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고후6:14~7:1
제목: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하는 신앙
● 기독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聖化, 거룩함을 이룸)하는 신앙입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
웬만한 기독교인들은 교리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이신칭의), 칭의의 결과는 성화이다! 정도는, 다 압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예정, 소명, 중생∙회심∙칭의 이후에 성화와 영화가 있다고 도식으로 외우고 넘어가는 분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성화에 대해서 수박 겉핥기를 넘어선 조금 더 깊은 이해와 성경적 믿음을 얻고자 합니다. 성화는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성화는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씻어주시고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새롭게 하시며, 그에게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자비롭고 끊임없는 사역이다. ← 루이스 벌코프. |
고후7:1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 성화를 할 마음과 인도하심을 주는 원동력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이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은 성령을 받아서 방언을 한다, 축사를 한다고만 하지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부족하거나 아예 없습니다. 대표적 사례로, 베뢰아 계열 이단들은 귀신을 쫓는다고 호들갑은 떨지만 정작 귀신의 속성인 온갖 더러운 것에 사로잡혀 있고 음행과 비리를 자행하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겉모양새를 보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없는 이유는, 이단들이 위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아 떠나가라!’고 외쳐대며 위선하기는 쉽지만,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 오늘의 본문은 o에서 o까지로 보면 고후6:14~7:1이 한 문단이고, 이 한 문단의 결론은 고후7:1이며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고후7:1의 앞에는 거룩함, 성화와 반대되는 것을 예시하고 예방∙경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래 말씀은 거룩함에 반대되는 내용과 그에 대한 경고입니다.
고후6: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고후6:14를 봅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이 세상 가운데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친밀하고 함께 멍에를 메는 정도로까지 밀접하게 혼합되면 아니 됩니다. 믿음의 순수성과 본질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는 성도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면 참 쉼이 있습니다.
마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이신칭의라면 칭의된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은 성화(聖化)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후6:15의 벨리알은 불신자∙악한 자 또는 불의한 자를 의미할 수 있고 사악한 세상 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거룩한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벨리알을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야비한 자’ 또는 ‘악랄한 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불량자’(삼상 1:12)로부터 ‘불의’(시 18:4), ‘악을 꾀하는 사람’(나 1:11), ‘악인’(15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비록 이 단어가 신화적인 용례에서 파생되었다고 하시만, 그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T.K.Cheyne는 이 단어가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바벨론의 여신 ‘벨릴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다. 유대의 계시 문학과 위경(pseudo) 문학(예. 희년서, 이사야의 승천서, 레위의 유언서 등)에서 ‘벨리알’은 사탄의 별명으로 사용되었으며, 바울도 고후 6:15에서 사탄을 벨리알이라 불렀다. 어떤 주석가들은 살후 2:3의 ‘불법의 사람’을 ‘벨리알의 사람’이라고도 주석하는데 이는 ‘벨리알’을 ‘불법한 자’라고 해석하는 랍비들의 영향을 받은 까닭일 것이다. 고후 6:15에서는 믿지 않는 자를 벨리알과 연관하고 있다. ← 성경사전: 아가페 출판사. |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 즉 성령을 받았으므로 거룩해지며 성화의 삶을 살아 나아갈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듯 보이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고 불의하며 악한 삶을 살아 나아가는 자는 그리스도와 벨리알(사탄)을 조화시키려는 모순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탄의 속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위선을 넘어서 성령을 받지 않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고후6:16을 보면 기독교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데 그 성전 안에 우상을 둔다면 그런 망발과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흔히 말하는 성도(聖徒)의 의미가 고후6:16에 나옵니다.
…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위 말씀은 레 26:11, 12을 인용한 것입니다.
레26:11.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자신의 가운데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과 구별된 백성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고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듯이 구별(區別)된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이방인과 불신자들 중에서 나와 구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함입니다.
사52:11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
고후6: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를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도(聖徒)이며 이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보면 그 내용이 보입니다.
