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빛교회는 처음엔 부산장로교회- 문현성안교회-한빛교회로 명칭이 바뀌었지요. 노광공의 직계 장로들(대부분 여자)이 주축이 되었고, 동상동 교회에서 온 동덕삼 장로가 유일하게 남자 장로였습니다. 얼마 후 정ㅇㅇ라는 사람이 오랜 공백기를 지난 후에 교회에 다시 들어왔는데, 동장로가 별다른 확인 작업도 거치지 않고 장로라고 불러줘서 덜컥 장로가 되었답니다.
정ㅇㅇ씨는 젊은 시절에 마약 판매를 하다가 체포되어 신문에 3번이나 보도될 정도로 건달 세계에 이름이 난 사람이라고 내게 자랑하듯 말했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직업도 없이 빈둥대거나 황소개구리 잡이 등 올바른 직업을 가지지 못했기에 생활은 좀 곤궁했을 겁니다. 하지만 처복은 있어서 청도 출신의 미모의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태어난 외아들을 위해 직장도 다니고 나름대로 먹고 살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바탕이 건달이었기에 아무에게나 반말과 무례한 언사를 써서 빈축을 많이 샀습니다. 그는 노영구와 가끔씩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으며 한빛교회 남자들을 건달들 비슷한 단체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음주, 흡연을 허용하고 자신과의 친분관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였기에 한빛교회 남전도부에서는 교회다운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지요.
대부분 무학이거나 국졸이 대부분인 여자 장로 중 몇 명은 시기질투에 언쟁이 잦았고, 남자 장로인 정ㅇㅇ씨는 건달 출신이었기에 형님, 동생 문화로 교회 조직을 끌고 갔지요. 거기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왕따를 시키고 유령취급을 했기에, 대부분 부인들의 손에 억지로 끌러온 남자들은 이런 분위기가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좁은길이 참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저와의 분쟁은 예고된 일이었을 겁니다. 저는 오직 충성, 정직, 순교의 정신을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에겐 모난 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인천교회에서 부산으로 간지 1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총각인 나는 안수집사라는 중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총각 안수집사는 불가하다며 거부했지만 여러 성민들의 권고도 있어서 덜컥 한빛교회 첫 회 안수집사로 임명되었답니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 교사부장, 선교부장, 총무, 촛불봉사단장, 인사국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근 20년을 한빛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건축과정에서 불투명한 재정처리와 목사의 개인적인 수주공사, 건축위원들을 모두 해임시키고 목사가 전횡을 일삼는 탓에 교회와 교단에 대한 믿음이 깨져갔습니다. 그리고 직무상 노회장과 총회를 이끄는 간부 목사들을 접촉하면서 주먹구구이며 비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우월감과 평신도의 오랜 사회경험을 우습게 보는 태도는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당시 부산에서만 20년 동안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인맥이 탄탄했는데, 이런걸 철저히 무시하면서 자신들이 시키는대로만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상식적이지 않은 제안들은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별다른 사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의견이니까 같이 대화를 하면 자신들이 밀렸기에 내가 더 싫었을 겁니다. 결국 담임목사가 내게 찾아와서 교회를 떠나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교회를 바로 나왔습니다. 한동안 동방교 사상에 찌들려서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동방교에 대한 회의도 컸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는 쉽게 동방교를 지울수 있었습니다.
내가 동방교에 대한 애정이 식게 된 몇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건 동방교는 목사로부터 수도자, 평신도까지 음주문화가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ㅇㅇ목사는 자신의 고향 친구 장례식에 가서 소주 5병을 마시고 교회 봉고차를 운행하고 왔는데, 마침 경찰의 음주측정기에 불었는데도 알콜수치가 측정되지 않았다는 간증(?)을 듣곤 나는 그를 경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성도 모임 후엔 으례히 음주로 끝을 냈기에 항상 죄책감과 회의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어느 날 사랑의교회를 세운 옥한음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술 취한 기분은 성령에 취한 것과 비슷하다고 적혀 있었으며, 이단들은 성령 대신 술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는 총회에 조차 교육과 인적 관리의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랜 시간 교사와 교사부장으로 재직하였는데, 총회의 교육 담당자들은 신출내기 젊은 전도사들로 매년 바뀌었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전문지식도 없는 전도사들을 보면서 암담한 미래가 보였습니다. 내가 봉사단장을 했을 때, 전임 봉사단장이 내게 격정을 토로하더군요. '"봉사단의 가장 큰 걸링돌은 목회자들입니다." 그는 언젠가 국가에서 땅만 있으면 복지관을 무상으로 지어주던 일이 있었는데, 총회에선 그냥 수수방관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300명이 넘는 방대한 봉사인원을 가지고도 타 봉사기관에 얹혀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로했습니다. 한마디로 성민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먹을 뿐, 재투자는 없는 단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의 표시로 봉사단 임원 전체가 사임해서 내가 1년을 봉사단장 직을 맡아서 일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매년 중,고등부 수련회는 소사의 성지로 불러 모아서 노광공의 일대기며 비디오를 보여주었는데. 내 아들들이 매년 똑같은 것들만 봐서 지겹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고등부 수련회를 일반 교회에서 진행하는 중고등부 수련회에 참석시켰습니다. 집회장소로는 창원과 한동대학 등으로 기억되는데, 총회 입장에서는 내가 무척 미웠을 겁니다. 할 이야기는 많은데, 시간이 너무 지나 졸려서 이만 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