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 금고엔 돈 없었다, 박정희가 몰래 준비했던 것 (7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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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서거(逝去)부터 국장(國葬)이 치러진 아흐레 동안 나는 내내 청와대에 머물렀다. 청와대 소접견실에 모셨던 박 대통령 유해는 10월 28일 새벽 입관 뒤 대접견실로 옮겨졌다. 나는 상주(喪主)인 육사 생도 지만군과 근혜·근영 옆에 서서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았다.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동작동 국립묘지로 향하고 있다. 이날 연도엔 시민 200만 명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정부와 국회 인사들이 연이어 조문을 왔다. 문상객 중 김영삼(YS) 신민당 총재가 기억난다. 그는 장발(長髮)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YS로서는 얼마 전 자신을 국회에서 내쫓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빈소에 찾아왔으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나는 YS와 말없이 눈으로 인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내가 그의 손을 꼭 눌러 잡자 그 역시 내 손을 꽉 잡았다. 10월 4일 YS 제명안의 국회 표결 때 내가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1979년 11월 3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박 대통령의 유해는 국화꽃 7만 송이로 뒤덮인 영구차에 실려 16년(1961년 5·16 이후 63년 12월까지는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거주) 가까이 살아온 청와대를 떠났다. 62발의 조포(弔砲)가 청와대 건너 경복궁 안에서 울렸다. 예순둘은 박 대통령이 살아온 햇수다.
영결식은 중앙청 앞마당에서 열렸다. 5년 전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이 열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육영수 여사 때는 국무총리인 내가 장의위원장이었지만 이번엔 지만군 바로 뒤편 가족석에 앉았다. 고인에 대한 묵념에 이어 장의위원장인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조사와 종교의식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이 남긴 육성녹음도 흘러나왔다.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비탄에 젖은 장례식장의 허공을 갈랐다.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조상의 빛난 얼과 자주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서 새로운 문화창조와 민족중흥에 적극 기여해야 합니다.”(1978년 6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 이어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사한 조가(弔歌)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태산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1966년 6월 8일 대전 유성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조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엄숙한 영결식이었지만 분위기는 5년 전과 묘하게 달랐다. 육 여사 장례식 땐 조문객들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해 곳곳에서 흐느꼈다. 이번엔 그때보다 슬픔의 농도가 옅었다.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죽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쉼 없이 눈물을 흘렸고 내 마음속은 통곡으로 가득했다. 절망에 가까운 비통함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었다.
박 대통령이 다른 사람도 아닌 부하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시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너무나도 슬펐다. 동시에 앞이 깜깜하고 황망했다. 내 손과 발을 꽁꽁 묶은 채 대양 한복판에 내던지고 박 대통령이 홀로 떠나버린 듯했다. 36년이 지난 지금(※2015년 구술 당시)도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정신이 아득하다.
영결식을 마친 뒤 사관학교 생도들의 호위를 받은 영구차가 천천히 남쪽으로 향했다. 영구차는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지나 서울시청 옆을 통과했다. 61년 5월 16일 아침 검은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소장은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섰다. 그가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국민 앞에 처음으로 보였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18년 뒤 그는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해 그곳을 지나게 됐다. 서울역과 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 이르는 30리 연도엔 200만 인파가 몰려 박 대통령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영구차 뒤를 따르면서 나는 박 대통령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이 국운(國運)에 예언하는 바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일지, 다음에 국가에 또 어떤 변고가 일어나지는 않을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국립묘지에 이를 때까지도 나의 상념은 이리저리 흔들렸고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육영수 여사 묘소 옆 유택(幽宅)에 박 대통령을 모셨다. 두 분의 무덤을 바라보며 떠오른 감상은 ‘혁명가가 혁명가답게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간 나는 청구동 집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박 대통령과 함께 혁명을 일으킨 지 18년. 돌이켜보면 나로선 부침(浮沈)이 끊이지 않았던 파란(波瀾)의 세월이었다. 그 격동의 무대에 막이 내렸고 나는 불 꺼진 텅 빈 무대에 남겨지고 말았다. 나는 갑작스레 종언을 맞은 내 인생의 제1막을 되돌아봤다.
1979년 10월 28일 청와대 대접견실에 마련된 박정희 대통령 빈소에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분향을 하고 있다.
JP는 국장이 치러진 9일 동안 청와대에 머물며 빈소를 지켰다.
박정희 시대 18년간 2인자 JP는 끊임없이 견제와 감시에 시달렸지만 박정희는 조카사위 JP를 내치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