삼하7: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고후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세상과 구별되어 모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기준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人)들입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합니다(고후7:1).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성도들이 성결(聖潔)한 삶을 살도록(성화) 해주는 기본적인 바탕이고 약속받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믿음은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화하는 온전한 믿음의 결과와 증명이 확실히 나타나는 확신과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에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추가로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주석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구별된 성도의 생활(고린도 후서 6:11-18)
바울은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며 불신자들과 혼합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다음을 관찰하자.
Ⅰ. 어떻게 이 주의가 주어지는가? 특히 다정하게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주의한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한다"(11-13절). 바울이 표현에 있어서 풍부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진 애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말이 요청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 같다. "오! 고린도 교인들이여, 나의 편지를 받는 그대들이여,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리고 싶도다.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모든 사람의 영적이며 영원한 행복을 증진케하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넓게 열렸도다."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넓게 열렸으므로 친절한 충고와 권면으로 그들에게 자유로히 충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마음과 기쁨을 돕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봉사를 다하였다. 만약 다르다면 잘못은 여러분에게 있도다. 우리에게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여러분 안에서 좁아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같이 우리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는 상호간의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상호간의 유익이 되며 위로가 된다.
Ⅱ. 불신자들과 혼합되지 않으며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도록 주의한다(14절).
1. 신앙에 있어서 주의한다. 선한 사람이 약하고 불경건한 사람과 혼합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을 나쁜 길로 유인하며 슬픈 일에 빠지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와 같이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선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보다 나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칠 위험이 더 많다.
2. 일반 교제에 있어서 주의해해 한다. 우리는 악한 사람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만나는 것울 피할 수가 없으나 즉 들고 함께 있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친한 친구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3. 더우기 그들과 신앙적인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상과 숭배나 거짓 예배나 어떤 혐오스러운 일에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과 악마의 식탁을 혼돈하거나 하나님의 집과 이방신의 집을 혼돈해서도 안 된다.
의 식탁과 악마의 식탁을 혼돈하거나 하나님의 집과 이방신의 집을 혼돈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이 타락한 교제에 반대하는 몇 개의 이유를 말한다.
(1) 그것은 큰 모순이다(14,15절). 일치하지 않는 멍에이다. 유대인에 대하여 소와 나귀를 같이 세우며 여러 곡식을 함께 파종하는 것만큼 나쁘다. 의와 불의가 연합하며 빛과 어두움 그리고 불과 물이 합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신자는 의롭다. 불신자는 불의하다. 신자는 세상의 빛이나 불신자는 어두움이다. 이들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서로 모순된다. 관심과 목적이 다르다. 이들 사이에 일치가 있을 수가 없다. 성도가 불신자와 함께 한다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연합하는 것과 같다.
(2)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모순되니(16절). 그리스도인들은 고백을 통해서 그리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되고 고용된 사람인다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거하시며 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을 돌봐 주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의 성전과 바알의 성전이 하나가 될 수 없다. 바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며 자기의 명예를 다른 존재에 양보하시지 않는다.
(3) 불신자와 우상 숭배자들과 교제하면 불결하게 되며 버림을 받을 위험성이 많다. 그러므로 격려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적당한 거리를 가질 것이며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나 전염병자를 피하듯이 "불결한 것을 피하여 오염을 피해야 한다." 숯을 만지고 더럽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죄로 물들인 자들과 교제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으며 거절되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4) 그것은 성도들에게 모든 은혜를 부어 주신 하나님께 배은망덕하는 것이다(18절).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보다 더 큰 영광과 명예가 있을까? 이 축복과 권위를 불신자와 교제하여 더럽히는 것은 얼마나 배은망덕하는 일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보답할 수 있겠는가? 오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여!"
@장코뱅 좋은 설명이고 하나의 설교 같이 보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 거룩한 생활과 교제(고린도 후서 7:1-4)
1절은 이중적인 권면을 가지고 있다.
