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일조에 대한 것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에서 그렇게 많지 않다. 마태 23:23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 한 구절뿐이다. 칼빈 자신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십일조 이야기는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Hendriksen의 마태복음 주석에서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사역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십일조는 제도적으로는 구약의 의문에 속하는 것으로서 폐지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신약 성도들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능력에 맞게, 관대하고 즐겁게 드리도록 하고 있다. 본인이 고신에서 공부할 때 목회학 교과서로 사용했던 곽안련의 목회학 책에는 십일조는 유대인의 헌금 방식이라고 밝혀 놓았다.
많은 헌금 방식을 논하는 중에 한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유대인의 헌금 방식이라고 했다.
박윤선 박사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의 글은 56년도 10월에 발간된 파수군 제 56호에 나와 있다. 이것은 그 해 9월 부산 노회(고신)에서 질의하고 박윤선 박사가 답한 것이다. 그리고 부산 노회에서 이 가르침을 받아서 잘 시행하도록 감사의 응답을 한 글이다.
본인은 '56년도 부산 노회에서 받은 박윤선 박사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인정하고 따른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동대구 노회의 수성시찰(2002년도)에서는 틀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박윤선 박사도 구약의 십일조 제도를 그대로 인정했다고 우겼다. 왜냐하면 박윤선 박사의 글의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십일조와 같은 구약의 예식적 규례도 아주 폐지하시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실행(즉 원측적 실행)을 필요시한 것이 사실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이다. 이것을 가지고 구약의 예식적이 규례를 박윤선 박사가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앞 부분만 읽어보아도 그 뜻이 명백하다.
바로 앞에서 '원측적 실행'을 ()로 묶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측적 실행(수짜를 기계적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정성껏 바침을 의미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밝혀 해설한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어떤 일정한 수량으로 제도화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시찰원들이 우긴 마지막 구절이 나온다.
물론 자세히 읽어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적어도 앞에서 박윤선 박사가 설명했던 내용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아야 하지는 않는가? 시찰원들은 박윤선 박사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옳다고 모두가 우기니 본인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들이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놀라운 뿐이다.
4. 헌법에 대한 나의 태도를 질문했다. 나는 헌법은 준수하여야 할 것이지만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하면서 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말씀에 비추어서 헌법은 연구하고 교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하면서 따라서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받아서 어떤 시찰원은 내가 헌법을 부정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나는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너무나 엉뚱하게 비약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헌법 전체를 부정한다고 한 적이 없다. 헌법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헌법은 교회를 섬기는 도구요 교회의 종이다. 교회가 헌법에 시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머리와 주인은 주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안에서 헌법은 살핌의 대상이다. 이것으로 교회를 석고화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가 사라지면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결과에 이른다. 사람의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대적하게 된다. 예수님이 저주하신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헌법은 연구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이야기를 헌법 부정으로 몰아붙였다. 그 저의가 무엇인가? 그 시찰원 자신이 밝힌 대로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가? 그래서 본인을 잘라 내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밝혀야 할 것이다.
5.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신에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너무나 인위적이고 비진리적인 사람들의 불신앙적 태도에 대하여 항거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순순히 나가지는 않으려고 한다. 자기 마음대로 난도질하려는 우상들과 싸우려고 한다.
항거하면서 불의와 비진리와 인본적인 사고방식과 싸우다가 지치고 쓰러지면 그 때에야 시찰원과 노회와 고신에 '주님이 없음'을 외치고 나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바르게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1. 12. 8. 박길현 씀.
다음은 고 박윤선 박사의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 전문이다.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옮겨 적는다.
제목: 십일조 헌금과 그 사용방법에 대하여
이 작은 논문은 지난 번 부산 노회시에 노회원들 중에서 질문한 문제를 해답하기 위한 것이다. 노회의 부탁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다. 그 질문 내용은 이렇다. 곧
문 의 서
주후 1956년 9월 4일
문의자 씨 명(약)
부산 노회장 귀하
하기와 같이 문의하오니 성경적으로 지시하여 주심을 경요하나이다.
기
교역자 및 교인의 십일조 헌금으로 본 교회에만 전부 헌금하는 것이 가한지 혹은 하기 사항에 사용하는 것도 가한지 지시하여 주심을 요망하나이다.
1. 교회 월정 헌금
2. 교회 주일 헌금
3. 성전 건축 헌금
4. 개인 구제 헌금
5. 개인 특별 감사 헌금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답함이 좋은 줄 안다.
1. 십일조 헌납은 구약 시대에 신정국가의 하나의 제도화한 것이었느니 법령으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드리는 자가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향기로운 것이겠지만 아니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 난 자를 바치는 것도 아니하면 벌을 받도록 된 것이다(출 13:13).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신약의 시대의 연보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실행시키는 것이 아닌 만큼, 자원하여 내는 것이다(고후 8:1-15, 특히 11절 참조)
2. 십일조를 사용하는 목적은 주로 (1) 레위 족속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제공하기 위함(민 18:24,26,28). (2)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려 함이다(신 14:22-27). 그러므로 신약 시대도 신자가 연보의 일부를 가지고 빈자나 외로운 자들을 구제할 수 있다(롬 15:25-26).
3. 이제 다시 생각할 문제들이 있다.
