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인간이 도저히 창조할 수 없는 대자연의 풍광에 감동한다. 지치고 힘들 때면 자연이 만든 길에서 위로를 받는다. 묵직하게 달고 왔던 일상의 근심까지도 말갛게 희석시켜준다. 올레길을 걷는 게 아니라 꿈을 꾸는 듯한 환상 속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완주코스가 늘어갈수록 행복도 더해진다. 더구나 청춘인 아들이 함께 가자고 손 내밀어 주니 마음도 걸음도 느긋하다.
제주 여행 때는 늘 찾아가는 단골식당도 있다. 특히 흑돼지구이. 고기 국수, 한치물회는 다시 찾아갈 때까지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수제 맥줏집도 빠질 수 없다.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올레길 코스를 마무리하는 셈이다. 큰 체구에 순한 인상을, 가진 사장님은 오랫동안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한다. 어는 순간 제주도가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멋진 곳이라 느껴져 함덕에 정착을 했다 한다.
집 모양도 여행을 좋아한다는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간판에는 특이하게 서프보드가 부착되어 있다. 홀 천장에도 서프보드를 매달아 놓았다. 함덕 바다가 젊은 서프들이 서핑하기 좋은 매력적인 바다라는 그 이미지로 장식했나 보다. 실내조명은 따뜻함과 편안함으로 아늑하다. 오래전 귀에 익었던 음악도 잔잔하게 깔려 마음에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입구와 마주 보이는 작은 바에는 네 개의 의자가 가지런하다. 그 위로 와인 잔이 거꾸로 줄지어 매달려있다. 구석진 곳에, 통기타가 벽을 기대섰고 반대편으로는 두 개의 바이올린이 액자 속에 그림처럼 걸렸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개조된 작은 남포등에 촛불이 타고 포개놓은 여행책이 눈길을 잡는다. 벽 쪽에 설치된 외줄에는 사장님이 여행하고 남은 국가별 지폐들이 집계에 집혀 빨래처럼 걸어놓았다. 많은 나라를 여행한 운치를 짐작하게 한다.
반대쪽 벽에는 철판이 걸려있다. 레드락 수제 맥주는 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라는 글귀다. 적색의 라거 맥주와 와인 에 대한 설명과 안주 종류도 적어놓았다. 읽어보고 취향대로 주문하기 좋다. 홀 안을 둘러보니 대부분 데이트 커플들이지만 우리처럼 모자(母子)는 없어 보인다.
나는 아직 확실한 술맛은 잘 모른다. 간혹 와인을 마셔보지만, 매번 두통이 심하다. 그나마 마시는 술이 맥주다. 차게 얼린 잔에 따라 마시는 술은 입안을 얼얼하게 하고 톡 쏘는 시원함에 먼 올레길을 걸었던 피로를 한 방에 날려 준다. 이런 맛이 있으니 함덕 수제 맥주를 거절하지 못한다. 주문한 안주가 더디게 나와도 실내의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구경하다 보면 지루함은 없다. 실내 분위기와 맥주 맛에 끌려 제주 여행 때마다 들르게 되는 곳이 ‘함덕 487’ 수제 맥줏집이다.
술을 못 마시는 남편과 달리 아들은 술을 즐겨 한다. 늦게 작업을 마무리 짓고 귀가하는 아들 손에서 종종 캔 맥주가 들려 있다. 나는 습관성 두통으로 금주 인이다. 하지만 늦은 밤 채워진 술잔을 앞에 두고 아들과 대화하는 즐거움은 차마 포기할 수 없다. 이런 행복이 있어 두통의 고통쯤은 기꺼이 감내한다. 그래서 내 주량도 조금씩 늘어간다.
아들은 마시는 술에 따라 안주도 맛깔스럽게 만들어낸다. 소시지볶음, 소고기 숙주 조림, 골뱅이무침을 어울리는 그릇에 완성된 작품처럼 담아낸다. 어느 술집 주방장이 이렇게 정성스럽고 맛깔나는 안주를 만들까 싶다. 나는 밍밍한 술맛보다 아들이 만들어내는 맛깔스러운 안주에 더 입맛이 끌린다. 내가 맛있게 먹으면 은근히 자부심을 느끼는 아들이다. 그렇다고 아들은 술을 즐길 뿐 과음이나 나쁜 술버릇 같은 것은 없다. 자신만의 주량에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정도로만 즐긴다.
잔에도 관심이 많다. 술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술잔을 구매하는 것이 아들의 취미다. 특이하고 예쁜 술잔이 보이면 절대 포기를 못 한다. 물건을 고르는 눈매도 예사롭지 않아 선택해오는 술잔들은 내가 보기에도 모양새가 멋스럽다. 그러니 술잔을 탐하는 별난 취향을 나무랄 수가 없다. 앙증맞은 소주잔, 멋스럽게 만들어진 맥주잔, 여인의 잘록한 몸매를 닮은 와인 잔, 심지어 노란 양은 막걸리 잔 까지다. 나 스스로도 아들이 구매한 술잔에 빠져들고 만다.
이미 여러 종류의 술잔들이 진열장에 채워져 있다. 예쁜 술잔보다 요란스럽지 않고 수더분한 막걸리 양은 잔 같은 아가씨에게 관심을 두면 좋으련만 내색 못 하는 내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다. 이러한 엄마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는 아들이다. 그럴 때면 아들은 음식도 잘 만들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외로울 틈새가 없단다. 그러니 혼자서도 잘 살아낼 수 있다며 너스레를 떤다.
주문한 레드락 맥주와 갈린 새우구이 안주가 나왔다. 살얼음이 깔린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 전 술잔에 먼저 눈길이 간다. 전에 보지 못했던 특이한 잔이다. 대나무 마디를 잘라 놓은 듯 유난히 길고 매끈하고 묵직한 잔이다. 아들 역시 맥주가 채워진 술잔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아들의 느낌은 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피는 못 속인다. 부전자전(父傳子傳) 모전자전(母傳子傳)이다. 아빠의 예술적 자질과 엄마의 약간의 미적인 감각을 함께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부산에 가면 또 새로운 모양의 술잔이 채워질 것이다.
되돌아보니 오늘 걸어 낸 길도 아름답다. 내가 걸어온 길이라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올레길에 올 때마다 가슴에 담겨 있던 슬픈 기억들을 하나씩 털어낸다. 비워 낸 자리에 대자연의 풍요로움을 채운다. 이번 여행도 함덕 487번지 술집에서 시원한 제주 수제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대 자연의 품 안에서 위로받았던 그 편안함과 가벼워진 마음으로 또 한 동안을 잘살아내게 될 것이다.
첫댓글 아들이 효자입니다.