을 지원하였다.
한편,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외무대신(外務大臣)에 임명하여 불평등조약 개정 업무를 맡겼는데, 이노우에 카오루가 제안한 개정안에 포함된 외국인 판사의 등용 등 조항이 문제가 되면서, 1887년 조약 개정 회의는 중단되었고, 이노우에 카오루가 사임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나츠시마(夏島, 별장이 있는 휴양지)에서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1857-1934) ·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1844-1895) ·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郎, 1853-1942) 등과 함께 헌법 초안을 검토하였다. 이후, 1888년, 추밀원(枢密院)이 개설되면서 수상을 사임하고, 초대 추밀원 의장(議長)이 되었다.
1889년, 쿠로다 내각(黒田内閣)하에서 헌법(憲法)이 발포(発布)되었다. 이때, 이토(伊藤)는 화족동방회(華族同方会)에서 헌법에 관해 연설을 하였는데, 입헌정치(立憲政治), 특히 일반 국민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였고, 1892년 에는,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인 대성회(大成会)를 기반으로 한 정당(政党) 결성을 주장하였지만, 메이지 일왕(明治天皇)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토(伊藤)의 2차 수상(首相) 재임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戦争)을 빌미로, 청군(清軍)과 충돌하였고, 조선의 주권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다음 해인 1895년,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1844-1897)와 함께 전권대사(全権大使)로서, 리훙장(李鴻章)과 시모노세키(下関)의 슌판로(春帆楼)에서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下関条約)에 조인하였다. 조선의 독립 (제1조) 과 요동 반도의 할양 등을 명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関条約)이 독일 · 프랑스 ·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三国干渉)을 야기하여, 제2차 이토 내각(第2次伊藤内閣)은 요동 반도의 포기를 결정하였고, 다음 해인 1896년, 이토(伊藤)는 수상을 사임하였다.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第3次伊藤内閣)이 발족하여, 중의원(衆議院)을 해산하고, 각의(閣議)에서 정당(政党) 결성의 의사를 표명하는 등, 신당(新党) 결성을 주창하였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반대에 부딪쳐 다시 수상을 사임하였다. 이 후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조선의 한성(漢城)에서 고종(高宗)과 회견하였고, 청나라의 베이징(北京)에서 경친왕(慶親王) · 캉유웨이(康有為) 등과 면담을 하였으며, 무술변법(戊戌変法)에 몰두하고 있었던 광서제(光緒帝)를 알현하였다. 베이징(北京)에서 체류 중이던 중, 보수파(保守派)가 결행한 무술정변(戊戌政変)을 목격하고는, 그때의 상황과 당혹감을 일본에 있는 아내인 우메코(梅子)에게 편지로 전하였다. 다음 해인 1899년 반년에 걸쳐서 전국 유세(全国遊説)를 행하였는데, 정당 창립(政党創立)의 준비와 민중에 대한 입헌제체(立憲体制) 수용을 호소하였다.
1900년,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를 창립하여, 초대 총재(総裁)를 역임하였고, 정우회(政友会)의 멤버를 대거 등용한 제4차 이토 내각(第4次伊藤内閣)이 발족하였지만, 서두른 탓에 내부 분열이 야기되어 1901년 사임하였다. 이후, 이토(伊藤)는 귀족원 의장(貴族院議長)에 취임하였다. 청일전쟁 후, 이토(伊藤)는 대러유화정책(対露宥和政策)을 취하였는데,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등과 함께 일러협상론(日露協商論) · 만한교환론(満韓交換論)을 주창하면서, 러시아와 교전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카츠라 타로(桂太郎, 1848-1913)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코무라 쥬타로(小村寿太郎, 1855-1911) 등의 일영동맹안(日英同盟案)에 반대하였다. 게다가 직접 단신으로 러시아에 건너가 만한교환론(満韓交換論)을 제안하였지만, 러시아 측으로부터 거부당하였다.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 때는, 카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郎, 1853-1942)를 미국으로 파견하여,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1858-1919)에게 강화(講和)를 알선해줄 것을 의뢰하였다. 이렇게 해서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수상인 카츠라(桂)가 일본의 전권대표(全権代表)로 이토(伊藤)에게 먼저 요청했는데, 강화 조건이 일본 국민들에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라는걸 처음부터 예견하였기 때문에, 이때까지 4번이나 수상을 역임한 이토라면 국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 강화에 따른 국민의 반감을 공연히 떠앉게 될 거라는 측근의 만류에 결국 취임을 거부하였고, 전권대표로 선발된 코무라(小村)에게 '자네가 귀국할 때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나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겠네.'라고, 격려하였다. 강화 이후에는, 승전국 일본과 패전국 러시아 간의 전후처리(戦後処理)에 노력하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 韓 日協約)에 의해 한국통감부(韓国統監府)가 설치되자 이토(伊藤)가 초대 통감(統監)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일본은 실질적인 조선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이토(伊藤)는 국제협조 중시파(国際協調重視派)로, 한국의 직할(直轄)을 서두르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카츠라 타로(桂太郎, 1848-1913) ·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 등 육군 군벌과 자주 대립하였고, 조선병합에 대해, 보호국화(保護国化)에 의한 실질적인 통치를 우선시하여 처음에는 병합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근래에 발견된 1905년 이토의 메모에는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증거를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韓国の富強の実を認むるに至る迄)' 라는 기술이 있었는데, 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기한을 한국의 국력이 부강해질 때까지만이라고 생각하였다.' 근거로 곧잘 인용되었는데,.실제로, 이 문구는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에 담겨져, 조인(調印)되었다.