(1) 신약의 시대에 연보하는 자가 그 소산의 십분지 일이란 수량을 유일한 표준으로 할 것인가? 십분지 일이란 수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수량이었고(창 14:20)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족속에게 그렇게 바쳤으니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이상적 수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고 의문과 기타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월하게 된 영적 단체이니 만큼 십분지 일이란 수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십분지 일이라는 수량이 이상적인 수량이니 만큼 그것을 신약 시대 신자들도 자원하여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교리화하거나 제도화할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원하여 소득의 십분지 일 이상도 하나님께 바침이 좋을 것이다(고후 8:1-15). 교회는 신약 교회는 교인들이 연보하는 일에 십일조 혹은 십일조 이상을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
장로교 예배 모범 제 18장 4조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헌금하는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찌니라"고 하였다.
(2) 신약 시대의 신자가 자기가 드릴 연보 수량(십일조 혹은 기타 수량)의 사용 목적을 자의 대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목적에 따라 활당하는 것도 자유로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장로교 예배모범 18장 3조가 대답한다. 거기 말하기를 " 그 수납금은 당회의 감독하에서 교회 각 대리국과 기타 자선 사업과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분배할 것이니 분배 다소와 일체 계획은 시시로 의결하되 혹 헌금하는 자가 특별한 소원히 있을 때에는 그의 원을 따라 삼가 실행할찌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신약 시대의 연보는 법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자의대로 또는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고후8:11).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게 되어 있었으니만큼(요4:19-21)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러니만큼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헌금에 외부적 제재를 방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또는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는데(요4;22-24) 치중한다. 신약 종교는 보다 더 영적인 것인 만큼 신자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시하며(고후3:17) 자기 혼자도 하나의 성전인 사실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고전 3:16-17,6:19-20,롬 12:1-2).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에서 어떤 개인들(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일종의 연보 행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교회를 통하여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친수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행 10:1-4).
잠 19:17절에 말하기를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잠 17:5참조. 마 10:42에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바리새 교인이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다
는 미명으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을 책망하셨다
(마15:4-6). 약1:27엔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서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마25;31-46참조.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께 바칠 물질을 가난한 자 구제의 목적(기카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지령없이 사용할 수 있다.
(3) 우리는 교회에 드리는 헌금을 등한히 하면 안된다. 교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항존 단체로서 복음을 전하며 보수하는데 가장 믿을만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전도와 복음 파수를 위하여서도 교회는 이렇게 귀한 기관이다.
그러니만큼 이 기관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른 좋은 일보다 교회에 물질을 바쳐야 된다(눅8:1-3,빌4:18).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성전 봉사와 제사장의 생활비로 제공한 것이다.
그 만큼 그때의 신자가 하나님께 직속한 거룩한 일을 위하여 물질적으로 힘껏 봉사하였다. 이 일은 고금을 물론하고 원측에 있어선 변하지 않는다. 출23;15에 말하기를 "공수로 내게 보이지말찌니라"고 하였다.
신 16:16 참조. 신약 시대에도 신자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보 드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다만 그 수량에 있어서 일정한 숫자 표준은 세우지 않았다.(Cassels Concise Bible Dictionary P.728. under new economy liberality enjoined on christians. No specific proportionof the earnings is mentioned......).
십일조 헌납에 자세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 윤리적 동기는 없이 외식으로 그러한 점을 꾸짖으셨다. (마 23;23, 눅 11:42).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 헌납하는 그것은 좋게 여기셨다. 이 점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라는 숫자를 표준으로 세우신 듯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해석하고 읽어야 한다. 해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1)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만큼(죽었다가 다시 살으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를 아직 그대로 옳게 보신 시절이었다. 마 8:4참조. 이점에 있어서 놀발 켈덴회이스(Norval Geldenhuysl)의 누가복음 (11:42) 주석 제 342 페이지를 참조하라.
(2) 그리고 둘째 해석은, 그 귀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고한 말씀(눅11;42)은 십일조의 바리새식 실행 그대로를 용인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그것에 대한 원측적 실행(숫자를 기계적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정성껏 바침을 의미함) 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밝혀 해설한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어떤 일정한 수량으로 제도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와 같은 구약의 예식적 규례도 아주 폐지하시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실행(즉 원측적 실행)을 필요시한 것은 사실이다(H.N.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p.264-265).
존 웨슬리, 칼빈...이들은 인간적인 교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킨 누룩입니다 인신제사에서 시작된 유아세례를 고집하고 밥티스마를 버린 가톨릭과 똑같은 누룩들입니다 감리교가 가톨릭의 먹이가 되었는데 장로교도 가톨릭과 손잡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전 배도가 먼저 일어나죠
첫댓글 고신교단을 잘 떠났습니다. 썩은 교단이데요.
존 웨슬리, 칼빈...이들은 인간적인 교리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킨 누룩입니다 인신제사에서 시작된 유아세례를 고집하고 밥티스마를 버린 가톨릭과 똑같은 누룩들입니다 감리교가 가톨릭의 먹이가 되었는데 장로교도 가톨릭과 손잡을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전 배도가 먼저 일어나죠
가톨릭을 이단으로 규정한 고신이 성경에도 없는 가톨릭의 세례와 유아세례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구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