Ⅰ. 거룩함에 있어서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자"(1절). 이 권면은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가장 부드러운 말씀으로 전하여지며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특별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초대한다. 즉
1. 죄에 죽고 우리의 정욕과 부패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죄는 더러운 것이며 육체와 마음의 더러움이 있다. 몸으로 범하는 죄가 있고 영적인 악함이 있는 영의 죄가 있다. 우리는 이 두 더러움에서 깨끗해야 한다. 하나님은 육과 영으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2. 의와 거룩함에 살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 소망한다면 우리는 "그의 거룩함에 참예하여야 한다." 그와 같이 거룩하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하여야 한다. 우리는 계속 거룩함에 있어서 전진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죄없는 생활은 할 수 없어도 계속 전진해야 한다.
이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경외가 모든 신앙의 뿌리요, 원리이다. 이것 없이는 경건은 없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과 소망은 우리의 경외심을 파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두려워하며 그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자에게 기뻐하신다."
이중적 권면은 이 카페에서 보았던 죄 죽이기와 영 살리기와 비슷한 내용 같습니다.
<박윤선 주석>, 분리를 위한 호소(고후6:14~7:1)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은 영적인 것이었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인들답게 살고 있지 않았으며, 죄와 타협하고 있었다. 바울은 분리를 위한 두 가지 주된 논점을 제시한다.
원리로부터 이끌어낸 논점(13~16절) - 반대가 되는 것끼리는 서로 교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생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은 레위기 19장 19절에 나오는 모세의 권고를 생각나게 한다. 이 고린도 사람들은 결혼과 사회생활과 사업, 기타 다른 방식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간증을 상실하고 있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오는 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사단의 구약 명칭), 신자와 불신자(라틴어로 “이단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등과 같은 연속적인 상반된 일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교회가 세상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환심을 사고 세상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보다 더 진리에서 거리가 먼 것도 없다!
죄와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고립이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지키는 것을 뜻한다. 물에 배가 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배에 물이 들어올 때에는 주의하라! 바울은 레위기 26장 11~12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신자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신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과 가지는 교제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밝힌다.
약속으로부터 이끌어낸 논점 (17~18절) - 하나님은 자신을 순전하게 유지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였다. 세속성이라도 것은 미묘한 것이어서, 그리스도인이 모르는 사이에 점차적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세상과 벗하게 된다(약 4:4).
다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요일 2:15~17), 그런 다음에는 세상에 순응하게 된다(롬 12:1~2).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로 분리시키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사 52:11 참조). 타협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것과, 삶을 정결케 할 유일한 경험인 성령 안에서의 보다 깊은 교제를 잃게 된다.
7장은 6절을 끝내는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바울이 개인적인 거룩함에 대하여 한 말을 치밀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일련의 “쌍”(Duets)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리를 위한 두 가지의 동기 -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극진히 사랑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우리의 생활에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작용해야만 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활을 깨끗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징계를 하셔야만 한다.
두 가지의 책임 - 우리는 소극적인 면으로는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며, 적극적인 면으로는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께 우리를 정결케 해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시 51:2, 7). 요한일서 1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완전히 정결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또한 주님을 불쾌하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의 생활에서 씻어내야만 한다.
이사야 1장 16절은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처리할 문제를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도록 기대해서는 안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면 찍어 버리라.” 이같이 함으로써,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거룩함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
두 종류의 죄 - 육신의 추행이 있듯이 영적인 추행이 있고, 마음가짐의 죄와 마찬가지로 행위의 죄가 있다. 탕자는 육신의 죄를 지었으나 그의 형은 무서운 심령의 죄를 범하였다(시 51:17 참조).
분리는 소극적이며, 온전한 거룩함이 적극적이다. 죄에서는 분리가 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거룩함에서 성장하지 못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기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바리새인들은 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삶에는 사랑과 마음으로 나는 순종이 결여되어 있었다. 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떨어지게 하지만, 우리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장코뱅 박윤선 주석은 위 묵상 본문과 문단 나누기가 일치하네요^^ 좋은 내용입니다.
