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6] 이정수(李貞壽) - 내 모든 것 하늘에 맡기고 4. 개척자의 반열에서
1 은사의 40일이 지나자 역사적인 1960년대가 시작되었다. 나는 집을 나가서 공적인 전도사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동계, 하계 전도 기간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그러니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고 주위 친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들의 손가락질이며 비웃음은 날로 더해 갔다.
2 나의 전도활동 중 가장 잊지 못할 일은 1961년 12월 20일부터 시작된 동계 전도 기간에 충남 금산군 남일면으로 전도 나갔던 때이다. 남일면은 나의 큰딸(성태)이 전도 나갔다 온 곳인데 교회는 폐허 상태에 있었다.
3 내가 도착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단결하여 “통일교회가 남일에는 절대로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라고 야단을 치면서 내가 기거할 방 한 칸을 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사정을 하고 인식을 시켜도 소용이 없자 별 수없이 다 쓰러져 가는 회관 방에서 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4 불길 하나 들지 않은 냉방에서 얼마나 떨면서 지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새벽 일찍 언 몸을 이끌고 산 위에 올라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다.
5 눈물은 흘러내려 고드름이 되었고, 눈썹과 머리카락은 얼어붙어 약간만 건드려도 부러졌다. 기도를 마치고 나면 피부에 감각이 없었으며 얼었던 몸이 녹아지면 쑤시고 아팠다. 그러고는 가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6 손과 귀 등에 동상이 걸린 것이다. 나는 계속 가정 방문을 하면서 말씀의 상대자를 찾았으나 생명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 핍박이 올 때마다 사랑으로 대했으며 사랑의 실천을 희생과 봉사로 대신했다.
7 겨울의 혹한이 풀리기 시작하고 훈풍이 옷자락을 스치는 초봄이 되자 강퍅한 남일도성의 인심도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진실이 유린될 수 없고 빛이 어둠에 삼킬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증이라도 하듯 이 뜻을 따르겠다는 형제들이 하나 둘 나타나더니 어느덧 70여 명의 입회자가 나왔다. 6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니 눈물짓는 식구들로 차마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8 그리고 또 한 가지 잊히지 않는 일은 I960년 7월 20일 하계 전도 때 무주지역 순회사의 명을 받고 순회하던 일이다. 개척 대원의 수고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순회 길을 재촉하다가 그만 해가 저물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아득한데 산 중턱을 질러가면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아 중턱으로 오르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9 아무리 헤매도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대호(大虎)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일이 아닌지라 반가워 호랑이 쪽으로 달려가니 꼬리를 흔들며 앞서가는 것이 아닌가. 캄캄한 밤에 호랑이가 아니었던들 큰 위험을 당했을 것이었다.
10 나는 기성 축복을 받고 준기(俊基)라는 아들을 낳아서 귀하게 키워 보고 싶었지만 하늘은 나를 가정의 분위기 속에 안주시켜 주지를 않았다. 1966년 5월 31일 전북지구를 발전시켜 보겠다는 목적 아래 설립된 창건 대원으로 어린 준기를 업고 사업의 길에 나서야만 했다.
11 신경통으로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을 느끼는 몸에 아기를 업고 돌아다니다 밤이 되면 견딜 수 없도록 몸이 아팠다. 사람들은 나의 모습을 보고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동냥을 다닌다고 비웃고 조롱했다.
12 창건대(創建隊) 활동을 마치고 무주에 돌아온 나는 온 정성을 다하여 인도자를 모시고 식구들을 기르는데 노력했다. 무주 교회하면 우리 집을 교회로 착각할 정도로 식구들이 찾아 들었다.
13 교회로 오는 편지도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고 무주를 찾는 순회사님이나 식구들도 먼저 경찰서 앞에 있는 우리 집을 거쳐 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우리 가정은 내실이 없는 그야말로 개방된 사랑방이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14 나는 그동안 선생님 성혼식, 3가정 성혼식, 33가정 성혼식, 선생님의 생신 등을 비롯해서 1956년부터 1960년대에 있었던 각종 행사엔 거의 참석했다. 서울에 있는 박기옥 식구님이 꼭 알려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