이토(伊藤)는 1907년, 한국에 부임한 일본인 교사들 앞에서 '철두철미하게 성실과 친절로서 아동을 교육하고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될 것', '종교는 한국민(韓国民)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평론(評論)하지 말 것', '일본인 교사는 여가를 이용하여 조선어(朝鮮語)를 배울 것' 을 당부하였고, 1907년, 경성(京城) 신문기자들 앞에서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 한국은 자치(自治)를 요한다.' 라고 연설했는데, 이는 적어도 성급한 직할통치를 경계하고, 혹여 이를 추진할 경우의 한국 국민의 격렬한 반대를 다루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에 따른 유화책으로 볼 수 있다.
하라다 토요지로(原田豊次郎)가 1909년 저술한 '이토 공과 한국(伊藤公と韓国)'에서, 주한 일본인 기자를 상대로 한 이토(伊藤)의 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고자 하는 뜻이 없다. 한국인은 자칫하면 일본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 일본에는 결코 그런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감히 내보일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헤이그 밀사 사건)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하여, 한국을 병합(併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을 병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병합은 도리어 성가신 일만 늘어나기 때문에, 한국이 자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설령 한국이 부국강병된다고 해도, 한국이 일본과 대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의 부국강병은 일본이 희망하는 바이지만, 한국이 영원히 일본과 친해야 하고, 일본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연방 바르텐베르크와 같이 한국을 지도하여 세력을 육성하고, 재정경제교육(財政経済教育)을 보급하여, 마침내는 연방 정치(連邦政治)를 펼 수 있게 된다면 이는 필시 일본의 이익이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하지만, 조선 내에서 의병투쟁(義兵闘争)이 격렬해짐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 1909년 4월, 당시 수상인 카츠라 타로(桂太郎)와 외상(外相)인 코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郎, 1855-1911)가 이토(伊藤)에게 조심스럽게 「현재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 장래에 병합 말고는 다른 대책은 있을 수 없는 사유'를 들자, 「(이토) 공(公)은 설명을 듣고는, 의외로 이의가 없다는 뜻을 언명(言明)」 하였고, 게다가 카츠라(桂) · 코무라(小村)가 제시한 병합의 방침에 대해서도 대체로 맞다고 인정하였다. 그로부터 2주일 뒤 도쿄(東京)에서 한 연설에서도 이토는, '이제는 실로 협동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서 한 가족(一家)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라며 병합(併合)을 시사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통감직(統監職)을 사직하였다. 이토의 생각이 바뀐 것을 확인한 카츠라와 코무라는, '대한대방침(対韓大方針)'과 '대한시설대강(対韓施設大綱)'을 작성하여, 병합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였고,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保護国化) 정책에 대한 미련을 버린 이토는 통감(統監) 사직 후, 4번째의 추밀원(枢密院) 의장에 취임, 사후처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진두지휘를 함으로써, 한국정부에게 '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韓国司法及監獄事務委託に関する覚書)'에 조인(調印)하게 하였고, 또 '한국 군부 폐지 칙령 공포(韓国軍部廃止勅令公布)'를 하게 하였다. 이로써, 1909년 통감으로 행한 일본의 정책에 대한 한국 국민의 원한을 사게 되어,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 의거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 병합이 가속화되었지만, 병합 방침은 이미 그 이전 내각의 각의(閣議)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이토(伊藤)는,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Коковцо́в, 1853-1943)와 만주 · 조선 문제에 관한 비공식회담을 위해 방문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사살되었다. 향년 69세.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서 국장(国葬)이 거행되었다.
안중근(安重根)은 암살 후 곧바로 포박되었고, 공범자인 우덕순(禹徳淳, 1876-1950), 조도선(曹道先, 1879-?), 유동하(劉東夏, 1892-1918) 등 3명도 역시 러시아 관헌에게 구금되었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 등을 '관동도독부 지방법원(関東都督府地方法院)'으로 이감시켰고,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을 사형, 우덕순을 징역 2년, 조도선 및 유동하를 징역 1년 6개월에 처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헌법을 제정시 담당관(担当官)에게, '신헌법(新憲法)을 제정하는데 있어, 나는 오직 한 명의 법률학자이고, 그대들 또한 각각 한 명의 법률학자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틀리다고 의견을 내라. 서로 의견을 다투는 것을 서슴치 않아야 신헌법이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오오이소(大磯)에는 이토(伊藤)를 비롯한, 정치가들의 별장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지역에는 이토의 인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남아있다.
'야마가타(山縣)는 호위하는 사람을 붙이고 있었고, 무츠(陸奥)는 속에 칼을 품은 시코미즈에(仕込み杖) 지팡이 를 가지고 산책을 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평상복을 입고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다녔다. 때로는 기모노(着物)의 끝부분을 위로 접어올린 모습으로 돌아다녔는데, 농가(農家)에 들러 농부에게, 쌀과 야채 가격을 묻기도 하고, 밭두렁에 걸터앉아 노인과 일상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마을 농민과 어민 등은 이토를 편하게 대장이라 부르며, 말을 걸었다.'
고향은 야마구치현(山口県) 히카리시(光市)이지만, 미천한 신분으로 고향사람과 대면하는 것을 즐기지 않아, 출세후 들른 적은 거의 없다고 하며, 이외에 효고현(兵庫県) 고베시(神戸市)에 오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 별장, 현 오오쿠라야마공원(大倉山公園)), 도쿄도(東京都) 시나가와구(品川区) 니시오오이(西大井, 옛 오오이이토마치(大井伊藤町)), 도쿄도(東京都) 미나토구(港区) 타카나와(高輪) 욘쵸메(四丁目, 카이토카쿠(開東閣)), 카나가와현(神奈川県) 오오이소마치(大磯町) 니시코이소(西小磯, 소로카쿠(滄浪閣)), 요코하마시(横浜市) 카나자와구(金沢区) 노치마쵸(野島町, 노지마공원(野島公園)) 등에 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