성화의 특징들
1. 성화의 창시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성화의 과정에서 철저히 수동적으로 남는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성화의 일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도록 주신 방편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해야 한다(고후 7:1; 골 3:5-14; 벧전 1:22).
2. 성화는 칭의처럼 하나님의 법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인 재창조 행위이며, 이 행위로써 죄인은 내적 존재가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에 점진적으로 부합하도록 만들어진다.
3. 성화는 대체로 기나긴 과정이며, 이생에서는 완성에 도달하지 않는다. 중생과 회심이 있은 뒤 곧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 과정이 매우 짧을 수 있다.
4. 성화 과정은 영혼에 관한 한 죽을 때 혹은 죽은 직후에 완성되며, 육체에 관한 한 부활 때 완성된다(빌 3:21; 히 12:23; 계 14:5; 21:27).
<--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 p.235.
이런 교과서적 설명이 정확도에서 짱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a. 옛 사람의 억제
성화의 소극적인 면은 죄로 말미암는 인간 본성의 오염과 부패가 점진적으로 제거되는 데 있다. 옛 사람, 즉 죄에 오염된 인간 본성이 점차 십자가에 못 박힌다(롬 6:6; 갈 5:24).
b. 새 사람의 소생
성화의 적극적인 면은 영혼의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그 거룩한 실천이 증대되며, 그로써 새로운 삶의 과정이 시작되는 데 있다(롬 6:4, 5; 골 2:12; 3:1, 3). 성화가 이끄는 새로운 삶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한 삶'이라고 한다(롬 6:11; 갈 2:19).
3. 성화는 전인(人)에 영향을 준다.
성화는 마음에 발생하기 때문에 자연히 전체 유기체에 영향을 준다. 속사람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외적 생활에도 변화를 일으키게 마련이다(롬 6:12; 고전 6:15, 20; 고후 5:17; 살전 5:23). 성화는 특히 죽음의 위기와 죽은 자의 부활에서 완성된다. 성경은 성화가 지식에 영향을 주고(렘 31:34; 요 6:45), 의지(겔 36:25-27; 빌 3:13), 감정(갈 5:24), 양심(딛1:15; 히 9:14)에도 영향을 준다고 가르친다.
4. 성화는 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인간이 성화 사역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은 악과 유혹에 대한 거듭된 경고(롬 12:9, 16, 17; 고전 6:9, 10; 갈 5:16-23)와 거룩하게 살라는 끊임없는 권면(미 6:8; 요 15:2, 8, 16; 롬 8:12, 13; 12:1, 2, 17; 갈 6:7, 8, 15)에 잘 나타난다.
<--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 p.235.
@장코뱅 이 설명이 이 카페 존 오웬 게시판 성화론에서 본 죄 죽이기와 영 살리기를 의미합니다. 좋은 설명을 잘 참고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사람들이고, 이것을 끝까지 잘 유지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군요.
그리스도는 가장 거룩하신 분이고, 벨리알은 사탄으로서 모든 불법과 악의 대명사요 원조이며, 가장 더럽기 때문에 둘은 절대로 조화가 될 수가 없음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성도가 악하고 불의한 자들 속에서 살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방법은 일단 너무 악하고 불법을 일삼는 자들 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겠지요.
사기를 계속 친다거나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고, 조폭들 처럼 불법과 악행이 난무하고,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반인륜적인 자들과는 함께 일을 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피해야겠죠.
선량한 자가 악한 자들과 어울렸다가 인생을 망친 경우들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영적으로도 이단 사이비 미신에 속지 않도록 깨어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겠습니다.
좋은 분별과 요약해 주신 것에서 배우고 매우 공감합니다.
매우 풍성한 댓글에 공감합니다.22
오늘 묵상을 읽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과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성화할 수 있으며, 성화의 바탕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믿음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확인했습니다.
핵심을 잘 짚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